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사단법인 정통풍수지리학회
http://poongsoojiri.org/record.html
숭례문 화재 사건을 인연으로 이와 관련된 유영봉 교수의 옛 글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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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3월 31일. 흐렸다가 갬.
산과 들에 고운 빛의 꽃들이 도처에 피어오르는 3월의 마지막 날이다. 약속 장소에 이르자, 부슬거리던 비가 어느덧 갠다. 대기 중이던 버스 주변에 회원들이 늘어서서 반가운 인사와 담소를 나눈다. 모두가 출발을 앞에 둔 들뜬 표정이다.
이윽고 버스가 몸을 굴리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몸을 가누던 버스가 서울을 벗어나자, 곧바로 과천(果川) 땅이다. 오른쪽 차창으로 해발 632m의 관악산(冠岳山)이 육중한 자태를 드러낸다.
백두산에서 출발한 백두대간룡은 지리산(地異山)의 천왕봉(天王峰)까지 가는 중간에, 보은(報恩)의 속리산(俗離山)에서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으로 나뉜다. 한남금북정맥은 죽산(竹山)의 칠현산(七賢山)까지 달려와 다시 금북정맥을 남으로 흘러 보낸 뒤, 한남정맥의 흐름을 보이며 김포, 강화까지 달려나간다. 그런데 부아산(負兒山)과 석성산(石城山)을 거쳐 수원 광교산(光敎山; 해발 582m)과 백운산(白雲山; 해발 564m)을 지나는 한남정맥은 다시 한 줄기를 뻗어내려 청계산(淸溪山)을 솟아 올린다.
그리고 남은 힘을 몰아 다시 북진을 해서 인덕원(仁德院) 고개에서 아주 큰 과협을 한 다음, 관악산을 힘있게 세운다. 그 기운은 다시 남태령(南泰嶺)을 지난 뒤, 마침내 우면산(牛眠山)으로 용솟음을 하고 멈추었다.
관악산은 생긴 형상이 마치 관(冠)처럼 뾰족한 아름다운 바위산이라 하여, 그렇게 이름이 붙여진 산이다. 그러나 날카로운 자태로 인해, 예로부터 쳐다보기도 꺼려지는 산으로 간주되어 왔다. 풍수로 보아, 서울 남쪽에 있는 불산[王都南方之火山(왕도남방지화산)]에 해당하기 때문이었다. 삼막사가 자리잡은 바로 옆의 삼성산 또한 같은 취급을 당하였다.
조선 초기 도읍터를 정하는 과정에 있었던 무학(無學)대사와 정도전(鄭道傳)의 의견 대립은 대개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관악산을 정남향으로 바라보고 궁궐을 세우면, 관악산의 살기가 궁성(宮城)을 위압하여 국가가 평안치 않다는 무학대사의 주장이 먼저 있었다. 화기는 화재와 병란을 암시한다. 그러자 남쪽에 둘리어진 큰 강물인 한강이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아내니, 관악산을 바라보며 정남향으로 궁궐을 세워도 무방하다는 정도전의 주장이 대두하였다. 결국 궁궐은 정도전의 의견에 따라 관악산을 바라보며 정남향을 하고 세워졌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한양에 정도(定都)한 이후로 도성에는 왕자의 난과 화재가 연이었다. 그래서 풍수설에 따라 불의 산인 관악산과 삼성산의 불기를 끊는다는 비보책(裨補策)으로, 서울 남대문 바로 앞에 남지(南池)라는 연못을 인공적으로 조성하였다. 연못뿐만이 아니다. 남대문의 현판에 숭례문(崇禮門)이란 글씨도 결국 세로로 쓰여지게 되었다.
현액(懸額)의 글씨는 가로로 쓰는 것이 관례이다. 숭례문이란 현액을 세로로 쓴 것은 관악산과 삼성산의 화기가 도성으로 번지는 것을 막는다는 의미에서였다. 숭(崇)은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을 본뜬 상형문자이다. 그리고 예(禮)란 글자를 오행(五行)으로 따져보면, 이는 화(火)에 속한다. 화를 오방(五方)으로 따지면 남(南)에 해당한다. 따라서 남쪽에 불을 지른다는 뜻이 되니, 이는 맞불 작전인 셈이다.
그리고 모양으로 보아, 숭례(崇禮)라는 글자를 세로로 써야 불이 더 잘 타오를 수 있다. 그래서 활활 타오르는 숭례문의 화기로 불산에서 옮겨오는 불을 막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더욱 재미있는 사실은, 세로로 쓴 숭례문의 현판이 정도전의 솜씨라는 점이다. 결국은 정도전이 무학대사에게 지고만 꼴이 되었다.
대원군(大院君)이 집정해서 경복궁을 재건할 때의 일이다. 화재와 병란으로 계속되는 관악산의 불기운을 막아내기 위해, 대원군은 물짐승인 해태 조각상을 궁궐의 대문이나 건물의 좌우에 안치하도록 하였다. 또 관악산 꼭대기에다 우물을 판 다음, 구리로 만든 용(龍)을 우물에다 넣어서 화기를 진압토록 하였다. 관악의 주봉(主峰)인 연주봉(戀主峰)에 아홉 개의 방화부(防火符)를 넣은 물 단지를 묻은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관악산의 화기는 민간의 풍습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실례로, 서울의 양반들이 모여 사는 가회동 일대 북촌(北村)에서는, 관악산을 마주하고 있는 집에서 자라난 규수와는 혼인을 거절하기도 하였다. 주민들 역시 관악산을 마주 보는 택지를 피한다든지, 부득이한 경우에는 친정으로 가 아이를 낳는 풍습까지 있었다. 관악산을 마주 보고 자란 여자들은 불같은 성미를 지녔다고 여긴 때문이었다. 이는 불이 열정적이고 가변적이기 때문에, 관악산의 화기를 쏘인 여인은 요망스럽고 음탕하여 일부종사(一夫從事)를 할 수 없으리라고 여긴 까닭이다.
관악산의 그 서러운 숙명 때문이었을까? 과천에서 사당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남태령(南泰嶺)은 지난날 산적들이 길손의 행장을 터는 길목이기도 하였다. 서울 남쪽의 가장 큰 고개라는 뜻을 지닌 자랑스런 이름이었음에도, 산적들의 소굴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서울을 목전에 둔 진입로 남태령에서 길손들이 산적들에게 얼마나 호되게 경을 쳤으면, `서울 무서워 과천서부터 긴다.`는 속담이 생겨났을까?
그러나 산맥의 흐름으로 보면, 과천은 썩 잘 짜여진 구도를 지닌 지역이다. 앞서 언급한대로, 한남정맥의 한 가닥이 북쪽 자락으로 빠져나와 커다란 S자 모양으로 감도는 곳이다. S자의 위쪽 터진 곳에는 신도시 의왕시가 자리를 잡았지만, 과천은 일찍이 고구려 때부터 S자의 아래쪽 터진 곳에 자리를 잡아왔다. 지도를 펴고 산세의 흐름을 쫓아보면, 이를 선명하게 알 수 있다.
이렇게 포근히 자리잡은 과천 땅 한가운데로 양재천이 흐른다. 인덕원 고개에서 발원한 양재천의 맑은 물은 과천의 너른 들을 지나면서, 알곡들을 품은 대지를 흡족하게 적시고 있다. 흐름조차 정부종합청사를 넉넉하게 감싼 다정한 품새이다.
고구려 때 과천의 지명은 동사힐(冬斯 ) 또는 율목군(栗木郡)이었다. 고려 때에는 과주(果州)로 불리다가, 조선 태종 13(서기 1413)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오늘의 지명 과천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고려 때의 지명 `동사힐`의 어원을 따져보면, `돋할[日出]`로 추측된다고 한다. 따라서 이 설명을 따른다면, 과천은 해가 뜨는 마을이란 이름을 일찌감치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