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11.(주일). 주의 말씀을 그리며 - 가정 같은 교회는 어려운 형편의 이웃들을 내 가족처럼 돌보는 교회입니다.
딤전 5:3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
딤전 5:4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성경에 나오는 참 과부라는 말은 실제로 혼자 사는 여자를 말하며, 남편이 없을 뿐 아니라 아무도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과부를 말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어렵게 사는 성도들을 잘 돌아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이 말씀은 성경이 얼마나 시대를 앞서가고 있는지 보여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디 모델에게 교회 안에서 시행되어야 할 복지제도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먼저 복지사회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 안에 핍절한 사람이 있는데도 그대로 내버려 두고 모르는 체하고 있다면 이것은 제대로 된 교회, 가정과 같은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자유인이나 노예나 차별 없이 모두 하나가 되고 같은 신분이 되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이것이 별로 실감이 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초대교회 당시에는 이것이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이었습니다. 벌써 2,000년 전에 복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 혁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현대사회에서 복지사회의 수혜자는 주로 저소득층과 실업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고대사회에서 복지사회의 수혜자는 고아와 과부였습니다.
하나 더 첨가한다면 나그네도 포함이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교회 안에 그대로인 구성원 중에서 복지사회의 수혜자를 찾는다면 과부가 우선이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과부가 제도적으로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맨 처음 생겼을 때부터 생겨난 제도입니다. 예루살렘에 처음으로 교회가 생겨났을 때, 교회에서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 바로 이 과부를 돕는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때에 따라서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고 부작용도 생길 수 있습니다. 제도의 맹점도 있게 마련이어서 그 제도의 의도와는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과부를 재정적으로 돕다 보니 혜택을 받으려고 일부러 과부가 되는 사람들도 생겨났을 것입니다. 마치 보험금을 타기 위해서 자기 발목을 자르거나 어린 아들 손가락을 자르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또 어떤 과부는 혜택을 받아서 흥청망청 유흥비로 사용하는 예도 생겨서 본래의 취지와는 맞지 않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과부의 자격을 두고 젊은 과부들은 교회 안에서 복지 혜택을 받지 못하게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가 이런 복지정책에 관해서 빨리 눈을 뜨고 도왔던 것처럼, 우리 교회도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초대교회 정신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댈 것입니다. 분명히 부족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근본 원리를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지 않다면 교회는 좋은 가정과 같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어제는 설날로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예배를 그리고 아들, 딸, 손자, 손녀의 세배를 받고 세뱃돈이 나가는 이름다운 우리 민족의 설날이었습니다.
고속도로 매표소를 지날 때마다 ‘0원입니다.’라고 나오면 ‘문재인 대통령 감사합니다.’라고 하자 아내도 감사하다며 덩달아 웃었습니다.
오네시모라는 노예요 절도범이 놀라운 복음의 사람으로 전혀 딴사람이 되는 모습을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빌레몬은 소아시아 골로새에 살고 있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재산을 훔쳐 가지고 로마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오네시모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마침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다가 붙잡혀 갇힌 감옥이었습니다.
바울은 그에게 날마다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오네시모는 감옥에서 전혀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찾아 다니며 전도하는 바울에게 집어 옆에 있는 오네시모는 전도의 특별한 대상이었습니다. 바울은 나이가 많이 들었어도 늘 전도가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사랑을 위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9)
바울은 감옥이라는 악조건의 자리에서도 언제나 전도였습니다.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10)
오늘도 새로운 주일날을 선물로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오네시모라는 노예가 귀한 복음의 전도자로 바뀐 것처럼 성도들 모두를 빠지지 않고 사랑하시어 주님의 귀한 사역자로 만드시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고 도와주고 계십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