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학당] 윤홍식의 성령과 구원 강의 31강 : 의화, 성화, 영화를 통한 영생의 길|녹취(49:59)
처음 지금 들어갈 게,
지난 시간에 마지막에 했던 단락부터 한번 다시 해볼게요.
그때 설명이 좀 미진한 것 같아서.
지금 의화, 어디쯤하고 계신지 감이 오시나요?
하도 오랜만에 하니까 소개를 해드리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이 성경 읽기는 지금 이 파트는 주제가 이겁니다.
의화, 성화, 영화를 주제로 해서 지금 의화, 성화까지 왔어요.
성화를 마무리 짓고 영화로 나가는 겁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면 또 한 파트가 끝나고,
또 다음 다른 주제로 또 넘어갈 겁니다.
주제별로 지금, 주제별로 성경의 관련 구절을 읽어보는 지금 시간이에요.
그래서 다음 파트는 천국, 예수님의 복음의 비밀은 무엇인가?
오늘 거기까지 좀 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의화, 성화, 영화라고 하는 기독교의 공부론,
공부론이자 천국에 들어가는 비결이죠.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론의 마무리 시간,
성화를 마무리 짓고 영화로 나아가는 고 대목입니다.
성화를 한번 마무리 짓는 글을 한번 읽어볼게요.
콜로새서 3장 1절에서 4절인데요,
「※ 가톨릭 성경(콜로새서 3장 1~4절)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바오로가 한 말이죠, 그러니까.
"여러분,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되었으니”
이게 뭐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되었으니’
자, 떠올려보세요. 의화, 성화, 영화,
영, 혼, 육으로 제가 항상 접근하시라고 말씀드렸죠.
영, 혼, 육 그래서 혼 중에 육만 따르는 혼, 요거를 겉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표현이에요.
그런데 왜?
영이 있는지 모르니까, 혼은.
우리 일반적으로 인간은 혼과 육이라고 생각하죠.
영혼 이렇게 얘기하지만 사실 영이 뭐냐? 모릅니다.
그냥 생각, 감정, 오감의 혼 작용과
실질적인 내가 나라고 여기는 내 몸뚱이 물질, 요거 말고 뭐가 있죠?
근데 영을 각성하게 된다는 거 이거는 성령을 각성할 때만 자기 영을 압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영이 내 영이 되셨다.
하느님이 흙으로 몸을 빚으시고 하느님의 숨결인 성령,
성령의 뜻이 숨결입니다.
숨결, 바람을 불어넣어 주셨을 때 내가 살아있는 존재,
즉 ‘혼작용을 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게 창세기죠.
이 원리대로 지금 여러분, 영이 지금 각성되지 않은 존재는
창세기적으로 볼 때 지금 어떤 존재냐면요,
창조는 돼서 살아가는데 제2의 창조가 이루어지지 않은 거예요.
어떻게 보면 제2의 창조입니다, 성령이 여러분한테 임한다는 건.
아시겠어요?
창세기에 보면 창조가 어떻게 일어나요?
이 우주에 성령이 임해 가지고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이 우리를 만들어놨는데,
지금 성령이 나한테 임했다는 걸 모르고 살아가잖아요.
모르고 살아가는 존재를 혈육의 자녀라고 하는 거예요, 혈육의 자녀.
이 육이 피와 살 아닙니까? 피와 살로 살아가는 혈육의 자녀,
피와 살 위주로 살아가는 혈육의 자녀로서의 혼이다가,
즉 겉사람으로 살다가, 영을 모르니까.
이 하느님 자리인 영을 인간은 왜 모르게 됐을까요,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원죄 때문에 그래요, 원죄 때문에.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지어가지고 하느님 하고 인간 사이에 벽이 생겼다고요.
벽이 생기는 바람에 서로 화목하게 살다가 에덴동산에서 화목이 깨진 거죠.
그래서 이게 원죄 때문에 우리는 성령을 모르고 살게 됩니다.
그래서 이 가죽 주머니 뒤집어쓰고, 육 뒤집어쓰고 고생하면서 사는,
혈육의 자녀로서 사는 이 운명에 처하게 된 거죠.
그런데 그 중간에 모세가 와서 답을 줍니다.
‘우리 다시 천국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하느님이 계시를 해 줬다.’ 뭡니까?
이 혼한테 율법을, ‘율법을 따르면 하느님이 다시 에덴동산에,
하느님 하고 다시 화목을 회복해서 에덴동산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그렇게 했는데 ‘와~’하고 지켜보니까, 또 열심히 지켜봤는데,
혈육의 자녀가 율법을 지킨다고 해서
지금 호박에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안 된다는 것처럼,
율법을 막 지켰더니 어떻게 돼요, 우리말로?
율법 지키는 고등 침팬지가 된 거예요, 그냥 고등 침팬지에서.
이건 아니거든요. 답이 안 나온다. 그때쯤에 예수님이 오셔서~
근본적으로 뭘 해결해야 돼요?
원죄가 해결이 안 됐는데 율법만 지킨다고,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과 똑같이 율법을 지킵니까?
하느님처럼 율법을 못 지키니까 천국으로도 못 가는 거예요.
왜? 천국은 하느님의 법을 지키는 사람이 가는 세계니까!
그래서 이 예수님이 근본 작업을 합니다.
원죄 소탕! 원죄를 날려 버려야만,
우리는 원죄가 날아가야만 성령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 안에 성령이 임했다는 건 여러분의 원죄가 사해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지금 의화에 해당되죠.
의화의 구원법은 뭐죠?
사도 바오로가 의화라고 불렀던 구원법은, '너의 죄를 사하노라!'예요.
무죄 선언, 의롭다 선언!
'너의 죄를 사하노라!' 이게 동시에 무슨 말이에요?
'너의 죄를 사한다.'는 게 여러분의 모든 죄를 사하는 게 아닙니다.
들으면 설레죠, '너의 죄를 사하노라!'
왜? 평소에 죄를 많이 지으니까.
아무튼 뭐 빚 탕감하면 무슨 빚이든 일단 기쁘잖아요.
채무 탕감, 뭐가 탕감되는지 모르지만 일단 기쁜데,
'너의 죄를 사하노라!' 그럼 무조건 기쁜데,
무슨 죄가 사해진 건지는 알아야죠.
뭔 죄가 사해져요? 원죄만 사해집니다.
여러분이 짓는 죄가 어떻게 다 사해져요?
여러분이 바로 잡아야지, 뿌린 대로 그건 받아야죠, 여러분!
원죄는 예수님과 그 제자인 사도들이 사해 줄 수가 있습니다.
'너희 죄를 사하노라!'
지금 사제들도 다른 죄를 사해 주면 안 돼요, 성경적으로는.
원죄만 사해줄 수 있습니다.
왜? 그 얘기는 뭐냐,
'원죄를 사하노라!' 하는 것은 '성령 받아라!'랑 같은 말이거든요.
자, 이건 뭐예요, 이게?
'성령 받아라!' 하는 이 세례가 성령의 세례입니다.
자, 성령의 세례는 사도들의 권한입니다. 해 줄 수 있어요.
예수님이 해 주신 거예요, 성령의 세례.
성령 받아라, '성령 받아라!'는 동시에 '너의 죄를 사하노라!'입니다.
죄가 사해져야 하느님 하고 다시 화목해지고 소통이 되니까.
자, 지금 이 논리 여기까지 전개되시죠?
그래서 의화라는 무죄 선언,
성령을 받아야만 확실히 죄가 사해졌다는 게 선포됩니다.
성령의 세례를 먼저 받고, 죄 사함을 받아서 성령을 진짜 받게 되면,
의로운 존재가 됩니다, 일단.
두 번째 그다음에 거룩해져야죠.
하느님의 영이 들어섰으면, 이 혼이 어떻게 해야 돼요?
성화는 당연한 작업이에요.
내 안에 영이 이제 임했어요. 하느님을 볼 수 있게 됐어요.
하느님 하고 다시 친해졌어요. 뭘 해야 돼요?
예수님 덕에 하느님과 친해졌어요. 이제 뭐 해야 돼요, 혼은?
뭘 해요, 율법 지켜야지!
이때 혼은요, 율법 지켜야 돼요, 결국.
이 율법이, 그런데 이거는 ‘유대교의 그 율법이어야 된다.’ 이건 아닙니다.
이때 율법은요, 무슨 율법이라 그래요?
신약적 율법은 복음적 율법이라고 그냥 예수님이,
왜냐하면 예수님이 ‘율법은 남김없이 지켜져야 된다.’
그런데 그럼 기존에 있던 토라, 유대교 율법 다 지키면 됩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딱 하나로 간명하게 해 줬어요.
보세요, 이렇게 얘기하셨잖아요.
‘나의 그 멍에를 메라!’ 멍에가 율법입니다, 꼭 지켜야 되는.
‘나의 멍에는 가볍다.’ 가볍다고 했죠.
기존 그 바리사이파들이 짊어지고 다닌 엄청난 멍에가 아니다.
내 멍에는 아주 가볍다. 뭡니까?
'사랑하라!'
복음적 율법은요, 간단해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한 마디입니다. 요것만 지켜라.
아니, 그 토라가 다 남김없이 구현된다면서요?
'서로 사랑하라!' 한 마디에서 나온 겁니다. 모든 율법, 기존의 모든 율법이.
거기서 가지치기하다가 오히려 본질을 잃어버린 율법들도 있었어요.
그건 예수님이 과감히 그런 율법적 전통을 무시해 버립니다.
서로 사랑하라에 위배되면 안식일도 안 지켜 버려요. 아시겠죠?
예수님이 모범을 보이신 거예요.
기존 율법 그대로 지키면 된다는 건가요?
성령 받아도 다시 도로 그 율법으로 돌아가는 건가요? 아니에요.
기존 율법은요, 제대로 이 성령적 삶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령에서 나오는 율법이 있어요.
그게 뭐냐? '서로 사랑하라!' 그 '서로 사랑하라!' 안에서,
서로 사랑함에 있어서 자명한 것은 맞는 율법이고, 규정이 돼 있지 않더라도.
서로 사랑함에 위배되면 규정이 돼 있지 않더라도 그건 죄죠.
이게 복음적 율법입니다, 성령에서 나오는.
그래서 성령에서 나온 율법을 지키는 삶을 성화의 삶이라고 합니다.
간단해요. 그 율법, 멍에는, 예수님의 멍에는 가볍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거 하나예요.
'이 계명만 지켜라!' 분명히 하셨어요.
그런데 지금도요, ‘어~’ 예수님 말씀 핑계 대 가지고,
‘토라가 다 구현된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그러니까
우리는 도로 유대교 율법으로 돌아가야 된다고 주장하는 교파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신약을 제대로 읽으시면 다 하나로,
‘서로 사랑하라! 내가 새 계명을 준다.’ 그랬어요.
이 계명만 지키면 너희들 오히려 구약의 바리사이파,
‘구약을 따르는 바리사이파보다 더 완벽하게 율법을 지킬 수 있다.’ 이 소리입니다.
아니 질적으로 달라지는 거예요, 율법이. 그것도 아시고...
그러면 이 혼이 성령의 뜻을 따르는 혼이 됐으니까 겉사람이 아니라 뭐가 됐죠?
속사람! 그리고 새사람이 된 겁니다, 새사람!
이렇게 해서 의화, 성화의 길을 걸어온 거예요.
마지막에 영화, 영화는 부활의 몸까지 얻어서 천국에 제대로 들어가서 살자!
그래서 부활의 몸 얘기하기 전에, 영적인 몸 얘기하기 전에,
지금 자, 보세요.
이 기존의 육신은 그러면 영원하냐? 아닙니다.
이 육신은 지구의 거예요, 지구의 것! 지구에 놓고 가셔야 돼요, 버리고~
살아있는 동안은 이 육신도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 잘 쓰고, 버릴 때는 확실히 버리고,
영원히 버리지 않을 부활체, 버릴 수 없는 몸, 부활체를 가지고 우리는 천국에 간다.
그래서 영, 혼, 육의 문제, 동양식 표현으로 백이라고 그랬죠.
영, 혼, 백 이게 새로운 육체, 영적인 육체가 됩니다, 영적.
부활체를 얻어서 천국 가면.
자, 영혼육이 온전하니까 이 육신은 죽더라도
새로운 육이 생겼으니까 죽음을 맛보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거예요.
분명히 육신은 죽어요. 그런데 죽음을 맛보지 않는데요. 이게 가능해집니다.
여기까지 아시면 기독교의 핵심 이론은 다 아시는 거예요.
"그러므로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되었으니",
성령 받아가지고 다시 '의화를 얻었다.' 이겁니다. 의화를 얻었잖아요!
그러니 이제는 여러분 이미,
성령 받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자, 그러면 이것도 한번, 이 주제도 생각해 보셔야죠.
우리가 아는 흔히 말하는 영생은 지금 이 중에 뭘까요?
의화, 성화, 영화 중에, 영, 혼, 육의 이런 발전 중에,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부활체를 얻는 걸 영생이라고 또 많이 주장합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는요, 지금 성령과 하나 될 때부터 영생은 시작된 거죠.
영생이 보증받습니다, 이때.
이때 이 영생이란 게 영혼육의 온전한 삶 아니겠어요?
영혼육이 영원해야 되는데,
성령은 원래 영원합니다. 그러니까 영생이에요. 성령은 원래 영생입니다.
성령과 함께 이 공명 할 혼도 영생합니다.
그리고 그 혼을 담는 그릇인 불멸의 그릇까지 생기면 더 영생이 또렷해지는 거지,
이 혼은 그런데 원래 죽는 물건인데 이 육체만 영원한 영생의 존재인가요?
아니죠. 혼도 어차피 영생이에요.
사실 혼은 따지고 보면 원래 영생입니다. 왜?
지옥 가서 굴러도 살고 있으니까 지옥에서 구르는 거 아니에요?
혼이 죽을 수 있는 물건이면 영벌에 처한다가 안 맞죠~
벌 받다 죽어버리면 되잖아요. 이해되십니까? 지옥을 가도 안 죽어요.
그러니까 혼도 원래 영생이에요.
여기서 영생이라는 말이 나오면,
여러분, 왜 영적 육체에 주목을 하게 되냐면,
어차피 사실 사람들이 알고 있어요, 이 혼도 안 죽는다는 걸.
죽는 건 뭐예요, 지금? 우리가 아는 것 중에 죽는 건 육체예요.
육체가 이제 안 죽는 육체가 생긴다가 영생의 포인트인 이유는
영혼이 원래 안 죽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이 육체의 영생이 중요한 우리가 아는 영생이라는 거고,
여러분, 웬만큼 영생 주장하는 데는 다 이게 안 죽는다고 하지 않나요,
이 육체가 안 죽는다고? 왜?
혼이 안 죽는다는 것은 여러분, ‘어이구 충격적인 데!’ 이런 분이 있어요?
‘당신 혼 사실 안 죽어!’
무신론자들은,
뭐 아니면 영혼은 당연히 죽는다고 믿었던 분들이면 좀 놀라실 수 있지만,
웬만한 분들은 사실은 윤회론도 많이 믿고 있고, 종교가 없어도.
다 윤회론 여러분 믿고 계세요.
왜? 일 안 되면 항상 그래요. ‘내 전생에 뭔 죄를 지어서 이러나?’
잘 되는 사람 보면 뭐라 그래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다 지금 암묵적으로 내생이 이어진다는 걸 전제하고 살아가고 있다니까요.
그런데 ‘영생합니다.’ 이 말이 뭐 그렇게 놀랍겠어요.
삶의 질이 중요하지, 계속 사는 게 지금 단순히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문제까지 다 포괄하면 어떻게 삽니까?
진짜로 영적인 육체까지 갖고 삽니다.
그리고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성령 받아가지고 성령의 뜻대로 삽니다.
이 세 가지(의화, 성화, 영화)가 다 영생의 중요한 부분들입니다.
그래서 이거(의화)는 예수님께서 '영생 보증'이라고 부르고,
의화만 돼도 영생에 이르는 열매라고 하셨어요, 의화만 돼도.
그러면 이게 뭐냐? 이미 열매는 맺었고,
열매가 이 세 가지(의화, 성화, 영화)만 가지고 얘기하면요,
각각의 열매도 얘기할 수 있습니다만,
자, 이걸 하나의 영생에 이르는 열매로 보면,
1) 열매가 맺혔고(의화)
2) 열매가 익어 가다가(성화)
3) 완숙하게 익으면(영화)
4) 수확이 돼서 어떻게 돼요? 천국에 가는 거죠.(영생)
천국에서 수확해 가는 개념, 아시겠죠?
이미 여기서(의화)부터 영생이에요.
자, 이런 개념이에요. 영생은 이미 왔다, 성령만 받아도.
여러분, 영원한 성령이 여러분 영혼 안에 자리를 잡았어요.
그러면 원래도 영원히 사는 이 영혼이 영원한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살면
이건 이미 기독교적으로 영생이잖아요, 그쵸?
그 영생이 이미 이루어집니다. 성령을 받았어요.(의화)
그리고 성령처럼 거룩해지기까지 했어요. 이미 영생이에요.
영생이 점점 심화되가는.(성화)
그러다가 영적인 육체까지 얻었대요.
아주 훌륭한, 영원한 그릇까지 얻었대요.(영화)
영생이 영혼육에 있어서 온전해지는 과정이에요.
그러니까 의화만 돼도 이미 영생이다.
여러분이 의화만 이뤄도 예수님께서 보장을 해주는 거예요.
당시 유대인들은요 보장이 조금 길어요. 왜 그러냐 하면,
유대인들은 언제 우리가 다 부활한다고 믿고 있냐면요,
이렇게 영적인 육체까지 얻어서 부활하는 날을 하나 정해 놨어요, 유대인들은.
언제? 부활의 날, 그 심판의 날이라고 할 때 부활에요.
심판의 날 때 부활한다고 다 유대인들은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수시 합격생이 지금 유대인들 머릿속에 있어요, 없어요?
없어요. 정시만 있어요. 정시는 언제예요?
심판의 날 때 시험을 봐요. 수시 개념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신약에 수시 개념을 집어넣어요. 아시겠어요?
수시로 입학할 수 있다, 천국에. 입성할 수 있다. 어떻게?
내가 살아서, '내가 지금 얘기하는 거를 살아서 믿고 따라버리면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 바로 천국 갈 수 있다는 길을 열어 버립니다.
그래도 혹시 못 가는 사람은 어떻게 하겠다구요?
내 말을 듣고 열심히 따라 하는데 못 간 사람들은
뭐 몸뚱이는 무덤에 있지만 영혼은 천국에 이미...
자, 보세요. 이 의화 하나만 살펴볼까요?
의화를 얻으면 영혼은 천국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이분 내면에는 이미 천국이 들어섰기 때문에.
성령이 이미 임해 있는 영혼이 어디 어두운데 가 있을 수 있나요?
지옥에 가 있을 수 있나요?
천국 쪽에 있겠지만, 그래서 제가 천국 영주권자라고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분 육신은 어디에 있어요?
영혼은 천국에 있겠지만 육신은 무덤에 누워 있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나중에 심판의 날 때 내가 무덤에다가 소리를 지를 테니
무덤에서 내 말을 듣고 살아 나와라.
영생, 영적인 육체까지 얻게 해 주겠다.’
‘의화를 얻고 죽은 사람들은
나중에 심판의 날 때 영적인 육체까지 얻게 내가 도와줄게.
무덤에서 내 목소리를 듣는 날이 올 것이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철저히 유대인들의 관점을 존중해 주는 거예요, 이런 얘기하실 때는.
예수님의 더 하고 싶은 얘기는 뭐예요?
지금 살아서 천국을 침략하라예요. 천국 가라는 거예요.
의화건 성화건 영화건 얻어서, 천국을 보세요~
이미 천국을 침략해 들어갔습니다. 한참 침략해 들어갔습니다.
아예 천국을 정복했어요.
자, 의화, 성화는 천국을 침략해 들어가는 개념이면,
영화는 이미 천국의 당당한 통치자가 됐기 때문에
제대로 천국을 정복해버린 셈입니다.
천국의 영주권자로 들어가서 시민권 따고, 이게 침략입니다.
나아가서 정복해 버려라. 천국의 통치권자가 돼라.
그러니까 살아서 지금 여기서 그렇게 하라.
그리고 그런 자기 제자들도 바로 천국에 입성시켜 버린 게 뭐냐면,
자기 제자를 키워 놓고 요한복음에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 제자들은 살았을 때요, 예수님 살아 계실 때!
‘내 제자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아버지!' 하고 기도합니다.
이 양반들은 다 지금 어디로 보내 버린 거예요? 천국으로.
일론 머스크가 화성 이주 계획할 때 저희는 몇 년 안에 저희가 천국 이주계획,
‘지상 천국에 백만천만이라도 이주시키고 싶다.’ 이런 농담한 적이 있는데,
예수님 때 이미 자기 제자 12명을 이주시켜 버렸어요.
그래서 나중에 오순절 때 성령 받는 거는 보여주기 위한 사건이지,
이미 사실은 성령 받아서, 뭐 아주 완벽하게 의화가 안 이루어졌더라도
이미 성령은 받은 양반들입니다.
성령만 받아도 예수님이 뭐라고 한 거예요?
'이 사람들은 이미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미 천국 쪽 소속입니다.’ 하고 질러 버리신 거예요.
아미타불 정토사상에서 참나만 봐도 그냥, 참나의 안주가 안 되고
‘참나만 봐도 정토 소속이다.’라고 질러 버리듯이,
예수님도 ‘내 제자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처럼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한테 박해도 받고 할 겁니다.’
이걸 요한복음 때에 혼자 기도하실 때 다 해요,
내 제자들의 처지에 대해서 걱정하면서.
그리고 ‘이 제자들이 앞으로 땅에서 엄청난 사역을 할 거다.’
이런 기대도 하시고. 아시겠죠?
그래서 조금 이런 얘기, 지금 제가 오늘 드리는 얘기만 잘 이해하셔도
기독교에 있어서 지금 누구보다 투철한 구원관을 갖게 되십니다.
성령을 통한 구원, 제 강의 주제에도 또 딱 맞죠. 성령을 통한 구원!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 아무리 열심히 진짜 호박에다가 진짜 멋지게 줄을 그어도
‘우와~ 호박에다가 진짜 멋지게 줄 그었네!’라고 합니다.
수박이라고 안 해요. 아시겠죠?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율법으로 아무리 멋있게 우리를 외식, 겉만 꾸며도
본질이 안 바뀌어요. 본질이 뭐예요?
하느님 사람이 아니거든요. 성령이 임해야만 하느님 사람입니다.
요 얘기 하나 해 드리까요? 사도 바오로가 한 얘긴데요,
나중에 또 해드릴 건데, 고린토 2서에 나온 글입니다.
“그대들 믿음을 점검해 보라.
그대들이 지금 그대들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지 점검해 보라.
그래서 자명하게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다는 걸 알 수 없다면
그대들은 버림받은 자이다, 실격자이다.”라고 얘기합니다.
살벌하죠, 바오로가.
한 명이라도 더 천국 가자고 노래 불러야 할 바오로가 매정한 얘기를 할 때는요,
가짜, 가짜 합격생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다 합격했다고 주장하는 가짜 천국 거주자들이, 영주권자들이 너무 많으니까
‘진짜 니네 증서 있어?’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니네 지금 천국의 확실히 들어갔어?’
‘증거가 뭐야?’
‘그리스도가 그대 안에 지금 거주하고 계셔? 확실해?’
번역에 따라서요, ‘실감 나게 아는가?’ 이렇게 번역하는데도 있는데,
저는 아마 ‘자명하게 아는가?’ 이렇게 번역할 것 같습니다만,
다른 성경 한번 찾아보세요, 고린토 2서 그 마지막 장일 거예요.
13장인가? 마지막 장에 그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 안에 확실히 그리스도가 거주한다는 건 성령이 거주한다는 거예요.
성령이 거주해야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할 수 있으십니다.
왜?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할 수 있는 원리는
한 성령이기 때문에 그래요, 한 성령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우리가 한 성령이기 때문.
또 미리 그려놓고 조금 있다 설명 자세히 드릴게요, 여러분.
제가 잘 그리는 그림인데 낯서시죠? 요즘은 잘 안 그렸던 것 같아요.
성령, 한 성령입니다.
자, ‘A’라는 인격체와 ‘B’라는 인격체의 개성이 다릅니다만,
에고가 다릅니다만, 성령은 한 성령입니다. 요 끈이 안 보여서 그렇죠.
여러분과 저는 지금 끈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한 성령, 한 성령이 우리 안에서 작동하거든요.
하느님의 성령이 둘일 수 있습니까, 하느님이 한 분이신데?
성령은 하느님의 영인데?
하느님의 영이 A라는 인격을 통해서 표현될 때는 여기서 지금 표현되는 거고,
B라는 인격을 통해서 표현될 때는 이런 식으로 표현될 뿐입니다.
한 뿌리예요, 한 뿌리.
그리스도와 한 뿌리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또 내 안에 거하는 원리는요, 내가 성령을 찾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는 사실 내 성령의 온전한 발현이시기 때문에,
내 성령이 온전히 발현되면 그리스도인 거예요.
그래서 내 성령을 찾았기 때문에 ‘내 안에 그리스도가 거하신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와 성령이 한 덩어리가 돼서 내 안에 거하십니다.
자, 보세요. 왜 그러냐면, 여러분이 성령을 찾았어도 여러분의 성령이
여러분을 통해서는 그렇게 전지전능한 역사를 잘 못 하실 거예요.
지혜와 사랑과 능력을 온전히 구현하시려면 그 그릇이 청정해야 되거든요.
청정한 그릇 속에서 성령이 온전히,
그 혼과 육의 그릇 속에서 성령이 온전히 발현된 존재가 누구예요? 예수님이요.
그러면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뭘 할 수 있어요?
예수님이란 인격이랑 나랑 별개의 인격이란 측면을 빼고,
예수님을 보면 내 성령이 여기서 온전히 꽃 피운 게 예수님이에요.
왜? 예수님은 성령의 뜻대로 말하고 행동하시는 분이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내 안에 있는 성령이 어디까지 가능한지는 예수님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내가 성령님, 성령님한테 기도합니다.
‘성령님 절 인도해 주세요.’ 할 때,
예수님 이름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기도드리는 이유는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기도합니다.
성령님 저를 인도해 주세요.’ 이렇게 예수님을 통하는 이유는요,
성령님은 사실은 우리가 영이시기 때문에 못 보고 못 들어요.
'성령님!' 할 때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성령님을 영접하면,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지혜와 사랑과 그 능력이 성령님 거라는 거 압니다.’
하고 성령님한테 비는 거예요.
그러면 이 성령님하고 나 사이가 훨씬 자명해지고,
나를 통해, 결국 나를 통해 펼치는 그 전지전능함이
예수님을 통해서 구현되었던 그 전지전능함과 사랑, 자비기 때문에
‘나를 통해서 성령님이 역사하실 겁니다.’ 그냥 이렇게만 해도 되는데
굳이 예수님을 통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통해,
온전히 예수님한테 성령님이 아주 제대로 쏘신 걸 제가 잘 압니다.
쏘시는 능력이 있는 것 제가 익히 예수님을 통해 알았습니다.
예수님 한테 쏴주셨던 것처럼 나를 통해서도 표현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한테도 쏴주시기 바랍니다.’ 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왜 성자와 성령을 함께 자꾸 묶어서 얘기하느냐, 성경에서는?
성령은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에요.
예수님만이 온전히 보고 들으셨어요.
그럼 온전히 보고 듣고 이미 표현해준,
성령을 온전히 이 땅에 드러내 준 인간이 계셨기 때문에
그 인간을 통해서 기도하는 거죠.
예수님은 동시에 인간이면서 하느님이죠. 왜?
인격적 측면에서 나랑 별개로 인간이고요,
신성의 측면에서 성령이 온전히 드러난 인간이니까
성령이 인간의 모습으로 드러난 존재가 예수이기도 한 겁니다.
이게 후대로 오면 신성을 더 강조하면 이쪽을 보겠죠, 안쪽을.
인성을 강조하면 바깥쪽으로 보겠죠.
그래서 이 두 모습을 다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만 그런 게 아니라 만약에 여러분도 성령을 온전히 구현했다면
여러분도요, 사실은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에요.
왜? 여러분을 통해 성령이 온전히 드러났기 때문에.
이 땅의 하느님이 온전히 구현하신 모습이 여러분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셨던 거예요, 역사적으로. 이해되시죠?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하느님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령의 진리세요.
동시에 예수님은 나랑 또 별개의 하나의 인격체이시죠. 이 느낌 오시죠?
기독교 삼위일체론에 제가 반대하는 게 있어요.
기독교 삼위일체론은요,
이 성령의 근원인 성부 그리고 성령, 성령의 인격적 표현인 이 성자,
밖으로 이렇게 드러나신 이 성자를 ‘원래 하나다.’
근데 제가 말씀드린 대로 말씀들을 이해하면 하나라는 게 이해되지 않으세요?
성령은 성부의 영이죠. 성부의 영이고,
성령의 뿌리가 성부고, 성령이 밖으로 온전히 드러난 존재가 성자입니다.
이렇게 하면 삼위일체가 이해되시죠?
원래 하나다. 하나!
그런데 기독교 삼위일체론의 문제가요,
‘성부도 인격체고, 성자도 인격체고,
성부, 성령, 성자가 각각 별개의 독립된 인격체이면서 하나다.’라는 걸
주장하려고 해요. 꽝입니다.
그 몇천 년 묵은 학설이 있다 하더라도 꽝입니다.
왜? 성부랑 성령은 인격이 아니세요.
인격적 하느님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의 형제기 때문에 우리도 인격적인 하느님이에요, 사실.
그래서 예수님이 신들이라고, 인간을 신들이라고 부르는 구약의 그 시편인가요?
그 인용해 가지고 유대인들한테도 설교하시고 한 거예요.
'니네도 사실 신이다.'
지금 교회가 꼬이는 이유가요,
‘성부 아버지 하느님’, ‘성령 하느님’하고 독자적인 인격이라고 생각하세요.
여기다 각각 인격을 입혀 버리면요, 완전 꼬여버립니다.
그런 삼위일체를 주장하면서,
그냥 한 하느님의 세 모습인 거예요. 이해되세요?
한 하느님의 본체 성부, 하느님의 시공 안에서의 작용,
시공을 초월한 본체 성부,
시공 안에서의 작용 성령,
시공 안에서의 작용 중에 인간의 모습을 통해 표현된 성령, 성부가
성자가 되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이렇게만 이해하시면 아무 문제도 없고 이해하기 하나도 어려울 게 없는데
여기 다 각각 인격을 입혀 버리고 이해하려니까 대가리가 빠게지죠.
그래서 삼위일체만 가면 다 이렇게 막 *아스트랄합니다,
머리가 그걸 이해하려고 하면.
「*아스트랄(astral): 인터넷언어. 뭔가 있어 보이면서도 찰진 어감으로
2000년대 초반에 게임계/판타지 소설계를 중심으로 퍼졌던 유행어.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매우 심오한 무언가를 지칭하거나,
황당하고 엽기적이거나, 병맛이거나, 고약한 무언가를 가리킬 때,
혹은 4차원을 뛰어넘는 정신줄을 놓는 상황에서도 사용한다.
소위 대략 조타가도 조치 안타라는 말이 아스트랄에 직면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나무위키-
내가 지금 하는 말이 내가 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하면서 얘기하게 돼요.
삼위일체로만 가면 다 꼬여 버리는 게, 왜?
말이 안 되는 소리를 말로 하려니까 이해가 안 되죠.
성경에 그런 게 어딨어요. 자기들의 해석이지, 나중에.
신학자들의 해석한 거지 성경에 무슨 삼위일체론 복잡하게 나온 게 어딨어요?
지금 제 얘기만 이해하시면 성경 읽는데 아무 지장이 없고,
성경 읽는데 오히려 도움이 되실 겁니다.
제 식으로만 설명한 내용만 가지고 성경을 읽으시면 성경이 자명해지는데,
지금 후대 신학자들은 삼위일체론 갖고 성경 들어가면
알던 구절도 꼬여 버려요. 잘 알던 것도 낯설어질 겁니다.
자, 이게 핵심입니다.
한 하느님의 세 모습입니다.
인간의 하느님 모습, 이해되시죠?
우주적 하느님의 모습!
온 우주의 본질로서의 하느님의 모습!
그러니까 구약의 하느님 하고는 별개로 보세요.
왜? 구약은 이스라엘인들이 왜곡시킨 하느님이에요.
인간적인 모습으로 왜곡해서 이해해요.
질투하고 분노하고 사죽(규범표기:사족)을 막 명하는...
신약에서는 그런 하느님이 사라집니다.
신약에 오시면 예수님이, 인격적 하느님을 예수님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하느님은 영이시다.’로 딱 승격돼버리고, 본 자리를 찾아요.
그래서 제가 구약을 보지 마시라고, 함부로.
구약에서 진리를 캘 정도 되려면 성령의 눈으로 봐야 돼요.
내가 성령의 눈이 아닌데, 바로 인간적인 눈으로 들어가 버리면
유대인들의 왜곡된 고정관념을 또 같이 받아야 돼요.
몇 천년 묵은 고정관념을 또 받아서 내가 이해하게 돼요.
그래서 신약을 보시라는 게, 신약의 그런 게 연결이 되는지 보시면
신약에서는 다 배제됩니다.
구약에서 나온 여호와의 이상한 인간적인 모습이 다 배제됩니다.
요한복음에서 뭐라고 하냐, 시작부터.
‘하느님은 영이시다. 아무도 본 사람도 없고 그 말을 들은 사람도 없다.
예수님만 유일하게 하느님을 온전히 구현하신다.’ 하고 시작해요.
그게 다 끊어 버리는 겁니다. 기존 구약을 다 끊어버립니다.
왜? 모세는 하느님을 봤어요.
모세도 부정하는 거예요, 그거 본 거 아니라는 식으로 쳐 버리면.
다 쳐 버립니다. 왜?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예수님 말고는 못 봤다!’
이게 단절을 사실은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모르고 읽으면,
‘신약이 그냥 예수님 짱이란 얘기구나!’ 이렇게 이해하시면 안 돼요.
그 기존의 전통 중에 자명하지 않은 건 다 쳐낸 겁니다.
예수님 제자들은 달라요.
성령의 눈으로 보니까 아닌 건 다 아니라고 쳐내버립니다.
그러니까 ‘어, 여호와, 왜 이상해요, 기독교?’
구약이 이상한 거예요. 신약에서는 다 배제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로 딱 정리합니다.
요게 구분하고 보시면 다 보여요. 섞어 버리면 안 보여요.
그래서 제가 구분을 항상 강조합니다. 왜냐?
그 원 저자의 의도에 따라 이해해줘야 맞는데,
구약 저자의 의도를 가지고 신약의 내용을 이해해 버리면
신약 저자들의 의도가 삭감되겠죠. 제대로 왜곡돼 버리고 펴지 못하겠죠?
그래서 신약에만 근거해서 말씀드린다는 것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구약을 한 번씩 인용하더라도 자명한 부분만 취해서 쓸 겁니다.
신약에서도 인정할 수 있는 부분만 취해서 씁니다.
재미있죠, 이런 것도 한번 생각해 보시면 재밌습니다.
삼위일체론이 어려울 게 없어요.
우리도 여러분, 여러분 안에 성령님이 임해 계시죠?
자, 이게 예수님만 해당되는 게 아니에요, 삼위일체의 이런 스토리가.
여러분이 지금 성령의 뜻대로 말하고 행동해버리면 여러분 또한,
여러분 안에서 성령님이,
인격의 모습을 한 성령님이 드러납니다, 여러분을 통해.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고,
그대들도 나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고...
아니, 성령님이 말한 대로 행하고 말했던, 성령님의 뜻대로,
예수님이 ‘그대들이 나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은
성령님을 전제한 거지, 그쵸?
‘너네가 뭐 나보다 더 뭐 잘날 것이다.’ 이 얘기를 한 것도 아니고,
‘성령님이 그대들을 통해서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라는 거.
이해되시죠?
성령 하느님이, 성령님이라고 하는 건 좋은데,
‘성령!’ 당연히 존칭, 하느님 존칭 붙이는 게 맞죠.
‘성령님을 인격으로는 이해하지 마라!’ 왜냐?
내 영혼, 인격은,
우리 이미 인격이라는 건 영혼육이 갖추어졌을 때 인격입니다.
성령님이 영혼육이 있는 존재가 아니고 영의 존재예요, 영의 존재.
그래서 이름부터 ‘성 령’이에요, 그냥 ‘영’.
이름에 다 비밀이 있어요. ‘영’이에요.
성령이 임하면 내 생각이 바뀌어요.
내 생각에서, 성령께서 나한테 무슨 말을 하는 것처럼
인격적으로 느낄 수 있어요, 우리 혼이. 왜?
그것은 인간한테 그렇게 번역되는 거예요.
인간의 혼은 어떻게 느껴요, 대상을? 내가 아는 대상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하느님을, 영을 혼의 존재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럼 이거는 사실은 당연한 현상인데, 조심해야 될 현상인데,
왜곡시키지 않으려면, 영을 왜곡시키지 않으려면 분명히 알고 있어야 돼요.
이 영도 혼의 입장에서는 영도 또 다른,
나와 또 다른 인격체로 이해해 버릴 수 있다는 거예요.
그건 오류라는 겁니다, 사실은.
그렇게 이해할 수는 있는데 본질은 알고 그렇게...
인격적으로 느끼고 살아가시는 건 좋은데,
인간이면 그럴 수밖에 없어요.
인간은 이 물건도 인격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쵸?
‘윌슨!’, 뭐 이렇게 이름 붙여서 대화도 나누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집에 예전에 어렸을 때 여동생들의 황당한 일이 있습니다.
제가 침대에 ‘야~!’ 하고 딱 누우면 깜짝 놀라요, 인형들 자고 있다고.
‘뭐야?’ 하면서 보니까, 인형도 이불을 잘 덮어 놨어요.
제가 그 위에 모르고 누운 거죠.
‘뭐지? 그 좀 뭐 병원에 가 봐야 되는 거 아닌가?ㅎㅎ’
어린 나이 때 제가 이해가 안 돼서.
또 그날 기분도 얘기해요.
‘오늘 쟤가 왜 기분이 안 좋지?’ 뭐 이런, 무섭죠? 못 느끼는 사람이라면 무섭죠?
여러분, 인간은 그 능력이 있어요.
성령님도, 영의 존재도 우린 인격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화나신 것 같이 느끼기도 해요.
하느님이 나한테 되게 서운하시다고 느끼실 수도 있고,
화났다고 느낄 수도 있고, 다 좋아요. 그렇게 느껴지는 거 좋아요.
더 실감 나게 느끼자는 거거든요, 저도.
근데 분명히 알고 있어야 돼요.
영은 영이고 혼은 혼이다는 걸 우리가 알고 있어야 돼요.
지혜가 부족하면 우리가 왜곡이 일어나요.
그 왜곡이 처음에 미세한 데 쌓이면 무섭습니다.
쌓이면 무서워져요. 요런 얘기도 제가...
우리 진도 지금 어디 나갔죠?
그것도 지나간 시간에 한 거 다시 간단하게 하고 가겠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재미있으셨으면 됐죠. 재밌으시죠?
그래서 자, 그러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우린 다시 살아났다.” 이 구절 하나가,
사실은 이거 한 구절 한 구절이 다 어려운 얘기예요.
그리스도와 함께 어떻게 내가, 언제 내가 그리스도랑 다시 살아나요?
성령님을 받았다는 얘기예요.
성령을 받으면 나는 성령의 온전한 구현인 성자와 함께 살아가는 겁니다.
다시 살아난 거예요. 살아나서 살아가는 거예요. 이해되시죠?
지금 그래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을 받아야,
예수님 길드 쪽은, 예수 길드는 그렇게 받아야 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성령을 받는 게 만렙이신 예수님의 그 전지, 전능, 자비까지
함께 내가 껴안고 가겠다는 겁니다.
그걸 항상 염두에 두면서 살아가겠다는 거예요.
눈에 안 보이는 성령을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성령으로 느껴야 되니까
꼭 모델이 하나 있어야 돼요. 그 모델이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이게 성자와 성령이 한 덩어리 되어서 그 사람 안에서 살아나는 겁니다.
이해되시죠?
이게 다 제자들을 더 성령의 길로 인도하려는 예수님의 방편이었어요.
요한복음에 보면 그 방편을 쓰시는 게 잘 나옵니다.
'나랑 하나가 돼라!'는 얘기를 계속하시거든요.
자, 그러니까 이제는 게임으로 비교해 볼게요, 게임으로.
제가 요즘 게임하고 비교해볼게요. 게임 비유 많이 하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는 것은 여러분,
예수 길드에 가입해서 게임에 접속도 됐고, 성령 받아서 접속했고,
길드 짱이 누구예요, 길드 마스터가? 길마가 예수님이죠. 예수님~
여러분 게임할 때 예수님 길드라는 걸 앞에 달고 다닙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돼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위에 있는 거 지금 지상 천국에 접속했으니
지상천국 게임의, 지상천국에서의 삶에 집중하라는 거예요.
리니지(온라인 게임)에 집중하시라 지금, 일상의 삶 보다.
리니지 협찬이 들어온 건 아닙니다. 제가 아는 게 리니지 밖에 없어서.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지상 천국의 삶을 잘할 생각만 하십시오, 이거예요.
지금 몸뚱이는 지상에 살고 있는데, 이 사바세계에 살고 있는데,
지상 천국의 삶을 더 추구하라는 거예요.
‘천국의 영주권 따서 시민권 향해 가라!’
‘의화, 성화, 영화의 길을 밟아가라!’ 이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런 표현은 우편에 앉는다는 것은 권능을 다 받았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보이지 않는 영의 권능을 다 받은,
우리가 아는 게임 안에서 최고 리더는 누구예요? 그리스도예요.
그리스도가 만렙, 게임 안에서는 만렙이 최고지,
지금 하느님에 해당되는 존재는 게임에서는요, 관리자와 중앙 서버입니다.
관리자가 법 짜 놓은데로 중앙 서버가 인과를 굴려요.
뿌린 대로 거두게 해 줘요.
그럼 게임 안에서 우린 보여요, 안 보여요? 안 보여요.
중앙 서버의 작용 안 보여요. 관리자가 세워놓은 그 법 안 보여요.
눈에 보이는 법은 누구예요? 만렙 밖에 없어요.
만렙만이 모든 법을 알고 있어요. 법을 구현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만렙이 갓 신입들한테 뭐라고 하겠어요?
‘내가 길이요 진리요 아이템이다. 나를 따르라!’라고, ‘나를 따르라!’
‘나 따라 댕기면 다 알 수 있다.’ 아시겠어요?
왜 그 예수님이 그토록 강조되는지.
구약에는 없던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구약에서는 여호와가 바로 얘기하잖아요?
지금 우리는 예수님한테만 집중하면 된다는 이론이에요, 신약은.
눈에 보이는 하느님에 집중하자는 거.
“그리고 위에 있는 것만 생각하고 땅에 있는 걸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상의 삶에 최대한 신경을 꺼라라는 얘기는요,
지상에서 살아가는 삶을 어떻게 신경 안 써요, 우리는 살아야 되는데.
그런데 이렇게 이해하시면 좋겠어요.
그동안 혈육의 자녀로 살아왔죠?
혈육의 자녀로 살아오면서 한 일이 뭡니까?
육의 쾌락에 복무하는 것,
육정에 복무하는 것,
불교식으로 탐진치에 끌려다니는 것,
‘탐진치에 고만 끌려 다니십시오.’ 이 소리입니다.
‘육체의 쾌락은 제발 좀 그만 좀 신경 좀 끊으십시오.’ 이런 거지,
‘생업을 포기하십시오.’ 이렇게 이해하시면 지금 뭐,
이 육신이 없이 어떻게 의화, 성화를 닦아요, 육신으로 닦는 거지.
말이 안 되는 소리고요.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땅의 삶에 너무 거기에 탐진치,
탐욕 내고 분노하고 거기에 시기 질투하고 끌려 다니지 마십시오.’
이는 여러분이 이미 세상에 대해서는 죽었고, 말이 쌥니다만, 뭐예요?
‘세상 것에서 탐진치 추구하는 삶은 이제 그만 종식합시다.’
종식됐습니다. 당신은 이제 천국의 시민입니다.
‘천국의 시민입니다.’라는 걸 강조합니다.
천국의 시민은 천국의 영주권자 일수도 있고 시민권자 일수도 있지만,
암튼 천국의 시민이죠. 천국에 살아가는 사람이면 천국에 집중하십시오.
천국의 삶에 집중하십시오.
이게 믿음으로만 되겠습니까? 믿음으로는 이거 안돼요.
아무리 상상해 보려고 해도 내가 천국에 산다고,
지상에서 혈육의 자녀로 살고 있는 입장에서 상상으로 천국의 자녀가 될 순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려운 거예요.
신앙이 자꾸 어렵다고 하고 평생을 해도 답이 안 나오는 거예요.
왜? 간단합니다. 성령 안 받아서 일어난 일이에요.
죄 사함을 안 받았는데 어떻게 일이 발생해요?
죄 사함을 받고 성령 받아야만,
이미 성령이 내 안에 거하면 어떻게 돼요? 내 혼이 어떻게 변해요?
혈육에서 오는 자극보다 더 강렬한 자극이 내 영혼을 지배합니다.
혈육에서 오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 까지두요,
성령을 제대로 성령의 현존을 체험하면 놔져요, 다 놔져요. 초연해집니다.
평안을 얻게 되고, 진리를 얻게 되고, 사랑의 마음으로 충만해져요.
그러니 놔져요. 불교에서 말하는 육바라밀의 마음이 돼 버려요.
탐진치는 자동으로 제압됩니다. 육바라밀 들어오면 탐진치 밀려나요.
여러분, 탐진치 충만해서 길을 걷다가,
‘나 오늘, 나 진짜 오늘 제대로 막 쇼핑할 거야, 나 뭐 살지 막 가슴 뛰어,
이거 안사면 나 오늘 죽을 것 같아!’ 하면서 가다가도
만약 여러분이 아는 사람이 길에서 피 흘리고 있으면 그거 다 날아갑니다.
탐진치 어디로 갔는지 없고, 이 사람이 빨리 다시 살았으면 좋겠다,
이 사람이 건강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꽉 찹니다.
일반인이라면, 웬만하다면.
그래도 ‘뭐 내 일 아니니까 다행이다.’ 하고 가시는 분도 있겠지만,
깜짝 놀래서 '오~' 그 사람 잘 되기만, 건강하기만 신경 써요.
그러면 이 사람은요, 원치 않게 어떻게 된 거예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느라 자기 탐진치를 잠시 잊어버렸어요.
그런 삶을 사시라는 겁니다.
어려운 게 아닙니다.
‘나는 탐욕이 너무 많아요.’ 괜찮아요.
양심 밀고 들어오면요, 탐욕이 흔적도 없어질 수 있어요, 여러분!
근데 문제는 그게 위급할 때만 나온다는 게 문제인데,
성령을 받아버리면 어떻게 된다는 거예요?
하느님이 내 안에 늘 계셔 버리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상황이 달라집니다.
다른 방식으로 문제가 풀려요.
성령이 내 안에 늘 계시니까 성령님만 의식하면 내 마음이 변해가요.
그 정도 돼야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 성령 받은 사람한테 하는 얘기예요.
당신들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살아났잖아요. 살아났으면 천국에 집중하세요.
당신들 지금 혈육에는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하세요, 여기 신경 쓰지 마시고.
혈육에서 오는 쾌락에 끌려 다니지 마시고
성령의 뜻에 충실하는 데 더 집중하세요, 이겁니다.
그게 제가 얘기하는 지상천국 게임 플레이에 더 집중하세요.
"그러면 이는 여러분이 이미 세상에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
영원한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 뭔 소리냐면요, 여러분의 영원한 생명이 뭐예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은 성령 자리예요.
자, 이런 모든 영 혼 육의 변화의 근원은 어디예요? 성령이에요.
성령이 생명 덩어리고 성령이 진리 덩어리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령에 감춰져 있는 생명과 진리,
그게 우리의 뿌리고 그리스도의 뿌리기도 한 거예요.
그러니까 말씀 잘 해석해 보세요.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이 세상에 대해”,
여러분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처럼 누구 안에 감춰져 있어요?
하느님 안에 감춰져 있어요.
우리도 그리스도도 그 생명 자리가 하느님 안에 감춰져 있어요.
하느님의 뿌리를 받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자, 우리도 하느님의 뿌리를 받고 그리스도도 하느님의 뿌리를 받고 살아가시는 분,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생명이 이제 하느님의 뿌리를 받게 됐어요.’ 이 소립니다.
‘우리도 이제 영생 줄 잡았어요.
하느님의 생명줄 잡았단 말이에요, 그리스도처럼.’ 이 소리입니다.
우리도 이미 이제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살 수 있게 됐어요.
그러니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의 또 생명이시기도 한 그리스도, 왜?
성령의 온전한 구현자니까 나의 생명인 겁니다. 나한테 영생을 줄 분이기도 해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영생을 받았잖아요.
이때 그리스도는 어떤 느낌이에요, 한 인격이라기보다는?
인격적인 성령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인격을 논하려면 항상 성자한테만 해야 됩니다.
인격을 띤 성령이 성자세요.
인격의 모습을 하고 왔다는 건 뭐예요?
우리를 더 도와주려고요, 인간을 구원하려고요.
그러니까 나한테 영생을 주는 분이 일차적으로 지금 누군 거예요?
눈에 보이는 하느님은 누구예요?
나한테 아이템 주는 분은 누구예요? 그리스도요.
아이템을 만든 분은 하느님 일지 몰라도 나한테 주는 분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나도 그리스도처럼 이제 하느님한테,
하느님의 영생에 뿌리를 받고 살 수 있게 됐고,
그리스도께서 나한테 영생을 또 주실 것이다.
근데 주시러 언제 와요?
유대인들은 언제 온다고 생각했습니까? 심판의 날에.
“심판의 날에 나한테 생명을 주실, 영생을 주실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여러분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가운데 나타날 겁니다.”
여러분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영생을 얻을 겁니다.
어떠세요? 짧은 글이지만, 이 바오로는 대단한 게요,
사실 한두 줄의 문장에도 의화, 성화, 영화가 다 들어 있습니다, 바오로는.
논리가 확고해요. 아주 정밀하게 얘기하는 분이에요, 이분은 아주.
본인은 아니라는데 아주 대단한 철학자세요.
본인은
‘난 성령의 지혜로만 얘기하는 사람이지, 세상의 철학자가 아니야!’ 하는데,
사실은 세상의 철학자만큼 말씀을 아주 논리적으로 정밀하게 하고 계십니다.
성령의 뿌리를 받고 얘기해서 그런 거죠.
그게 세상의 그냥 세상의 철학자와 다른 거지,
이분이 하신 게 진짜 진정한 철학이죠, 이분이 하신 게.
이해되시죠? 이 그림을 이해하세요.
자, 우리도, 예수님도 다 하느님한테 뿌리를 받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나한테 직접적으로 영생을 주러 오실 분은 누구예요? 그리스도요.
눈에 보이는 성자.
근데 사실은 알고 보면 그리스도는 성령이 인격적으로 나타난 존재이기도 한 거죠,
삼위일체적 입장에서 볼 때는.
나한테 영생을 주러 인격적으로 오시는 성령님이 성자예요.
그러니까 성자가 나한테 영생 주러 심판의 날에 오실 때,
나도 영생 얻어서 그날 함께 그리스도와 함께 할 것이다. 이날을 고대한다.
그래서 바오로는 영화의 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복음과 비교하면,
예수님은 ‘살아서 바로 영생을 얻어 죽음을 맛보지 마라’라고 한다면,
바오로는 그 입장이 아니에요.
바오로는 철저히 부활의 날, 심판의 날을 기다리는 입장이에요.
기다리면서 간절히 바라는 입장이에요.
나한테 영화를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영화를 주시기를.
부활체를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입장입니다.
대신에 바오로는 의화 성화는 확실히 따르는 거죠.
의화 성화를 열심히 닦으면서 영화를 고대하는 입장입니다.
근데 이 영화는 언제 이루어진다고 봐요, 바오로는? 심판의 날에!
이게 유대인적 입장에서 보는 거예요.
영화에 이르는 그 예수님의 ‘여기 살아서 바로 영화를 얻어라’라는 가르침은
바오로한테는 사실은 좀 퇴색됩니다.
바오로는 심판의 날에 확실하게 천국의 부활체를 입고
천국에 입성 하기를 되게 고대하는 사람입니다.
제대로 천국의 통치자로서 입성하기를...
분명히 그러면서도 동시에 바오로는 자신이 로마의,
육신으로는 로마의 시민권자지만 영혼은 천국의 시민권자라는 걸
확실히 알고 살아가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방금 말한 것처럼 나는 이미 이 땅에 죽었대잖아요.
나는 뭐 어떻다는 거예요? 본인이 살아간 얘기를 한 거잖아요.
위의 것만 신경 쓰고 산다는 게 천국에 살고 있다는 거죠, 지금 본인은.
지상천국 게임 폐인 같은 분이죠. 육신은 어떻든지 간에,
나는 영혼적으로 이 지상 천국 플레이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근데 바라는 게 있어요. 바라는 게 있다면,
황금갑옷 하나 얻어서 제대로 게임 안에서도 더 높은 차원인
제대로 된 부활체 입은, 황금갑옷 입은 사람들이 가는
그 더 천국의 통치자들의 그룹에 끼고 싶은 게 바오로의 욕심인 거죠.
바오로는 이미 천국에 살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런 글에서 알 수 있죠. 어떠세요?
제 논리가 무리하지 않죠, 요렇게 이해하시면.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에요,
어마어마한 감동과 영감과 진리가 거기 숨어 있어요.
그런 식으로 읽어 가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한 단락 했습니다. 5분 쉬고 다시 하겠습니다.
첫댓글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녹취>
<거내영 사도>
1. 시작~5분 ㅡ 마카리오스
2. 5분1초~10분 ㅡ 옴니아
3. 10분1초~15분 ㅡ 베네딕따
4. 15분1초~20분 ㅡ 지혜
5. 20분1초~25분 ㅡ 사랑의빛
6. 25분1초~30분 ㅡ 그냥
7. 30분1초~35분 ㅡ 진리의빛
8. 35분1초~40분 ㅡ 완전한사랑
9. 40분1초~45분 ㅡ 완전한영광
10. 45분1초~끝 ㅡ 초연
함께 수고해 주신 사도님들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완사완영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내 멍에는 아주 가볍다. 뭡니까?
'사랑하라!'>
<내가 살아서, '내가 지금 얘기하는 거를 살아서 믿고 따라버리면
죽음을 맛보지 않으리라.' 바로 천국 갈 수 있다는 길을 열어 버립니다.>
<하느님이 내 안에 늘 계셔 버리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상황이 달라집니다.
다른 방식으로 문제가 풀려요.
성령이 내 안에 늘 계시니까 성령님만 의식하면 내 마음이 변해가요.
그 정도 돼야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 성령 받은 사람한테 하는 얘기예요.
당신들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살아났잖아요. 살아났으면 천국에 집중하세요.
당신들 지금 혈육에는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하세요, 여기 신경 쓰지 마시고.>
사랑하는 아버지, 오늘도 다정하게 건네시는 모든 말씀에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숨쉬는 모든 순간 아버지를 온전히 의식하고 온마음 다해 감사와 찬미 드리는 삶이 되게 하소서.
늘 기뻐하며 감사와 찬미가 샘솟는 영혼이게 하소서.
사랑하는 아버지, 부족한 저의 모든 것을 내맡겨 드립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이끌어 주소서.
사랑하는 아버지, 제가 당신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게 하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콜로 3,2-3)
<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할 수 있는 원리는 한 성령이기 때문에 그래요. >
< ‘세상 것에서 탐진치 추구하는 삶은 이제 그만 종식합시다.’
당신은 이제 "천국의 시민입니다." 라는 걸 강조합니다.
천국의 시민은 천국의 영주권자 일수도 있고 시민권자 일수도 있지만,
암튼 천국의 시민이죠.
천국에 살아가는 사람이면 천국의 삶에 집중하십시오.
이게 믿음으로만 되겠습니까? 믿음으로는 이거 안돼요.
내가 천국에 산다고 아무리 상상해 보려고 해도
지상에서 혈육의 자녀로 살고 있는 입장에서
상상으로 천국의 자녀가 될 순 없습니다.
그러니까 어려운 거예요.
신앙이 자꾸 어렵다고 하고 평생을 해도 답이 안 나오는 거예요.
왜? 간단합니다. 성령 안 받아서 일어난 일이에요.
죄 사함을 안 받았는데 어떻게 일이 발생해요?
죄 사함을 받고 성령 받아야만,
이미 성령이 내 안에 거하면 어떻게 돼요? 내 혼이 어떻게 변해요?
혈육에서 오는 자극보다 더 강렬한 자극이 내 영혼을 지배합니다.
혈육에서 오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 까지두요,
성령을 제대로 성령의 현존을 체험하면 놔져요, 다 놔져요. 초연해집니다.
평안을 얻게 되고, 진리를 얻게 되고, 사랑의 마음으로 충만해져요. >
@무화.보조.기조실
이번 강의는 잘 정리했다가
통째로 외워서 주변의 지인들에게 얘기해 주고 싶은 생각을 주십니다.
늘 듣던 내용이지만
의화, 성화, 영화를
천국의 영주권, 시민권, 통치권~으로
특히,
영신, 부활체를 얻는 설명에서
수시와 정시로 비유한 부분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활용하고 싶습니다.
관건은
성령이 임해서 성령이 하시게 하면 의화에서 영화까지 만사 오케이인데,
세례 때 <하느님을 주인으로 섬기며
하느님께 자신의 생명까지 다 내놓을 각오(결심)>를 하지 않았기에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제야 거내영의 봉헌을 함으로써 예수님과 한 성령이 되어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뿌리를 박고 살아가게 되어
영생줄, 생명줄을 잡았습니다.
<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다는 것은
예수 길드에 가입해서 게임에 접속도 됐고, 성령 받아서 접속했고,
길드 짱이 누구예요, 길드 마스터가? 길마가 예수님이죠. 예수님~
여러분 게임할 때 예수님 길드라는 걸 앞에 달고 다닙니다.
예수님과 하나가 돼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여러분, 위에 있는 거 지금 지상 천국에 접속했으니
지상천국 게임의, 지상천국에서의 삶에 집중하라는 거예요. >
아멘~ 아멘!
사랑하는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버지만 죽도록 뜨겁게 죽기까지 사랑하며
지상천국 게임 플레이에만 초집중하겠습니다!
저의 모~~~든 것을 내맡깁니다.
부족한 저를 통하여 당신 마음껏 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사완영을 위하여!
@무화.보조.기조실
< 2018년 1월 14일 무위신부님의 강론 말씀 -테바-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분과 한 영이 됩니다."(1코린 6,17)
도대체 우리 비천한 인간이 주님과 결합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한 영이 되요~하느님과!★
하느님의 성부 성자의 영이 뭐예요.
성령이시죠! 성령안에 하나가 되는 거예요.
★하느님의 영과 하나가 된다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바오로 사도가 선포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걸 몰라요.
이거 있죠, 어마어마한 말씀이예요.
★주님과 결합하는 방법이 뭔지 아십니까! 우리 인간이!
제가 전하는 내맡김의 영성★이예요.
'당신은 저의 주인이십니다.' 고백을 하고
여러분들의 온 마음을 다해서
여러분들의 모든 것!
여러분들의 생명과 여러분들이 소중이 여기는
이사악, 아브라함에게 이사악처럼
가장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드리세요.
마음을 맡겨드리면 이게 주님과 결합하는 방법이예요.
그러면 ★주님과 한 영★이 되요.
★주님과 한 영이 되는 이 방법이 얼마나 쉬운 방법인지★
그리고
★내맡김의 화살기도를 끊임없이 부르고 듣고 하면
하느님이 오셔서 완전히 내 안에 자리를 잡고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을 살아간다는 것이 내맡김의 영성★입니다. >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런데 기독교 삼위일체론의 문제가요,
‘성부도 인격체고, 성자도 인격체고,
성부, 성령, 성자가 각각 별개의 독립된 인격체이면서 하나다.’라는 걸
주장하려고 해요. 꽝입니다.
그 몇 천 년 묵은 학설이 있다 하더라도 꽝입니다.
왜? 성부랑 성령은 인격이 아니세요.
인격적 하느님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부족한 저는 이 말씀에서 역시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의 차이를 느꼈습니다.
"성부, 성령, 성자가 각각 별개의 독립된 인격체"라는 의미를
글자 그대로만 인식하는 비 그리스도인의 한계를 보게 되네요.
성부, 성령, 성자의 각 위격께서 서로에게 베풀고 나누는 <사랑>은
분명 신적 행위이시지만 그것이 결코 비인격적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곧, 창조주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그리고, 이 <사랑>은 인간이 결코 이해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그 어느 누가 신격과 인격을 나눌 수 있을 런지요?!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1코린2,12)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로마8.14)
그것이, 그 <사랑>이 아버지가
아버지를 믿는 우리에게 주신 <황금률>이지요.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천주는 그치지 않는 사랑의 샘,
우리의 사랑이 거기에서 나누이어,
우리 안에 흘러오는 사랑의 원천이시다.>(거룩한위탁 제 4 편 제2장)
부족한 제가 저의 모~~~든 것을 내맡겨 드리고
마침내 <아버지>의 '참 자녀'로 새로 태어난 원인이 바로 그 <사랑>입니다.
<━민범식 신부의
22.[민범식 신부의 쉽게 풀어쓰는 기도 이야기] ‘너’ 중심 / ‘너’를 향하는 방향 선택
moowee 18.05.12 18:17
그렇다면, 영의 차원에서의
성령의 움직임은 어떠한 방향으로 이루어질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를 바라보게 됩니다.
영의 차원에서 직접적으로 움직이는 분은 성령이시지만,
이러한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한 본체이시며,
@무심.보조.회장
삼위일체의 내적 ‘생명’에서나 세상을 위한 당신 사랑의 선물에서나
성부와 성자와 분리되실 수 없는’(「가톨릭교회교리서」689항)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곧, 성령의 움직임은 바로 삼위일체 하느님의 움직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움직임, 삼위일체 신비의 핵심에는
바로 ‘사랑’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회의 프랑수아 바리용 신부님은「흔들리지 않는 신앙」(생활성서사/2014)이라는 책에서
‘사랑’이라는 열쇠를 통해 삼위일체의 신비를 탁월하게 풀어내십니다.
“다시 말해, 더 이상 내가 나 자신의 중심이기를 멈추기 위하여,
자신을 해체하여 내 중심이 너이게 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네가 나의 중심이요, 나는 너를 위하여, 너에 의하여 산다.
나는, 너 역시 너 자신을 해체하여 이제 더 이상 네가 너 자신의 중심이 아니며,
내 안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고 있다.
나는 네 안에 집중되어 너를 위해 산다.
너는 내 안에 집중되어 나를 위해 살고, 우리 둘 모두가 서로에 의하여 산다.
@무심.보조.회장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위하여 산다는 것 - 이것이 베풂이다! -이요,
상대방에 의하여 산다는 것 - 이것이 받아들임이다! - 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내 안에서, 나를 위해, 나 자신에 의해 사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신비 전부이다.”(45~46쪽)
우리는 성령의 움직임 역시도 ‘나 자신’이 아닌
‘너’를 향한 움직임이라고 알아들을 수 있게 됩니다.
“삼위일체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향한 순수한 움직임이요,
아들은 아버지를 향한 순수한 움직임이고,
성령은 이 움직임의 상호성이요 역동성 자체”(48쪽)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영의 차원에서 움직이시는 성령의 이끄심은 나 자신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너를 향하는 움직임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영의 차원의 원리를 따라 사는 삶’이요,
‘영적 인간의 삶의 방식’이며, ‘영성’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드러나는 바대로,
성부 하느님께서 먼저 이러한 방향을 택하셨고,
성자 예수님 역시도 이 방향을 따르셨으며,
성령께서도 우리를 이 방향으로 이끌고 계신 것입니다.>
@무심.보조.회장
아멘, 아멘!!!
사랑하는 아버지와의 일치는 역시 아버지를 <참 사랑>하는
똥싸개 철부지들에게 주시는 은총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2코린 4,7)
사랑하는 아버지,
베풀어 주시는 이 놀라우신 은총에 찬미합니다. 흠숭드립니다.
부족한 제가 죽도록 뜨겁게 아버지만을 사랑하게 하소서.
부족한 저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아버지께 내맡겨 드립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이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뭔 죄가 사해져요? 원죄만 사해집니다.
여러분이 짓는 죄가 어떻게 다 사해져요?
여러분이 바로 잡아야지, 뿌린 대로 그건 받아야죠, 여러분!
원죄는 예수님과 그 제자인 사도들이 사해 줄 수가 있습니다.
'너희 죄를 사하노라!'
지금 사제들도 다른 죄를 사해 주면 안 돼요, 성경적으로는.
원죄만 사해줄 수 있습니다.>
<★ 창에 찔린 예수 화살에 꽂힌 신부 ★
14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은?(5)
죄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겨 드리면 죄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죄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멀어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의 모든 것,부족함과 죄스러움마저도 하느님의 자비로
모두 하느님의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래서 ‘거룩함’ 그 자체이신 하느님의 것이 되었기에 죄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죄를 범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 써도 별 소용이 없었다면,
이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겨 온전히 하느님의 것이 되었기에
하느님께서 직접 죄’를 막아 주신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1요한 5,18)
초보 때 가끔 죄에 떨어지지만
그것은 ‘겸손되이’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의지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은총에 의해서만
죄로 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그것을 허락하신다.
참으로 우리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도저히 그 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악의 파수꾼인 마귀는 감히 하느님과 대적한 존재다.
마귀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하느님이시며,
그분의 뜻과 은총만이 죄를 극복할 수 있다.
죄를 극복하는 최선의 탁월한 방법이 바로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것,
즉 거룩한 내맡김의 삶을 사는 것이다.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완전히 100% 다 내맡기겠다는
‘맹세 수준의 굳은 결심’을 하는 순간,
‘하느님의 씨’가 그 영혼 안에 착상된다.>
사랑하는 아버지,
비그리스도인이 어찌 아버지의 무한무량하신 자비의 바다를 알 수 있겠습니까!
@무뇌어린양.보조
그 자비의 바다를 모르는데
어찌 거내영의 진리와 가치를 짐작이나 하겠습니까!
지금 여기 제 안에서 함께 사시고 대신 해 주시는 아버지의 현존으로
죄에서 멀어지고 보호받고 지난 날의 온갖 더러움과 죄악들이
끊임없는 내맡김의 화살기도와
무형성전에 아롱새겨지는 수많은 영적 식구들의 댓글쓰기와
힘차게 돌아가는 아버지 세탁기의 위력 안에서
새하얗게 씻겨지고 향기롭게 정화되고 있음을 어찌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저는 할 수 없으나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손수 구원의 길로
이끌고 가심을 무지랭이 천둥벌거숭이 제가 알고 확신하심도
아버지의 이끄심입니다.
제가 제 모든 것을 완전히 100% 다 내맡기겠다는
'맹세 수준의 결심'을 드린 봉헌의 순간에
'아버지의 씨'가 제 영혼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이제는 저의 원죄든 본죄든 모든 것이 아버지의 것이오니
저는 모릅니다.
그저 철부지, 무뇌아, 어린양, 철면피, 막가파되어
물처럼 바람처럼 이끄시는 대로 이끌려 드릴 뿐입니다.
제 의견, 생각, 의도, 계획,...아무것도 제 안에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만 소유하고픈 열망만이 벌겋게 달구어집니다.
@무뇌어린양.보조
<그런데 기독교 삼위일체론의 문제가요,
‘성부도 인격체고, 성자도 인격체고,
성부, 성령, 성자가 각각 별개의 독립된 인격체이면서 하나다.’라는 걸
주장하려고 해요. 꽝입니다.
그 몇 천 년 묵은 학설이 있다 하더라도 꽝입니다.
왜? 성부랑 성령은 인격이 아니세요.
인격적 하느님은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이 주장에 대해서 뒷통수를 잡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무심 회장의 댓글을 통하여
핵 사이다를 마신 듯 시원해졌습니다.
특별히 예수회의 프랑수아 바리용 신부님의 저서를 인용하여
성령의 움직임이 '나 지신' 이 아닌 '너' 를 향한 움직임' 임을
새로이 알게 되었으니 영적 기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무심 회장의 댓글 전체를 통하여
아버지께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당신의 모든 것인 성령안에서 하나로 일하시는 예수님과
그 분의 뒤만 온전히 따르셨던 성모님의 따라쟁이로 살고자 하오니
그 안에서 활동하셨던 성령께서 제 안에 오시도록 맡겨드립니다.
오직 아버지께로만 이끌어 주소서.
부족한 제가 아버지만을 죽도록 죽기까지 뜨겁게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완사완영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성령에서 나온 율법을 지키는 삶을 성화의 삶이라고 합니다.
간단해요. 그 율법, 멍에는, 예수님의 멍에는 가볍습니다.
'서로 사랑하라!' 이거 하나예요.
'이 계명만 지켜라!' 분명히 하셨어요.>
사랑하는 아버지
거내영으로 이끌림받아 하나의 계명을
분명하게 받은것은
아버지만 뜨겁게 사랑하는 것 입니다.
부족한 제가 사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사시는 지금
저의 모든것을 100% 다 내맡겨 저는 죽고 아버지의 뜻으로 살아가는
거내영에서 그렇게 찾던 사랑을 찾았습니다.
아버지 아버지 사랑하는 아버지
세상에 살면서 아버지의사랑안에 살수있게 해 주셔서 감사와 찬미영광 드립니다.
더 뜨겁게 죽도록 아버지만 사랑하게 하소서.
모든사제와 수도자들과 거내영식구들을 통하여 아버지의 거룩하신 뜻이 이루어 지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느님이 내 안에 늘 계셔 버리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상황이 달라집니다. 다른 방식으로 문제가 풀려요.
성령이 내 안에 늘 계시니까 성령님만 의식하면 내 마음이 변해가요.
그 정도 돼야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자, 이런 모든 영 혼 육의 변화의 근원은 어디예요? 성령이에요.
성령이 생명 덩어리고 성령이 진리 덩어리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령에 감춰져 있는 생명과 진리,
그게 우리의 뿌리고 그리스도의 뿌리기도 한 거예요.>
이번 윤홍식 강사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계속 반복해 왔던
의화, 성화, 영화의 개념을 천국의 영주권, 시민권, 통치권으로
설명하는 부분에서 제 삶이 <거내영>의 고속도로로 천국행로를
가는 여정임이 자명해졌습니다.
제 안에 하느님께서 늘 함께하시는 현존의 성사를 화살기도로
매순간 아버지 이름을 부르며 제 영혼육은 성령님과 함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아버지를 따라 일상 안에서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뿌리에서 뽑아올리는 영혼의 샘물을 마시고 살아가지요.
제 뜻대로 운전대를 잡고 살던 것을 몽땅 불태워버리고,
이제와 영원히 <거내영>의 생명줄을 붙잡고 살아가렵니다.
화살기도로 성령의 숨결을 타고 사는 모든 시간 안에
성령님께서 함께하시기에 매순간 의화를 넘어 성화의 길을 걷고 있지요.
모가지를 바쳐드리는 저의 죽음, 봉헌 이후에 <마목정>으로
아버지를 뜨겁게 사랑하는 길을 예수님처럼, 마리아엄마처럼,
아버지께 내맡기며 하루하루를 살아갑니다.
강사님의 삼위일체 설명에서 성경 지식인일 뿐,
그리스도인이 아닌 시각으로 해석하는 안타까움은
<무심회장님>께서 올려주신 댓글을 통해 시원스레 해소되어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혈육에서 오는 탐욕, 분노, 어리석음 까지두요,
성령을 제대로 성령의 현존을 체험하면 놔져요, 다 놔져요.>
성령의 현존을 이어가는 <거내영>의 불화로에서 아버지께
더더욱 내맡겨드리니 내 뜻의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이 녹아내리고,
오직 아버지께 초집중하며 아버지 뜻 안으로 깊숙이 젖어드는
제 영혼육은 <무형의 성전>, 거룩한 아버지 집에서 기뻐 뛰놉니다,
사랑하는 아버지,
부족한 저를 통하여 당신 마음껏 무한감사 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