(옮긴이[잉걸]의 말 : 내가 서기 2022년 양력 8월 15일에,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NGC]’에서 본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정리해서 소개한다. 그리고 그것을 본 내 생각을 ‘옮긴이의 주석’이라는 형식으로 덧붙인다.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은 영어로 “국립 지리학회”라는 뜻이고, 의역하자면 “미국 국립 지리학회”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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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기 1200년(서기 13세기), 오세아니아(하와이 섬이나, 피지나, 통가나, 타히티 섬이나, ‘이스터 섬’으로 널리 알려진 ‘라파누이’ 섬이나, 파푸아뉴기니나, 동티모르나, 괌 섬이나, 사이판 섬이나, 영어권에는 ‘뉴질랜드’로 알려진 ‘아오테아로아’나, 오스트레일리아[한자 이름 ‘호주(濠州)’]가 있는 곳 – 옮긴이), 의 일부분인 미크로네시아(파푸아뉴기니의 북쪽, 괌/사이판의 동남쪽에 있는 섬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 – 옮긴이)의 ‘폰페이’ 섬에 ‘난 마돌’이라는 도시가 나타났다(그러니까, 미크로네시아 원주민이 유럽인들이 오세아니아로 침입하기 3~4세기 전에, 자신들의 힘으로 도시를 세웠다는 이야기다! - 옮긴이).
- 난 마돌은 미크로네시아 원주민의 왕가인 ‘사우델레우르’ 왕가(王家)의 근거지였다(그러니까, 난 마돌 시[市]는 사우델레우르 왕가의 도읍이었던 것이다 – 옮긴이).
- 난 마돌은 섬의 산호초 위에 돌(현무암 기둥)들을 쌓아서 만들어 낸 ‘바다 도시’다(그리고 임금과 사제들과 사람들이 살았던 도시이기도 하다).
- ‘난므와키’는 폰페이 섬 원주민들의 말로 ‘임금’이라는 뜻이다.
- 폰페이 섬 원주민들은 난 마돌 유적에 ‘죽은 이들의 넋’이 머무르며, 따라서 만약 그들의 허락 없이 유적에 들어가면, 그들에게 해꼬지를 당한다고 믿는다.
- 그래서 원주민들은 오늘날에도 유적을 탐사/연구하려고 들어가는 바깥 세상 사람들(다른 나라의 학자들 – 옮긴이)에게 유적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종교 의식에 쓰이는 음료를 마시게 해, 그 의식으로 유적 안의 넋(왕가 구성원들의 영혼들)에게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다음에야 (유적 안으로) 들여보낸다.
- 사우텔레우르 왕가는 (지금으로부터? - 옮긴이) 8세기 전(그렇다면, 대략 서기 13세기? - 옮긴이) 폰페이 섬에 와서 난 마돌을 세웠다(따라서, 사우텔레우르 왕가는 중세시대에 이민/식민을 했고, 새 땅에서 도읍과 나라를 세운 셈이다. 이는 오세아니아 원주민 사회가 유럽인이 오세아니아로 건너오기 전에는 변화도, 발전도 없었다는 유럽 중심주의 사관을 반박할 증거가 된다 – 옮긴이).
- 난 마돌 유적은 오늘날의 바티칸(바티칸 시국[市國]/교황청 – 옮긴이)보다 2배는 넓다(유적의 넓이와 규모만 놓고 보면, 사우텔레우르 왕가는 중세/근세의 유럽인들보다 더 위대한 일을 했다고 봐도 된다 – 옮긴이).
- 난 마돌을 세운 사람들에게는 글자가 없었기 때문에, 난 마돌의 갈마(‘역사[歷史]’를 일컫는, 순수한 배달말 낱말 – 옮긴이)는 사람의 ‘입’으로, 그러니까 ‘말’과 ‘이야기’로 전해졌고(이를 ‘구전[口傳] 역사’라고 부른다 – 옮긴이), 그나마도 그것의 전체를 다 아는 사람은 없었다(한 사람이 아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몰랐다).
- 난 마돌에는 신전과 왕족들의 무덤이 있다.
- 사우델레우르 왕가에 대한 원주민들의 평판은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이는 그 집안이 모두에게 잘 해 주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 (비록 같은 오세아니아 유적이지만 – 옮긴이) 난 마돌은 라파누이 섬(서양식 이름은 ‘이스터’ 섬이지만, 원주민들이 부른 올바른 이름은 ‘누리[세계]의 배꼽’이라는 뜻인 ‘라파누이’ 섬이다 – 옮긴이)의 유적들과는 모양/분위기 자체가 다르다.
- 오늘날(서기 21세기), 난 마돌은 열대 우림(홍수림)으로 뒤덮여서, 그 일부만 눈으로 볼 수 있다(유적 안에 숲이 우거지고 나무로 뒤덮인 건, 캄보디아의 유적인 앙코르와트나, 중앙아메리카의 유적인 마야의 도시들과 똑같다 – 옮긴이).
- 난 마돌 사람들은 산호초 위에 “바위(큰 바위)”로 길이가 2㎞는 넘는 방조벽(防潮壁. 파도[潮]를 막는[防] 벽[壁] - 옮긴이)을 쌓았다.
- 난 마돌은 “도시보다는 요새에 가깝다(다큐멘터리에 나온,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회원이자 과학자이고 기술자이며 해설자고 고고학자인 ‘알버트 린’의 평가).”[나는 난 마돌이 도시이기도 했고, 요새이기도 했다고 생각한다. 고대나 중세의 동아시아에도 도시 겸 요새였던 곳들은 많았으니까 – 옮긴이]
- 난 마돌은 회반죽을 쓰지 않은 돌들을 정교한 방식으로 쌓아 올려서, (도시가 세워진 지 – 옮긴이) 8세기 동안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었다(석공들이 잘 다듬은 건물 같다).[난 마돌을 세운 중세 폰페이 원주민들의 뛰어난 토목 기술에 찬사를! 이런 훌륭한 도시를 만든 중세 미크로네시아 원주민들이 어떻게 ‘멍청한 야만인(근세/근대 유럽인이 오세아니아 원주민을 평가한 말)’일 수 있겠는가? - 옮긴이]
- (난 마돌 안에 있는 – 옮긴이) 왕가의 거주 구역은 방조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는 파도뿐만 아니라 사람(예를 들면, 내부의 반란군이나 다른 나라의 적군? - 옮긴이)도 막았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니까, 난 마돌은 바깥의 성벽과 도시 안에 있는 왕궁의 성벽 – 성벽 겸 방조벽 – 으로 이중으로 둘러싸인 도시였던 셈이다 – 옮긴이).
- 난 마돌 유적지는 “90개”가 넘는 “인공 섬”들(방조벽 겸 성벽으로 둘러싸인 구역들)로 이루어졌다(중세 폰페이섬 원주민들이 자연을 바꾸어서 인공 섬을 만들고, 그것을 성벽으로 둘러싸 여러 구역으로 만들었으며, 그 구역들이 합쳐져서 난 마돌이라는 하나의 도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세 미크로네시아 원주민들은 유럽인이 침입하기 수 세기 전에 이미 자연을 개척했고, 베네치아 같은 수상도시를 만들었으며, 상경용천부나 금성[金城 : 경주]이나 장안 같은, 여러 구역으로 나뉜 복잡한 도시를 만들었다 – 옮긴이).
- 돌 1만 4000톤이 난 마돌의 바깥쪽 벽을 쌓는 데 쓰였고, 도시 전체는 70만 톤의 돌을 썼다(이 정도면 폰페이섬 원주민들은 안데스산맥의 원주민들이나, 마야인들/테오티우아칸 시민들/톨텍인들 못지않게 많은 돌을 다루었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폰페이섬은 안데스 지역이나 유카탄반도나 메히코 북부/중부보다 훨씬 작고 좁지 않은가? 그런 곳에서 난 마돌 같은 유적이 만들어진 것 자체가 놀랍고 경탄할 일이다! – 옮긴이).
- 난 마돌의 돌들은 (라파누이 섬의 모아이들이 그 섬 안에 있는 돌을 깨뜨리고 파내서 만든 것들이듯이 – 옮긴이) 폰페이섬 안에 있는 채석장에서 깨뜨려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폰페이섬의 장인[匠人]들이 채석장인 산에 올라가, 바위를 가지고 내려옴).
- 폰페이섬의 장인들, 그러니까 석공(석수장이)들은 먼저 돌에 구멍을 낸 뒤, 그 구멍에 태운 나무를 박아넣고, 나무에 물을 부어서 그것이 물을 먹고 부풀어 오르게 한 뒤, 그 팽창 압력으로 돌이 깨지게 했다.
- 석공들은 바위를 떼어낸 뒤, 그것을 아래로 굴렸고, 그 다음 (배에 실어) 홍수림의 물길로 바닷가까지 날랐다가, 다시 도시(난 마돌 – 옮긴이)로 그것을 나른 것으로 보인다.
- (폰페이 섬의 – 옮긴이) 산호초에는 현무암이 없으므로,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난 마돌은 섬의 뫼(山)에서 캐낸 돌로 사람이 쌓은 인공 구조물이 맞다.
- 지금도 난 마돌 근처의 바다 속에는 “6~9미터”는 넘는 현무암 기둥들이 가라앉아 있다. → 이는 난 마돌의 건축가들이 배를 바다에 띄우고, 그 배에 돌 기둥을 실어 난 마돌로 날랐다는 증거다.
- 난 마돌에서 좀 떨어진 ‘앤트 아톨’ 섬에는 다리에 문신을 새긴 ‘보호사’인 원주민이 사는데, 그의 설명에 따르면, 거기(앤트 아톨 섬)에 “현무암”으로 만든 구조물이나 “사카우(미크로네시아 원주민의 음료수를 만드는 재료)”를 으깨는 바위 같은, 폰페이섬의 그것과 똑같은 문명의 흔적이 남아있다(주거지도 있었을 것이다). → 난 마돌 사람들이 배를 타고 앤트 아톨 섬으로 건너가, 거주지와, 자신의 고향에 있는 것과 같은 구조물을 만들었다는 증거다(그렇다면, 이것은 난 마돌 사람들의 식민지 건설이며, 이것은 근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 아니라 고대 페니키아나 헬라스 사람들의 해외 식민지 건설에 가깝다 – 옮긴이).
- (오세아니아의 – 옮긴이) 섬들은 바다와 바다를 건너 문화를 교류하고, 교역망을 만들었을 것이다.
(→ 내가 이 다큐멘터리를 보기 몇 해 전에 읽은, 라파누이 섬의 갈마를 다룬 책에 따르면, 근세 유럽의 탐험가들은 오세아니아, 특히 폴리네시아의 여러 섬에 인종과 말과 문화가 비슷한 여러 민족이 흩어져 산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나는 그것이 그들이 동남아시아나 남중국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와 폴리네시아 곳곳으로 흩어졌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라고 판단했으나, 이 다큐멘터리를 보니, 그게 전부가 아니고, 어쩌면 오세아니아 원주민들은 유럽인이 침입하기 훨씬 전부터 카누를 타고 바다를 건너 서로 교역을 하거나 전쟁을 하거나 식민/개척을 했고, 그런 상황이 고대부터 중세, 어쩌면 근세 초까지 죽 이어졌으며, 유럽인들의 ‘탐험’, 아니 침입은 그 질서를 깨뜨리고 망가뜨리고 없앤 게 아니냐는 의문이 든다.
오세아니아 원주민인 폴리네시아인이나 미크로네시아 사람들이 돛을 단 큰 카누를 타고 태평양을 돌아다닌 일은, 아시아의 유목민족/기마민족들이 말을 타고 유라시아의 초원을 돌아다닌 일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으며, 유목민족에게 말이나 낙타가 자동차와 다를 바가 없었듯이, 해양민족인 오세아니아 원주민들에게는 카누가 자동차/오토바이와 다를 게 없었다.
심지어 ‘영국인이 배를 타고 건너오기 전까지는 바깥세상과 어떤 교류도 하지 않았다.’고 알려진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들조차도, 그 아대륙 북부에 살던 ‘요잉구’ 인[人]으로 불리던 사람들은 유럽인이 오기 훨씬 전부터 오늘날의 인도네시아 동부에 해당하는 ‘술라웨시’ 섬의 ‘마사카르’인들과 만나 교역을 한 적이 있다[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글을 써서 설명하겠다].
그렇다면 유럽인이 오세아니아에 도착/침입하기 전인 서기 17세기 이전의 오세아니아 사회가 ‘닫힌 사회’나 ‘자기가 살던 섬에만 갇혀있던 사람들의 사회’라고 가르치는 지금까지의 교육은 잘못된 것임이 분명하다 – 옮긴이)
- 오세아니아 원주민들은 태평양 전체를 아우르는 연락망(내지는 교역망 – 옮긴이)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 폰페이섬에는 지금으로부터 1000~2000년 전에 새겨진 바위그림도 있다(그렇다면, 이것들은 - 서기 20년에서 서기 1020년쯤에 산 사람들이 남긴 것인가? 이때가 사우델레우르 왕가가 오기 180 ~ 1180년 전이라면, 사우델레우르 왕가는 폰페이섬이 아닌 오세아니아의 다른 나라에서 건너온 중세 후기의 정복자들인가? 그래서 왕족이 아닌 폰페이 원주민들[그러니까, 정복당한 사람들?]이 그 왕가를 좋게 평가하지 않은 것이고? - 옮긴이). 이 바위그림들은 사람 모양이나 칼 모양이고, 이것들은 폰페이가 (미크로네시아 원주민들에게 – 옮긴이) 중요한 문화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단, 알버트 린의 설명과는 달리, 폰페이섬의 바위그림들은 예수 시대[서기 1세기]에 새겨진 것은 맞으나, 영정[시호 ‘진시황’] 시대에 새겨진 것은 아니다. 영정은 예수보다 3세기 전에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 옮긴이)
- 바위에 새겨진 “십자가” 무늬는 폰페이섬에서 3천㎞ 떨어진 ‘뉴칼레도니아’ 섬(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동북쪽으로 1500 킬로미터 떨어진 오세아니아의 섬 – 옮긴이)에도 비슷한 게 나오며, 이것들은 고고학자/인류학자들이 폰페이 원주민들의 구전(口傳)을 바탕으로 찾아냈고, 그들의 구전에 따르면, “원주민”이 아니라 “외국인”이 섬에 찾아와서 새겼다고 한다(지금으로서는, 과연 그 “외국인”들이 누구인지 결론을 내릴 수가 없고, 좀 더 연구해서 그 무늬의 뜻과 그것을 새긴 사람들을 알아내기까지는 말을 아껴야 한다 – 옮긴이).
- 사우델레우르 왕가는 4세기 동안 난 마돌을 다스리다가 물러났다(단, 집안 자체는 지금도 남아있다).[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 왕가는 서기 13세기부터 서기 17세기까지 난 마돌과 폰페이섬을 다스리다가, 서기 17세기 이후에 왕권을 잃은 셈이다. 이들이 왕권을 잃은 뒤에도 집안은 보존한 사실은, 한국의 청주한씨나 부여서씨나 김해김씨나 경주김씨나 개성왕씨나 전주이씨가 자신들의 나라가 망한 뒤에도 오늘날까지 집안을 유지하고 있는 것과 같다 – 옮긴이]
- 폰페이섬과 뉴칼레도니아 섬에서 비슷한 바위 그림이 나타나는 건, 사람이 건너갔거나, 아니면 배를 타고 교류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 어쩌면 라파누이 섬의 거석(巨石. 매우 큰 돌 – 옮긴이) 문화도 이 커다란 흐름(미크로네시아인이나 폴리네시아인의 오세아니아 이동/교류/정착/교역/식민)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 폰페이섬의 원주민들은 지금(서기 21세기 전반 – 옮긴이)도 난 마돌 유적지에 죽은 자의 영혼들이 돌아다니고, 그것도 (밤이 아니라 – 옮긴이) 오후(!)에 그런다고 믿어, 유적지 안에 들어가기를 꺼린다(사우델레우르 왕가와 난 마돌이 망할 때, 원주민과 왕가 사이에 내전이나 대량학살이라도 일어났던 건가? 그래서 원주민들이 그때 죽은 사람들의 넋이 원한을 품고 돌아다닌다고 믿어 그곳을 꺼리는 거고? 아니면 다른 까닭이라도 있는 건지? - 옮긴이).
- 단기 4356년 음력 2월 6일에, (콜럼버스 이전의 거북섬[ ‘ 아메리카 ’ 주] 갈마뿐 아니라) 쿡 선장 이전의 오세아니아 원주민 갈마도 완전히 고쳐 써야 하고, 한국의 『 역사 』 교과서에 그 갈마가 제대로 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잉걸이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