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마다 여성 상품화, "예쁜 여성이 경기 보조하면 좋지 않으냐" 야구 등 각 구단들도 팬들도 긍정적 반응… 일부 팬, 경기보다 치어리더 보러 오기도기업도 '걸 마케팅' 적극 가세, 신제품 출시 행사장엔 꼭 여성모델 세워 "여성이 있어야 주목도 높아져 불가피"… 지자체까지 고추아가씨 등 미인대회 선정적 홍보행사, 국제 망신도, 삼성, 남아공서 수영복차림 모델 세웠다 "가장 부끄러운 발표회" 현지언론에 뭇매 남아공법인 책임자가 결국 사과문 게재
지난 6일 전남 영암 코리아인터내셔널 서킷에서 열린 F1(포뮬러 원) 코리아 그랑프리 결승전. 대회에 참가한 국가의 국기를 손에 들고 등장한 24명의 그리드(grid·격자무늬, 자동차 경주에서는 출발선이라는 뜻)걸이 짧은 빨간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레이싱 카 옆에 서서 포즈를 취했다. 결승전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연방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번 대회에서는 총 30명의 그리드걸이 선발됐다.
한 포털 사이트 검색 결과 F1 결승전이 벌어진 6일부터 24일까지 독일인 레이서 제바스티안 페텔의 영암 대회 우승 기사는 모두 139건이 올라왔다. 같은 기간 그리드걸 관련 기사는 111건이었다. 조연인 '걸'들이 대회의 주인공인 우승자와 비슷한 빈도로 세상에 노출된 것이다.
물론 F1 대회에서 관중의 주목을 끌기 위해 미녀를 앞세우는 것은 한국만이 아니다. 영국·일본·캐나다·헝가리 등 F1 대회 대부분이 미녀를 배치한다. 하지만 홍보 측면에서 한국처럼 '걸'들의 위력이 강하게 나타나는 곳은 드물다. 후원사의 한 관계자는 "F1에 대한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에 한국의 행사 주최자가 여성에 더 집착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남자들이 주로 찾는 자동차 전시 행사에는 어김없이 짧은 치마를 입은 예쁜 모델들이 차에 걸터앉거나 차 옆에 서서 사진 모델을 자청한다. 올해 3월 28일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2013 서울모터쇼'에서 한 남성이 차에 걸터앉은 여성을 촬영하고 있다. / 오종찬 기자
지난 7월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자동차 관련 행사. 수많은 남성이 한 블랙박스 회사 부스에 서 있는 여성 모델의 가슴과 다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성 모델의 가슴과 다리에는 블랙박스 회사의 이름이 새겨졌다. 가슴과 배가 훤히 드러나는 짧은 상의와 속옷처럼 보이는 짧은 바지를 입은 여성들이 카메라를 들이대는 남성들을 향해 갖가지 포즈를 취했다.
이날 행사장 다른 부스에서는 레이싱 모델들이 세차를 하며 춤을 추는 세차 쇼가 벌어졌다. 세 명의 모델들은 가슴을 겨우 가린 짧은 상의와 짧은 반바지가 세차 거품에 젖어들어 가는데도 남성들을 향해 윙크하며 손을 머리 위로 뻗어 춤을 췄다. 24일 인터넷에서 관련 행사의 이미지를 검색했더니 이 행사의 진짜 '주인공'인 자동차나 블랙박스 사진에 비해 야한 옷차림의 여성 사진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배트걸, 그리드걸, 마핑걸… 한국의 모든 마케팅은 '걸'(girl)로 통한다. '걸'이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았을 뿐 치어리더나 내레이터 모델 등 여성을 내세운 마케팅은 스포츠를 비롯해 우리 사회 곳곳에서 보인다. 한국은 왜 이렇게 '걸'에 중독돼 가는 것일까.
◇식기세척기 발표회의 비키니 걸들
지난 3월 삼성전자가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냉장고·식기세척기 등 신제품 발표회를 열었다. 식기세척기를 홍보하기 위한 10대 무용수들이 파란 수영복과 짧은 흰 치마를 입고 무대에 올랐다. 이들은 물병을 손에 쥐고 흔들며 과감하게 춤을 췄다. 냉장고 홍보 때에는 비키니 상의를 입은 여성들을 냉장고 옆에 세워놓았다. 미녀를 동원해 주목도를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 나왔다. 이 장면을 본 남아공의 정보통신매체 편집자 악셀 부르먼은 "이건 아니다. 나는 아직도 몸이 떨린다. 보이는가?"라며 행사장에서 무용수들이 춤추는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다. 남아공의 과학기술 전문기자 사만다 페리도 가세했다. 여성 단체 '걸 가이드'를 통해 발표한 공개서한에서 그는 "삼성, 성 차별주의자의 덫에 빠지지 마라. 주요 타깃인 여성 소비자들을 전혀 배려하지 못한 행사였다"고 비난했다.
올해 3월 13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삼성전자 신제품 발표 행사에서 6명의 어린 여성 무용수가 수영복과 짧은 치마를 입고 무대에 올라 물병을 들고 춤을 추는 모습. 현지 언론들은 "IT 신제품 발표회 중에서 가장 부끄럽고 선정적이었다"고 평가했다. / 더버지
남아공의 이런 반응은 미국 방송사 CBS를 통해 미국에도 알려졌다. 미국의 허핑턴포스트는 "삼성이 이번 사건 외에도 여성을 비하하는 듯한 홍보 방식으로 문제를 일으켰다"고 보도했다. 이 일은 삼성전자 남아공법인 마케팅 담당자 미셸 포트기터가 사과문을 게재하며 간신히 마무리됐다. 이 사례가 여성을 앞세우는 한국적 마케팅을 삼성의 남아공 마케팅 담당자가 답습한 결과인지는 불분명하지만 행사 현장인 남아공과 이를 비판한 미국의 시각에서 매우 이질적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마케팅 상품이 된 '걸'들
한국의 '걸 중독'은 이미 스포츠 전반에 깊숙이 침투했다. 요즘 프로야구에서 감독이나 야구 선수만큼 화제가 되는 건 치어리더와 배트걸이다. 두산 베어스와 넥센 히어로즈 준플레이오프 2차전이 열린 지난 9일 서울 목동야구장. 넥센 유한준 선수가 안타를 친 뒤 배트를 던지고 달려가자 길이가 한뼘도 되지 않는 반바지를 입은 '배트걸'(bat girl·야구 방망이 등을 정리하며 경기 진행을 돕는 여성)이 그라운드로 뛰어들어갔다. 남성뿐인 그라운드에 귀여운 외모의 배트걸이 올라서자 시선이 쏠렸다. 카메라를 들어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많았다. 짧은 바지는 위에 입은 반소매 티셔츠에 가려 보일 듯 말 듯했다. 금녀(禁女)의 공간인 그라운드를 누비는 배트걸은 관중의 인기를 얻어 지난달 22일 목동야구장에서 시구자로 섰다. 시구 사진은 '아슬아슬 핫팬츠 시구' 등의 단어와 함께 인터넷에 퍼져 나갔다.
한국 야구에서 배트걸을 운영하는 팀은 SK 와이번스, 넥센 히어로즈, 롯데 자이언츠, LG 트윈스 등. 배트걸과 함께 '경기장의 꽃'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치어리더도 점점 화려하고 과감해진다. 치어리더는 1982년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첫선을 보였고, 1997년 프로농구가 출범하면서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야구보다 늦게 출범한 농구 치어리더들은 야구보다 화려한 의상을 갖춰 입고 더 현란한 춤을 추면서 인기를 얻었다. 결국 야구의 치어리더들도 '화려하고 야한 치어리더' 기류에 동참했다. 이제 짧은 미니스커트나 몸에 달라붙는 원피스를 입고 격렬한 율동을 하는 치어리더를 보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다. 미국이나 일본과 달리 현재 한국 9개 프로야구 구단 모두 치어리더를 두고 있다.
조용준 야구발전실행위원(수원시정연구원 연구위원)은 "미국 메이저리그는 전광판에 뜨는 선수 소개나 응원 문구를 보면서 자유롭게 응원을 하는 문화가 일반적이지만 한국은 다 같이 노래를 부르고 율동을 하는 '떼거리 응원'이 야구장을 찾는 하나의 동기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야구·농구뿐 아니라 남성들이 관객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스포츠 경기장엔 '걸'이 빠지지 않는다. 종합격투기에서는 라운드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옥타곤걸'이 등장하고 있다. 프로배구에는 코트 위에 떨어진 선수들의 땀을 닦아내는 이른바 '마핑(mopping·대걸레질)걸', 경륜장엔 이륜 전동기를 타고 다음 경주를 예고하거나 선수들의 입장을 돕는 '경륜 레이싱걸'이 등장한다.
◇3B 중 유난히 'Beauty'에 집착
'걸'을 내세우는 문화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과거 주로 남성 통보관이 진행하던 일기예보 방송을 화려한 옷차림을 한 20대 기상캐스터들이 장악한 것은 오래전의 일이다. 자동차, 휴대전화, 레토르트 식품, 은행 예금상품, 커피 등 온갖 신제품이 출시될 때마다 기업은 제품을 젊고 예쁜 여성이 이를 든 사진을 배포한다. 지자체들은 고추아가씨(강원 양양), 사과아가씨(충남 예산), 인삼아가씨(경북 영주) 같은 '지역 특산품 아가씨 대회'를 연다. 특산품을 내세우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결국은 예쁜 여성을 뽑는 비슷비슷한 미인 대회다. 우리나라 어느 지역에서나 길거리에서 춤을 추며 치킨집이 문을 열었다거나 가전제품을 싸게 판다는 내용의 전단을 나눠주는 여성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들은 '행사 도우미' 혹은 '내레이터 모델'로 불린다.
한 대기업 홍보 담당자는 "한국 기업은 고객의 주목도를 높이기 위해 내세우는 마케팅의 '3B(Beauty·Baby·Beast)' 중 'Beauty'를 유난히 선호한다"며 "고객이 여성 모델을 선호하는 것도 이유이지만 몇 년 사이 Beauty의 공급시장이 급성장한 것도 이유"라고 말했다. 젊은 층의 3D 업종 기피, 구직난이 겹치면서 모델 아르바이트에 인력이 몰려 '걸' 모델을 다른 모델보다 훨씬 쉽게 구할 수 있는 수급 구조라는 것이다.
한국에선 익숙한 풍경이 됐지만 한국에 온 외국인 가운데에는 "길거리 곳곳에 짧은 옷을 입고 서 있거나 음악을 크게 틀고 춤을 추는 여성이 이상해 보인다"는 사람들이 있다. 일본인으로 지난해 2월 한국에 온 한국외국어대 프랑스어과 3학년 마쓰모토 유키(23)씨는 "처음 명동에 갔을 때 대낮에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배꼽을 드러낸 여성들이 길거리에 서서 전단을 나눠주는 풍경이 생소했다"고 말했다.
◇'선정성'이란 강력한 흡인력
치어리더와 배트걸을 고용해 쓰는 구단 관계자들은 "'걸'들이 관중의 눈요깃거리가 되고 미디어에 노출도 많이 되기 때문에 홍보 효과가 크다"고 말한다. 젊고 예쁜 여성의 사진이 공개되면 자연스럽게 인터넷이나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에서 눈길을 끌 수 있고 그만큼 구단 홍보 효과도 커진다는 것이다. 한 구단 관계자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보라. 배트보이보다 배트걸의 사진이 훨씬 더 많이 검색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야구 구단 관계자는 "사실 젊은 남성인 배트보이가 힘도 세고 일은 훨씬 더 잘한다. 그러나 관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그래서 팬 서비스의 하나로 배트걸을 운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주목도를 높이는 이유가 '아름다움(beauty)'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여성 모델 관련 사진을 검색하면 일반인이 찍은 사진과 함께 '숨 막히는 뒤태' '아찔한 자세' 등 자극적인 표현이 따라붙는다. 디지털 카메라와 스마트폰 보급으로 '걸'들의 선정적 장면이 예전보다 훨씬 많은 빈도로 포착되고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것이다. 한 대기업 홍보 담당자는 "'선정성'이란 강력한 요소 때문에 인터넷 시대엔 'Beauty'의 파급력을 'Beast'나 'Baby'가 절대 따라잡을 수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걸 마케팅'이 보수적 성문화와 개방적 성문화가 혼재된 한국에서 유난히 활성화된 이유도 이런 측면에서 찾아야 한다고 분석한다. 고려대 최동호 명예교수는 이런 현상을 "전통적 유교 문화와 개방적 성 문화 사이의 괴리가 불러낸 이중성"이라고 표현했다. 성적인 것을 자신이 표현하는 데는 소극적이다가도 모두가 공개적으로, 대놓고 즐길 기회가 생기면 과감해지는 특성을 시장이 '걸 마케팅'을 통해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