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 마르다. 일어나 물을 마시고 싶은데 일어나지지 않는다. 몸은 납덩어리 같고 침대는 수렁 같다. 달빛이 하얗던 미쉘네 학교 마당이 다시 뇌리에 스친다. 그런데 거기 서 있는 사람은 미쉘이 아니다. 죽은 병수 형이다. 병수 형이 꿈에 나타난 걸 보면 객지에서 연일 과음한 탓에 내 몸이 많이 허해진 거다.
병수 형은 1973년 12월에 창신동 어느 여인숙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었다. 병수 형은 동숭동(지금의 대학로) 뒷산 자취방에서 '반야'라는 이름의 암고양이와 함께 살았다.
'반야'는 병수 형의 옛날 애인 이름이기도 하다. 병수 형은 반야를 마치 옛날 애인이기나 한 듯 끌어안고 다녔지만 내게는 달갑지 않았다. 그 음산한 울음소리는 특히 싫었다.
그때 나는 도봉동에 살았기 때문에 종로 통에서 술 마시다 통금에 쫓기면 병수 형 자취방을 찾아가곤 했다. 병수 형은 집에 없는 날도 많았지만 상관없었다. 언제나 신발장 맨 아래 있는 헌 털신 속에 열쇠를 두고 다녔기 때문이다.
반야도 염려 없었다. 병수 형이 없을 때는 반야도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수 형이 없던 어느 날, 자다가 깨보니 반야가 새벽 달빛을 등지고 들창 턱에 웅크리고 앉아 음산하게 울고 있었다. 내가 '가'라고 짧게 소리치자 반야는 들창 너머로 사라졌다.
창을 닫으며 본 골목은 달빛 때문에 밀가루를 뿌려 놓은 것 같이 하얬다. 그리고 거기 어떤 사람의 뒷모습이 언뜻 보이다 사라졌다. 들창을 닫고 이부자리에 누우면서 좀 전에 본 어떤 사람의 뒷모습이 병수 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면서 등줄기가 오싹했었다.
며칠 후에 알았지만 병수 형은 바로 그 시간에 창신동 여인숙에서 술에 취해 잠들었다가 연탄 가스 중독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아니 그 시간에는 이미 죽어있었는지도 모른다.
목이, 입술이 탄다. 물이 마시고 싶다. 누군가 있었으면, 냉장고에서 시원한 보리차를 가져다 주고, 찬 물수건을 이마에 얹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하지만 이 방에는 나 밖에 없다.
만일 내가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될까?
경찰이 오겠지. 경찰은 대사관에 연락 할 테고, 대사관에서는 유족에게 연락할 테고......이 도시의 병원에는 유가족이 올 때까지 시체를 안치하는 냉동실이 있을까? 냉동실이 없으면 방부제 처리를 하거나 소금에 절여둘지도 모른다. 어쩌면 신원 확인만 하고 화장해 버릴지도 모른다.
병수 형은 화장을 했다. 그 날 아침에 나는 영안실에서 신발을 잃어버렸다. 양말 바람에 관을 들었고, 영구차에 탔으며, 벽제 화장장에 갔다. 그날 병수 형 친구 종태 형이 맨발인 내게 말했다. '병수의 부케는 네게 던져진 것 같다.'라고. 병수 형 장례식 다음에는 내 장례식이 있을 꺼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한 종태 형이 먼저 갔다. 그는 그 이듬해에 북한산 자락에서 변사체로 발견됐었다. 부검 결과 술에 취해 자다가 저체온증으로 죽은 것으로 추정됐다.
어제 밤이 떠오른다. 나는 달빛이 하얗게 내리는 미쉘네 학교 마당에서 돌아섰다. 미쉘네 집에서 고양이가 튀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고양이를 보니 왠지 그 집에 들어가기가 싫었던 거다. 미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 와서 왜 그러냐고 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돌아보지도 않았다. 단호한 걸음으로 비탈을 올랐다.
광장에 이르자 개들이 으르렁거렸다. 시퍼런 불이 나는 눈과 날카로운 송곳니, 뚝뚝 땅에 흘리는 침을 보자 미친개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 머리칼이 곤두섰다. 주변엔 돌도 막대기도 없었다. 나는 급히 혁대를 풀어 빙빙 돌렸다.
사납게 짖어대는 개들은 점점 늘어났다. 다섯 마리, 여섯 마리......무서웠다. 하지만 천천히 걸었다. 흘러내리는 바지를 움켜쥐고, 혁대를 빙빙 돌리며.....
누군가가 식은땀을 흘리는 내 몸을 조심스럽게 흔든다.
다바 구릉의 흐린 얼굴이 눈앞에 있다.
"다바. 물 좀 줘. 목이 타는 것 같아."
잠시 후 다바가 물을 가지고 왔다. 물을 마시기 위해 일어나 앉았는데, 침대가 보트 같다. 물이 차서 곧 가라앉을 것처럼 빙그르 도는 보트......시간은 얼마나 됐을까. 손목 시계는 어디다 두었을까. 햇빛의 각도로 보아 정오는 이미 지난 것 같다.
"천천히 마셔. 넌 몹시 아픈 것 같다. 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어."
물을 마시니 좀 살 것 같다.
"병원은 안 가도 돼. 술이 좀 과했던 데다 미친개들 때문에 놀랐을 뿐이야."
다바에게 어제 밤 상황을 대충 설명해 주었다. 다바는 한숨을 푹 쉬고 나서 말한다.
"김, 잘 들어 둬. 이 동네 개들은 밤이면 미친다. 특히 달밤에는 더 그래. 어제 밤 그 개들의 눈에는 네가 사람이 아니고 귀신으로 보였던 거야."
"귀신이라......하긴 내게는 늘 술 마시다 죽은 귀신이 따라 다니지. 개들은 아마 그 술 귀신을 보고 짖었을 거야."
"그래. 개는 귀신을 쫓는 동물이다. 어쨌든 밤늦게 다니지 마. 얼마 전에도 서양 여행자 한 명이 개들에게 목을 물어 뜯겼어.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중태였지. 넌 운이 좋았던 거야."
"난 언제나 운이 좋아. 걱정 마. 네 경찰 친구는 만나봤냐?"
"물론. 늦어도 내일은 좋은 소식이 있을 꺼다. 슬슬 식당으로 내려와. 뭣 좀 먹어야 되잖아."
다바 구릉을 따라 식당으로 내려와 국수를 먹었다.
점심 시간이 지났는지 식당은 한산하다. 서양 여자 한 명이 카운터 옆 탁자의 수화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마미, 아이 미스 유' 하며 울먹인다. 괜히 가슴이 찡하다.
전화를 마치고도 서양 여자는 카운터에 가만이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 겉모습은 독수리처럼 생겼지만 마음 속에는 병아리가 들었나 보다. 여자는 이제 다 울었는지 손수건으로 코를 푼다.
지갑을 꺼내들고 전화 사용료를 계산하는 그녀의 모습은 진짜 독수리 같다. 그 여자가 간 후 다바에게 맥주 한 병을 청한다.
다바는 카운터를 두 손으로 짚고 서서 한숨을 쉰다.
"김, 네게서는 아직도 술 냄새가 난다. 더구나 넌 혼자 일어나지도 못했어. 난 널 데리고 병원에 갈 생각이었어."
"환자 취급하지 마, 다바. 하지만 네 말을 듣고 보니 술은 그만 두는 게 좋겠다."
"그럼. 그럼. 그게 좋아. 그런데 하나 묻자."
"물어봐."
"어제 누구와 마신 거냐?"
"미쉘이라고 아냐? 광장 밑에 있는 학교의 교사라고 하더라."
"맙소사. 그 주정뱅이에 오입쟁이 ......그는 끝난 인간이야. 다질링에서는 아무도 그를 상대하지 않는다. 주정뱅이들이나 걸인들 빼고는."
"그건 나도 알아. 그런데 오입쟁이라니?"
"지금 마누라가 네 번 째 마누라다. 마누라가 되기 전에는 제자였는데 세 번 째 마누라가 버젓이 있을 때부터 몰래 정을 통했거든."
"미쉘에 대해서 잘 아는군."
"다들 잘 알지, 그래서 상대를 안 해.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주면 얼마나 귀찮게 구는지 알아? 네가 여기 알리멘트에 묵는다는 걸 말했냐?"
"아직은......"
"말해 주지 않는 게 현명할 꺼야. 말해 주면 저녁마다 찾아와 마시자고 할 테니까."
"네 말을 들으니 다시 피곤해진다."
"그럼 이제 올라가서 좀 더 쉬는 게 어때?"
"아냐, 차라리 좀 걷는 게 나."
"이런 말 하기 미안하지만 어제처럼 밤중에 오면 곤란해. 오늘은 밤이 되기 전에 와 주겠지?"
"약속한다, 다바. 넌 꼭 내 형 같다. 앞으로 형님이라고 불러 주겠다."
"그건 사양한다. 네가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면 다들 내가 늙은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난 늙은이가 아니다. 난 아직 스무 살이고 싶다."
광장은 여전히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다. 관광객들 사이로 어린 거지들이 따라다니고, 개들이 벤치 근처를 어슬렁거린다. 그 중 한 놈은 감자 칩을 먹는 어린애의 발 밑에 앉아 군침을 흘리고 있다. 어제 밤 내 목을 물어뜯을 듯이 덤벼들던 개들 중에 저 개도 있었으리라고는 상상이 안 된다.
광장에서 한 계단 내려선 골목 끝에 큰 구라스 나무들이 서 있다. 거기서 떨어진 꽃잎들이 지붕을 가득 덮고 있는 건물이 미쉘네 학교다. 마당 가장자리에 어제 밤에는 몰랐던 작은 화단이 있고 거기 채송화가 피어 있다. 오후의 햇살 아래 학교 건물은 '서부 활극'에 나오는 시골 교회 같은 분위기다. 건물 동쪽 벽에 인부들이 흰 페인트칠을 하고 있다.
비탈길을 에돌아 내려서니 현관 앞에 체구가 아주 큰 서양인과 뭔가 수근대고 있는 미쉘이 보인다. 무슨 날인가. 둘 다 넥타이를 맸다. 둘 옆에는 원피스 차림의 젊은 여자가 서있다. 미쉘에게 의자를 던졌다는 미쉘의 네 번 째 아내가 바로 저 여자일까? 친정에 갔다더니 벌써 왔나.......
"김!"
미쉘이 나를 보고 반갑게 웃는다. 면도를 했는지 얼굴이 말쑥하다. 도무지 어제 밤의 그 주정뱅이 같지 않다. 미쉘이 나를 그들에게 소개한다. 젊은 여자는 미쉘의 아내 이스바나, 체구가 큰 서양 남자는 미쉘의 형이다. 형제치고는 둘이 너무 다르다. 배다른 형제일 것이다. 미쉘의 형이 내게 불쑥 묻는다.
"네 직업은 뭐냐 ?"
아주 거만한 태도다. 나는 어제 미쉘에게 말했던 대로 '퇴역 군인'이기를 고수한다.
"전에는 군인이었다."
"직업 군인이었냐?"
"장교였다. 첩보 부대에서 조종관으로 근무했다."
"연금을 얼마나 받냐?"
"근근히 여행할 수 있을 만큼."
"나갈랜드에 가 봤냐? 반란군들은 대개 몽고리안이다. 꼭 너같이 생겼어. 노란 얼굴에 찢어진 눈."
"......."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다. 하긴 첩보 장교였다고 거짓말을 계속 하는 나도 웃기는 놈이긴 하다. 대화가 엉뚱하게 흐르는 걸 느꼈는지 미쉘이 끼어 든다.
"군대 얘기는 그만 하는 게 좋겠어 형."
미쉘의 형은 혼자 뭐라고 중얼거리며 인부들이 페인트 작업하는 곳으로 갔다. 미쉘의 아내 이스바나도 슬그머니 뒤채로 돌아간다. 손님을 꺼리는 분위기다. 미쉘은 나를 실내로 안내하며 말한다.
"형을 이해해 줘. 김. 형은 나갈랜드 내전 때문에 엄청난 재산 피해를 입어서 저래."
"알았어. 그건 그렇고, 손은 어때?"
"오늘 벌써 네 알 째 먹었어. 봐, 빈 병이지."
미쉘은 빈 약병을 보여준 후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서재에는 큰 나무 책상과 팔걸이 의자가 몇 개 있다. 책상 위의 꽃병에는 새빨간 구라스 꽃이 꽂혀 있다. 미쉘은 내게 팔걸이 의자를 권한 뒤 자신의 의젓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지 책상에 딸린 큼직한 안락 의자에 앉는다.
"네 와이프는 친정에 갔다더니?"
"나도 깜짝 놀랬어. 어제 밤에 와보니 집에 있더군. 네가 그냥 가준 건 정말 다행이었어."
"대신에 나는 미친개들에게 물어뜯길 뻔했어."
나는 미쉘에게 어제 밤의 상황을 좀 자세히 설명해 줬다. 미쉘은 내가 바지를 붙들고 혁대를 휘두르며 호텔로 간 대목에서 배를 잡고 웃는다.
방안의 가구들이 모두 골동품에 가까운 고급이다. 책장에 가지런히 세워 놓은 조그만 액자들마다 오래된 흑백사진이 들어 있다. 옛날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들은 무성 영화의 한 토막 같다.
가운데 액자에는 정장 차림의 아버지와 어머니. 오른 쪽에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사진. 왼쪽에는 아주 어렸을 때의 미쉘과 미쉘의 형. 한 단 아래쪽의 액자에는 젊은 부부와 어린 남매의 가족 사진이다. 다들 귀족풍의 고급스러운 의상을 입고 있으며 행복에 겹다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다.
"미쉘, 이건 누구냐. 혹시 너 아니냐?"
"아니다. 내 동생이다. 옆에 있는 건 동생 가족들이고."
"동생도 있었냐? 영화 배우 같구나. 네 제수도 아주 미인이다. 지금 어디 사냐?"
"글쎄......여기 있다고 할까. 여기 바로 내 가슴속에 말이다."
"무슨 말이냐?"
"그건 옛날의 나다. 그리고 내 첫 아내와 아이들이지."
"그럴 줄 알았다."
미쉘은 무표정한 얼굴로 책상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창 너머로 미쉘의 형이 인부들의 작업을 감독하고 있다. 미쉘의 아내는 그 옆 화단에서 풀을 뽑고 있다. 미쉘은 반대편 창문을 마저 연 뒤에 내게 담배를 청한다. 내 담배 갑에는 담배가 딱 한가치 밖에 없다.
미쉘은 담배 연기를 창 밖으로 내뿜는다.
"형이 담배를 싫어하는구나?"
"다 싫어하지. 우리 아버지 빈센트 목사님을 비롯해서 우린 대대로 크리스챤이다. 나도 요즘은 다시 교회에 끌려 다니고 있어. 오늘도 교회에 갔었다."
"첫 아내와 헤어진 건 언제냐?"
"10년도 훨씬 넘었다."
"그럼 지금 아내와는 언제 만난 거냐?"
"4년 전.......말하자면 길어 .지금 아내는 네 번 째다."
"네 번 째?"
"그래 네 번 째......두 번 째는 버마 여자였는데 캘커타에서 3년 살고 헤어졌어. 세 번 째는 독일 여자였어. 지금 아내를 만날 때까지 여기서 함께 살았지."
"그녀들에겐 네 자식이 없었냐?"
"응. 다행이......"
미쉘은 두 개의 커다란 콧구멍으로 두 줄기 굵은 담배 연기를 빠르게 몇 번 뿜고서 꽁초를 창 밖 축대 위로 던진다.
미쉘의 첫 아내는 프랑스 여자였는데 미국에 가서 재혼했다고 한다. 아들은 3년 전까지는 상선의 선원이었는데 작년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이 왔고, 딸은 어머니와 미국에서 살면서 대학을 다녔는데 작년부터 소식이 끊어졌다고 한다.
"얼굴을 보면 서로 모를지도 몰라. 헤어진지가 하도 오래 돼서 가족 사진 속으로 돌아가야만 서로를 알아 볼 수 있을 꺼야."
나에게도 가족 사진이라는 게 있었다. 그 사진은 아직도 어머니 방에 그대로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9평 짜리 개포동 주공 아파트 1단지에 입주했던 그 해에 친구 종수가 구룡산 약수터에서 찍어 준 사진이다. 아내와 아이들은 노란 양산을 쓰고 쪼그리고 앉아 있고 나는 물통을 안고 그 앞에 길게 누워 있는 사진이다.
어머니는 그 사진에서 당신께서 우리 형제를 기르시던 때를 보는 것 같다고 좋아하셨다. 똑같이 개구리 왕눈이 셔츠를 입고 있는 손자 손녀가 어린 시절의 나와 내 동생 한로 같다고도 하셨다.
어머니 생각을 하니 우울해진다. "변하지 말고 그저 요대루만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니......"하시던 어머니의 음성이 귀에 들리는 듯하다. 그리고 머지 않아 우리도 미쉘네처럼 가족 사진 속으로 돌아가야만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던 집은 지금쯤 팔렸을지도 모른다. 아내는 아이들의 학교가 있는 런던 어딘가에 방을 얻었겠지. 런던......런던에도 이곳 다질링처럼 안개가 많이 낀다지.
눈썹에 안개 이슬을 매달고 내게 손을 내밀던 거지 소녀는 고만할 때의 내 딸 이랑이와 비슷한 얼굴이라는 느낌이 든다.
"김, 안색이 안 좋다. 어디 아프냐?"
"어제 너무 마셨잖아. 힘들어. 가서 좀 쉬어야겠어."
"조금만 기다려. 형이 퇴근하거든 함께 나가자. 어제 그 락시 어땠어? 스바나네 집 락시 말이다."
"미안하다. 오늘 저녁엔 중요한 약속이 있어."
"잠깐. 차 마시고 가. 이스바나가 금방 가져 올 꺼야."
"창 밖을 봐라, 미쉘. 이스바나는 꽃밭에서 일하고 있다."
미쉘은 시무룩한 얼굴로 창 밖을 내다본다. 나는 미쉘의 등을 두드려 준다.
"괜찮아, 다음에 와서 마시자."
"김, 어느 호텔에 묵냐?"
"알리멘트 호텔이다. 티브이 타워에서 군부대로 가는 길목에 있다."
"쿠르카 용병이었던 친구가 주인이지? 안다. 하필이면 그 치사한 뚱뚱이 자식의 호텔에 묵게 됐냐. 돈 준다면 마누라도 팔아먹을 놈이다 그 놈은. 차라리 짐 싸 가지고 우리 집으로 오는 게 어때?. 네 방을 하나 만들어 주겠다. 물론 무료다."
"고맙다. 생각해 보겠다."
미쉘과 작별하고 광장으로 올라서는 비탈길에서 미쉘네 학교를 내려다본다. 큰 구라스 나무에서 떨어진 붉은 꽃잎들이 학교 지붕에 가득하다.
광장은 흐린 안개로 젖어 있다. 사람들도 젖어 있다. 오늘은 유난히 인도인 관광객들이 많다. 신혼부부도 있고 핵가족도 있고 대가족도 있다. 한 줄은 벤치에 앉고, 한 줄은 그 뒤에 주르르 서도 모자라 벤치 앞에도 서넛이 털썩 주저 앉아야할 만큼 식구가 많은 가족도 있다.
그 많은 식구들을 향하여 카메라를 들고 있던 여학생이 내게 미소지으며 손짓한다. 셔터를 눌러달라는 것이리라.
"스마일. 하나, 둘...... "
번창한 가족의 행복한 일원임이 자랑스러운 사람들의 미소......한때는 나도 저런 가족의 소중한 일원이었다. 그러나 다시는 그 일원으로 돌아갈 수 없다. 나는 가족들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나왔다. 너무나 오래 떨어져 살았다. 너무나 다르게 살았다. 가족들의 눈에는 오래 전 기념 사진 속의 내가 이미 죽은 사람의 혼령처럼 보일 것이다.
카메라를 돌려 받으며 여학생은 '매니매니 쌩큐'하며 귀엽게 인사한다. 온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누구 못지 않게 소중한 딸이라는 뿌듯한 자부심 속에서 자란 것 같다.
으슬으슬 추워서 눈을 떠보니 어느새 밤이다. 알리멘트의 식당에서 점심으로 볶음밥을 먹고 잠시 침대에 누웠다가 깜빡 잠들었나 보았다. 창으로 푸르스름한 안개가 축축하게 흘러들어 온다. 창을 닫을까, 그냥 둘까, 망설이는데 창에서 다바의 얼굴이 불쑥 나온다. 그가 조그맣게 말한다.
"밑에 네 친구가 왔다."
"친구?"
"주정뱅이 말이야. 내가 뭐랬어. 숙소를 가르쳐 주면 찾아온다고 하지 않았어?"
"방에 있다고 했어?"
"아니, 있나 없나 보고 온다고 했어. 그 친구는 벌써 한잔했더군. 술 냄새가 역해. 없다고 할까?"
"그래. 나갔다고 해 줘."
미쉘 이 술꾼. 보나 안 보나 술 마시자고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나는 자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행 중에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마시다보면 중풍으로 쓰러지거나 치매가 되어 행려로 떠돌다가 객사할지도 모른다. 끔찍하다.
다바가 다시 올라와 미쉘이 내일 아침에 또 온다고 했음을 알린다. 미쉘은 내일 나와 함께 칼림퐁에 가자고 했다 한다. 하지만 내일은 다바의 경찰 친구가 '외국인 통행자 명부'를 가지고 올지도 모른다. 함께 갈 수가 없다.
추워서 몸이 뻣뻣하고 여기저기 쑤신다. 목욕탕 생각이 간절하다. 열탕과 냉탕을 서너 번 씩 왔다 갔다 하는 상상을 해 본다. 얼큰한 육계장이나 짬뽕 국물, 혹은 콩나물국에 고추 가루를 풀어서 쭉 들이키면 기운이 날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는 뚝바가 고작이다.
아침 9시. 이를 닦고 있는데 다바가 올라온다. 미쉘이 식당에 와 있다는 것이다. 슬그머니 짜증이 난다. 사람을 사귈 때는 귀찮은 일을 감수해야한다는 사실을 깜빡 잊은 게 후회스럽다. 나는 일부러 천천히 이를 닦고, 머리도 감고, 팬티까지 빨아 널은 후에 천천히 걸어서 식당으로 내려간다. 미쉘에게 뭐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
-미쉘, 난 오늘 할 일이 많다.
-미쉘, 우리가 오늘 만나기로 했던가?
-미쉘, 아무 때나 마음대로 찾아오는 건 곤란해......
전에 많이 연습했던 대사들이다. 느닷없이 나타나서는 술 사라고, 보험을 들라고, 문학전집을 사라고, 돈을 꿔달라고 회사 지하 다방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만나러 가면서 말이다.
그들 중에는 인애도 있었다. 그만 만나기로 했고, 오랫동안 안 만났는데, 그래서 거의 잊을 무렵의 어느 날 문득 인애가 찾아왔었다. 둘이 나란히 앉아 따끈한 청주를 마시곤 했던 그 날처럼 쌀쌀한 초겨울이었다.
우린 커피 한잔만으로 헤어지지 못했다. 청주는 여전히 향기로웠고 구운 은행 열매는 어느 때보다도 맛있었다. 청주를 거의 열 잔이나 마시고도 우린 헤어지지 못했다. 그 날 우린 술을 사들고 근처의 여관으로 가야 했다.
식당이 시끌시끌하다. 주방의 석유버너 타는 소리도 숨가쁘다. 빈 탁자가 없다. 미쉘은 카운터 아래 전화 받는 탁자에 옹색하게 앉아 손의 붕대를 고쳐 매고 있다. 맙소사, 미쉘의 탁자 위에는 어느새 비운 맥주병과 컵이 놓여 있다.
카운터에 있던 다바가 턱짓으로 미쉘을 가리키며 얼굴을 찡그려 보인다. 아침부터 술 냄새 풍기며 영업집 분위기 깬다는 뜻이리라. 나는 식당 출입문 밖에 서서 단호한 음성으로 미쉘을 불러낸다. 미쉘이 못 마땅한 얼굴로 나온다.
"난 지금 막 돌아 가려던 참이었어, 김."
"미안해. 하지만 나는 하던 일이 있었어. 마저 마쳐야만 하는."
"널 칼림퐁에 데려가고 싶어. 어제 말했지? 누나는 음식 솜씨가 아주 좋아....."
"고맙지만 못 간다. 오늘부터 며칠 동안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
"칼림퐁은 여기 다질링하고 달라. 날씨도 따뜻하고. 무엇보다도 물건값이 아주 싸. 닭, 염소, 물론 싱싱한 채소도 많아. 장을 봐다가 누나에게 주면 누나가 요리를 해 주지. 술도 걱정 마. 거기 사는 내 친구가 아주 좋은 락시를 얼마든지 구해올 수 있어."
"다음 주에 가보도록 하자. 그렇지만 장담은 못해. 난 말야, 사람을 찾거든."
"알아. 저 안에 네가 붙인 광고를 봤어. 그리고 저 안에 있는 뚱뚱이 녀석한테 들었어. 경찰에게 뭘 부탁했다는 걸."
"그래, 바로 그거야. 오늘쯤 경찰에서 무슨 연락이 올 꺼야."
"김, 그 여자를 꼭 찾아야 된다면 넌 진작에 나한테 말했어야 돼."
"무슨 뜻이야?"
"여기 경찰 서장이 우리 아버지 제자야. 검찰청장은 또 우리 형 친구야. 하지만 모두 돌대가리에 쓰레기들이지. 돈 밖에 모르는 버러지들이기도 하고. 그런 건 말야, 이 동네 거지들이 더 잘 알아. 그리고 나는 이 동네 거지 대장들을 아주 잘 알지. 학교가 문을 닫았던 3년 동안 거지 대장들이 나와 함께 우리 학교에서 살았어.."
알 것 같다. 어제 밤, 광장이나 공중변소 주변의 거지들이 미쉘에게 공손한 태도로 인사를 했던 이유를......그리고 그건 좋은 방법이다. 미쉘의 말처럼 거지들을 통해 수배해 보는 것은. 거지들은 하루 종일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을 배회하거나 그 길목을 지키고 있지 않은가......
"미쉘, 정말 도와줄 수 있겠어? 시장이나 터미널 주변의 거지들도 잘 알아?"
"물론이다. 지금 당장 터미널로 내려가자."
"잠깐만 기다려. 안에 자리가 나면 아침 식사를 하고 가자."
"터미널이나 시장에도 식당은 많아. 그리고 난 저 뚱뚱이 녀석이 싫어."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는 중에 다바가 문을 열고 나온다. 다바의 얼굴은 조금 상기되어 있다.
"김, 내 경찰 친구가 지금 빨리 경찰서로 오라고 한다."
"명단이 나왔구나?"
"그건 아닌가 봐, 하지만 중요한 일이다. 내가 같이 가면 좋겠지만 보다시피 난 지금 아주 바쁘다. 내 경찰 친구의 이름은 산디프다. 경찰서 안내실에 가서 산디프라는 이름을 대면 안내해 줄 꺼다. 시간이 급하다. 빨리 가라."
미쉘이 다바에게 네팔말로 뭐라고 묻는다. 두 사람의 문답은 다소 길어진다. 두 사람의 얼굴에 뭔가 복잡한 표정이 엇갈린다. 무슨 일인가 벌어진 것이 틀림없다.
"무슨 일이야?"
"김, 가면서 이야기하자. 시간이 없다."
미쉘은 앞장서서 걷는다.
티브이 타워 앞 삼거리에 오니 마침 택시 지프가 서 있다. 운전사 옆 좌석에 앉은 미쉘의 뒤통수가 듬직하다. 무슨 일인지 묻고 싶지만 일단 미쉘이 말할 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한다. 미쉘이 돌아보며 말한다.
"네 누이가 아닐 꺼야. 난 그렇게 생각한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확인해 달라는 거야."
"뭘?"
"누군지 알 수 없는 어떤 여자가 죽었다. 몽골리언이고, 서른 살쯤 됐다. 검시한 의사에 의하면 어제 새벽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단다."
"어디서?"
"굼이라는 마을 쪽이다. 여기서 멀지 않다. 찦으로 가면 30분쯤 걸린다."
"그런데?"
"그 여자는 보름 전부터 그 마을에 나타났다. 그리고 날마다 아이들에게 스웨터를 떠 입혔다고 한다."
"......"
갑자기 온 몸이 얼어붙을 듯 오싹한 느낌이 스쳐간다.
"김. 걱정 마라. 분명히 네 누이는 아니다."
"사체가 경찰에 있는 거냐?"
"그 얘기는 못 들었다. 가보면 안다."
시장 삼거리에 이르자 신호 대기다. 찝차는 바로 어제 저녁 미쉘과 술을 마시던 모퉁이 주막집 옆에 서있다. 미쉘이 택시를 타고 있음을 자랑하려는 듯 주막집을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 지른다. 주모가 뚱한 얼굴로 내다본다. 주모의 등뒤에서 앞니 빠진 늙은 주정뱅이가 손을 흔들며 웃는다.
경찰서 건물이 보인다. 영국 통치 시대에 지었을 이층 짜리 붉은 벽돌 건물, 넓은 운동장이 있고 운동장 주변에 키 큰 미류나무들이 서 있다. 운전사가 핸들을 운동장 쪽으로 꺾자 미쉘은 운전사더러 차를 본관 앞에 세우라고 지시한다. 마치 자기가 경찰서장이기나 한 듯이.
본관 1층 로비에 안내실이 있다. 허리 굽은 노인이 청소를 하느라고 먼지를 날릴 뿐 안내실에는 아무도 없다. 미쉘은 안내실에 경찰관이 없는 것에 분통을 터뜨리며 담배를 밟아 끄고 이층으로 올라간다. 무조건 경찰서장실로 가겠다는 것이다.
다바가 안내실에서 '산디프'를 찾으라고 했음을 상기시켰으나 미쉘은 고집 불통이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난간을 붙들고 서서 빨리 따라 오라고 손짓하다가 결국 기다리라는 시늉을 하고는 층계 위로 모습을 감춘다.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경찰에서 나를 부른 것은 죽은 여자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나는 곧 죽은 여자의 얼굴을 보게 된다. 죽은 여자가 인애라면 ......인애라면 어떻게 되는 건가?
인애가 정말 그렇게 죽었다면 그건 내 책임인가? 내 책임이 아니다. 왜 내 책임이 아니냐. 너는 사실상 인애를 버렸다. 캘커타에다 유기해 버린 거다. 혼자 남은 인애는 절망했고, 절망한 나머지 실성해서 돌아다니다 죽은 거다.
침착하자. 지금 책임을 따질 때가 아니다. 대책을 생각해야 한다. 장례는 어떻게 치를 것이며 연락은 어디로 해야 하나. 이럴 때 마하 스님이 계셨으면 얼마나 좋을까. 영아나 극섭이만 있어도 크게 도움이 될 텐데......
결국 장례를 치르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 말인가? 이게 인애와 나의 운명이고 결말이란 말인가? 안 된다. 난 살아있는 인애를 만나야 한다. 살아있는 인애를 만나 용서를 빌고 싶다. 살아있는 인애가 들려주는 용서의 말을 듣고 싶다.
그 여자가 정말 인애였을까? 람만에서, 림빅에서, 그리고 다질링에서 뜨개질을 하며 돌아다녔던 그 여자는 인애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람만의 셀파네 집에서 일하는 까말에게 스웨터를 떠 입힌 여자는 분명 한국 여자라고 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그 여자가 우리나라 여자인지 알았다는 말인가, 그 여자는 벙어리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여행했다. 아니 그 여자는 실제로 벙어리였는지도 모른다.
미쉘이 온다. 같이 오는 사내는 다바가 말한 그 형사일까?
검은 가죽 점퍼에 청바지 차림을 한 사내가 손을 내민다. 미쉘이 그를 자랑스럽게 소개한다.
"바스타코티 경감님이야. 어제 아침에 의사와 함께 죽은 여자를 검시했었대. 다바의 친구라는 산디프는 바스타코티 경감님의 부하야. 그도 잠시 후에 내려 온다."
무표정하게, 그러나 내 면목을 재빨리 훑으며 악수를 한 후 바스타코티는 "잠깐 앉자." 라고 말하고 대기실의 긴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는다.
바스타코티는 상어처럼 무자비하게 생긴 인간이다. 그러나 검은 가죽 장화 신은 발을 체신머리 없이 달달 떨면서 말한다.
"사체는 처음 발견된 장소인 굼의 옛 절 뒤쪽 공터에 있다. 의사의 검시 결과에 의하면 심한 영양실조에 의한 자연사라고 한다. 우리는 죽은 여자의 신원에 대해 조사했지만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복장과 골격, 치아와 피부 상태로 보아 30세 가량의 몽고리안 여성이라고 추정한다. 우리나라 법에 의해서 사체는 사망 후 24시간 이내에 지체 없이 화장하도록 되어 있다. 곧 산디프가 와서 현장으로 안내할 것이다. 내가 할 말은 이상이다. 질문 있냐?"
바스타코티라는 사나이는 '질문 있냐'는 말을 '질문은 없을 거다' 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처럼 의자에서 일어선다. 그리고는 억지로 만든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청한 다음 미쉘을 저만치 데리고 가서 뭐라고 귀엣말을 주고받은 뒤 층계 위로 사라진다.
미쉘이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걸어온다.
"안심해도 좋다, 김. 저 친구도 죽은 여자는 네가 찾는 여자가 아닐 것이라고 장담한다."
"......"
"그리고 말야. 저 친구 좀 화났어. 자기는 어제 이미 화장 허가서에 사인을 해서 산디프에게 줬는데 산디프는 그걸 마을 사람들에게 안 주고 자기가 붙들고 있었던 거야. 화장하기 전에 널 데리고 가서 확인하려구 말야. 상관한테 보고도 없이."
"미쉘, 어쨌든 산디프는 우릴 도우려고 했어. 산디프가 아니었으면 사체는 이미 화장했을 꺼야. 그게 내 동생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기도 전에 말이야."
"그건 그렇군. 그러나 난 경찰을 안 믿어. 산디프도 바스타코티도 모두 돈 밖에 모르는 놈들이야. 김, 봐라. 산디프가 저기 내려온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