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재현 동시집 <달팽이 사진관> 발행(소북북 아이들 011)***
|작품해설|
아이들 마음의 문이
“딸깍”
소리를 내며 열릴 것 같은 동시
이화주
(아동문학가)
1.
홍재현 시인은 2020년 시 전문지 『시와소금』 신인상으로 등단한 시인이다.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시인은 역사와 언론학을 전공했지만 다 잊어버렸다고(시인은 다 까먹었다고 표현) 썼다. 그 빈자리를 어린이 학으로, 어린이 문학으로 채우고 있다고 말한다.
시인의 첫 동시집 『달팽이 사진관』은 반짝이는 시 56편이 담겨 있다. 첫 독자가 되어 시인의 동시를 읽는 기쁨은 컸다. 빛나는 시를 가슴에 가득 품고 있는 시인을 발견한다는 것은 얼마나 기쁘고 의미 있는 일인가.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말한다.
“동시가 왔어요! 동동동! 문 좀 열어주세요!”
시인은 완전히 새로운 생명체 같은 요즘 아이들이 궁금하다고 했다. 그 아이들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지, 어느 별을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하고 궁금해서 동동동 동시로 문을 두드린다고 했다. 시인의 동시는 아이들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을까? 아이들 마음의 문이 비밀번호 없이도 스르르 자동으로 열릴까? 홍재현 시인의 시집의 문을 열자마자 그 의문은 풀린다. 그의 동시의 매력에 퐁당 빠지고 말테니까.
홍재현 시인이 아니면 쓸 수 없는 동시, 평생을 동시나라를 여행한 시인도 들어보지 않은 새로운 시, 재미있으면서도 건네야 할 메시지를 놓치지 않는 동시, 무엇보다 시인의 동시는 놀이하듯 딱 맞는 적확한 시어를 찾아내 우리 말의 풍성함과 재미와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럼 아이들의 마음의 문이 “딸깍” 열릴 것 같은 홍재현 시인의 동시 매력에 빠져보자.
2.
미지의 장소와 공간을 달리고, 날아오르는 홍재현 시인의 상상력의 동력은 무엇일까?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상상한다.
상상의 방, 상상의 정원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의 열쇠는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다. 시인의 기억, 경험, 배경지식을 섞고 흔들어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열쇠를 찾아내야 한다. 상황과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비밀번호처럼 바뀌는 열쇠. 그 열쇠는 마법처럼 손에 들려있기도 하고 오랜 시간 찾아야 하기도 한다. 꿈속에서, 기억 속에서 단서를 얻어 찾아 나서기도 한다. 시인은 생활 속 곳곳에서 그 단서를 찾아낸다. 모든 사물이 속삭인다. 이렇게 해보라고.
말똥말똥
별똥별 같은 생각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까만 밤
커다란 까만 색종이를 떠올려봐
까만 밤 한 귀퉁이를 접고
뒤집어 접고
비틀어 접고
꼭꼭 눌러 접어
까만 배를 만들어
둥실둥실 달빛 속에 배를 띄워
말똥말똥 별똥별들을 가득 태워
그리고 떠나보내
까만 밤을 접어 만든 까만 배를
―「까만 밤을 접는 방법」 전문
말똥말똥 별똥별 같은 생각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까만 밤이다. 그 생각들은 우수수 우수수 떨어지고 눈은 점점 말똥말똥해진다. ‘잠이 안 오니?’ 누군가 속삭이며 은빛 열쇠 하나 쥐어준다. ‘너만의 열쇠야.’상상의 나라로 들어가는 작은 문에 열쇠를 끼운다. ‘딸깍’ 문이 열리는 소리.
색종이로 종이배를 접던 시인의 기억과 까만 밤은 서로 손을 잡는다. 그 순간 까만 밤은 커다란 색종이가 되고 아이가 된 시인은 까만 밤 한 귀퉁이를 접는다. 뒤집어 접고, 비틀어 접고, 꼭꼭 눌러 접어 까만 배를 만든다. 달빛 속에 둥실둥실 배를 띄워 보낸다. 말똥말똥 별똥별처럼 떨어지는 생각들을 가득 태워서. 까만 밤을 접어 만든 까만 배를 띄워 보낸다.
시인은 까만 밤을 접어 까만 배를 만들어낸다. 시인은 잠들지 못하게 하는 온갖 생각들을 아름다운 별똥별이 되게 하는 상상의 힘을 갖고 있다.
색종이 접기 시간 분홍 꽃이 되고, 파랑새가 되고, 노란 나비가 되어 날아가던 색종이. 언제나 무엇이 되기보다는 남겨져 서랍 안으로 들어가던 까만 색종이. 마음속에 남아 있던 그 까만 색종이가 까만 밤과 손을 잡는다. 시인의 독특한 상상력만큼 빛나는 것은 뒤쪽으로 밀려난 것들에 대한 마음 씀 아닐까?
또 있다. 시인의 시는 짧은 동영상 같은 매력이 있다. 시어들이 말똥말똥 눈을 깜박이고 우수수 우수수 떨어지는가 하면 둥실둥실 떠 간다. 뒤집히기도 하고 비틀리기도 한다. 시인은 3차원의 세계가 아니라 사차원의 세계를 보여준다.
으르릉 철썩
어흥!
“확 끝까지 달려가 잡아먹을까 보다”
파도 호랑이가 그르릉 그르릉
바다 철창 밖 모래를 긁어댄다
푸른 호랑이가 넘실대며 기지개를 켜는 날
우린 다 죽었다
―「파도 호랑이」 전문
동시 「파도 호랑이」를 보자. 해변으로 달려드는 거친 파도에서 시인은 호랑이를 본다. 파도 호랑이가 된 화자는 “으르릉 철썩 어흥!”소리친다. “확 끝까지 달려가 잡아먹을까 보다” 을러대기도 한다. 그르릉 그르릉 철창 밖 모래를 긁어댄다. 푸른 호랑이가 넘실대며 기지개를 켜는 날 우린 다 죽었다.
동영상 보다도 더 실감 나게 이미지와 상상을 이끌어낸다. 이보다 더 실감 나게 보여주기는 쉽지 않다. 적극적인 의성어와 구어의 활용은 영상을 뛰어넘는 역동성과 우리 언어의 맛을 알게 해준다. 「파도 호랑이」는 7행의 짧은 동시이고 「메아리」는 8행의 동시다. 그중 4행이 단 한 자의 시어도 되어있다.
「메아리」는 「파도 호랑이」만큼 엉뚱하고 재미있는 상상으로 태어났다. 메아리 소리“야---호”를 낱자로 분리해 “야”와 “호”로 엉뚱한 상상을 해낸다. 야! 다섯 살 꼬마가 크게 부르니 호----- 호----- 호----- 천 살도 넘는 산 할아버지가 기가 막혀 그냥 웃는다는 상상을 해낸다.
으르렁거리는 집채 만 한 초록 호랑이로 변신하는 파도, 커다란 산 할아버지를 ‘야’하고 불러 호- 호- 호- 웃게 하는 다섯 살 꼬마까지, 눈 뜬 채 걸어 들어가는 꿈속 이미지는 풍요롭다. 잠재의식 속에 웅크리고 있던 눈에 보이지 않는 재료들이 연결되고 융합되어 눈에 보이는 이미지로 변신한다. 파란 불빛을 반짝이며 떠오른다. 유리 새가 된 시인은 수면으로 내려꽂혀 펄떡이는 물고기를 낚아채 오듯 시 한 편을 물고 나온다.
3.
홍재현의 동시는 기어가고 업혀 가고, 날아간다. 홍재현 시인은 동시집『달팽이 사진관』에서 시간에 대한 다채로운 동시를 보여준다. 속도로서의 시뿐 아니라 머무르고 곱씹는 기다림의 동시도 보여준다.
지금 여기를 사는 이들은 시간의 정확성과 빠른 속도에 길들어져 있다. 기다림은 불편한 것이고, 어떠한 비용을 치르고라도 피하고 싶어 한다.
홍재현 시인은 왜 다채로운 시간의 시를, 기다림의 시를 독자에게 건네주는 것일까?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배유가 주장했던 것처럼, 우리는 기다림을 ‘관심’, 마음 씀의 한 형태로 새롭게 사고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문방구 옆 달팽이 사진관이 문을 닫았다
처음부터 사진관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고 했다
찰칵 순간을 빠르게 찍어야 하는데 달팽이라니
찰칵 찍어서 빨리빨리 뽑아줘야 하는데 달팽이라니
수군수군 댔을 것이다
손님이 없는 시간에 졸고 있는 달팽이를 보고
쯧쯧 혀를 찼을 것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달팽이는 끊임없이 기었다
달팽이 사진관이 문을 닫았다
달팽이는 마침내 결승점을 통과했다
내가 다 봤다
―「달팽이 사진관」 전문
「달팽이 사진관」은 시인의 시집 표제 작품이다. 연을 가르지 않았다면 산문 동시라 해도 좋겠다. 디지털카메라에 밀려 사진관도 사라져가는 중이다. 그런데 그것도 달팽이 사진관이다. 찰나를, 순간을 찍어내야 하는 사진의 특징과 느림의 은유인 달팽이와는 어색한 조합이다. 화자도 처음부터 사진관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고 고개를 갸웃한다. 사람들이 수군수군댔을 것이라고, 손님이 없는 시간에 졸고 있는 달팽이를 보고 쯧쯧 혀를 찼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달팽이는 끊임없이 기었다. 달팽이는 마침내 결승점을 통과했다. 넷째 연의 첫 행 ‘그러거나 말거나 달팽이는 끊임없이 기었다’의 관용구 ‘그러거나 말거나’의 선택이 탁월하다. 사진관 이름이 어울리거나 말거나, 남들이 수군수군 대거나 말거나, 혀를 쯧쯧 차거나 말거나 달팽이는 끊임없이 기어 결국 달팽이는 마침내 결승점을 통과했다. 정신없는 질주, 1분의 기다림도 허용하지 않는 오늘날의 우리의 삶에 대해 ‘느림’의 ‘쉼’의 편에서 살짝 꼬집은 것이 아닐까? 시간이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는 것이라고.
‘내가 다 봤다.’ 마지막 연 이 짧은 한 행이 단호하고 강력하게 시인의 마음을 전달한다.
어느 날
형은 번데기가 되었다
돌돌돌
보이지 않는 실을 뽑아내어
온몸을 둘둘 감고
조용하다
번데기가 된 형은
거칠고
단단하다
아직 애벌레인 나는
오물오물 배춧잎을 씹으며
번데기가 된 형을 기다린다
언젠가 형이
배추흰나비로 날아오르면
내가 제일 먼저 보아줄라고
―「번데기 우리 형」 전문
「달팽이 사진관」이 시간의 흐름에 대한 시라면 「번데기 우리 형」과 「엄마와 어머니」, 「곁과 옆」은 머무름에 대한 시이다. 기다림에 대한 해럴드 슈와이저의 생각처럼 기다림은 보상을 주는 것인가?
어린이인 화자는 변화를 겪는 형의 곁에 머무른다. 형은 돌돌돌 보이지 않는 실을 뽑아내어 온몸을 둘둘 감고 조용하다. 번데기가 된 형은 거칠고 단단하다. 아직 애벌레인 나는 형의 곁을 지킨다. 오물오물 배춧잎을 씹으며 번데기가 된 형을 기다린다. 언젠가 형이 배추흰나비로 날아오르면 제일 먼저 보아주려고. 형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기다림의 시간, 머무름의 시간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 만이 사물 속에서 특별함을 낯섦을 보는 것이다. 번데기에서 배추흰나비로 우화하는 형의 신비하고 화려한 변신을 마주할 것이다.
「엄마와 어머니」는 단순한 말놀이 동시가 아니다. 홍재현 시인이 “엄마”와 “어머니”두 낱말에 오래오래 머무르지 않았다면 이 동시가 태어났을까? 어린이에게 엄마인 존재가 어른으로 성장한 자녀에게는 왜 어머니가 되는 것일까? 당연한 우리의 언어생활을 시인은 궁금증을 가지고 오래오래 곱씹는다. 그리고 수수께끼처럼 재미있게 비밀을 알아낸다. 아기를 폭 안고 있지. 엄마는 ㅇ과 ㅁ 안에. 아이가 자라고 ㅇ과 ㅁ이 좁아지면, 엄마는 슬며시 문을 열어 ㄴ을 만든다니, 훨훨 날아가라고 문을 열어준다니 시인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하고 재미있는 상상이다.
홍재현 시인은 한 낱말 앞에도 사물 앞에도 오래 머무르고 곱씹는다. 번데기 우리 형이 나비가 되는 시간, ㅇ과 ㅁ안에 아이가 자라면 문을 열어 ㄴ을 만드는 엄마가 어머니가 되는 시간, 울릉도 따개비가 섬 엄마 등에 업혀 ‘까짓것 까짓것’하며 바다 끝 바람살이를 하는 반만년의 시간이 그것이다. 박수와 축하 노래를 양보한 바싹 마른 검은 몸의 성냥개비의 시간 그 시간 앞에 머무른다. 시인은 아이들에게도 학교에 가는 평범한 매일이 당연하다 생각하는 그 시간이 사실은 쉽지 않은 일이란 걸 깨닫게 해 준다. 동시 앞에 머무르는 고만큼, 동시 속에 담겨 있는 아름다움을, 깨달음을 거저 얻는다고.
아기를 폭 안고 있지. 엄마는
ㅇ과 ㅁ 안에
세상 모든 것들로부터
다 지켜 줄 테야
아이가 자라고
ㅇ과 ㅁ이 좁아지면
엄마는 슬며시 문을 열어 ㄴ을 만들지
날아가렴, 훨훨
하지만 언제든 돌아와 쉴 수 있는
ㅇ과 ㅁ이 있다는 걸 기억하렴
그렇게 엄마는
어머니가 되지
―「엄마와 어머니」 전문
따개비는
바위가 엄마인 줄 안다
바위 등에 업혀서
가랑가랑 잠을 자고
포동포동 살이 오른다
울릉도에는 따개비 집들이
따닥따닥 섬 엄마 등에 업혀 있다
울렁울렁 파도가 너울져도
바다 끝 바람살이 매서워도
섬 엄마 등에만 업혀 있으면
까짓것, 까짓것이다
파도 소리 들으며
바람 소리 들으며
가랑가랑 잠을 자고
포동포동 살이 올랐다
그렇게 반만년
잘 커왔다
―「울릉도 따개비 집」 전문
4.
시인은 놀이를 즐기는 아이의 눈으로 시적 대상을 바라본다. 놀이를 즐기는 아이처럼 유추의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실생활의 문제를 풀어간다. 그래서 시인의 동시는 낯설고 새롭다. 시인의 동시는 웃음을 선사한다. 「매미」, 「위대한 자석」, 「빨래 가족」, 「와, 박태기 나무」, 「오리 엄마 오리배 엄마」…….
맴맴맴맴 매애애애애애앰
윔윔윔 위이이임 위이이이이이이이임
민민민민민민 미이이이이인
매미
위미
미미
매미기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논다
그래서 시끄럽다
원래 조용히는 못 노는 거니까
―「매미」 전문
시에서 초여름 초록 열매 같은 청량함이 물씬 난다. 시인의 ‘매미’는 그동안 우리가 만난 매미가 아니다. 누구의 안경도 빌리지 않은 홍재현 시인의 투명한 새 안경으로 바라본 매미다. 아이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매미, 아이의 귀로만 들을 수 있는 매미 소리. 새 눈과 새 귀를 갖은 시인만이 독자에게 선물할 수 있는 동시다.
시인의 동시 ‘매미’는 3연 6행으로 아주 짧다. 어려운 말이 없다. 그것도 두 개의 연이 몽땅 매미 울음소리다. 그 울음소리가 재미있다. 아니다. 울음소리라니? 매미들의 이야기 소리다. 신나서 마음껏 목청 높여 떠들며 노는 소리.
이 매미들은 끼리끼리만 모여 노는 매미가 아니다. 매미는 위미와도 미미와도 함께 논다. 똑같은 매미들이 모여와 똑같은 목소리를 내며 노는 것이 얼마나 재미없는가를 아는 매미다.
매미는 맴맴맴맴 매애애애애애앰
위미는 윔윔윔 위이이임 위이이이이이이이임
미미는 민민민민민민 미이이이이인
매미는 매미 목소리를, 위미는 위미 목소리를, 미미는 미미 목소리를 내며 신나게 논다. 그래서 시끄럽다. 원래 조용히는 못 노니까.
아이들이 시끄럽게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며 놀 때 새로운 매미, 위미와 미미가 태어난다. 이 재미있고 짧은 동시가 건네주는 메시지가 작지 않다.
텅 빈 운동장 한가운데를
걸어갑니다
혼자서 걸어갑니다
오늘은 내가 자석이 되어보겠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먼지로 오해받던 철가루 같은 친구들을
끌어모아 보겠습니다
“잡기 놀이할 사람 여기 붙어라!”
―「위대한 자석」 전문
아이들에게서 놀이가 사라져 가고 있다.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노는 운동장은 텅 비어 있다. 모래알처럼 먼지처럼 흩어져 혼자서 무언가를 한다. 문제지를 풀고 게임을 하고 스마트폰 속을 들락인다. 텅 빈 운동장을 혼자 걸어가는 화자는 말한다. 오늘은 내가 자석이 되어보겠다고 한다. 여기저기 흩어져 먼지로 오해받던 철가루 같은 친구들을 끌어모아 보겠다고 말한다. 꼬마 철학자나 과학자처럼 진지하다. 마지막 연에서 훅 웃음이 난다. “잡기 놀이할 사람 여기 붙어라!” 유쾌한 반전이다. 시인은 말한다. 아이들은 문제를 철학이 아니라 과학이 아니라 놀이로 풀어간다고.
우당탕탕
세탁기 속
빨래들이 엉켜 돌아간다
축구 하다 더러워진 내 양말
형 태권도복 속에 들어가 있고
밤늦게 오신 아빠 바지
엄마 내복을 휘감고 있다
서랍 속에 개켜놓은 빨래처럼 각자 조용한
우리 가족 대신
세탁기 속에서 빨래들이 껴안고 있다
시끄럽게
다정하게
우당탕탕
―「빨래 가족」 전문
「매미」 동시에서 매미는 매미 목소리를, 위미는 위미 목소리를, 미미는 미미 목소리를 내며 신나게 놀 듯이 「빨래 가족」도 빨래들이 세탁기 안에서 신나게 논다. 우당탕탕 세탁기 속 빨래들이 엉켜 돌아간다. 내 양말은 형 태권도복 안에 들어가 있고, 아빠 바지는 엄마 내복을 휘감고 있다. 「빨래 가족」 동시는 시인을 대신해 독자에게 말한다. 가족은 서랍 속에 개켜놓은 빨래처럼 각자 조용히 있는 게 아니랍니다. 세탁기 속에서 빨래처럼 서로 껴안으세요. 시끄럽게, 다정하게, 우당탕탕탕 놀이처럼.
5.
홍재현 시인은 지금 여기 아이들의 현주소를 다양한 관점에서 보여준다. 그 핵심을 꿰뚫는 직관과 통찰을 편편의 결구에 담아놓고 있다.
시인은 동시 「산만한 나」에서 이제는 아이들에 대한 눈높이를 바꿔주세요.라고 말한다. 선생님도 엄마도 아이를 산만하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화자인 아이는 어른들의 생각을 물구나무 세운다. 부정을 긍정으로 바꿔놓는다. “부산스럽고 어지럽게 행동하는 아이가 아니에요. 난 산만큼 키도 크고 꿈도 큰 아이랍니다.” 시인은 아이들을 대신해서 말한다.
“제발 앎을 돌에 새기지 마세요. 지금의 앎을 놓아버리고 수수께끼를 풀 듯 모름의 고개를 넘어가세요. 한 고개, 한 고개 그래서 새로운 길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새로운 연결을 만들어가세요. 가보지 않은 세계를 발견하세요. 우리는 우주 시대의 아이들이랍니다. 우주적 관점으로 바라봐 주세요.”
형용사를 보조 형용사로 바꾸어 놓은 말놀이 같은 동시가 아니다. 시인이 지금 여기 어른들에게 건네주고 싶은 메시지가 담겨 있는 동시다.
오늘 너무 기분 좋아
선생님이 나보고 산만하다고 하셨어
내가 키 크고 싶어서
어제 밥을 두 그릇이나 먹은 걸 어떻게 아셨지?
내가 산처럼 커졌나 봐
오늘 너무 기분 좋아
엄마가 나보고 산만하다고 했어
내가 드디어 꿈이 생겼거든
나는 우주 먼지가 될 거야
아주 작은 우주 먼지가 저 반짝이는 별도 되고
커다란 태양도 되는 거 알지?
일단 우주 먼지가 된 다음에 뭐가 될지는 두고 봐
나는 참 키도 꿈도
산만한 아이야
멋지지!
―「산만한 나」 전문
홍재현 시인에게는 두 자녀 사이의 정서적 심리적 간극이나 행동의 차이도 시가 된다. 동생을 홀리기도 하고 짓궂은 장난을 치는 고학년 아이를 「6학년 도깨비」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6학년 형이 된 화자는 능청맞게 말한다. 나도 0학년일 땐 동글동글했다고. 1학년, 2학년, ·, ·, ·, 6학년 되니까 머리에 까칠한 뿔 하나 뾰족이 올라오더라고. 유치원과 6학년 간의 생각의 차이는 0차원의 세계와 4차원의 세계만큼 크지 않을까?
동글동글했던 아이는 점점 학년이 올라갈수록 변화가 나타난다. 비밀의 세계를 향해 한 칸씩 사다리를 오르는 동화 속 아이처럼 화자에게도 한 학년씩 올라가며 변화가 일어났다. 마법처럼 까칠한 뿔 하나 뾰족이 올라온다.
숫자 0과 6의 모양에 대한 말놀이가 아니다. 까칠해지는 내적 변화를 꼬집고 있는 은유다.
온라인 수업을 하는 컴퓨터 화면에
우리 반 친구들 얼굴이
다닥다닥 우표처럼 붙어 있다
홍진 : 현수 : 시원 : 시우 : 민재
채은 : 승준 : 홍율 : 슬찬 : 규현
친구 얼굴 우표 한 칸 뜯어서
연습장에 슥슥 쓴 편지에 붙여서
보내고 싶다
별말 없다
십 초 만에 다 썼다
보고 싶다
같이 놀자
―「얼굴 우표」 전문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으로 전 인류는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긴 비대면의 시간을 살았다. 온라인 수업을 하는 컴퓨터 화면에 같은 반 친구들 얼굴이 우표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다. 홍진 : 현수 : 시원 : 시우 : 민재 : 채은 : 승준 : 홍율 : 슬찬 : 규현. 시인은 컴퓨터 화면에 다닥다닥 나타나 있는 친구 얼굴에서 우표를 상상한다. 친구 얼굴 우표라는 재미있는 상상이다. 아이들 곁에서 멀어진, 사라지고 있는 손 편지 쓰기를 불러낸다. ‘무슨 손 편지?’‘한 줄도 길다는 단문의 시대에?’ 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를 바라본다. 친구 얼굴 우표 한 칸 뜯어서 순식간에 연습장에 쓱쓱 써 봐. ‘별말 없다 ’‘보고 싶다’‘같이 놀자’. 자, 10초면 어떠냐고 초 단문의 시대를 꼬집기도 한다. 내 얼굴 우표나 친구 얼굴 우표를 붙인 편지 상상만으로도 재미있다. 시구가 역동적이면서 유쾌하다. 홍재현 시인의 언어 감각과 유추 감각이 남다르다. 기존의 지식 너머의 새로운 곳에 가 닿아있다.
시인은 다른 관점에서도 아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산만한 나」, 「6학년 도깨비」,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불가능, 불일치의 말과 행동을 꼬집는 동시뿐 아니다. 「방학계획」처럼 한방에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자유’의 힘을 보여주기도 하고, 「벌레박사」와 「비밀노트와 ✕✕」아이들의 호기심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유리그릇처럼 깨지기 쉽답니다.’ ‘귀한 택배처럼 조심조심 다뤄주세요.’ 「잔소리」, 「파손주의」처럼 또 다른 특성인 여리고 여린 아이들의 마음을 보여준다. 또한 「마음퍼즐 맞추기」, 「내가 구멍이라고」, 「가을, 밤의 사춘기」 같은 달의 뒷면 같은 보이지 않는 이면에도 다녀온다.
6.
아이들의 마음속에 쏘옥 들어갔다 나온 것 같은 홍재현 시인의 첫 동시집 『달팽이 사진관』의 동시를 만나 보았다.
홍재현 시인은 동시 마을로 걸어들어온 게 얼마 안 됐다. 그런데도 그의 동시를 읽고 있으면 동시들이 성큼성큼 걸어 다닌다. 때로는 날아오르는 느낌이다. 동시가 낯설고 신선하다. 황당한 공상이 아니라 시적 논리가 뒷받침된 유추와 상상이다. 동적인 묘사와 다양한 이미지를 품고 있는 동시들이 동영상처럼 실감 난다. 간결한 동시도 가볍지 않다. 지체하고 머무르면서 태어난 시들이 저마다 보석 같은 의미를 품고 있다. 핵심을 꿰뚫는 직관과 통찰을 편편의 결구에 담아놓고 있다. 지금 여기 아이들의 적확한 현주소를 다양한 관점에서 보여준다. 『달팽이 사진관』의 동시들은 어른과 어린이의 정서의 간극을 좁히면서도 아이를 따라가는 것과 이끄는 것 사이의 조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지식의 피라미드가 거꾸로 뒤집힌 지금 여기, 어른과 어린이 모든 독자가 읽었으면 하는 동시다.
“동동동 동시 배달이요.”
외치는 힘찬 발걸음은 시인의 넓은 품만큼이나 믿음직스럽다. 앞으로 시인은 어린이 독자와 멀어진 우리 동시가, 아이들 마음의 비밀번호를 찾는 일에 큰 몫을 하리라 믿는다. 홍재현 시인의 첫 동시집 출간을 축하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