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 (서울시 중구 을지로 281, 을지로7가 2-1)
동대문역사문화공원과 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세계적인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2014년 설계하였다
(2004년 여성으로는 세계 최초로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건축상을 받은 이라크 출신 건축가다)
동대문 DDP 외관은 총 4만5133장의 알루미늄 패널을 이어 붙여서 만들었고,
구조물이 직선이 아닌 곡선이라서 크기가 조금씩 다르며, 이어 붙이는데 18개월 걸렸다
각각의 외장패널에 고유번호가 있어 파손되면 바로 교체가 가능하다
이곳은 동대문운동장이 있었던 곳이다
본래 동대문운동장 터의 일부는 조선시대 치안을 담당하던 하도감과 군사훈련을 담당하던 훈련도감이 있던 곳이다
한반도를 장악해 가던 일본은 1907년 8월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이 자리에 당시 일본의 동궁(東宮 - 세자) 히로히토(裕仁)의 결혼을 기념하여 대규모 운동장을 건설했다
한양도성의 성벽 일부가 지나는 이곳은 야트막한 언덕으로, 자연 지형을 살려 관중석을 만들기에 좋았다
1925년 10월 15일 문을 연 '경성운동장'은 총 면적 75,000㎡, 총 공사비 155,000원(당시 큰 기와집 한 채가 1,000원), 수용인원 26,000명이라는 숫자가 말해주듯 당시 동양 최대였던 일본 고시엔(甲子園)에 버금가는 큰 규모의 운동장이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경성운동장은 '서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간 일제가 금지했던 행사도 다시 개최되었다
1945년 10월 자유해방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이것이 제26회 전국체육대회이며, 이 때의 경기종목은 육상·축구·농구·배구·야구·정구·럭비·자전거경주·탁구·마술 등 10개 이다)가 열린 날, 자유롭게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며 많은 이들이 눈시울을 적셨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의 귀국 환영식이 거행되어 독립국가의 미래를 그렸던 곳도 바로 서울운동장이었 다
1960년대 후반에는 운동장 사방에 조명탑이 설치되어 야간에도 경기가 가능했다
1970년대 고교야구, 박대통령컵 쟁탈 아시아축구 대회는 늘 장안의 화재가 되었고 때때로 열리는 축제 와 퍼레이드는 즐거운 볼거리였다
서울운동장은 동대문운동장 역사에 있어 가장 찬란한 시기였다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와 1988년 올림픽의 서울 개최가 확정되면서 1984년 9월 잠실에 서울종합 운동장이 개장했다
서울운동장의 명칭은 '동대문운동장'으로 변경되었고, 이후 주요한 스포츠 경기가 주로 서울종합운동장에서 열리면서 동대문운동장을 찾는 발걸음이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동대문운동장은 도심에서 더욱 고립되어 갔고, 이와 함께 동대문운동장의 향후 발전을 둘러싼 여러 의견이 나왔다
계속되는 운영 적자와 동대문운동장 특수를 누릴 수 없게 된 상인들의 호소, 새로이 복원된 청계천과의 대비 등으로 2007년 12월 18일 동대문야구장부터 철거를 시작하여 2008년 5월 14일 '굿바이 동대문 운동장' 행사를 진행하고 동대문운동장 축구장이 철거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동대문운동장의 역사성을 감안해 흔적을 남긴다는 차원에서 주경기장 동쪽 관중석 뒷편에 있던 조명탑을 철거하지 않고 보존하고 있으며 주경기장의 성화대도 철거 과정에서 떼낸 뒤 공원 내부에 전시하 고 있다
또한 영상, 사진, 소품들을 정리하여 전시하고 있는 동대문운동장 기념관을 운영하고 있다
이후 2009년 5월 21일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을 개장하였으며, 2014년 3월 21일 DDP(동대문디자인 플라자)가 개장했다
(운동장 터에서 조선 시대의 치성과 이간수문, 하도감 터 등이 발굴되었다)
♤ 하도감 터 (서울시 중구 을지로 281, 을지로7가 2-1)
조선시대 도성인 한성의 방위를 위해 조직된 기구인 훈련도감(訓鍊都監)의 한 분영(分營)으로, 도성의 치안을 담당하고 왕의 신변을 보호하며 지방군의 훈련을 맡아하던 군영으로 훈련원 동쪽, 현재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자리에 있었다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3) 유성룡 (柳成龍)의 제안에 따라 도성인 한성의 방위를 위해 임시로 조직된 부대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상설기구 로 편제되었으며, 그 휘하에 여러 분영(북영北營, 남영 南營, 신영新營, 하도감下都監, 북일영北一營, 서영 西營)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하도감의 규모가 가장 컸다
1881년(고종 18) 군제개혁 때 조선 최초의 근대식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이 조직됨에 따라 구식군대인 무위영(武衛營)에 통합됨에 따라 하도감은 그해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별기군의 훈련장소로 사용되었다
그러다 이듬해인 1882년 별기군과 구식군대의 차별로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생하고, 이 과정에서 13명의 일본인이 사망하게 되자 청과 일본의 군사적 간섭이 시작되어 하도감은 폐지되었다
♤ 이간수문 (서울시 중구 을지로 281, 을지로7가 2-1)
도성 내부에서 지형적으로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가 가장 낮은 지역이여서 물이 빠져나가는 시설물이 필요했는데, 이때 성곽을 관통하는 곳에 수구시설을 만들어 이간수문이라 하였다
목멱산(남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빗물은 남소문동천 으로 흘러 이간수문을 지나 청계천과 합류하여 중랑천 에서 만나니 구슬같은 옥수가 한강이 되었다
2009년 서울시에서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고 그 일대에 새롭게 동대문 디자인플라자와 동대문역사 문화공원을 조성하는 공사를 진행하던 중 발견되었다
이 일대가 도성과 이간수문이 지나는 자리이긴 하였으 나 성곽의 대부분은 1925년 동대문운동장을 건립하 는 과정에서 매몰되었거나 멸실되었다
하지만 성곽 내 외부에 유구가 남아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이를 확인하기 위한 시굴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시굴조사 결과 흥인지문과 광희문을 연결했던 성곽이 123m 가량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확장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 동대문운동장기념관 (서울시 중구 을지로 281, 신당동 853)
동대문운동장기념관은
경성운동장부터 해방 후 경기 및 각종 행사의 공간이 된 서울운동장,
그리고 동대문운동장으로 이름이 바뀐 뒤
2007년 철거되기까지의 운동장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운동장 조명탑 총 11기 가운데 현재 축구장 조명탑 2기가 남아 이곳이 운동장이 있던 자리임을 알려주고 있다
♤ 동대문역사관 (서울시 중구 을지로 281, 신당동 853)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의 조성 과정에서 발굴 조사된 매장 유물을 보존 전시함으로써
옛 동대문운동장 터의 역사를 되짚어보는 공간으로 마련되었다
이곳은 과거 한양도성의 동쪽 지역으로 방어에 취약한 지형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성곽 방어 시설과 다수 의 군사 시설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2008년 ~ 2009년 진행된 발굴 조사 결과 일제강점 기 공원 조성 및 운동장 건립 등으로 멸싱되었으리라 추정되었던 한양도성 성벽과 치성, 이간수문, 하도감 터
그리고 조선시대 건물 터 등이 확인되었으며, 관련 유물들이 대량 출토되었다
♤ 성화대(聖火臺)
성화가 최초로 이용된 때는 1955년 개최된 제36회 전국체육대회로, 최종 주자는 손기정 이었으며, 성화 전국일주는 1969년 제50회 전국체육대회부터 처음 으로 실시하였다
1968년 동대문운동장 보수 공사 때 새 야간 조명 시설과 성화대 등이 설치 되었으며, 철근에 콘크리트 를 입혀 제작 하였고 상층부 지름은 2.15m, 하층부 지름은 1.15m이고 살은 16개로 구성되어 있다
(16개의 살은 16개 시,도를 상징한다)
첫댓글 예전에 동대문 야구장으로 고교야구와 실업야구 참 많이 보려 다녔던 것 같습니다. 고교야구는 선린상고 실업아구는 한일은행 많이 응원했던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