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France) - 서유럽 -
▶ 개관 : 프랑스 France 위치 - 서부 유럽 인구 - 약 6,475만명 세계 23위(24,05,07) GDP - 약 2조9,234억 달러 세계 7위 종족 - 골족 (프랑스계) 수도 - 파리 (한국과 -7시간 차) 면적 - 약 64만㎢ (한반도의 2.9 배) 언어 - 프랑스語 종교 - 로마가톨릭(83%), 개신교(2%), 이슬람교 정부 형태 - 공화제 / 양원제 (대통령 / 총리) 관련 - 날씨 정보 국가번호 - 33
민족구성-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은 과거 여러 시기에 걸쳐 중동과 아프리카로부 터 지중해를 건너오거나 중앙 아시아와 북유럽으로부터 유럽을 가로질러 이주 해와 영구적으로 정착한 다양한 이민들의 후손이다. 이러한 이주 외에도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전쟁과 장기간의 이민족 점령을 겪 었으며, 특히 20세기에는 다른 대륙에서 유럽으로 몰려드는 이민들의 주요 목 적지가 됨으로써 더욱 다양한 인종들이 모이게 되었다.
▶ 약사 : 프랑스는 유럽 가운데서도 가장 복잡한 인류사를 지니고 있다.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은 최고 10만 년도 더 된 것으로, 프랑스 지방에서 구석기시대부터 정착생활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BC 1200년경에 켈트계 갈리아人이 라인 강 유역으로부터 현재의 프랑스와 이탈리아 북부지역을 향해 남쪽과 서쪽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BC 600년경에는 이오니아계 그리스인이 마실리아에 상업식민지를 건설했다. 현재의 남프랑스 지역에서 수세기 동안 번창한 많은 이오니아人 취락 가운데 가장 유명했던 이 식민지가 오늘날 마르세유로 발전했다.
BC 121년에 시작된 로마인의 갈리아 정복은 BC 58~50년 율리우스 카이사르 의 정복으로 끝났다. 갈리아는 로마 지배를 받는 동안에 철저히 로마화되었다. 로마가 쇠퇴하면서 갈리아는 게르만족의 침입을 받게 되었다. 5세기말까지는 프랑크계 살리족(支族)이 루아르 강 북쪽 지역을 점령했고, 서고트족이 아키텐 과 프로방스를, 부르군트족이 론 강 유역을 차지했다. 살리족은 6세기에 메로 빙거 왕조의 영도하에 갈리아 대부분을 장악했다.
8세기에 와서 메로빙거 왕조의 왕권이 카롤링거 왕조로 넘어갔는데, 이 왕조 의 가장 위대한 왕인 샤를마뉴는 9세기초 서유럽의 대부분까지 제국을 넓혔다. 그의 죽음은 제국의 분할을 야기했다. 843년 베르됭 조약 이후 샤를마뉴 제국의 가장 서쪽에 해당하는 영토는 프랑 키아 오키덴탈리스로 알려지게 되었다. 카롤링거 왕조의 마지막 왕이 987년에 죽자 위그 카페가 프랑키아 오키덴탈리스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카페 왕조는 처음에는 힘이 약했지만 1328년까지 존속했으며, 플랑드르·브르 타뉴·부르고뉴·아키텐을 제외한 현대 프랑스의 대부분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1328년에 프랑스의 왕위는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 6세에게 넘어갔으며, 이것이 백년전쟁(1337~1453)으로 알려진 잉글랜드와의 투쟁을 촉발했다.
이 전쟁으로 발루아 가문은 프랑스의 왕가로 확고히 자리잡았고, 잉글랜드는 칼레를 제외한 프랑스 내의 영지를 전부 상실했다. 15세기말 부르고뉴와 브르 타뉴가 발루아 가문의 지배하에 들어감으로써 프랑스의 영토는 오늘날과 거의 같게 되었다.
16세기에는 프로테스탄트 운동이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어 일련의 종교전쟁 과 내란을 야기했다. 프로테스탄트(위그노)와 로마 가톨릭교도 사이의 전쟁은 1572년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전야에 파리에서 약 3,000명의 위그노교도가 학살당하는 것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뒤이은 혼란 속에서 부르봉 가문의 프로테스탄트인 앙리 드 나바르(앙리4세) 가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결국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는 낭트 칙령(1598)을 공포하여 위그노교도에게 상당한 신앙의 자유를 허용 했다. 17세기에는 추기경 리슐리외와 마자랭 같은 뛰어난 정치가들이 국왕을 보필하여 프랑스를 유럽의 최강국으로 만드는 데 힘썼다. 부르봉 가문의 후기 왕들, 특히 루이 14세는 베르사유에 호화로운 궁전을 꾸미고 태양왕을 자임함 으로써 프랑스의 절대왕권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18세기에 막대한 비용을 들인 해외원정이 연이어 실패한 결과 프랑스 는 여러 개의 해외영토를 상실하고 거의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1789년에 일어난 혁명은 왕을 몰아내고 '인권선언'을 발표했으며 앙시앵 레짐 (구체제)을 무너뜨렸다. 프랑스 혁명은 유혈사태를 거쳐 5인 총재(總裁)의 약체 정부가 들어서는 것으로 끝났다. 정권은 이내 나폴레옹에게 넘어갔는데, 나폴 레옹은 1799~1814년에 처음엔 통령으로, 후에는 황제로 프랑스를 지배했다. 나폴레옹의 대대적인 군사원정은 1815년 그의 몰락과 함께 끝났다. 제한적으 로 복고된 왕정은 짧은 공화정 기간(1848~52)을 제외하고는 1871년까지 계속 되었고, 섬으로써 종지부를 찍었다. 프랑스는 1871년에 알자스-로렌 지방을 독일에 빼 앗겼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이곳을 되찾았다.
1940년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침략한 후 비시 프랑스의 필리프 페탱을 수반으 로 하는 친독일 정권이 수립되었다(제2차 세계대전) 드골 장군의 영도하에 '자유 프랑스'가 결성되었고, 국내에서는 레지스탕스 운동이 일어났다. 프랑스는 1944년 연합군과 자유 프랑스군에 의해 해방되었 으며, 이어 제4공화정하에 의회민주주의가 회복되었다.
제4공화국은 1950년대에 인도차이나에서 민족주의자 게릴라들을 상대로 한 값비싼 전쟁과 알제리를 비롯한 프랑스의 식민지들에서 대두한 민족주의 운동 을 감당할 수 없었다. 1958년 공직생활로 복귀한 드골은 제5공화국의 대통령 으로서 프랑스의 해외식민지들을 대부분 독립시키는 데 앞장섰다. 1981년 사 회당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프랑수아 미테랑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1988년에 재선되어 1995년 물러났다.
▶ 경제 : 프랑스는 전후부터 1970년대 중엽까지 상당 기간에 걸쳐 계속된 유례 없는 성 장으로 세계적인 경제 대국이 되었다.
이 기간에 경제구조는 농공업 대신 3차산업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 으며, 경제성장의 중심지도 북부와 북동부 지방에서 남부지방으로 바뀌고, 서부지방도 어느 정도 각광을 받게 되었다. 1947년부터는 일련의 국가경제개 발계획이 프랑스 경제를 이끌게 되었다. 4, 5년을 단위로 하는 이 계획들은 성 장 목표와 개발 전략을 부과하기보다는 지시하는 방향으로 수행되었다. 전환 기인 1944~46년에 파리국립은행(BNP)과 크레디리오네은행 등 몇 개의 대은행 르노와 같은 일부 대기업, 가스와 전기를 공급하는 공익사업체들이 잇달아 국 유화됨으로써 공공부문이 프랑스 경제에서 최초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1982년에는 사회당 정부가 국유화 정책을 대대적으로 실시한 결과 확대된 공공부문이 산업 근로자의 1/5 이상을 고용하게 되고, 신용기관의 80% 이상이 국립금융기관들의 관리하에 들어갔다.
그러나 뒤이어 수립된 자크 시라크의 보수당 정부(1986~88)는 국영기업을 대 폭 민영화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여 거의 100만 명의 고용처를 민간부문으로 돌려놓았다. 1960년대부터 노동직에서 사무직으로의 전업률이 높아졌으며, 이러한 변화와 함께 여성의 취업률이 현저하게 높아져 현재는 전체 일자리의 2/5를 여성이 차지하고 있다.
남녀를 불문하고 시간제 근로와 계약제 취업을 하는 경향도 상당히 높아졌다. 이러한 경제활동의 변동은 프랑스에서 노동조합의 지위를 크게 약화시키는 원 인이 되어 현재는 노동조합원수가 프랑스 전근로자 1/5에도 훨씬 못 미친다. ▶ 대한 관계 : 개항 이전 - 프랑스는 가톨릭을 통해서 서유럽 국가들 중 가장 먼저 조선 과 접촉했다. 1831년 로마 교황청이 조선교구(朝鮮敎區)를 창설했고, 1836년에 는 앵베르 신부를 비롯한 3명의 선교사가 잠입하여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金 大建)을 탄생시키는 등 선교활동을 폈다. 1839년 선교에 종사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이 모두 희생당한 사건(기해박해)은 프랑스가 조선에 간섭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1866년 신부박해사건이 일어나자 그해 11월 프랑스 극동함대사령관 로즈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강화도를 침략했 다(병인양요). 이 싸움은 조선 승리로 끝나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강화되었다. 개항 이후 - 1886년 6월 4일 프랑스측 전권특사 코고르당, 조선측 한성판윤(漢 城判尹) 김만식(金晩植), 고종의 외교고문관 데니 사이에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됨으로써 국교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조약을 체결한 이후에도 양국은 천주교 문제로 만만찮은 갈등을 겪었으 며, 특히 청일전쟁(1894~95) 후 프랑스는 러시아·독일과 더불어 3국간섭의 일 원이 되어, 경의선 부설권, 광산채굴권, 조선정부에 대한 차관공여 등 막대한 경제적 이권을 얻었다. 또한 조선의 농상공부 우체사무주임(우체국장, 1888년) 에 클레망세가 임명된 것을 비롯하여 철도·광산 등의 기술분야 및 법부고문에 프랑스인들이 등용되었다.
조선교구의 제8대 교구장으로 취임한 뮈텔 주교는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종현 성당(지금의 명동성당)과 약현성당을 준공시켰고 드망주 신부는 1906년 10월 19일 주간지 〈경향신문 京鄕新聞〉을 창간했다. 주한 프랑스 총영사관에 근무 한 쿠랑은 3,821권의 한국문헌을 〈조선서지〉(1896)로 펴내어 한국의 서지문 화를 유럽에 처음 소개했다. 1905년의 을사조약 체결로 한국의 외교권이 모두 박탈되고 한국·프랑스 간의 공식적인 외교관계도 끝났으나 프랑스는 주한공사관을 조선영사관으로 격하시 킨 상태로 유지했다.
일제강점기 - 프랑스의 대한정책은 원래 극동에서 팽창해가는 일본 세력을 막 아 자신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를 보존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과는 무관하게 프·일협상(1907. 6. 10)을 체결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한인들의 망명·정치 활동을 묵인했으며, 조선은 독립을 요구하 는 외교 채널로 프랑스를 이용하였다.
8·15해방 이후 - 프랑스는 1949년 2월 15일 대한민국을 정식승인하면서 국교 를 재개했고, 같은 해 4월 상주공관을 설치했다. 6·25전쟁 때는 국제연합(UN)군 산하 프랑스 지상군의 특수부대를 파견했다. 1958년 10월 10일 한국·프랑스 양국은 공사관을 대사관으로 승격시키는 등, 외교관계를 강화했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은 외교적인 면에서도 프랑스 주재 대사관을 아프리카 진출 의 교두보로 삼았다. 프랑스는 한국의 주요 교역상대국으로 1996년 현재 대한 수입 11억 9,698만 달러, 대한 수출 22억 574만 달러(원자로·전동기·철)를 기록 했다. 1989년 10월부터 한국인들의 프랑스 입국사증(비자)이 폐지되었으며, 1997년 현재 교민 1,099명, 체류자 9,643명이 거주하고 있다.
북한과의 관계 - 북한과 공식적인 수교관계는 없으나, 1984년 12월 파리 주재 북한통상대표부를 총대표부로 승격시켜 주었다.
▶ 여행 정보 : 치안 상태 - 양호 / 급연락처 : 대사관 (33-01)4753-0101 팁문화 잔돈을 남겨 놓는 것이 관행으로 호텔에서는 1~2유로가 적당 무사증 체류기간 90일, 협정 전압 : 220 / 230 / 240V 콘센트 2구 220V 콘센트 3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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