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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린[成石璘]의 행장(行狀) 김연지(金連枝)
독곡선생행장 獨谷先生行狀
공(公)의 휘(諱)는 석린(石璘)이요 자(字)는 자수(自脩)이며, 시호(諡號)는 문경(文景)이다. 그 선대(先代)는 경상도(慶尙道) 창녕현(昌寧縣)에서 나왔는데, 대체로 세족(世族)이었다. 공의 증조(曾祖)는 봉익 대부(奉翊大夫)에 추봉(追封)되고 판도 판서(版圖判書)에 추증(追贈)된 휘 공필(公弼)인데, 공필이 봉상 대부(奉常大夫)로서 판도 총랑(版圖摠郞)을 지낸 휘 군미(君美)를 낳았고, 군미가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 문정공(文靖公) 휘 여완(汝完)을 낳았다. 여완이 정순 대부(正順大夫)로서 밀직사 지신사(密直司知申事)를 지낸 나천부(羅天富)의 딸에게 장가들어 원(元)나라 지원(至元) 4년 무인년(戊寅年, 1338년 충숙왕 복위 7년) 12월 계사일(癸巳日)에 개성(開城)의 독곡방(獨谷坊)에서 공을 낳았는데, 공이 그 지명에 따라 독곡(獨谷)이라 자호(自號)하였다.
지정(至正) 원년 신사년(辛巳年, 1341년 충혜왕 복위 2년) 겨울에 문음(門蔭)으로써 사온승 동정(司醞丞同正)에 임명되었고 품계(品階)는 통사랑(通仕郞)이었는데, 당시 나이 막 4세였고 고려 충혜왕(忠惠王) 복위 2년이었다.
지정 15년 을미년(乙未年, 1355년 공민왕 4년) 봄에 사마시(司馬試)에 3등으로 합격하였고, 17년인 정유년(丁酉年, 1357년 공민왕 6년) 여름에 정당 문학(政堂文學) 이인복(李仁復)이 주관하던 과시(科試)에 등제(登第)하여 그해 가을 국자감 직학(國子監直學)에 임명되었으며, 그 후에 한림원 검열(翰林院檢閱)을 거쳐 삼사 도사(三司都事)로 옮겼다.
계묘년(癸卯年, 1363년 공민왕 12년) 여름에 전의시 주부(典儀寺注簿)로 승진되었고 품계는 승봉랑(承奉郞)이었는데, 현릉(玄陵, 공민왕)이 공을 한번 보고는 깊이 신임하여 서찰(書札)에 관한 임무를 전담시켰다. 고공사(考功司)ㆍ예의사(禮儀司)ㆍ군부사(軍簿司)ㆍ전리사(典理司) 등 여러 관사(官司)의 좌랑(佐郞)을 누차 거쳤고, 비어대(魚袋)를 하사받았다.
을사년(乙巳年, 1365년 공민왕 14년) 봄에 군기감 승(軍器監丞)으로 승진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으며 품계는 조봉랑(朝奉郞)이었다. 가을에 전교시 부령(典校寺副令)ㆍ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임명되었고, 품계는 봉선 대부(奉善大夫)였으니, 대체로 표창한 것이었다. 현릉이 또 “성모(成某)는 문장이 신묘하고 숙련됨이 이미 오래인지라, 지인 상서(知印尙書)가 될 만하다.” 하고 즉시 임명하였다. 겨울에 봉상 대부(奉常大夫)의 품계로 승진하였고, 그 후 2년 동안에 예의사ㆍ군부사ㆍ전리사 등 여러 관사의 총랑(摠郞)을 역임하였으며 지제교(知製敎)ㆍ보문각은 옛날과 같이 맡았다.
명(明)나라 홍무(洪武) 원년 무신년(戊申年, 1368년 공민왕 17년) 겨울에 중현 대부(中顯大夫)로서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나갔는데, 당시에 국정을 담당한 신돈(辛旽)이 공의 은우(恩遇)를 질시하여 공을 궁지에 빠뜨리려고 꾀하였으므로 현릉이 그러함을 살펴 이런 명을 내렸다가 공이 부임한 지 3개월이 지나자 소환하였다.
기유년(己酉年, 1369년 공민왕 18년) 겨울에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ㆍ예문관 직제학(禮文館直提學)ㆍ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고 품계는 중정 대부(中正大夫)였다.
계축년(癸丑年, 1373년 공민왕 22년) 여름에 위위윤(尉衛尹)ㆍ진현관 직제학(進賢館直提學)ㆍ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고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임하다가 겨울에는 전의시 영(典儀寺令)으로 옮겼는데, 춘추관 편수관과 진현관 직제학ㆍ지제교는 옛날과 같았다.
갑인년(甲寅年, 1374년 우왕 즉위년) 겨울에 밀직사 좌부대언(密直司左副代言)으로 승진하였으니, 당시의 중요한 선발이었다. 얼마 후 봉순 대부(奉順大夫)로 품계가 올랐고 좌부대언(左副代言)은 종전대로였으며, 보문각 직제학ㆍ지제교ㆍ지예의사사(知禮儀司事)에 임명되었다. 또 정순 대부(正順大夫)로 품계가 올랐고 좌부대언은 종전대로였으며, 진현관 직제학ㆍ동지서연사(同知書筵事)에 고쳐 임명되었는데 지제교와 지예의사사는 옛날과 같았다.
을묘년(乙卯年, 1375년 우왕 원년) 여름에 좌대언(左代言)ㆍ예문관 직제학ㆍ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로 승진하였는데 지제교ㆍ서연의 벼슬은 옛날과 같았다. 가을에 지신사(知申事)로 승진하면서 판전의전리사사(判典儀典理司事)를 겸임하였고, 예문관 직제학ㆍ지제교ㆍ서연의 벼슬은 옛날과 같았다. 겨울에 지신사(知申事)는 종전대로 맡으면서 우문관 직제학(右文館直提學)에 고쳐 임명되었는데 춘추관 편수관과 지제교ㆍ전의ㆍ전리ㆍ서연의 벼슬은 옛날과 같았다.
병진년(丙辰年, 1376년 우왕 2년) 봄에 밀직 제학(密直提學)ㆍ예문관 제학ㆍ상호군(上護軍)ㆍ동지춘추서연사(同知春秋書筵事)로 승진하니, 품계는 봉익 대부(奉翊大夫)였다. 무오년(戊午年, 1378년 우왕 4년) 여름, 수성좌명공신(輸誠佐命功臣)으로 칭해지고 밀직 부사(密直副使)에 제수되니, 국제(國制)에 밀직 이상에게는 으레 공신이라 칭하였다. 이해 여름 왜적(倭賊)이 송도(松都, 개성)의 근교(近郊)에 침입하여 개경(開京)이 거의 함락될 지경이었다. 이때 양백연(楊伯淵)이 원수(元帥)가 되었는데, 공은 조전 원수(助戰元帥)로 출정하였다. 여러 장수들은 모두 후퇴하여 다리를 건너와서 싸우려고 하였으나 공은 홀로 고집하기를, “만일 다리를 건너오면 군사들 마음이 둘로 갈라지게 될 것이니, 다리를 등지고 결사적으로 싸우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여러 장수들은 공의 주장을 따른 결과, 군사들이 모두 사력을 다하여 싸우니, 왜적이 과연 패주하여 돌아갔다. 이때에 사람들은 모두 공의 지략에 탄복하였다. 가을, 원수 양백연이 참소를 입어 처형되자, 공에게까지 연루되어 함안(咸安)으로 유배되었다.
기미년(己未年, 1379년 우왕 5년) 여름, 함안에서 돌아와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ㆍ진현관 제학ㆍ상호군에 임명되었는데, 품계는 옛날과 같았다. 임술년(壬戌年, 1382년 우왕 8년) 겨울, 단성익조좌리공신(端誠翊祚佐理功臣)으로 칭해지고 창원군(昌原君)에 봉해졌으며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에 제수되었다. 이후로부터 기사년(己巳年, 1389년 창왕 원년) 가을까지는 모두 이 공신호를 칭하였다. 병인년(丙寅年, 1386년 우왕 12년) 가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ㆍ상호군ㆍ진현관 제학으로 승진하였으며, 정묘년(丁卯年, 1387년 우왕 13년) 가을, 판덕창부사(判德昌府事)ㆍ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으로 승진하였는데 상호군(上護軍)은 옛날과 같았다. 품계는 광정 대부(匡靖大夫)였다. 무진년(戊辰年, 1388년 우왕 14년) 봄에 정당 문학(政堂文學)ㆍ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ㆍ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으로 승진되고 상호군(上護軍)은 옛날과 같았다. 이해 여름, 양광도 도관찰출척사(楊廣道都觀察黜陟使) 겸 감창안집전수권농관학사(監倉安集轉輸勸農管學事)ㆍ제조형옥병마공사(提調刑獄兵馬公事)에 임명되니, 이때부터 안렴사(按廉使)를 혁파(革罷)하고 양부(兩府, 문하부(門下府)와 밀직사(密直司)) 이상의 고관으로 감사(監司)를 제수하고 임금의 교서(敎書)를 받고서 부임해 가게 되었다. 가을에 소환되어 문하 평리(門下評理) 겸 판소부시사(判小府寺事)ㆍ보문각 대제학ㆍ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ㆍ상호군에 임명되었다. 겨울에 단성보절찬화공신(端誠保節贊化功臣)으로 개칭되고 종전대로 문하 평리를 맡았으며, 동판도평의사사(同判都評議司事) 겸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ㆍ진현관 대제학에 고쳐 임명되고 지춘추관사는 옛날과 같았다.
경오년(庚午年, 1390년 공양왕 2년) 여름, 지공거(知貢擧, 고시관)가 되어 이조(李慥)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가을에 단성보절찬화공신으로 개칭되고, 종전대로 문하 평리를 맡았으며, 창성군 충의군(昌城郡忠義君)에 제수되고, 도평의사사ㆍ진현관ㆍ춘추관의 벼슬은 옛날과 같았다. 이해 신씨(辛氏, 우왕과 창왕)를 축출하고 왕씨(王氏, 공양왕임)를 다시 세운 공로로 공신호를 고쳐받고 충의군이라 칭하였는데, 임신년(壬申年, 1392년 공양왕 4년) 여름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공신호를 칭하였다. 신미년(辛未年, 1391년 공양왕 3년) 봄, 삼사 좌사(三司左使)에 제수되고 나머지 벼슬은 옛날과 같았다. 겨울에 단성보절찬화정조공신(端誠保節贊化定祚功臣)으로 개칭되었으며, 삼사 우사(三司右使)ㆍ보문각 대제학으로 전임하였는데,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와 춘추관의 벼슬 및 품계는 옛날과 같았다. 이로부터 임신년 여름까지는 모두 이 공신호를 칭하였다.
임신년 봄, 대광(大匡)으로 품계가 올랐으며, 여름에는 예문관 대제학으로 옮겼는데, 춘추관의 벼슬은 옛날과 같았다. 또다시 상의문하찬성사(商議門下贊成事)ㆍ진현관 대제학 겸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옮겼는데, 지춘추관사는 옛날과 같았다. 이해 가을 우리 태조(太祖)가 새로 등극하자 예우가 더욱 높았다. 계유년(癸酉年, 1393년 태조 2년) 가을, 원로 대신이라 하여 숭정 대부(崇政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ㆍ동판도평의사사(同判都評議司事)ㆍ판호조사(判戶曹事)ㆍ보문각 태학사(寶文閣太學士)ㆍ지경연 예문 춘추관사(知經筵藝文春秋館事)에 임명되었다. 갑술년(甲戌年, 1394년 태조 3년) 가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에 임명되었는데, 도평의사사와 보문각의 벼슬은 옛날과 같았다. 을해년(乙亥年, 1395년 태조 4년) 봄, 태조의 원종 공신(元從功臣)으로 공신 녹권(功臣錄券)을 받았다. 여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고쳐 임명되었는데, 나머지 벼슬은 옛날과 같았다. 병자년(丙子年, 1396년 태조 5년) 봄, 예문 춘추관 태학사로 전임하였는데, 도평의사사와 보문각의 벼슬은 옛날과 같았다. 여름, 개성유후사 유후(開城留後司留後)로 옮겼다.
무인년(戊寅年, 1398년 태조 7년) 여름, 문하시랑 찬성사ㆍ판호조사에 임명되었는데, 도평의사사와 보문각의 벼슬은 옛날과 같았다. 가을에 종전대로 문하시랑 찬성사로서 서북면 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ㆍ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ㆍ평양 부윤(平壤府尹)을 겸임하여 나갔는데, 도평의사사ㆍ호조ㆍ보문각의 벼슬은 옛날과 같았다. 건문(建文) 원년 기묘년(己卯年, 1399년 정종 원년) 여름, 소환되어 다시 문하시랑 찬성사ㆍ판이조사(判吏曹事)에 임명되었는데, 도평의사사와 보문각의 벼슬은 옛날과 같았다. 이해 겨울, 수충익대공신(輸忠翊戴功臣)으로 개칭되고, 문하 우정승(門下右政丞)ㆍ판도평의사사사(判都評議使司事)ㆍ병조사(兵曹事) 겸 상서사사(尙瑞司事)ㆍ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ㆍ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ㆍ영경연사(領經筵事)로 승진하고 창녕백(昌寧伯)에 봉해졌으며, 품계가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특진(特進)되었다.
경진년(庚辰年, 1400년 정종 2년) 봄, 좌정승(左政丞)ㆍ판이조사에 제수되고, 나머지 벼슬은 옛날과 같았다. 여름, 동덕찬화공신(同德贊化功臣)으로 개칭되고, 종전대로 좌정승으로서 판의정부사(判議政府事) 겸 판상서사사ㆍ영예문 춘추관사(領藝文春秋館事)ㆍ녹군국중사(錄軍國重事)에 임명되었는데, 판이조사ㆍ집현전 태학사ㆍ영경연사와 창녕백의 봉호는 옛날과 같았다. 이해 가을,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슬픔과 예절을 다하고 세속에 구애되지 않았다. 신사년(辛巳年, 1401년 태종 원년) 봄, 중신(重臣)이므로 국사(國事)를 맡지 않을 수 없다 하여 기복(起復)하고 추충동덕익대좌명공신(推忠同德翊戴佐命功臣)으로 개칭되었으며,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ㆍ집현전 태학사에 제수되었다. 이해 2월, 태종(太宗)은 공이 박포(朴苞)의 난을 제거했다 하여 어서(御書)를 내려 칭찬하고, 좌명 3등 공신의 녹권(錄券)을 내렸으며, 고비(考妣)에게 관작을 추증하고 후세 자손들에게 영구히 사면이 미치게 하였으며, 전토(田土)와 노비(奴婢)ㆍ백금(白金) 및 무늬 놓은 고운 비단과 구마(廐馬)를 하사하였다.
가을, 수충동덕익대좌명공신(輸忠同德翊戴佐命功臣)으로 개칭되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로 승진하였으며, 창녕 부원군ㆍ집현전 대제학에 제수되었다. 이후로는 모두 이 공신호와 부원군의 봉호를 칭하였다. 임오년(壬午年, 1402년 태종 2년) 겨울,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ㆍ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ㆍ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로 승진하였으며, 얼마 후에는 종전대로 영의정부사로서 판개성유후사 유후(判開城留後司留後)를 겸직하여 나갔는데, 나머지 벼슬은 옛날과 같았다.
영락(永樂) 원년 계미년(癸未年, 1403년 태종 3년) 봄, 종전대로 영의정부사로서 소환되었는데, 수문전과 춘추관의 벼슬은 옛날과 같았다. 여름, 의정부 우정승(議政府右政丞)ㆍ판병조사(判兵曹事)ㆍ겸판상서사사(兼判尙瑞司事)ㆍ영경연사(領經筵事)에 제수되었다. 명(明)나라 황제가 국왕의 인장(印章)을 하사하였으므로 공은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연경(燕京)에 갔다 왔다. 갑신년(甲申年, 1404년 태종 4년) 봄, 누대의 훈구(勳舊)로서 사명(使命)을 받들고 연경에 가서 여러 번 황제의 총애하여 내리는 물품을 받아 왔다 하여 어서(御書)를 내려 칭찬하고, 창녕의 관노비(官奴婢) 5명을 주어 후손들에게 물려주게 하였다. 여름, 창녕부원군ㆍ집현전 대제학에 제수되었다. 을유년(乙酉年, 1405년 태종 5년) 가을, 영의정부사ㆍ수문전 대제학ㆍ영경연 춘추관사ㆍ세자사(世子師)에 임명되었다. 정해년(丁亥年, 1407년 태종 7년) 가을, 의정부 좌정승ㆍ판이조사(判吏曹事)로 고쳐 임명되었는데, 나머지 벼슬은 옛날과 같았다. 신묘년(辛卯年, 1411년 태종 11년) 봄,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권극중(權克中) 등 33인을 선발하였다. 가을, 전문(箋文)을 올려 직사(職事)를 면해 줄 것을 청원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갑오년(甲午年, 1414년 태종 14년) 여름, 창녕 부원군ㆍ수문전 대제학으로 전임했으며, 을미년(乙未年, 1415년 태종 15년) 겨울, 다시 영의정부사에 임명되었는데, 수문전의 벼슬은 옛날과 같았다.
경자년(庚子年, 1420년 세종 2년) 봄, 창녕 부원군ㆍ영예문관사(領藝文館事)로 고쳐 임명되었으며, 신축년(辛丑年, 1421년 세종 3년),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전문(箋文)을 올려 사은(謝恩)하였다.
공은 정당 문학 안원숭(安原崇)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검호조참의(檢戶曹參議)인 성지도(成志道)이고, 차남은 정헌 대부(正憲大夫)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을 지낸 경숙공(景肅公) 성발도(成發道)이다. 장녀는 판강릉부사(判江陵府使) 조휴(趙休)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정강군(定康君) 왕단(王)에게 시집갔다.
검호조참의(성지도)는 부정(副正) 유사명(兪思明)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을 두었으니, 현재 검공조참의(檢工曹參議)인 성귀수(成龜壽)이다. 검공조참의(성귀수)는 교도(敎導) 김수겸(金守謙)의 딸에게 장가들어 사정(司正) 성계증(成繼曾)을 낳았다. 참찬(성발도)은 참찬 문하(參贊門下) 박위(朴葳)의 딸에게 장가들어 4녀를 두었으니, 장녀는 바로 나 (김연지의) 아내이며, 다음은 감찰(監察) 김수지(金守智)와 사직(司直) 한영견(韓永堅)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일찍 죽었다.
공은 천품이 고매하고 기개와 도량이 컸으며, 학문은 천인(天人)의 원리를 연구하였고, 지식은 고금을 꿰뚫어 보았으며, 경근(敬謹)함으로 몸을 수행하여 시종 여일하고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려서 문과 급제하여 사원(史院, 사관(史館))에 있었는데, 당시 익재(益齋) 이 상공(李相公, 이제현(李齊賢))이 국사(國史)를 맡아 편수하고 있었다. 익재는 공을 한번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 공에게 편수의 업무를 일체 주관하게 하여 크게 인정해 주었다. 이후도 여러 문원(文苑, 예문관)을 거쳐 명성이 자자하니, 사림(士林)에서 모두 우러러보았다.
고려 말기에 공은 문하 평리로 있으면서 우리 태조(太祖)를 도와 사전(私田)의 폐단을 혁파하였으며, 주군(州郡)의 의창(義倉) 제도는 실로 공이 맨 처음 양광도(楊廣道)에 시행한 것으로 수많은 백성들이 큰 혜택을 입었다.
우리 태조는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공을 존중했었는데, 보위(寶位)에 오르자 총애와 예우가 더욱 융숭하여, 비록 마음이 불쾌한 때일지라도 공을 보면 대번에 노기를 거두고, 공의 말을 잘 받아들였다.
공은 태조 이하 네 왕조를 섬겼는데, 충절을 다 바쳐 국가의 시귀(蓍龜)가 되었고, 조정의 의표가 되었다. 의정부에 봉직하고 전선(銓選, 관리임용)을 맡은 것이 25년이나 되었는데, 사람들은 누구하나 공을 비난하는 이가 없었다. 성품이 평화롭고 고요하여 분분하게 변경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일을 논할 때에는 남의 의견에 무조건 따르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확고히 가졌다. 임금을 면대하게 되면 언제나 옳은 도리를 극진히 말하여 기어이 도리에 맞도록 힘썼다.
일찍이 요동(遼東)의 패잔병인 임파라실(林派羅實)이 관문을 두드리고 귀의할 것을 청해 오자, 조정에서는 모두 받아들이려고 하였으나, 공은 홀로 이의 불가함을 말하고 이해(利害)의 상관성을 극언하였는데, 그 후 과연 공의 예견과 같이 되었으니, 일에 대한 치밀한 계산이 모두 이와 같았다. 기타 시문(詩文)과 필법도 뛰어났는데, 이는 모두 여사(餘事)에 불과하다. 가정에 있을 때에는 검소하게 생활하고 가산을 증식하지 않았으며, 곤궁한 자를 구제해 주기를 좋아하고 약물 등의 하찮은 물건도 남에게 요구하지 않았으며, 청탁을 해오는 자가 있으면 모두 거절하니, 사람들이 다 칭찬하였다.
정축년(丁丑年, 1397년 태조 6년) 공의 모부인(母夫人)께서 연세가 이미 희년(稀年, 70세)이 넘었는데, 병환이 위독하여 눈을 감고 말을 못하였다. 의원이 손을 써보았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자, 공은 분향(焚香)하고 신령께 기도하며 슬피 울부짖어 거의 기절하게 되었다. 얼마 후 모부인께서 말씀하기를, “이 무슨 소리이냐?” 하고 물었다. 모시는 자가 놀라고 기뻐하며 “기도하는 소리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모부인은 “하늘이 사람을 보내어 지팡이를 주면서 ‘이것을 잡고 일어나라.’ 했다.” 하였다. 즉시 사람을 시켜 부축하여 일으키고 죽 한 수저를 먹였는데, 며칠 만에 병환이 쾌유되었다. 공의 효성은 이처럼 지극하였다.
만년에는 정무(政務)를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와 세상일에 마음을 쓰지 않으니, 나이가 많았지만 정신은 더욱 맑았다. 항상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염려하는 충정(衷情)이 그치지 않았으며 부귀 공명이 시종 여일하였으니, 옛사람에 비하면 당(唐)나라의 진공(晉公, 진국공(晉國公)) 배도(裵度)와 분양(汾陽, 분양왕(汾陽王)) 곽자의(郭子儀)와 똑같다 할 것이다. 공은 집에서 거처할 때에는 항상 양화궤(養和几)라는 나무로 된 안석에 기대 앉으셨다. 임인년(壬寅年, 1422년 세종 4년) 정월부터 체후(體候)가 약간 편찮으셨으나 크게 위독하지는 않았다. 다음 해인 계묘년(癸卯年, 1423년 세종 5년) 정월 12일인 갑오일 밤에 좌우에서 모시는 자들에게 “지금 몇시나 되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모시는 자가 “벌써 2경(二更)이 되었습니다.” 하였다. 이에 공은 양화궤에 기대어 한동안 묵묵히 앉아 계시다가 다시 잠드셨는데 조금 있다가 별세하시니. 향년 86세였다.
임금께서는 공이 별세했다는 부음을 듣고 몹시 애도하여 3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제문을 지어 치제(致祭)하였으며, 문경(文景)이란 시호를 내렸다. 예조(禮曹)에 명하여 장례를 돕게 하여 포천(抱川)의 북리(北里) 계류산(溪流山) 선영이 있는 동쪽에 예장(禮葬)하였다. 이것이 공의 공명(功名)의 시종의 대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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