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7일 오늘의 역사
2023년 튀니지 해안에서 사하라 남부 아프리카 국가 출신 이민자 등이 탄 이민선 3척이 침몰, 최소 29명이 사망 11명 구조
2016년 파키스탄 두 번째 큰 도시 라호르의 어린이공원에서 폭탄테러 사망 74명
2014년 일본 법원 세계에서 가장 오래 복역한 사형수(기네스북) 하카마다 이와오(78세) 사형선고 48년 만에 석방과 재심 결정
2013년 북한 남북간 모든 공식 통신선 차단ㆍ군통신연락소 활동 중단 통보
2012년 '꼬방동네' 실제 모델이었던 '빈민의 벗' 허병섭 목사 별세
1970년대 청계천 판자촌의 가난한 사람들 사이로 소금처럼 녹아들었던 사람. 달동네 교회에 탁아소를 세우고 스스로 철거민의 '목소리'가 됐던 사람. 결국엔 목사라는 직함도 벗어던지고 미장이로, 노동판 일꾼으로 살았던 사람. '노가다 목사님', '빈민의 벗'으로 불렸던 허병섭(71·사진) 목사가 27일 오후 4시30분 서울 녹색병원에서 패혈증으로 별세했다. 고인은 이철용(64) 전 의원이 소설 '꼬방동네 사람들'과 '어둠의 자식들'에 등장시켰던 빈민운동가 '공병두 목사'의 실제 모델이다.
허 목사는 2009년 1월 먼저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부인 이정진(64)씨를 간병하다 자신도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고, 뇌손상 진단을 받아 3년 넘게 혼수상태로 투병했다. 부인 이씨는 여전히 투병 중이다.
가난한 이들 속에 살아가려는 그의 결심은 개인적 경험에서 나왔다. 1960년대 어렵게 신학 공부를 하던 고인은 백혈병으로 사경을 헤매다 교회 여전도회에서 모아준 돈으로 기적적인 회복을 경험한다. '내 남은 삶은 덤이다. 제2의 인생은 예수의 정신으로 살겠다'는 허 목사의 결심은 이때 시작됐다.
시작은 청계천 판자촌이었다. 한국신학대를 졸업하고 1974년 군목(軍牧)생활을 마친 허 목사는 서울 신설동 4번지 청계천변 판자촌에서 구두닦이 소년들의 '왕초'로 살던 이철용씨를 찾아갔다. 이씨는 28일 "허 목사는 처음엔 자신이 목사라는 것도 말하지 않고 야학에서 가르치는 구두닦이 아이들과 형 동생 하며 살았다. 나중에 물으니 '목사인 걸 알면 거리감 생길까봐 알리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회고했다. 1976년 허 목사는 서울 하월곡동으로 옮겨가 '동월교회'를 개척했다. '동쪽의 달 뜨는 교회'라는 뜻이다. 국악 찬송을 만들어 동네잔치 같은 예배를 드렸다. 교회에 달동네 맞벌이 부부들을 위한 탁아소 '똘배의 집'도 차렸다.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철폐를 요구하는 '민주수호기독자회' 등으로 다섯 차례 옥살이도 겪었다.
허 목사는 1990년 아예 목사직을 벗어던지고 막노동판에서 미장일을 익혔고, 노동공동체 운동과 협동조합 운동도 벌였다. 1996년부터는 전북 무주에서 생태교육 대안학교 '푸른꿈고등학교'를 세우는 데 기여했고, 대안 대학인 '온배움터'를 세우고 운영하는 데 헌신했다.
2009년 인도네시아 수도 외곽 댐 붕괴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의 외곽 지역에서 2009년 3월 27일 새벽 토사댐이 붕괴돼 58명이 숨졌다. 인도네시아 국가재난청의 프리야디 카르도노 대변인은 이번 사고로 지금까지 최소 91명이 숨졌으며 100명 이상이 여전히 실종된 상태라고 밝혔다.
사고는 이날 오전 2시쯤(현지시각) 자카르타 남서쪽 20㎞ 지점에 있는 시투 진퉁(Situ Gintung) 저수지의 토사댐이 집중 호우로 불어난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면서 일어났다. 이로 인해 저수지에 담겨 있던 약 200만t의 흙탕물이 인구 밀집지역으로 쏟아져 내리면서 주택 500여 채가 침수되고 대규모 인명 피해가 났다.
현지 재난관리센터 러스탐 파카야(Pakaya) 대표는 "주택 수백 채는 최고 6m 높이까지 침수됐고 수십 채는 수압 때문에 형체도 없이 쓸려나갔다"면서 "마치 '작은 쓰나미(small tsunami)'가 일어난 것 같다"고 했다.
2002년 한국의 국가신용등급 A등급 회복
세계적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Moody`s)가 2002년 3월 27일 전격적으로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장기 외화표시 채권 기준)을 현행 `Baa2`에서 `A3`로 두 단계 상향 조정했다. 무디스는 또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기업은행 등 3개 국책은행과 예금보험공사의 장기신용등급도 국가신용등급 상향에 맞춰 `A3`로 두 단계 상향 조정했다. 이로써 한국은 1997년 외환위기 직전(A1)보다는 두 단계 낮지만 `A`등급을 회복, 대외 신인도가 높아지면서 해외 차입 비용이 연간 10억달러 이상 절감되는 효과를 보았다.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은 이날 2단계 상향 조정에 따라, 외환 위기로 실추된 6단계 등급(`A1`→`Ba1`) 중 4단계를 다시 되찾아, 잃어버린 불명예의 3분의 2를 회복한 셈이 됐다. 한국에 관해 가장 보수적 입장을 견지해 온 무디스는 한국의 대외 부문의 견고성, 다원화된 경제 등을 한국의 신용등급 상향 조정의 주된 이유로 꼽았다.
2000년 전 국립극장장 허규씨 별세
서울대 농대 3학년 재학 중 총연극회 활동에 참여하다 연극에 빠져 1973년 민예극장을 창단, 연극 인생 전기를 만든다. 산만한 번역극 공연이 대세를 이루던 이 시기, 허규는 ‘놀부뎐’ ‘서울 말뚝이’ ‘한네의 승천’ ‘물도리동’ ‘다시라기’ 등 전통을 재창조한 새로운 연극을 선보여 충격을 줬다. 1981년 관료 아닌 예술인으로선 처음으로 국립중앙극장장에 취임해서도 민중극 팀을 국립극장에 부르는 등 파격으로 투서사태를 빚기도 했다.
훤칠한 키(178cm)에 깡마른 체격. 무슨 일이든 판을 벌이는 데 선수였고, 벌여놓은 판을 어떻게든 마무리하는 데도 선수였다. 1986년 상감마마 행차를 서울거리에 재현하고 88올림픽 거리축제 총감독을 맡았던 허규는 1989년 ‘축제문화진흥회’ 를 세워 이벤트 기획가로 본격 변신한다. 오사카의 사천왕사 왔소 축제(1990년), 덕수궁 조선왕궁 수문병 교대식 재현(1996년)등을 통해 전통의 멋을 되살렸다.
1993년 종로구 원서동 자기가 살던 집터를 헐고 설립한 북촌창우극장은 마당극 창극 판소리 사물놀이 공연의 마당이 됐다.
1999년 서울대 황우석 교수, 한우송아지 복제에 성공(이름 진이)
젖소(영롱이) 복제에 성공한 서울대 수의과 황우석 교수가 토종 한우 송아지 복제에 성공했다.
황 교수는 “지난달 27일 오전 2시30분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임 모씨의 목장에서 영롱이처럼 암-수교배 없이 체세포를 복제해 대리모에 수정란을 이식시키는 방법으로 암컷 한우 송아지를 출산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이 송아지는 체중이 27㎏으로, 현재 질병없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고 황 교수는 전했다.
황 교수는 지난 1일 김대중 대통령이 주재한 국가기술자문위원회에서 이같은 사실을 보고했으며, 김 대통령은 이 송아지에게 “역사를 앞서가는 삶을 살면서 시대를 초월해 칭송을 받을 작품을 남긴 황진이처럼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소가 되어달라”는 뜻으로 ‘진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진이’의 모체 소는 몸무게가 국내평균 한우(550㎏)의 1.8배인 980㎏짜리 수퍼(SUPER)소다. 황 교수는 “‘진이’는 모체 소의 귀에서 세포를 떼어내 복제를 했다”며 ‘모체와 똑같은 수퍼소로 성장할 것’라고 말했다. 이번 한우 복제의 기술과 과정 등은 영롱이 복제와 같았다.
황 교수는 “그러나 한우의 경우, 세포 크기가 젖소의 3분의 2에 불과, 세포융합 성공률이 젖소보다 낮았다”며 "이 때문에 한우 복제는 젖소 복제보다 훨씬 어렵다”고 설명했다.
1998년 미국 식품의약국(FDA), 남성발기부전증 치료제 `비아그라` 승인
1998년은 `비아그라의 해` 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비아그라가 세계인의 화두가 됐다. 1998년 3월 27일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남성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의 시판을 승인하면서 이 푸른 알약은 세계적인 선풍을 불러 일으켰다. 화이자사가 개발한 `비아그라`(viagra)는 외과적 처치 필요 없이, 단지 알약을 복용함으로써 성기능을 회복토록 하고 있다.
협심증 치료과정에서 개발된 비아그라는 1998년 노벨의학상까지 이 약품 개발의 ‘단초’를 제공했던 의사들에게 돌아감으로써 성가를 드높였다 . 그러나 여성들은 비아그라가 나이 많은 남성들의 바람기만 부추긴다며 불매 캠페인에 나서는 등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한국은 1999년 10월 비아그라 시판을 허용했다
1998년 증권관리위원회 해체
1997년 미국 사교집단 `천국의 문` 신도 39명 집단자살
1990년 KAL 858기 폭파범 김현희 2심에서 사형선고
1987년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 민족정기구현회 회장 권중희씨에게 피습
1982년 프로야구 출범
6번타자 이종도의 상대는 한국 제일의 좌완투수 이선희였다. 7-7, 10회말 2사만루, 2만여 관중은 숨을 죽였다. 볼 두개를 골라낸 이종도는 가운데로 쏠린 3구째를 강타했다. 좌측 담장을 넘어가는 결승 만루홈런.
1982년 3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한국프로야구 원년 개막전서 MBC 청룡이 삼성 라이온스에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는 순간이었다. 영웅이 된 이종도는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며 홈 플레이트를 밟았고, 이선희는 더그아웃서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렸다.
이날 경기는 프로야구 출범을 축하하듯 홈런 4개를 포함, 26안타가 터지는 화끈한 타격전이었다. 청룡은 4-7로 끌려가던 7회말 유승안의 3점 홈런포로 동점을 만든 뒤 10회말 경기를 뒤집어 마지막에 웃었다.
한국 프로야구는 1982년 `어린이에게는 꿈을, 젊은이에게는 정열을 그리고 모든 국민들의 선량한 여가선용을 위하여`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출범했다. MBC 청룡(서울), 롯데 자이언트(부산), 삼성 라이온즈(대구), 해태 타이거즈(광주), 삼미수퍼스타즈(인천), OB 베어즈(대전) 등 6개구단으로 출범한 한국프로야구는 그해 관중 143만8768명(평균5995명)을 동원, 화려하게 돛을 올렸다. 원년 챔피언은 OB 베어스가 차지했다.
1980년 팔레스타인 자치협상 재개
1979년 토지개발공사 발족
1977년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에서 여객기 충돌로 582명 사망
582명의 사상자를 낸 민간항공사상 최대의 참사가 1977년 3월 27일 스페인의 테네리페섬에서 발생했다.
네덜란드의 KLM기가 카나리아 제도의 한 섬인 테네리페섬 로스로데오스 공항에서 이륙을 시도하던 중 활주로에 있던 미국의 팬암기를 들이받아 발생한 이 사고로 2대의 항공기 모두 폭발해, KLM기 승객과 승무원 전원이 사망했다. 사상자들은 대부분 지중해 관광을 즐기려던 관광객이었다.
사고원인은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의 분리주의자들이 제공했다. 분리주의자들이 대(大)카나리아 공항에 폭탄을 설치했다는 제보에 스페인 경찰이 대카나리아 공항의 모든 비행기를 인접한 로스로데오스 공항으로 유도하자 공항은 북새통을 이뤘다. 넘쳐나는 비행기들과 그날따라 짙게 내린 안개로 참사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1972년 노동당 연락부 간부급 간첩사건
1971년 주한미군 7사단, 23년 10개월 만에 철수
1969년 베트남, 제10회 파리회담에서 평화5원칙 제시
1968년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 사망
인류 최초로 우주여행을 하고 돌아온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1968년 3월 27일 사망했다. 스몰렌스크주에서 출생한 가가린은 콜호즈 구성원의 집안에서 태어나 사라토프의 공업중등기술학교 재학중에 항공 클럽에서 비행 기술을 익혔고, 오렌부르크의 항공학교를 졸업한 뒤 공군에 입대했다.
1961년 4월 12일 보스토크 1호를 타고 1시간 48분 만에 지구의 상공을 일주함으로써 인류 최초의 우주비행에 성공했다. 우주에서 지구를 본 감상을, “지구는 푸른 빛이었다”라고 한 말은 유명하다.
우주비행에 성공한 뒤 중위에서 소령으로 특진하여 우주비행사대 대장 등을 지내고 대령으로 진급했다. 1968년 3월 27일 비행 훈련 중 타고 있던 제트 훈련기가 모스크바 근교 블라디미르주의 한 마을에 추락하여 사망했다.
1964년 알래스카에 대지진(진도 9.2)과 해일, 128명 사망
1963년 내각, 시국수습협의회 개최
1958년 니키타 흐루시초프, 소련 수상에 선임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1958년 3월 27일 수상으로 선임됐다. 니콜라이 불가닌 전 수상의 뒤를 이어 수상자리에 올랐으나 흐루시초프는 이미 소련사회에서 막대한 권력을 장악한 상태였다. 스탈린 사망 후 제1서기로 선출되면서부터 경쟁자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 온 흐루시초프는 말렌코프 총리의 농업정책을 비판해 1956년 그를 사직하게 했고, 몰로토프와는 유고슬라비아 문제로 대립했다.
제20회 당대회에서는 `개인숭배와 그 결과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비밀보고로 `스탈린 비판`을 제기했다. 이 보고에서 당규범의 파괴와 충실한 간부들의 숙청, 독소 전쟁 초기의 외교적, 군사적 과오, 다수의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테러를 스탈린의 잘못으로 지적했지만 내용이 무원칙적이고, 사실 확증이 결여돼 있어 몰로토프, 말렌코프, 불가닌, 주코프, 셰피로프 등 유력 간부들의 반대에 직면했다.
흐루시초프는 반대자들을 `반당 그룹`으로 지목, 그들을 요직으로부터 추방하고 친척이나 자파의 신인들로 대체했다. 이렇게 당과 국가의 전권을 장악한 그는 1961년 제22회 당대회를 주재하여 `신노선`을 채택했다. 1964년 실각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 ‘한글 간소화’ 특별담화
1954년 3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이 “3개월 이내에 현행 한글 맞춤법을 버리고 한말 성경 맞춤법으로 돌아가라”는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읽기에 힘이 들고 쓰기에 복잡하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이 대통령 개인의 불편함이 더 크게 작용했다.
191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수십년간 변화해 온 한글을 제대로 접하지 않다가 광복 후 본격 사용하기 시작한 한글표기가 불편했던 것.
일반 국민들의 불편함을 내세워 이 대통령의 취지에 찬동하는 학자도 일부 있었지만 반대 여론이 더 많았다. 현재의 맞춤법이 복잡하다해도 한말 성경에 사용된 맞춤법도 문제 있기는 마찬가지여서 해결책이 될 수 없고 또 3개월로는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한글 간소화 주장은 1949년 10월 이 대통령의 담화로까지 거슬러올라가지만 6·25가 논쟁을 가로막았다. 논쟁이 다시 고개를 든 것은 1953년 4월, 국무회의에서 정부 문서와 교과서 만이라도 옛 맞춤법을 사용할 것을 일방적으로 결의하면서였다.
문교부까지 나서 반대해도 이 대통령이 뜻을 굽히지 않자 편수국장 최현배와 문교장관 김법린이 사임하며 반발한다. 이런 상황에서 특별담화가 발표됐고, 7월 3일에는 ‘앉았다’를 ‘안잣다’로, ‘좋지않다’를 ‘조치안다’로 표기하는 한글간소화 시안까지 발표됐다. 하지만 학자들은 물론 국회까지 나서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자 결국 이 대통령이 1955년 9월 19일 한글간소화 추진 입장을 철회함으로써 7년에 걸친 한글간소화 파동이 일단락됐다.
1951년 6-3-3-4학제실시
1950년 남로당 무장 총책임자 이주하 검거
1933년 일본, 국제연맹 탈퇴
1932년 수영스타 뮬러, 6대 타잔으로 출연
세계적인 수영선수 조니 와이즈 뮬러가 6대 타잔으로 출연한 영화 ‘유인원 타잔(The Tarzan of the Apes)’이 1932년 3월 27일 뉴욕에서 개봉됐다.
뮬러는 1922년에 100m 자유형에서 세계최초로 1분 벽을 끊은 이래 1928년까지 세계기록을 24번이나 갱신하고, 올림픽에도 두 번 출전해 5개의 금메달을 딴 최고의 수영선수. 192cm의 큰 키에 수영으로 다져진 몸매, 게다가 수려한 외모까지 자랑하고 있었다. 뮬러의 등장으로 타잔은 비로소 오늘날의 지적이고 에로틱한 이미지를 갖게 됐다.
타잔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12년 소설가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가 잡지 ‘올 스토리’에 ‘타잔’을 발표하면서였다. 1914년 단행본으로 출간돼 첫 권이 인기를 끌자 이후 26편의 시리즈로 만들어졌고 56개국 언어로 번역돼 2,500만부 이상 팔려나갔다.
타잔이 처음 영화로 제작된 것은 1918년 2월 14일로 프로레슬러 출신의 엘모 링컨이 첫 타잔역을 맡았다. 초기에는 머리띠를 두르고 왼쪽어깨에 털가죽을 비스듬히 맨 원시인의 모습이었지만 뮬러 때부터 쭉 뻗은 다리를 드러낸 수영복 차림의 타잔으로 변신했다. ‘타잔’은 원숭이들의 언어로 ‘하얀 피부’를 뜻한다고 한다.
1922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발기회 개최
1912년 조선공립소학교관제 공포
1898년 러시아, 여순항과 대련만 조차
1893년 독일 사회학자 칼 만하임 출생
1871년 프랑스 화가 조르주 루오 출생
1854년 크림전쟁 발발
1854년 3월27일 크림반도와 흑해를 둘러싸고 러시아, 오스만트르크, 프랑스, 영국,프로이센, 사르데냐 연합군 사이 크림전쟁이 일어났다
크림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분쟁에서 시작되었지만 러시아 니콜라이 1세가 오스만투르크제국 그리스 정교도의 보호권을 주장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러시아가 몰다비, 왈라카이 등에 침입해 크림반도를 점령하자 오스만투르크가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영국, 프랑스, 오스만트르크 연합군은 크림반도에 6만여 명의 대군을 배치, 세바스토폴을 포위하였다. 그 후 러시아 함대는 열세를 인정하고 세바스토폴만에서 함정을 침몰시키고 항구를 패쇄했다
러시아 육군은 11개월간이나 연합군에 맞섰다.
1856년 3월 파리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수습에 들어가게 되었고 전쟁결과 러시아는 몰다비아 나뉴브하구와 베사라비아 일부를 넘겨줘야 했다
흑해에서 자유항해는 인정됐지만 굴함항해는 금지됐다
1845년 독일 물리학자 빌헬름 뢴트겐 출생
1812년 홍경래의 난 진압
1802년 영-프랑스 아미앵조약 체결
1592년 거북선 진수
1387년 태양 흑점 관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