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히아* / 김재홍
중남미의 어느 공화국 시민인 그는
동란과 쿠데타를 딛고선 아시아의 작은
공화 정부의 취업비자를 받아
뜨끈뜨끈한 잠실야구장 타석에 섰다
(왜 중남미 선수들은 교범에도 없는 말타기 자세를 하는지 몰라)
메시아가 어디 사는지도 모르면서
검게 붉게 얽은 얼굴을 하고 그는 처음에
야구공과 방망이를 손난로처럼 품고
한겨울 국제공항 청사를 두리번거리며 어슬렁거리며 나왔을 것이다
(머리통이 얼마나 작으면 헬멧 속에 모자를 또 썼을까)
그는 당당하게 2루타를 쳤다
베이스를 밟고 선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
수천 개 눈동자가 일순간 그의 몸을 향해
함성을 지르고 파도처럼 술렁거리며 비명을 지르고
거대한 솥단지가 되어 펄펄 끓다가
더 작은 체구의 다음 타자가 안타를 칠 수 있을지 의심한다
(관중석에 앉으면 왜 선수들은 모두 야구공처럼 보일까)
비쩍 마른 붉은 눈의 게바라를 읽고 싶었다
국경을 뛰어넘는 공화국의 깃발을 보고 싶었지만
그는 너무 작았고 액정 화면에 잡힌 그의 헬멧에는
국적 불명의 독수리 이니셜만 코를 벌름거리며 박혀 있었다
멕시코와 푸에르토리코와 쿠바 출신의 운수 좋은 메이저리거들도
타석에 서면 구부정하게 허리 굽히고
꼭 말 타는 자세로 방망이를 든다
*국내 프로야구팀 ‘한화 이글스’의 외국인 선수(2003년)
[ 감 상 ]
고등학교 1학년 봄 난생 처음 참가한 백일장에서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모두 낙방한 가운데 홀로 받은 입선(入選) 상으로부터 거의 20년 동안 나는 이른바 등단을 위해 절망과 희망이 교차하는 생활을 했다. 가끔씩 문예반 앞을 어슬렁거리게 된 그 순간을 저주하기도 했고, 아주 가끔은 시인의 삶이란 얼마나 고귀하고 고결한가를 상상하며 즐거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한 가지 변함없는 시적 자세는 언제 어디서고 시를 찾아가는 의욕(意慾)이었다. 반드시 좋은 시를 쓰고야 말겠다는 의지는 반드시 시보다 먼저 시에 대한 절망으로 돌아왔다.
적어도 야구 선수 메히아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시를 향한 향일성의 간절함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2루타를 치고 베이스 위에서 그 큰 두 눈을 두리번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던 야구 선수의 몸동작 하나하나는 곧 시였다. 황급히 종이와 볼펜을 찾아 보이는 모습 그대로 적어 나갔다. 연습 스윙을 하던 모습, 말 탄 기사(騎士)처럼 우스꽝스럽던 타격 자세, 모자를 쓰고 다시 헬멧을 쓴 작은 머리통, 울퉁불퉁한 검은 얼굴….
이어서 그의 조국 도미니카와 중남미, 낯선 인천국제공항을 빠져나오는 장면, 체 게바라의 흑백 사진과 중미 해안의 왠지 비릿한 느낌이 나는 풍경, 안타깝게도 박찬호로부터 곧잘 홈런을 쳐내던 블라디미르 게레로라는 선수, 그 역시 도미니카 출신으로 드물게 타격용 장갑을 끼지 않고 타석에 서던 선수였다. 멕시코, 푸에르토리코, 베네수엘라, 쿠바 출신 메이저리그 야구 선수들의 기이한 자세들까지…. 특별히 고심할 것도 없이 무언가를 애써 표현하려 할 필요도 없이 그저 생각나는 대로 적어 나갔다.
첫 연의 4행은 메히아가 잠실야구장 타석에 서기 위해 필요한 제반 요건을 간략히 다루었고, 2연의 4행은 그가 한국 프로야구 등록 선수가 되어야만 했던 이유를 메히아와 메시아의 발음상의 유사성에 착안해 적었다. 그리고 3연은 이 시의 착상이 된 TV 속 경기 장면을 말 그대로 거두절미하고 기록했다. 나머지 4연과 5연은 좀 더 당당하고 배짱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을 실어 그동안 보고 들었던 몇 가지 정보를 보태 적었다. 불과 십수 분 만에 5연 24행의 시가 눈앞에 나타났다.
수고스럽지 않게 뼈대를 갖추고 살을 붙이고 옷까지 챙겨 입혔으나 이상하게도 밋밋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가락이든 표현이든 내용이든 형식이든 시란 모름지기 새로운 기운으로 생동해야 한다는 교과서적 기준을 생각할 때 그 상태로 마감할 수는 없었다. 거기서 잠깐 멈춰 있는데 ‘메히아란 선수는 왜 그럴까’ 하는 솔직한 질문을 그대로 적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순간 떠올랐다. 1연부터 3연까지의 마지막 행마다 괄호 안에 넣은 ‘왜 중남미 선수들은 교범에도 없는 말타기 자세를 하는지 몰라’ ‘머리통이 얼마나 작으면 헬멧 속에 모자를 또 썼을까’ ‘관중석에 앉으면 왜 선수들은 모두 야구공처럼 보일까’는 주로 묘사를 통해 전개되는 시의 전반적 흐름과는 이질적인 내면적 독백의 표현들이다. 밋밋한 전개에 물음표가 빠진 질문이 괄호 속에 들어가자 색다른 맛이 났다.
이렇게 하여 20여 년 소망하던 나의 등단작은 불과 십수 분 동안 세상에 태어날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솔직히 이놈이 시인지, 시라 하더라도 얼마만큼 구색을 갖춘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시란 언제나 내가 먼저 찾아가야 살짝 얼굴을 보여주던 감질나는 존재였는데 이처럼 덜컥 나타나는 것도 못미더웠고, 선배 세대의 문학적 고뇌와 시적 전범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고 자부하던 터라 스스로도 그 모양새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다. 그해 나의 응모작은 모두 8편이었는데, 앞세운 작품은 사실은 ‘메히아’가 아니었다.
- 길상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