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해적 / 이영숙
빙하가 녹아 지구가 반쯤 물에 잠겼다
도시의 무릎이 잘리고
저지대는 저도 모르게 무의식이 깊어져 갔다
산모들의 태몽도 물에 잠겨 퉁퉁 불었다
버스가 유턴하면
지하보도의 공기가 휘어지던 사거리
보도블록을 따라가다 보면 집이 나왔고
굴절되는 사물의 목록을 외지 않아도 열리던 현관문
천둥 치니
모과 떨어지는 소리 들리지 않던 밤이 있었다
심장은 그때 달의 뒤편처럼 어두워
베개를 짓누른 귀에서 들리는 맥박수나 맞춰보고 있었다
일개 소대쯤 행군하는 고요한 밤이었다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
모든 물이 소금물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
소금공장을 끄려고 해도
대륙조차 이미 들불처럼 만연했으니
부식되지 않은 물빛과 물맛을 찾아
금속조각같이 번쩍이는 해적들이 출몰할 시각
택시가 멎듯
해적 하나 다가와서 손목을 척 비튼다
대체, 가진 게 뭐냐
얼룩은 더 큰 얼룩 속으로 스며든다 / 이영숙
턱을 괸 채 그는 오래도 앉아 있다
지친 종이컵이 맥없이 쓰러진다
벤치와 흙에 응혈이 지고
바람은 컵에 남은 믹스커피 향을
마저 거두어간다
금박이 떨어져나갔는지 다 식은 햇살에서
쇠붙이 냄새가 난다
작은 연못에 거북이 세 마리
띄엄띄엄
낡은 목을 물 위로 내미는데
빌딩들이 고궁 안을 일삼아 들여다본다
나의 담은 일평생 너무 낮았지
그림자 하나 숨길 데 없이 계속되던 백주대낮
꽃망울이 잔뜩 토라져 있는
벚나무 그늘에서
어린아이 하나가 연못에 돌을 던진다
유리천장이 박살나고
박살나기 위해서 유리천장은 새로 세팅되고
거북이가 움푹 팬 그의 눈 속으로 잠적한다
히스테리 미스터리 / 이영숙
잠을 자야 살지, 백야가 따라와 삼 년째 동거 중이다 그늘
한 점 주름 한 줄 없는 06시 10분에서 40분 사이 검은 비키
니 금발머리가 허구한 날 자맥질에 배영(背泳)질이고 게서
십여 분 거리 해변에선 스패니얼 계의 죽은 개 한 마리에 파
리가 떼로 들고 난다 영문도 모른 채 닳고 닳아 종잇장처럼
팔랑이는 핀란드만(灣)의 여름
발레리노가 그녀를 허공에 띄웠을 때 내가 그의 손을 잡
고 어둠을 벌컥 연다 스프링영양처럼 그녀가 공중을 딛고
있는 동안 타조 같은 나의 다리 몸통 부리가 퍽퍽 잘려나간
다 빛의 숄을 두른 채 그의 능선을 밟고 사뿐히 내려서는 그
녀 한번 날아보지도 못하고 나는 다시 객석에 갇혀
우리는 자연 공부를 이렇게 하며 살아요 낡은 빌라 불개
미가 줄지어 과자 부스러기를 물어 나른다 자신은 다른 종
족인 양 바퀴벌레가 천장을 가로지른다 주인 같은 자들의
목요일의 패러독스1 / 이영숙
그녀는 오줌을 너무 참았습니다
이미지 때문에
오줌보가 터져서
우리는 지린내를 뒤집어썼습니다
로터스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으나
실내에 만연한 건 플라스틱이었습니다
막차는 발음하기 어려워 그냥 떠나보냈습니다
늘 다른 곳으로 배송되는 새벽
절벽 끝에 앉는 것은 금지된 메뉴입니다
우리는 젓가락을 들어 서로를 찔러봅니다
발라드풍으로 졸아든 웃음이 다른 부위로 몰립니다
액자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는 대화에
후추를 훌훌 뿌려 놓고 기다리면 출구가 보입니다
재채기를 하면서 우리는 겨우 자기 밖으로 빠져나옵니다
설령 감추어 왔던 것이 누대의 전족이라 해도
기꺼이 발설하고픈 시간대를 그제야 막 통과합니다
카운터에서 나무 주걱에 매달린 화장실 키를 받아든 그녀가
오줌을 누러 갑니다 한 인간이 그렇게 완성되고
우리는 축배를 듭니다
계시가 없는 밤은 없습니다
[ 이영숙 시인 약력 ]
이영숙 시인
* 강원도 철원에서 출생.
* 서울예술대학 졸업.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학위 받음
* 1991년 《문학예술》을 통해 시 등단. 2017년 《시와 세계》를 통해 평론 등단. .
* 시집으로 『詩와 호박씨』, 『히스테리 미스터리』가 있음.
* 현재 추계예술대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