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구 서산부인과 (서울시 중구 퇴계로 349, 을지로7가 11-6)
1965년 ~ 1966년에 걸쳐 설계해 지하1층, 지상5층 (연면적 574.92㎡)의 개인병원(서산부인과) 으로 1967년에 완공된 건물이다
1965년 건축주인 산부인과 의사 서병준이 병원과 주거 공간을 겸할 수 있도록 김중업에게 설계를 의뢰해 1층은 진료실, 2 ~ 3층은 병상, 4층은 주거공간으로 구성된 독특한 외관의 건물이 탄생됐다
평면도를 보면, 산부인과인만큼 자궁과 남성의 성기를 표현한 모습이다
위에 툭 길게 튀어나온 곳이 계단인데, 사실 계단이 아니고 경사로이다
병원 환자들을 배려해서 설계했다고 한다
이 건물의 외관은 직선의 모서리가 없이 자유로운 곡선 형태의 외벽과 발코니, 경사로가 돋보이는 구성이다
1967년 완공된 건물이 오늘날까지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서병준 원장을 비롯해서 현 소유주인 정인훈 아리움 대표의 애착과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1995년 1대 소유주인 서병준 원장으로부터 건물을 인수받은 정인훈 대표의 건물에 대한 애착과 보존 의지는 각별하다
1대 소유주 서병준 원장은 "무척 신경써 지은 건물이 라 아무에게나 넘겨줄 수가 없어서 식당이나 공장으로 쓰겠다는 사람은 모두 물리쳤는데, 자네라면 이 건물 을 잘 지킬 수 있을것 같다"며 김중업의 설계도 청사진 과 공사시방서, 1966년 시청으로부터 받은 허가 서류 까지 일괄을 현 소유주 정인훈 대표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이후 정대표도 IMF 사태를 맞아 회사가 어려워졌을 때 사옥을 매도하거나 새롭게 지어 이윤을 남길까? 하는 유혹을 물리치고 오늘날까지 그 원형을 유지하려 무던히 애써왔다
현재는 명함 쇼핑몰, 소재별 슬림팅, 배경명함 제작, 캐이스, 지갑 홀더를 판매하는 회사 아리움(arium)의 사옥으로 사용 중이다
광희문 성지 순교자현양관 (서울시 중구 퇴계로 348, 신당동 228-17)
좌ㆍ우 포도청과 의금부, 전옥서에서 순교한 후 광희문 밖에 버려진 794위 순교자를 기리는 공간이다
이들 794위 순교자 가운데 최경환(프란치스코), 민극가(스테파노), 현석문(가롤로) 등 성인 20위와 심아기(바르바라), 김이우(바르바라) 등 복자 5위, 황석지(베드로), 최영수(필립보), 이윤일(안토니오) 등 하느님의 종 25위가 포함돼 있다
이처럼 광희문 밖은 한국 천주교에서 가장 많은 순교자의 시신이 버려지고 매장된 성지다
광희문 성지는 더 이상 죽은 이들만의 공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우리와 천상의 순교자들이 서로 교류하고 교감하는 영적 소통의 광장이 되고 있다
3층에 마련된 성당에는 제대와 김대건 성인의 유해가 안치돼 있고,
매주 목, 금, 토요일과 주일 오후 3시에 순교자 현양 미사가 봉헌된다(앞의 네모는 의자입니다)
광희문 (서울시 중구 퇴계로 344, 광희동2가 105-32)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4소문(小門) 중의 하나로 남쪽의 소문이다
오간수문, 이간수문이 가까워 수구문(水口門)이라고 하였고, 도성의 장례행렬이 통과하던 문이어서 시구문 (屍口門)이라고도 하였다
(남소문南小門으로 불리기도 하였지만 남소문은 따로 있었다)
장충단공원에서 한남동으로 통하는 고개에 남소문이 있었다
광희문은 한양도성의 축조와 함께 1396년에 건립되었다
일제가 전차궤도를 부설하면서 성곽을 철거할 때도 문과 문루는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문루가 파괴된 상태로 방치되었다
그 후 1975년에 도로(퇴계로) 확장을 위해
원위치(도로 중간)에서 남쪽으로 15m 옮겨지고 문루가 중건되었다
광희문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보면 1624년(인조 2)에 이괄이 난을 일으켰다가 수구문을 통하여 도망갔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임금(인조)이 역시 이문을 통과하여 남한산성으로 옮겨(도망?)갔다
그리고,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와 일본군 사이에서 벌어진 서울시가 전투(일명 남대문 전투) 에서 죽은 대한제국 군인들의 시신이 가까운 남대문 이나 서소문으로 나가지 않고 멀리 광희문 밖에까지 와 버려졌다
♤ 광희문 각자성석
監官金壽涵軍金英得 石手金成福 辛未八月日
(감관김수함군김영득 석수김성복 신미팔월일)
1811년(순조 11)8월 김수함이 감독하고, 김영득이 공사를 이끌었고, 석수 김성복이 성을 보수했다는 내용이다
治所監官金德亨 書員李珎燁 庫直金光福
(치소감관김덕형 서원이진엽 고직김광복)
치소감관 김덕형, 서원 이진엽, 고직 김광복이 축성을 담당하였다는 내용이다
♤ 시구문시장
한 때는 번성하였지만
지금은 시장 흔적조차 찾아 볼 수가 없다
원일수도, 충남대장간
경남철공소
이름은 각각 다르지만 서울에 몇 남아 있지 않은 대장간들이다
♤ 뒷골목
참 좁다 좁아 ㅠㅠ
1968~69년 당시 축구선수 이회택도 이 근처 어디엔가에 살았다
♤ 문 밖으로 나온 망자들을 위해, 유족들은 무당들을 불러 굿을 하며 넋을 위로했고 광희문 밖은 자연스럽 게 하나둘씩 신당이 늘어나 이후 신당이 많다 하여 '신당동(神堂洞)'으로 불렸다
이후 갑오개혁 때부터는 한자어가 '신당동(新堂洞)' 으로 바뀌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거리 (서울시 중구 을지로 42길, 광희동1가)
정식 명칭은 ‘광희동 중앙아시아거리’이지만 흔히 동대문 러시아거리로 부른다
1990년 9월 30일 소련을 승계한 러시아와 한국이 수교를 맺으며 초기 러시아무역상들이 모여들며 형성되기 시작한 거리로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스탄,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라크 등 수천년 역사를 간직한 실크로드 무역 유전자를 가진 국민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사마르칸트 식당과 카페, 식료품점, 러시아 빵집 등 대부분의 상점 간판이 한글 간판보다 러시아 키릴문자로 쓰여 있다
코로나19 장기화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까지 겹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크게 줄어 상권이 무너지고 있다
(광희동의 거의 모든 곳에서 마치 증발이라도 한 듯, 러시아인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다)
첫댓글 흥인지문 언저리에 제법 볼거리들이 많이 있군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