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여성시대 Luna Kaguya
영화자서전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것> 중
1985년부터 시작된 도쿄 국제영화제는 유감스럽게도 세계적으로 보면 매우 지위가 낮은 영화제입니다.
최근에야 겨우 디렉터 제너럴(2012년까지는 체어맨)이라 불리는 수장이 각국의 영화제를 돌며 조사하게 되었는데, 그전까지는 다른 나라의 영화제를 모르는 채로 시작해 버려서 영화제의 형태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면 경쟁 부문 선택의 역사가 없습니다. 우리가 발견한 작가를 세계를 향해 평가하고, 두 팔 벌려 다시 맞이하며 키워 나가는 지속적인 관계를 구축해 오지 않은 점이 가장 애석합니다.
처음에는 해외에서 온 감독이나 배우를 보살펴 주지도 않았습니다. 메인 회장이 명확하게 없어서 가령 어디에 가면 누구를 만날 수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시부야의 분카무라가 일단 메인이긴 했지만, 그곳 지하의 열린 공간에서 허우샤오시엔 감독과 담소를 나누던 중 오후 6시가 되자 이제 닫으니까 나가 달라는 말을 듣고 커피를 손에 든 채 허둥지둥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적어도 ‘아시아 최대의 영화제’라 한다면 감독이 일본에 와서 일주일 동안 어떻게 지내는지, 식사는 어떻게 할지를 신경 써 줬으면 합니다. 해외 감독, 특히 아시아에서 온 감독들은 도쿄 물가가 너무 비싸서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노자키 마코토 감독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영화제에서 친구가 된 이란 감독이 도쿄 국제영화제에 초대받았을 때 돈이 없어서 호텔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기에 아사쿠사로 데려가 오코노미야키를 사 줬다고 합니다. 이런 문제점은 최근에 조금은 개선되었을까요.
유럽의 영화제라면 저마다 독자적인 색깔을 내며 그야말로 ‘접대’를 연출합니다.
이를테면 1982년에 시작된 토리노 국제영화제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시민이 긍지를 가지로 영화제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저는 세 번 정도 참가했는데, 영화제에 참가한 첫날에 체류 기간 동안의 식권과 그 식권으로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이 표시된 지도를 받았습니다. 영화제 공식 패스를 목에 걸고 있으면 웨이터가 “어디서 왔어요? 일본? 나 구로사와 알아요”라는 식으로 말을 걸고, 그 고장의 맛있는 음식도 먹을 수 있으며, 거리의 사람들과 자연스레 교류할 수 있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런 점은 근사했습니다.
프랑스 낭트 3대륙 국제영화제도 머무는 기간 동안의 비용을 주며 “밖에서 맛있는 음식 먹으면서 지내세요.”라고 합니다. 이건 정말 멋있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제는 영화만 상영하면 그걸로 되는 게 아니라서 거리 전체에 영화와 영화인을 환영하는 정신이 없으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음식 이야기만 하면 제가 단순한 먹보 같으니(사실 그렇지만요) 다른 매력에 대해서도 말하자면, 프랑스 서부의 항구 도시 라로셸에서 열리는 영화제는 규모도 작고 비경쟁이며 마켓이 열리는 것도 아니지만 1973년부터 40년 이상 지속되고 있습니다. 저는 2006년에 회고전으로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도 포함해서 상영해 주신 적이 있어서 여름휴가를 겸해 일주일 동안 머물렀습니다. 아마 거리 전체가 월드컵으로 들떴던 것 같습니다.
거기서 영화제 사무국을 통해 그 지역 고등학생들로부터 취재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고등학교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있는데 제작품도 DVD로 봐서 취재하고 싶다고요. 인터뷰어도 카메라맨도 조명 담당자도 모두 고등학생. “프랑스 감독 중 누구를 좋아하나요?”라는 식의 서툰 인터뷰였지만 정말로 즐거운 체험이어서 세 건 정도 취재에 응했습니다. 또 보육원 선생님이 아이들을 40명 정도 데리고 미국의 희극배우 버스터 키튼의 무성영화 특집을 보여 주는 광경도 우연히 보았습니다. 이 상영은 물론 무료였습니다. 영화제는 이처럼 영화 교육의 장이기도 합니다.
결코 유럽이 모조리 옳고 일본은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경쟁 부문 선택, 참가자 대우, 지역과의 양호한 관계성, 영화 교육의 역할을 담당하는 감각 등의 관점에서 보면 도쿄 국제영화제는 세계 국제영화제 수준에서 한참 뒤처졌다는 게 제가 받은 인상입니다.
이는 분명 일본에서는 영화 시장이 국내 수요만으로 유지되었기 때문이겠지요. 무리해서 해외로 나가거나 영화제를 열지 않아도 국내에서 장사가 되었습니다. 대형 영화제작사인 도호, 쇼치쿠, 도에이의 좋은 시절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기 때문에 ‘왜 무리해서 해외로 나가지?’하는 발상이 아직까지 뿌리 깊어서 거기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반면 유럽에는 원래 영화를 세계 언어로 생각하는 가치관이 있었고, 자국만으로는 시장이 이루어지 않는다는 점도 큰 원인입니다. 해외 시장을 시야에 두고 영화제에 출품하는 것이 상식이지요.
영화제는 일본의 매력을 호소하는 장이 아니다
도쿄 국제영화제는 2013년 디렉터 제너럴로 취임한 시이나 야스시 씨가 2014년에 “애니메이션 작품에 특화된 형태로 만들고 싶다”는 방향성을 명확하게 내세웠습니다. 앞으로 성공할지는 둘째 치고, 그런 명확한 주장이 없으면 아무도 일부러 도쿄 국제영화제까지 와서 영화를 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그해의 영화제 선전 문구는 몹시 무신경했습니다. “일본은 전 세계가 존경하는 영화감독의 출신국이었다. 잊지 말기를.” 해외에서 온 영화인들이 이 문구를 읽고(물론 영어 번역이 아래에 있습니다) 어떤 기분이 들었을지 생각해 보면 부끄러움을 뛰어넘어 분노조차 느낍니다. 영화제는 일본 영화의 매력을 호소하기 위한 장이 아닙니다.
영화제는 ‘영화의 풍성함이란 무엇인가? 이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장입니다. 영화를 신에 비유할 생각은 없지만 우리가 영화의 종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궁리하고, 영화라는 넓은 강을 흐르는 한 방울의 물로 거기에 참여할 수 있는 기쁨을 모두 함께 나누는 것이 영화제입니다. 결코 ‘영화가 우리 일본 경제에 무엇을 가져다주는가?’를 호소하는 장이 아닙니다. 광고 대리점이나 경제 산업성이 주도하여 아이디어를 내니 이렇게 부끄러운 일이 태연하게 벌어집니다.
그 밖에도 “도쿄가 칸, 베니스, 베를린을 뛰어넘는 날이 온다?!”라는 문구도 있었다는데, 현재 수준이라면 유서 깊은 3대 국제영화제를 뛰어넘을 날은 영원히 오지 않겠지요. 레드카펫을 깔고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를 그 위에서 걷게하는 진부하고 개연성 없는 영화제로는 영원히 세계의 사람을 불러들일 수 없습니다. 도쿄가 칸을 노리는지 부산을 노리는지 토론토를 노리는지, 그 방향성을 명확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이하 중략)
부산 국제영화제의 발전에서 배울 점
아시아의 영화제 가운데 압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부산 국제영화제입니다. 1996년에 창설되었으니 역사로 따지자면 도쿄 국제영화제가 더 오래되었지만 예산은 도쿄의 5~6배입니다. 다시 말해 국가적인 대처가 다른 것이지요.
저는 3회 때 부산에 처음 갔는데, 그 무렵은 영화제로서는 아직 미숙해서 상영 중에 휴대전화를 받는 사람도 있었고 자원봉사자가 곳곳에서 해외 영화감독에게 사인을 해 달라고 조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미숙함이 없어져서 규모도 크고 한국의 많은 스타가 모이는 매우 성숙한 영화제가 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창설된 해부터 2010년까지 15년 동안 집행위원장을 맡아 ‘부산 국제영화제의 아버지’라 불리는 김동호 씨가 전 세계의 영화제를 돌며 배운 점을 반영한 결과일 것입니다.
김동호 씨는 한국 정부가 일본 영화의 일반 상영을 금지하던 시대에 1회부터 다큐멘터리 영화 세 편을 포함하여 13편의 일본 영화를 초대했습니다. 영화제를 시작한 계기에 대해서는 “당시는 한국 영화가 해외 영화제에 겨우 초대받기 시작하던 무렵이었고, 세계에 더욱 널리 알리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전략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 아시아권 영화를 중심으로 삼기로 하고 인재 육성을 지향했다”고 말했는데, 실제로 아시아 젊은 감독의 기획을 심사하여 제작 자금을 조성하는 PPP라는 프로그램을 계속해 왔습니다.
그 결과 바이어들도 찾아오고 새로운 창작자들도 기획서를 들고 모여서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프로듀서들과 미팅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30개국·지역의 작품 174편으로 시작한 영화제가 지금은 70개국 이상, 300편 이상의 영화가 모이는 거대한 이벤트가 되었지요.
단,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나라의 위신을 걸고 개최하는 국가 이벤트이니 국위선양의 장이라는 측면이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며, 아직 세계를 향한 발신이라기보다 ‘한국인을 위한, 한국인에 의한 영화 이벤트’라는 경향이 있습니다. 초대 게스트로 가보면 솔직히 조금 멋쩍은 순간이 있습니다. 기자들의 질문도 여전히 “한국요리 중 무엇을 좋아하시나요?” “한국에서 함께 작업하고 싶은 배우는 누구입니까?” 같은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감독도 기자도 배급사도 모두 젊어서 에너지와 활기가 있습니다.
한국에는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생이 되어 한국 운동에 참가한 세대를 가리키는 ‘386세대’라는 말이 있는데, 한국 영화계는 지금 그들이 짊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봉준호 감독이나 박찬욱 감동 득 유학 경험이 있어서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모두 40대가 된 뒤 할리우드로 건너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경력에 비하면 반드시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상승 지향의 경향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점도 한국 감독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화제도 순풍에 돛 단 듯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부산 국제영화제는 재작년 세월호 사고 다큐멘터리 상영을 둘러싸고 정부와 대립하여 조성금이 깎이고 수장 교체를 요구받았습니다. 존속조차 위태로운 상황이어서 국경을 뛰어넘어 영화인들이 연대하여 영화제를 응원하기 위해 지금 항의의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저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등이 영화제를 지지하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성숙한 영화제, 국립 영화대학, 고등학교의 영화 커리큘럼, 아트하우스 조성 등 한국은 나라 전체가 영화를 떠받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일본에는 아직 그중 한 가지도 없습니다.
가령 앞서 말한 대로 국립 영화대학이 없는 나라는 선진국 가운데 일본뿐이어서 해외에서는 이를 두고 무척 놀랍니다. 일본은 영화를 문화로 여기지 않으며, 오즈 야스지로나 미조구치 겐지의 초기 단편조차 남아 있지 않습니다. 물론 영화가 단순한 ‘문화’가 되어도 재미없을 테고 영화제가 ‘국가사업’이 되어도 재미없겠지만, 한국의 최근 20년을 돌아보면 일본은 정말로 영화라는 문화를 육성시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나라인 듯해서 실망하게 됩니다.
(중략)
영화제는 배움의 장
제가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가지게 된 이유는 1장에서 쓴 대로 낭트에서 체험한 관객과의 대화가 매우 의미 있었기 때문입니다.
관객과의 대화는 비평과는 또 다른 면에서 자신의 영화가 어떻게 가 닿았는지 (혹은 가 닿지 않았는지)를 손에 잡힐 듯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외국에서는 통역이 중간에 있으니 듣는 사람을 관찰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이는 제가 영화감독으로서 단련이 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제가 국내에서 관객과의 대화를 시작한 것은 <원더풀 라이프>(1999년 작) 부터입니다. 영화 개봉 중에 감독이 극장에서 관객과의 대화 시간을 가진 것은 아마도 일본에서는 제가 처음일 것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즐거워서 했는데, 지금은 외람되지만 관객이 영화적 소양을 기르는 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이처럼 저에게 영화제란 배움의 장이기도 합니다. 특히 다른 나라의 감독들과 대화를 나누면 일본이 처해 있는 상황이 얼마나 특이한지가 보이고, 제 작품이 외국인 눈에 어떻게 비칠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인식은 20년 동안 영화를 계속 만들며 각국의 영화제에서 그들과 만남으로써 상당히 성숙하지 않았나 합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작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감독이기도한데 일본에 비판적이라고 나서기좋아하는 아베가 축하도 안해줬었음
자기객관화 개오진부분
첫댓글 역시 객관화 오지는 감독
와 글 진짜 술술읽힌다 아베저새끼는 답이없네
아니 구구절절 맞는 말이고만. 아베 존나 졸렬하네;
에휴 우리나라 환경도 썩...올려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좃본 앞에서 상대적으로 나아보이는 기적ㅋㅋㅋㅋ
일본 영화 수준 낮아서 자국민빼고 보는사람 없자나 ㅎ
일본 영화 다 똥망인데 이 사람건 볼만함
일본은 전통문화에 치중해서 그런가? 영화를 육성할 생각을 하지 않은게... 읽다가 생각난건데 일본의 장신정신이 의도나 뜻은 좋아 근데 너무 과거에 머물게 만드는것 같음 과거를 소중히 하는걸 넘어서 거기에 갖히려는것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