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훈련원 터 (서울시 중구 을지로 245, 을지로6가 18-79)
훈련원은 조선 개국 초기(1392년)에 '훈련관(訓鍊觀)' 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설치되어 무과시험과 아울러 화쏘기 등 무예를 연마하거나 대규모 군사조련 과 열병을 실시하는 곳이다
태종 때 이곳으로 옮겨졌으며, 1466년(세조 12)에 훈련원으로 이름이 고쳐졌다
(이순신 장군이 무과시험 때 말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자 버드나무 껍질을 덧대어 동여매고 다시 달렸다는 곳이기도 하다)
일제와 1907년 8월에 체결된 한일신협약(일명 정미 7조약)에 의해 훈련원에서 조선의 군대 해산식이 거행되고 조선 군인들의 무장 해제가 이루어져 군대가 해산되고 훈련원도 강제 폐쇄된 아픈 역사가 있는 곳이다
♤ 일제 강점기 이후 훈련원 일대
1917년 4월 동대문심상소학교 개교를 위시하여 1919년 5월 경성약학전문학교 신축이전, 1921년 9월 경성사범학교 신축이전, 1927년 12월 경성여자 공립실업학교 신축 등이 잇달아 들어서면서 그 영역이 서서히 잠식되어 갔다
1926년 6월 10일에는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붕어하자 국장(國葬)으로 영결식을 훈련원에서 거행하였다
또한 돈의문 밖 경기감영 터(현 서울 적십자 병원)에 있었던 고양군청(高陽郡廳)이 1928년 4월 7일 옮겨와 이 구역을 다시 분할하여 차지하며 1961년 8월까지 머물렀다
그 후 경성전기주식회사의 기부금 50만원을 재원으로 경비진료소(輕費診療所)를 건립하기로 하고 1933년 6월 착공하여 1934년 3월 낙성식을 하였는데, 완공 직전에 경성부민병원으로 이름을 고쳤다
1941년 3월에는 병원 후면에 상이군인 유가족을 위한 수산장(授産場)으로 2층 규모의 양관인 '생활의 집'이라는 시설이 추가되었다
경성부민병원은 해방 이후 한때 시민병원(市民病院) 으로 개칭하였다가, 그 자리에 1958년에 신설된 국립중앙의료원이 들어섰다
♤ 국립중앙의료원 (서울시 중구 을지로 245, 을지로 6가 18-79)
한국전쟁 후 전상병(戰傷兵)을 비롯한 환자 진료 및 의료요원의 교육과 훈련을 목적으로 1956년 3월 정부와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 스칸디나비아 3국(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 대표자 간에 <중앙 의료원의 설립과 운영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어 소요 재원을 공동투자, 1958년 11월 정부와 스칸디나비아 3국의 공동운영체제로 '중앙의료원'으로 개원하여 진료를 시작하였다
1960년 8월 12일 '국립의료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 고 1968년 10월 정부가 모든 운영권을 인수하여 운영하였으며,
1980년 8월부터 1983년까지 약 3년에 걸친 대규모 의 병원 증·개축공사 착공으로 지하 1층, 지상 7층의 본관병동과 지하 1층, 지상 3층의 외래진료동의 신축 및 기존 2개 병동 보수 등 총건평 4만 8,889㎡ 및 6백 개 병상의 현대식 시설과 장비를 갖추게 되었다
2000년 1월 1일에 책임운영기관으로 지정되었고, '국립중앙의료원의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이 제정됨에 따라 2010년 4월 2일 지금의 명칭으로 특수법인화 되었다
2003년 서울시에서 강남구 원지동으로 이전을 제안 하면서 계획이 가시화 되었으나 여러가지 이해관계가 얽혀 2014년 말에야 11년 만에 사업계획이 최종 승인되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2019년 7월 원지동 이전사업 은 16년 만에 백지화가 되었다
2020년 11월에 미 육군 극동공병단 부지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반환된 데 이어서 2021년 1월 6일에 보건복지부와 국방부간의 업무 협약을 체결함으로서, 본격적인 신축 이전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2021년 4월 삼성(이건희일가)이 의료발전을 위해 내놓은 1조원 기부 중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코로나19) 등 감염병 대응 역량 개선 등의 목적으로 국립중앙의료원에 5천억원을 기부했다
바로 옆 미 육군 극동공병단 부지로 이전이 확정된 가운데 7천억원의 기부 중 5천억원을 세계 최고 수준 의 감염병 전문 병원 설립을 위해 사용하기로 결정 했다ㅍ
♤ 스칸디나비안 클럽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덴마크는 유엔 회원국 가운데 가장 먼저 의료 지원 의사를 밝혀 곧바로 최고의 의료진을 병원선 ‘유틀란디아호(Jutlandia)’에 태워 보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도 따로 의료진을 파견했다
이들 스칸디나비아 3국 의료진의 활약은 눈부셨다
연인원 5000명의 의료진은 쉴 새 없이 전상자와 민간인을 치료했다
이런 노력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어졌다
한국과 이들 3국은 1958년 유엔한국재건단 (UNKRA)과 공동으로 서울에 국립의료원을 세웠다
유엔의 지원사업 중 가장 모범적인 사례였다
이때 병원 측은 고향 음식을 그리워하는 3국 의료진을 위해 구내 음식점과 휴게시설을 마련했다
국내 최초 뷔페 식당, 스칸디나비안클럽의 탄생이었다
뷔페는 원래 바이킹들의 풍습이다
긴 항해에서 돌아온 뒤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놓고 며칠 동안 잠을 자지 않으면서 축제를 벌인 데서 유래했다
이것이 2차세계대전 중 전 세계로 퍼져나갔는데, 한국 에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본고장 뷔페가 스칸디나비안 클럽을 통해 전해진 것이다
스칸디나비안클럽은 뷔페 음식에 이들 3국의 국왕 사진, 북유럽풍 가구와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처음에는 주한외교사절과 정치인 등이 회동 장소로 이용했다
1968년 의료진의 철수와 함께 외부에 개방됐는데 금세 명소가 되었다
클럽이 낸 임차료는 의료원 의사들이 스칸디나비아 3국에 연수를 다녀오는 기금으로 지원됐다
한·스칸디나비아 우호의 상징과도 같은 장소였다
아쉽게도 이 클럽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의료진 철수 후 한·스칸디나비아 재단이 맡아 운영 하다가 2012년 문을 닫았다
한때 가족행사 장소로 인기가 있었으나 뷔페 식당이 많아지면서 적자를 면치 못한 것이다
현재는 병원 시설(중앙치매센터)과 민간시설 (뚜레쥬르)로 사용 중이다
♤ 스칸디나바아 기념관
의료진의 흔적은 국립의료원 내 스칸디나비아 기념관 에 자료로만 남아 있다
경성사범학교 터 (서울시 중구 을지로 227, 을지로 5가 40-3)
1922년 9월 30일 경성사범학교가 이전해 와서 1945년까지 있었으며,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1945년~1950년), 부속중학교(1946년 ~1947년) 및 부속고등학교(1946년~1947년, 1954년~1967년)와 부속국민학교(1947년~ 1950년, 1953년~1975년)가 있던 곳이다
1921년 조선총독부사범학교가 설립되었는데, 사범학교 규정 없이 예비적으로 설립되어 있던 학교로 1922년 2월 사범학교 규정이 제정되고나서 조선총독부사범학교는 경성사범학교로 개편되었다
경성사범학교는 개교 후 5개월 가량 경성제1고등보통 학교(현 경기고등학교) 내의 가교사(현 종로구 화동 1번지 소재)를 사용하였고, 같은해 9월 30일에 이곳 (을지로 5가)에 있는 신축교사로 이전하였다
경성사범학교의 학급은 1부와 2부로 나뉘면서 1부에서는 일본인이 다니는 학교의 초등교원을 양성 했고, 2부에서는 조선인이 다니는 학교의 초등교원을 양성했다
해방직후 경성사범대학으로 승격되어 초등교원뿐만 아니라 중등교원을 양성하다가 1946년 경성여자사범 학교와 통폐합되어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개편 되었다
오늘날 서울시에 있는 서울교육대학교(경기사범학교 의 후신)와는 무관한 학교이다
♤ 헌법재판소 터 (서울시 중구 을지로 227, 을지로 5가 40-3)
1988년 12월 27일부터 1993년 5월 31일까지 헌법재판소 청사로 쓰였던 건물은 구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중학교 등 부속학교가 쓰던 건물이었다
강당을 심판정으로 개조,
헌법재판소 독립청사를 가지게 되어 을지로 청사 개청식을 가졌다
헌법재판소가 1993년 6월 1일 종로구 재동으로 떠난 뒤 해당 건물은 철거되고, 현재의 훈련원공원이 되었다
미 육군 극동공병단 터 (서울시 중구 을지로39길 29, 을지로5가 40)
서울 중구 을지로5가 40번지 일대 4만 2614㎡ 넓이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국방부가 징발해 1951년 6월 1일 주한미군에 공여하였던 부지를 2020년 12월 11일 제201차 주한미군지위협정 (SOFA) 회의에서 반환받았다
서울대는 이 땅의 소유권을 두고 국방부와 법적 다툼 을 벌였으나 법원은 국방부 손을 들어주었다
정부는 미군이 떠난 이 자리에 ‘중앙 감염병 전문병원’ 을 건립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