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을 지나고 나니 제법 날씨가 풀렸다. 아침,저녁으로 동장군의 기세는 여전하지만 오늘은 기상캐스터들이 밝은 모습으로 오랫만에 나들이 하기 좋은 날씨가 될거라는 맨트를 마구마구 날려주신다.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 남대문시장에 있는 한순자할머니 손칼수를 먹으로 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지하철 회현역 5번출구를 빠져나가면 바로 남대문시장과 연결되어 있고 지하철 입구에서 약 50m를 직진하면 우측에 50년 전통에 빛나는 한순자 손 칼국수집이 옷가계 틈새에 자리한다.
지하철을 나서니 어디선가 고소한 냄새가 사람을 유혹한다. '호떡집에 불났다'라는 말이 왜 생겼는지 궁금하다면 이곳에서 장사진을 이루며 줄을 서 있는 모습을 보면 그 말을 실감할 수 있다.
호떡을 사려고 기다리는 동안에 세상천지의 언어들이 귓가에 들려온다. 요즘 남대문시장의 대세는 외국관광객이다. 단체로 몰려다니는 중국이나 일본관광객들의 끓임없는 재잘거림, 고맙지 뭐~~! 한국경제에 큰 도움을 주시는 분들이니...
현란하다고 표현해야겠지. 호떡을 만드는 솜씨가 '전광석화'다.
야채호떡에 찰당면과 잘게 썰어넣은 야채가 들어 있다.
시장에 오면 삶의 활력을 느끼게 된다. 나태해졌던 삶도 시장상인들의 절절한 삶의 현장을 목격하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삶에 박차를 가하게 되는 요상한 도력을 가지고 있다.
오늘 딸 민지와 함께 칼국수를 먹으러 가자고 말했지만 실상은 시장의 활기와 치열한 삶의 현장을 보여주고 싶었다.
만물상같은 시장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며 소소한 것들을 사기도 하고...
남대문시장은 나에게 추억의 장소다. 열혈청년시절에 남대문시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였기에 시장 골목 골목마다 나의 인생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세월은 흘러 약 30년이 지났지만 시장의 모습은 큰 변화없이 그 모습 그대로 사람과 사람사이를 이어준다.
남대문시장에서 50여년간 칼국수를 만들어 파는 이가 있다. '한순자 손칼국수'집이다. 이미 이곳은 많은 이들에게 남대문시장 명물로 자리하며 꽤 많은 방송출연 경력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이곳은 맛집이 아니라 삶을 이겨내기 위해 푸짐하게 채워넣어야 했던 위안의 장소였다. 50년의 전통을 가진 곳이다. 나도 벌써 약 30년 단골집이 되버렸다.
오랫만에 들르니 새삼스럽다. 칼국수집 입구에 밀려오는 손님들을 맞기위해 기본적인 그릇이 셋팅되어 있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칼국수에 들어갈 육수와 면을 만드는 곳. 마치 하얀서리가 내린것 같은...
한순자할머니 손칼국수집 앞에서 한컷.
메뉴는 단촐하다. 손칼국수와 냉면 그리고 보리밥,찰밥,국수다. 하지만 점심시간이면 바빠서 칼국수나 냉면외에는 주문이 어렵다. 이곳은 어떤 음식을 주문하더라도 냉면을 공짜로 준다.
주메뉴인 손칼국수(4.500원)를 주문하면 맛있는 냉면이 공짜이니 말그대로 '일석이조'
김치는 식탁위에 있어 마음껏 먹으면 되고 바쁠때는 누구라도 겸상할 수 있기에 마음에 준비를 해야한다.
자리에 앉자마자 냉면이 먼저 나왔다. 음식은 찬음식부터 먼저 먹고 따뜻한 음식을 먹는게 정석.
서비스로 주는 냉면이라 얕잡아본다면 오산이다. 양은 보통냉면의 절반정도 수준이며 냉면의 기본,계란 반쪽도 들어있다. 이곳 냉면의 특징은 참기름이 많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냄새만으로는 느끼하지않을까 걱정할 수 있으나 막상 면을 비벼놓고 시식해보면 맛을 내는데 참기름이 중요한 역활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면발은 탱글탱글 굿!
냉면의 뒤를 이어 칼국수가 나왔다. 그릇에 담긴 칼국수양이 엄청나다. 수영복을 안 가져온게 후회스럽다. 수영장을 방불케하는 크기와 양에 압도된다.
'냉면먹고 저걸 어떻게 다먹나'하는 걱정이 앞선다. 먼저 칼국수 국물을 먹어본다. 김가루의 고소함과 양념장과 파가 어우러진 칼칼한 국물맛이 그만이다.
칼국수면을 시식해본다. 면은 여느 칼구수집보다 굵고 거칠다. 면을 숙성시켜 탱탱함이 살아 잇는 것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실망감이 들 수 있는 맛이다. 이곳은 바로 반죽하여 생면을 사용하므로 쫄깃함보다는 시골 어머니의 손맛이라고 해야 맞다. 모양역시 직접만든 손칼수임을 감안하더라도 그리 이쁘지는 않다.
워낙에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음식을 만드는 주방은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걸 보면서도 '면에 신경써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너무 굵게 나오는 면은 좋은 식감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4.500원하는 칼국수를 이렇게 푸짐하게 먹을 수 있는 곳은 그리 흔치 않다. 면에서 약간 실망스러운 부분은 맛있는 국물과 냉면 그리고 언제나 변함없이 친절한 한순자할머니의 마음이 상쇄시켜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큼직한 유부는 맛있었다. 참고로 우리 민지의 맛평가는 " 너무 맛있는데 양이 많아서 조금 남겨야겟어요"다. 같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이렇게 평가가 엇갈린다.
나의 전적,한판승으로 싹쓸이. (약간의 불만을 가지면서도 먹을건 다먹음)
남대문시장을 한참이나 돌아다니다. 배가 꺼졌으면 남대문시장의 명물 (남대문은 명물이 무지 많다) 갈치조림이나 한그릇 먹어볼 요량으로 "민지야 배 안 꺼졌냐?" 물어보면 속모르는 민지는 "아빠는 그렇게 드시고 벌써 배가 꺼졌어요?"라고 한다. 갈치조림골목에서 빠져나와 민지배가 꺼지기를 기대하며 또 다시 남대문시장을 돌아다녀본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시장구경을 한참이나 한것 같은데 갈치조림골목에서 빠져나와 시장둘러본 시간이 겨우 20분 정도 지났단다. 하기는 점심을 거나하게 먹고 두어시간도 안지나 저녁을 대신해 갈치조림먹자고 하면 그게 사람인가.
그냥 간단하게 핫바로 때우기로 하고 덕수궁으로 놀러가기로 했다. (덕수궁 이야기는 길따라 코너에 올려 놓습니다)
남대문복원현장.
남대문시장에서 - 천하주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