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종가가 가장 많은 지역이 안동이라는 거 아시죠? 안동에 군자마을이라고 500년 넘은 마을이 있는데, 그곳으로 종가음식을 찾아가보는 게 어때요?”
‘종가문화의 메카’라 할 만한 경북 안동, 그중에서도 마을 전체가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고택으로 이뤄진 군자마을에 가보자는 강레오 셰프의 말에 남쪽으로 향했다. 조선시대 순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김부필이 지은 후조당, 퇴계 이황의 제자인 금응협이 후진 양성을 위해 만든 일휴당, 조선 중기의 학자 김부신이 지은 양정당 등 군자마을의 수다한 고건축물 중에 강 셰프가 발길을 멈춘 곳은 설월당이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조리서 <수운잡방>을 가보로 간직하고 있는 광산 김씨 설월당파 15대 종부 김도은씨(57)가 있는 곳이다.
손님상 술안주 더덕자반과 가지모점이
“멀리까지 오셨네요. 오는 길은 편안하셨어요?”
세월의 더께가 까맣게 쌓인 낡은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종부가 ‘버선발’로 고택 마루를 내려서며 강 셰프를 맞는다. 뜨거운 햇볕에 서 있지 말고 어서어서 설월당 안으로 올라오라는 종부. 한여름 더위를 피하는 데 동서남북 사방으로 난 문을 다 열어젖힌 설월당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단다.
“<수운잡방>이 전해 내려오는 집안의 음식은 어떨까 항상 궁금했어요. 음식 종류는 뭐가 있는지, 조리법은 어떤지, 맛은 어떤지 다 궁금하더라고요.”
강 셰프의 질문에 종부가 웃으며 답한다.
“우리집 음식이 좀 특별하기는 하죠. <수운잡방>은 500여년 전인 조선시대 중종 때 김유 할아버지가 쓰신 책인데, 그 시절에 남자가 조리서를 쓸 정도였으니까요.”
옛날부터 손님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집안이라 접대음식에 신경을 썼고, 그래서 집안 내림음식이 대부분 손이 많이 간다고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 만들 때는 손이 엄청 많이 가는 음식들이에요. 예를 들면 손님 술상에 흔하게 올리던 더덕자반하고 가지모점이가 그렇죠.”
겉으로 보기에 특별한 양념 없이 불에 살짝 굽기만 해서 상에 올렸을 것 같은 더덕자반은 사실 굽고 말리는 일을 다섯번 이상 반복해서 완성한 음식이다. 가지모점이도 들기름을 앞뒤로 발라가면서 3일간 말린 뒤 굽고 식히고를 세번 반복해야 한다. 더덕은 열번까지 말리기도 하는데, 더덕을 한지 사이사이에 넣고 그 위에 고서(古書)를 올려 눌러주면 마치 종이처럼 얇고 바삭하게 마른단다. 손님이 오면 꺼내 살짝 구운 뒤 꿀을 발라서 내놓는데 바삭바삭한 식감이 마치 과자를 먹는 것 같다고.
“대신 양념은 아주 단순하게 해요. 대부분 집에서 담근 간장이나 된장만으로 간을 하고 고춧가루 같은 강한 양념은 거의 안 넣죠. 깨나 잣도 음식 본연의 맛을 해칠까 봐 잘 안 뿌리고요.”
종부의 정성이 가득한 꽃정과
더덕자반이 보기에만 단순해보이는 음식이라면 꽃정과는 겉보기에도 손이 엄청나게 많이 갈 것 같은 음식이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아니 자세히 들여다본다 한들 저것이 입에 넣으면 달달하게 씹히는 정과라는 것을 알아채기 어려울 만큼 꽃잎 하나하나가 정교하다.
“우엉·마·박으로 만든 정과예요. 얇게 저민 뒤 설탕이나 물엿 넣고 조려 꽃잎을 만들어요. 그리고 꽃잎 한장한장을 손으로 붙여서 꽃모양을 완성하죠. 초록색은 오이, 붉은색은 비트, 노란색은 치자로 냈어요.”
처음 시집왔을 때는 시어머니와 마주 앉아서 몇시간이고 꽃잎을 붙였다. 그때는 ‘왜 이런 걸 하고 있나’ 이해할 수 없었는데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지금 종부는 혼자서 꽃정과를 만들고 있다. “안할 거라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귀한 분들 오시면 보여드리고 싶고 맛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그리고 만들어놓고 먹다보면 ‘이것들이 흔한 과자에 비할 바냐’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지금도 꽃잎을 붙이고 있는 거죠.”
대추에 아교·정향을 넣어서 만드는 전약, 꿀에 버무린 팥앙금을 익반죽한 쌀반죽 속에 소로 넣은 뒤 기름에 구워서 만드는 떡 조약, 얇고 길게 찢은 쇠고기를 면 대신 넣고 만든 육면 등 생소한 음식들 이야기가 종부에게서 줄줄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끝에 종부는 세상을 향해 스스로 하는 다짐처럼 마음 한자락을 내놓는다.
“시어머니가 하시던 그대로, 윗대 할머니들이 하시던 그대로, 집안음식을 보존하려고요. 그게 종부로서 제가 할 일인 것 같아요. 이런 마음 때문인지 요즘엔 혼자 앉아서 꽃잎 붙이고 있으면 힐링이 되는 것 같다니까요.”
우연히 군자마을에 들러 설월당에 발걸음하게 되면 마루에 앉아 꽃정과를 만들고 있는 종부의 모습을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안동=이상희 기자, 사진=김덕영 기자
김도은 종부의 더덕자반과 가지모점이
더덕은 두드려서 얇게 펴거나 칼로 저민다. 숯불에 초벌구이한 뒤 그늘에서 하룻밤 말린다. 다시 숯불에 구워서 말리기를 다섯번 반복한다. 조선간장을 채수와 섞어서 만든 양념장을 발라서 낸다. 가지는 얇게 저민 뒤 낮 동안 시원한 그늘에서 말린다. 저녁이 되면 넣어뒀다가 아침에 다시 꺼내서 그늘에 말리기를 3일 동안 반복한다. 채수와 간장을 섞어서 만든 양념간장을 발라서 숯불에 구운 뒤 식혀둔다. 상에 내기 직전 살짝 굽는다.
도전! 강레오 셰프의 종가음식고소하고 시원한 ‘육면’
김도은 종부가 알려준 수많은 음식 중에 육면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채 썬 쇠고기를 익힌 뒤 된장으로 맛을 낸 육수에 넣고 끓여서 완성했다. 종부의 육면은 쇠고기에 밀가루를 묻혀서 만들었는데, 강 셰프는 달걀옷을 입혀 기름에 지진 육전을 만든 뒤 채 썰어서 완성했다. 기름에 지져 한층 고소해진 쇠고기와 시원한 된장 육수가 잘 어우러져 깊은 맛을 낸다.
광산 김씨 설월당파 국내 최고 조리서 ‘수운잡방’ 소장
광산 김씨는 신라시대 신무왕의 셋째 아들 김흥광을 시조로 하는 성씨다. 500~600년 전 광산 김씨 김효로가 경북 안동의 외내마을에 정착하면서 광산 김씨 집성촌이 만들어졌다. 1974년 안동댐 건설로 마을이 수몰되자 마을 전체가 지금의 와룡면 오천리로 옮겨와 이름을 군자마을이라고 지었다. 이 군자마을의 광산 김씨 중 설월당 김부륜의 자손들이 살고 있는 곳이 설월당파 종가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조리서 <수운잡방>을 소장하고 있다. <수운잡방>은 121가지의 음식 조리법이 세세하게 기록돼 당시의 식생활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