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향 모르는 질주 (20)
요리가 들어오자 문사장은 학수에게 술을 따르며 말했다.
“자아, 오랜만에 건배 한 번 합시다. 꿩이랑 오리를 잡아 중국집에 가서 요리해 달라고 해 같이 먹고 마셨던 것이 어제 같은 데…, 벌써 8년이 지났어.”
“글쎄 말입니다. 별로 한 일이 없는데 세월만 가고….”
그들은 한동안 말없이 음식을 먹으며 술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학수는 문사장이 그냥 먹고 마시려고 해서 자기를 찾은 것 같지 않은데 무슨 이야기일까 궁금했지만 문사장이 스스로 먼저 입을 열 때까지 참고 기다렸다. 한참 후 문사장이 입을 떼었다.
“김부장, 엔진을 좀 아나?”
“엔진이요? 전혀 모르는데요. 저야, 차가 고장나서 보닛을 열 때 엔진을 들여다 본 것과 시멘트공장에서 킬른에 붙어 있는 비상엔진을 가끔 시동시켜 본 것 이외는 엔진을 만져 본 적도 없고…. 대학 3학년 때 내연기관이라는 과목에서 엔진에 대해 배웠는데 교과서도 없었고, 저는 시험에서 과락점수를 받아 재시험을 봐서 겨우 D학점을 받았어요. 그리고 참, 설계시간에 디젤엔진을 설계해 도면을 그려 본 적이 있군요. 간단한 계산만 하고 나머지는 견본도면을 베끼다시피 했지만…, 그런데, 왜 그런 것을 제게 묻습니까?”
학수는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문사장을 쳐다 보았다. 문사장은 생선회 한 점을 집어 입에 넣고 씹으면서 다시 한동안 조용했다.
“엔진을 만들려고 하는데 말이야….”
“엔진을요? 자동차조립을 몇 년 하시더니 누군가 엔진설계라도 해 낸 모양이지요? 몇 대나 만드실 건데요? 제가 만들어 드릴까요? 엔진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도면만 주신다면야 손가락으로 후벼서라도 만들어 드리지요.”
학수는 속으로 개인적으로 그것을 맡아 만들어 주면 돈을 잘 버는 회사라서 비싼 값을 받을 수 있겠다 생각했다.
“연간 5만 대는 만들어야 경제적으로 타산이 맞는다는구먼.”
“예에? 5만 대씩이나요? 그건 제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이야기로군요. 그렇게 많이 만들려면 전용공작기계라든가 트랜스퍼머신 같은 것이 있어야 할 텐데 저는 그런 경험이 전혀 없어요. 매달 보는 일본 기술잡지, 「기계기술」이라는 일본잡지에서 사진으로 보고 그에 대한 글이나 읽었을 정도니까요.”
“지금 대한민국에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이 있긴 있어요? 김부장은 배워 가면서 잘하지 않아? 그걸 배워 가면서 해 주지 않겠나?”
“예에? 지금 회사를 그만두고 울산자동차에 들어오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 말이야. 시멘트공장이나 건설회사에서 썩는 것보다 기계쟁이의 본고장에서 일해 보는 것이 더 낫지 않겠어요?”
“ ……………………. ”
학수는 대답을 얼른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문사장의 말이 백 번 옳다고 생각했다. 엔진공장이라면 본격적인 기계공장이다. 어려서 조그마한 철공소를 보면서 그런 공장에서 일하고 싶어 기계쟁이가 될 꿈을 가지지 않았던가? 지금도 기계쟁이로서의 일은 하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계쟁이로서는 보조적인 일에 불과했다.
“글쎄요. 해 보고는 싶지만, 저희 회사 사정도 있고 ….”
“그것은 당신만 결정하면 돼요. 한신양회에는 사장님에게 내가 얘기를 해서 양해를 구할 테니까 ….”
학수는 무엇이라고 해야 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문사장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 얼마를 받고 있지?”
“15만 원요.”
“우리는 20만 원 밖에 못줘, 그래도 되겠나?”
학수가 울산자동차로 가는 결정을 이미 한 것 같은 어투였다.
“사장님, 제가 언제 월급을 바라보고 회사를 옮겨 다닙디까? 만약 저는 간다면 엔진공장을 세우고 엔진을 생산하는 재미로 가보고 싶다는 거지요.”
이렇게 해서 학수는 결국 울산자동차로 가게 되었으며 울산자동차가 일본 히카리자동차와 기술제휴를 합의하고 아직도 계약서에 서명도 하기 전인 그 해 11월에 일본 요코하마에 있는 소형엔진 생산공장으로 사원 네 사람을 데리고 갔다. 엔진공장을 공부하고 그들 기술자 도움으로 울산자동차공장에 필요한 기계의 사양서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거기서 학수가 배운 것은 대량생산이라는 것은 한국중기에서 기계가공할 때와는 달리 소재 하나하나에 가공을 위한 줄긋기를 하지 않고 가공해서 완성된 가공품이 똑같게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고려해 소재가 만들어지고 공정을 작성하고 그 공정에 필요한 기계사양을 결정하는 것을 생산기술이라 했다. 생산기술의 기술정도는 누가 투자를 더 적게 해서 목적을 달성하느냐로 판단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되도록 적은 수의 기계, 더 적은 액수의 기계설비 투자로 좋은 제품을 만들어 내는 회사가 더 경쟁력이 있다는 말이었다.
따라서 연간 5만 대를 생산할 울산자동차가 사야 되는 기계는 연간 40만 대를 생산하는 히카리공장의 기계와 달라야 했다. 그것을 일본기술자들과 논의하면서 공정을 만들어 나가고 기계사양서를 만들어 갔다. 그것을 들고 영국에 갔던 것은 3월말이었다. 귄터와는 그 때 알게 되었던 것이다.
엔진부장이 된 학수는 산업기계설계를 2, 3년 경험한 기술자 2명과 국방부에서 운영하는 M1 소총공장 현장에서 2년 정도 경험한 기술자 3명, 그 밖에는 신입사원 5명을 받아 엔진부를 구성했다. 자기 자신도 기계가공 이외는 경험이 없었지만 모두가 엔진부품의 대량생산에는 경험이 없는 사원들만 모여 엔진부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들을 훈련시켜 가솔린엔진만 아니라 일 년 뒤에는 디젤엔진도 생산해야 했다.
학수는 우선 그들 전체에게 일본어를 가르쳤다. 그가 ELI에서 영어회화를 배웠을 때 했던 것처럼 기계공장에서 사용하는 말로 단문을 약 200개 만들어 프린트하고 녹음기로 테이프에 그것을 읽어 녹음했다. 그리고 사원들에게는 각자 자기 돈으로 녹음기를 사도록 명령했다. 회사가 사 줄 수도 있었지만 책은 자기 돈으로 사야 돈이 아까워서라도 그것을 다 읽게 되는 것을 아는 학수는 사원들에게 일본어를 배우려면 투자를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들은 학수가 녹음한 테이프를 복사해서 그것을 들으면서 프린트를 읽으며 단문을 암기하도록 했다.
「이것은 기계입니다. 이것은 선반입니다. 이것은 환봉을 깎는 기계입니다」
「이 기계로 환봉을 깎습니다. 이 기계로 실린더 헤드를 깎습니까?」
단문 200개를 외우면 기계공장에서 쓰는 용어 약 300개는 외울 수 있었다. 이것을 3개월간에 마스터하게 하는 한편, 각 사원들에게 자기가 맡을 부품의 공정에 대해 학수가 일본에서 작성했던 공정을 보면서 공부를 시켰다. 일본에 가기 전에 일본어로 자기 공정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만약 그것을 해 내지 못하는 사람은 일본에 보내지 않겠다고 위협하듯이 말했다.
사원들은 매일 죽자 살자하고 공부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에서 외국에 나간다는 것은 선택된 사람이 아니면 안될 때였다. 뿐만 아니라 기아자동차가 먼저 엔진을 생산하기 시작했지만 울산자동차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연간 5만 대의 엔진을 생산하게 되는 것이어서 젊은 사원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모두가 한국 제일의 기계가공 기술자가 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된 것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들은 요코하마에 8주간씩 파견되어 기계가공라인에 들어가 작업자들과 함께 일했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는 서툴기는 했지만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충분히 할만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기계설치와 시운전을 도와주기 위해 히카리에 요청해 파견된 일본인들의 도움을 받아 가며 직접 자기 손으로 기계의 시운전을 할 수 있었다.
75년 초여름부터 영국에 발주했던 기계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기계설치와 시운전이 시작되고 엔진생산이 본격화해서 생산라인이 안정되었던 76년 여름까지 엔진부의 사원 전체는 출근시간도 없고 퇴근시간도 없었다. 기계설치나 시운전이 예정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 끝날 때까지 이틀이고 사흘이고 잠을 자지 않고 집에도 가지 못했다.
76년 2월부터 엔진부에서 생산한 엔진을 얹은 한국 자동차, 「슈레」가 생산되어 시판에 들어갔다. 그 차는 처음에는 기아의 승용차에 밀려 주춤거렸지만 반 년이 지난 뒤부터 날개 돋친 듯이 팔리기 시작했다. 「슈레」라는 이름은 순수한 우리말 수레의 옛말인데 영어로 표기하기에는 SURE, SURAY보다 SHURAY로 하는 것이 낫겠다는 의견이 많아 지어진 이름이었다.
판매의 증가속도가 빠른 것을 안 울산자동차는 곧 확장계획에 들어갔다. 그래서 78년에는 공장의 두 배 확장이 시작되었다. 협력업체에서 공급 받던 트랜스미션과 리어액슬은 검사에서 불량품이 너무 많이 발견되었으므로 공장확장 계획에서는 그것들도 울산자동차에서 직접 생산하도록 했다.
이번에는 기계를 영국에서가 아니라 일본에서 도입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형구가 소개해 주었던 닛또상사의 아오키 마사오씨와도 자주 만나게 되었고 여러 대의 기계를 그의 회사에 발주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면 적지 않은 커미션이 형구에게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학수는 알고 있었다.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