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이보세상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미술 Gallery (韓) 스크랩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 contemporary art / 현대미술 걸작선
이보 추천 0 조회 192 19.02.07 12: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현대미술 걸작선


matisse woman in blue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

contemporary art


정장진 미술 평론가


지난 일년 동안 현대미술 걸작선을 연재해왔다. 글을 대했던 이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조금 고개를 갸우뚱했을 수도 있다. 현대미술 이야기를 한다면서 19세기 미술 이야기가 많았으며 20세기라고 해도 야수파의 마티스나 추상회화의 선구자들인 몬드리안과 칸딘스키 정도에 그쳤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팝아트 이후의 다양한 현대미술들을 다룰 수 없었던 것은 다름 아니라 비싼 저작권료 때문이었다. 저작권 교섭은 비싸기도 하지만 상당히 복잡하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하지만 정작 현대미술을 본격적으로 다룰 수 없었던 것은 사후 70년 동안 권리가 인정되는 저작권이라는 현실적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많은 이들이 착각을 하고 있지만, 현대미술은 별도로 존재하는 특이한 미술이 아니며, 현대미술에도 모든 시대의 미술이 그렇듯이 가짜가 많고, 따라서 단지 시기 상으로 20세기 후반이나 21세기에 창작되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현대미술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또 정통 미술사나 문화사에서는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 이후를 현대로 보기도 한다.


Dominique Ingres - Mme Moitessier

▲ 엥그르의 <마담 므와티시에>


현대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국에서 요즈음 때 아닌 인기를 끌고 있는 만화를 예술적으로 가공해서 제작된 리히텐슈타인의 팝아트 계열의 그림들은 사실은 모 재벌 그룹이 운영하는 미술관이 관련되면서 유명세를 탔다.

다름 아니라 <행복한 눈물>이 그것인데, 대략 가격만 100억 원 가까이 된다. 리히텐슈타인의 그림들은 그 전에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던 그림이다. 현재는 ‘리히텐슈타인 스타일’만으로도 사람들이 즐겨 초상화를 그려 소장할 정도로 인기를 얻고 있다. 앤디 워홀도 마찬가지인데, 마릴린 먼로나 코카콜라 혹은 캠벨 수프 캔 같은 대량 생산품을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처리해 온 화가의 말 그대로 ‘팩토리’에서 대량으로 찍어낸 그의 그림들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대형 전시회가 열린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현대미술을 둘러싼 이러한 현상이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미술은 늘 돈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어 왔다. 또한 미술은 시대가 바뀌어 새로운 미디어가 출현하면 언제든지 새로운 미디어에 맞추어 변신을 거듭해왔다. 르네상스는 금융가문인 피렌체 메디치가에서 시작되었다. 왕실과 교회는 건축, 회화, 조각의 최대 주문자였고, 후일 부르주아 층이 이들을 대신하게 되며 19세기 중엽 본격적으로 화랑과 화상들이 출현한다. 회화와 조각의 시대가 가고, 언론이 등장하고 사진, 광고, 만화, 영화 등 새로운 미디어와 콘텐츠 영역이 출현하자 이제 회화와 조각은 새로운 표현 대상과 주제를 찾아 움직여야만 했고 그래서 나온 미술 장르가 추상화이다. 이 움직임들이 인상주의를 전후해서 일어났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세계 정치, 경제의 헤게모니를 쥐게 되자 미국식 자본주의가 전세계에 퍼졌고 이를 반영한 미술 역시 비슷한 지배력을 갖게 된다. 미키 마우스, 서부 영화, 추잉껌, 코카콜라, 마릴린 먼로는 우리의 것이 아니지만 21세기에 들어선 이제 ‘거의’ 우리의 것이 되었다. 우리 역시 한류와 K 팝을 문화상품으로 집중 육성하고 있으며 캐릭터를 수출하고 있다.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그토록 강한 인기를 얻을지 누가 알았는가? <대장금>이 중동에까지 방영되면서 높은 시청률을 올릴지 누가 예견했겠는가?

싸이의 유튜브 조회건수는 기적에 가까운 현상이다. 정치가들까지 호들갑을 떠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는 국가로부터 훈장까지 탔다고 한다.


현대 미술은 과거의 미술들이 그랬듯이 현실을 반영한다. 현대는 과거의 반복일 뿐이다. 미술은 홀로 발전하거나 변화하지 못 한다. 삶과 역사가 입체적이듯이 미술도 입체적으로 정치 경제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따라서 현대미술이라는 말 자체가 조금은 모순이다. 진정한 미술은 언제나 동시대적이면서 동시에 늘 시대를 한 발자국씩 앞서 가기 때문이다. 이 때 미술은 단순히 현실의 표면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삶의 모든 영역을 총체적으로 반영한다.


Sandro Botticelli, The Birth of Venus (c. 1484-86). Tempera on canvas. 172.5 cm × 278.9 cm (67.9 in × 109.6 in). Uffizi, Florence

1.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Philippe Parrot (1831-1894): The Judgment of Paris

2. 피림파로의 <파리스의 심판>


현대미술의 뿌리는?


앤디 워홀은 르네상스 화가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을 헤아릴 수도 없이 패러디해서 묘사했다. 그러면서도 마릴린 먼로를 그렸다. 마릴린 먼로만이 아니라 유명한 현대역사의 주역들은 거의 모두 그렸다.

앤디워홀의 이러한 작품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20세기, 21세기는 상품만이 아니라 이미지를 소비하
는 사회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하루에 대략 3천 번 정도의 광고를 보고 산다는 통계가 나와있을 정도다. 모택동,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레닌 등이 앤디의 손에 의해 동등하게 묘사될 때 앤디는 현대인들에게 정치와 역사는 매일 마시는 코카콜라 보다 덜하지도 더 하지 않은 이미지로 존재한다는 서글픈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릴린 먼로에 대해 사람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이 금발의 여배우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7년만의 외출>에 나오는 그 유명한 장면은 다 알면서도 정작 영화는 본 적이 없는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 마릴린 먼로는 지하철 통풍구에서 치마를 펄럭이며 파안대소하고 있는 이미지일 뿐이다.
바로 이 이미지에 현대미술의 뿌리가 있다는 것은 모른 채.


미디어가 바뀌었다. 영화가 소설과 회화를 밀어내고 대세가 된 시대의 비너스는 신화 속이나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같은 회화 속이 아니라 영화나 사진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다이어트 음료를 팔기 위해 패트병을 든 채 치마를 펄럭이고 있는 전지현이라는 이름의 광고모델도 비너스인 것이다.
이제 비너스는 올림포스 산을 내려와 처량하게도 광고 속에 등장해 음료수를 팔고 있는 것이다. 미디어가 바뀌면 가장 먼저 그에 적응하는 것이 신화적 캐릭터들이다.

하지만 언제나 원형이 되는 이미지는 간직한 채 다시 등장한다. 먼로이든 전지현이든 모든 비너스의 이미지에는 바람이 등장한다. 그리고 치마를 펄럭인다.

이른바 만물의 소생을 일러주면서 위험도 함께 간직하고 있는 봄바람이다.


미디어만이 아니라 새로운 콘텐츠 영역이 등장하면 신화적 캐릭터들도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한다. 수많은 서구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파리스의 심판>을 보자. 트로이 전쟁을 일으킨 이 심판에서 비너스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으로 뽑힌다. 이 <파리스의 심판>은 오늘날의 진선미를 뽑는 미인 선발대회에 해당된다.

여인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상업적 대상이었고 나아가 관음증의 대상이기도 했다. 스포츠의 역사도 마찬가지이다. 마차 경주는 F1 자동차 경주로 바뀌었다. 현대미술의 뿌리는 미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화에 있는 것이다. 이 문화 전체를 드러내는 미술가만이 진정한 의미의 현대미술가일 것이다.


"Spring" - Conch Sculpture by Coosje Van Bruggen and Claes Oldenburg Cheonggyecheon Stream,

3. 올덴버그의 <스프링>


Seoul, South Korea Hammering Man Jonathan Borofsky

보롭스키의 <햄머링맨>


그러면 올덴버그의 <스프링>과 <햄머링맨>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이런 질문이 나올 법도 하다. 하지만 답은 의외로 쉽다. 솔직하게 보면 되는 것이다.

올덴버그의 20m 길이의 뾰족한 탑은 어딘지 선사시대의 선돌을 닮았다. 마찬가지 논리로 포스코 본관 앞에 있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스텔라의 <아마벨>은 어딘지 고인돌을 닮았다.

<햄머링맨>은 고대부터 헤아릴 수도 없이 제작된 거상 조각의 아류에 지나지 않는다. 유명한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에 있는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나 여신에게 바쳐진 신전이었으며 안에는 상아와 황금으로 제작된 처녀의 신이자 전쟁과 지혜의 여신인 아테나 상이 세워져 있었다. 아니 그 전에 고대 이집트의 아부심벨 신전에 가면 거대 석상들이 즐비하다. 부처도 예수도 엄청난 크기로 제작되어 아직도 세계 곳곳에 널려있다.

요즈음은 어떤가? <햄머링맨>은 그래도 봐줄 만하지만 건담이나 옵티머스 프라임 거상들이 테마파크에 들어서고 있다. 이것도 예술일까? 올덴버그의 <스프링>이 서있는 광화문에 가면 이순신과 세종대왕 상이 있다. 이것들도 예술일까? 단순한 기념물과 예술 작품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대가는 대가의 그림을 모방하며 대가가 된다.
미술사는 이 모방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곰브리치는 “미술은 없으며 있다면 미술가들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와 같이 현대미술은 미술가들에 의해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의도적으로 모방하고 패러디하며 형성되어 왔다.



1. 백남준의 <다다익선>


국보 86호 <경천사지십층석탑>


TV Cello nam june paik

3. 백남준의 <TV첼로>


미술은 반복된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인 백남준을 다들 알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라는 사실 이외에 많은 이들은 백남준에 대해 무얼 더 알고 있을까?

그리고 백남준이 과연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일까?

백남준이 청소년 시절을 보낼 당시 한국에는 컬러 TV는 고사하고 흑백 TV도 드물었던 때인데도?

외국에서 뜨니까 그제서야 역수입해서 난리를 피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백남준이 한국인인 것은 맞지만 한국이 낳은 예술가는 아니다. 그 이유를 일러주는 사례를 하나 더 들어보자.


과천 경마장 옆에 가면 산사를 연상시키는 너무나도 한적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중앙홀에 백남준의 <다다익선>이 있다. 1천3대의 모니터를 쌓아 올린 거대한 설치미술품이다. 하지만 누구도 이 작품을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의 중앙홀에 있는 <경천사지십층석탑>과 함께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 경주 불국사에 있는 다보탑과의 관련성은 눈치도 못 채게 마련이다.


미술은 반복된다. <다다익선>은 20세기 말의 불탑이었던 것이고 다보탑은 통일신라 시대의 다다익선이었던 것이다. 강남 봉은사에 유해의 일부가 보관되어있는 백남준은 깨달음의 광명을 찾아 죽기까지 예술을 했던 예인이었다. 그가 제작한 비디오 첼로는 뛰어난 바이올린 주자이기도 했던 19세기 프랑스 최고의 초상화가인 앵그르를 패러디한 만 레이의 작품에서 시작된 음악과 미술의 내적인 관련성을 다룬 작품의 일부다.

백남준의 비디오 첼로는 적어도 앵그르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인 것이다.
그러면 앵그르는? 앵그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폼페이 벽화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10년 넘게 정성을 들인 유명한 초상화 <마담 므와티시에>는 폼페이 벽화의 포즈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후일 마티스는 이 초상화를 다시 자신의 그림에 여러 번 사용했다.


이런 예를 비단 앵그르와 마티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가는 대가의 그림을 모방하며 대가가 된다. 미술사는 이 모방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곰브리치는 그의 대중적인 미술사를 마치면서 말했다.

“미술은 없으며 있다면 미술가들만 있을 뿐이다”라고.


현대미술은 새로운 미디어 환경에서 새로운 주제를 찾아나선 몇 안 되는 미술가들에 의해 형성된 영역이다. 의도적으로 모방하고 패러디하며, 그 대상도 미술만이 아니라 대량생산된 상품에서부터 대중스타와 정치가들까지 다양하기만 하다. 또 많은 경우 현대예술가들은 무의식적으로 아주 먼 옛날을 모방하기도 한다.

올덴버그, 스텔라, <햄머링맨>의 보롭스키 등이 그들이다. 인간을 인간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산업사회에서 선사시대의 원초적 상상력이 이들 현대예술가를 통해 표현되며 잠시나마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다.

비판적인 한 미술사가는 이들 현대예술가들을 두고 말했다. “감동과 미적 아름다움을 전달하지는 못한다”고. 그렇다. 그러나 이 말은 얼마나 답답한가! 우리는 이제 미술작품 앞에서 더 이상 “감동”이나 “미적 이름다움”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저것도 예술인가?”하는 충격이나 회의 정도만 얻어도 다행이다.

매년 성탄절이 되면 <햄머링맨>이 빨간 산타모자를 쓴다. 그러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 번 올려다 보면서 한 마디씩 한다. “어! 햄머링맨이 산타가 되었네.”

현대 미술은 이 정도의 느낌만 줄 뿐이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돈 걱정을 하고 지나가다 이 정도의 위안만 얻어도 대단한 것인지 모른다. 족히 수십억 원의 위안이니까.



금융.

전국은행연합회 (http://www.kfb.or.kr)




============================================




Hammering Man


Fernando Botero (Dominique Ingres, Mme Moitessier)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