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여행11 - 도쿄대학 아까몽을 뒤로 하고 전철로 고라쿠엔 정원에 가다!
2022년 11월 7일 “도쿄 프리깃푸” 를 구입해 야마노테센(山手線) 전철을 타고 구 후루카와
정원과 리쿠기엔 六義園(육의원) 을 구경하고는 혼고마고에(本駒込 ) 역으로 들어
가서 고이시카와 고라쿠엔 小石川後楽園 을 보기 위해 야마노테센(山手線) 전철을 탑니다.
전철이 도다이마에 (東大前 동대전) 에 서기에 즉흥적으로 내려서 도쿄대학 으로 들어가니 한 눈에
보아도 건물들이 중후한 느낌이 드는데..... 지나가는 여학생에게 아카몽을 물으니 계단을
올라가라고 하는데 야스다 강당을 지나고서도 한참을 걸어 드디어 아까몽(赤門 적문) 에 도착합니다.
붉은 문 은 1827년, 가네자와현 카가번(加賀藩) 13대 번주(藩主) 마에다 나리야스(前田斉泰)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딸 야스히메를 정실로 맞으면서 붉게 칠한 문 을 만들었으니 쇼군의 딸인 공주가 시집와서
거주하는 안채를 고쥬덴(御守殿 어수전) 이라 하고 그 문을 붉게 칠했기 때문에 아카몽 이라고 불리었습니다.
카가번(加賀藩) 고쥬덴(御守殿 어수전) 아까몽(赤門 적문) 은 동해(일본해) 가나자와에서 1877년
에 도쿄시의 도쿄 대학 으로 이관되어 1961년에 해체 수리했으며...... 현재는 일본의
국가 중요문화재 로 지정되어 있는데 오늘 우리가 보는 문은 수리중에 있어 드나들수는 없습니다.
여기 도쿄 시내에 위치한 도쿄대학을 구경하다 보니 자연히 우리나라 서울대학이 비교되는데.... 임정묵
서울대 교수협의회 회장은 동아일보에 “서울대의 ‘진짜’ 문제점과 그 해법” 이란 글을 올렸습니다.
10년전 서울대는 자율성 확보와 재정확충을 통해 세계적인 대학이 되겠다며 법인화를 선택했다.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5,000억원 이상 국고지원을 받고있고 1조원이 넘는 예산을 운용 중이다.
그러나 베이징대나 도쿄대등 경쟁대학 예산의 몇분의 일에 불과해 경쟁력 있는 재정 기반의 확보는 요원 하다.
서울대 교수들이 체감하는 문제는 무엇일까? 첫째, 비효율적인 인력구조 다. 국내 주요 사립대학과 비교하면
교수 수는 두배를 넘지 않는데 직원 수는 세배 이상이다. 관료적이고 경직 되어 의사결정 절차도
복잡하며 둘째, 권위적이고 폐쇄적인 문화 다. 각 기관은 서로 조정이 잘되지 않아 고유 기능을 잘 발휘
하지 못하고 있는데 대학본부는 섬김의 리더십이 실종되어 갈등을 조율하거나 신속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셋째, 미래를 보는 안목없이 고루 하다. 개인 가치와 삶의 질이 미래 사회의 지향점인데 대학은 ‘가성비
좋은 발전’ 을 외치며 교권과 학습권을 무시 하고 교원의 세세한 직무활동마저도 간섭하려 한다.
넷째, 정부 의존적 이다. 법인화를 통해 외쳐왔던 자율성 확보를 위해서는 재정 자립이
필수인데..... 국가의 지원에만 의지하다 보니 정부의 눈치만 보고 자율화를 이루기에는 역부족이다.
교수는 연구에 몰두할수 있어야 하고, 학생은 적성을 찾고 개발할수 있어야 하며, 직원은 보람
을 가져야 하니 불필요한 조직을 없애고, 절차를 간소화하며 업적이 많은 교수는 충분히
대우해 주고, 직원도 능력있는 사람이 승진하고 대우아야 하며 지식재산권, 창업
및 수익사업을 활성화 하여 30∼40% 에 달하는 운영비 정도는 서울대 스스로 해결 해야 한다.
도다이마에(동대전) 역을 출발한 야마노테센 전철은 고라쿠엔(후락원)역 에 서기로 내릴까
하다가 다음 정류소인 이다바시(飯田橋) 역 에서 내려서는 분쿄구 고라쿠( 1, Kouraku,
Bunkyo-ku) 에 위치한 고이시카와 고라쿠엔 (小石川後楽園) 으로 가는 출입구를 찾습니다.
그런데 얼른 고이시카와 고라쿠엔 小石川後楽園 표지가 보이지 않기로 마주 오는
일본 처녀 에게 물으니... 자기도 잘 모르겠는지 고개를 갸웃하더니 우리 부부
보고 뒤따라 오라며 앞장을 서더니 한참을 가서 죄회전을 하여 출입구를 확인합니다.
처녀는 저 문으로 나가서는 좀 걸어야 할 것 이라고 말해주고는 다시 뒤돌아 서서 빠른 걸음 을
걷는데, 일본인들의 이런 친절 은 하도 자주 겪는지라 별로 고맙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습니다.
일본인의 친절 그 중에서도 여자, 특히 할머니들의 친절 은 참으로 대단하니 이까짓
것.... 저 처녀가 가던길을 되돌아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손 쳐도 불과 150미터
정도 걸어왔다가 돌아가는 것이니 이런 정도의 친절은 우리에게는 그냥 보통 입니다.
지하철을 나와서 둘러보고는 또 표지판을 보고 짐작해서 큰 도로를 건너서 걷는데 나중에
생각하니 도중에 오른쪽 도로로 들어가야 할 것을... 그만 내쳐 걷다가 보니
이쯤에서는 숲 이 나와야 하는데 보이지 않으니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습니다.
해서 지나가는 일본 처녀 에게 길을 물으니 처녀는 휴대폰을 꺼내 검색하더니 갑자기
밝은 표정으로 “무꼬!” 하고 외치면서 20cm 나 팔짝 뛰어 오르더니 손가락
으로 가리키는데.... 그 반가워 하며 팔짝 뛰어 오르는 모습이 여간 신기한게 아닙니다.
처음 보는 외국인 앞에서 저리 자기 감정을 여과없이 나타내는 것을 보니 순진무구한 마음씨 를 가진
처녀라는 생각을 하며 걸어서 드디어 분쿄구에 위치한 고이시카와 고라쿠엔 小石川後楽園 에
도착하여 300엔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학생과 65세 이상 시니어는 반값인 150엔 입니다.
고이시카와 고라쿠엔 에서는 도게쓰(渡月)교 주변이 아름다운데 에도시대 초기 미토번 가미야시키
( 지위가 높은 무사의 평상시 집 ) 안에 만들어진...... 회유식 쓰키야마센스이 정원 으로
초대 번주인 도쿠가와 요리후사가 착수하여 2대 번주인 도쿠가와 미쓰쿠니가 완성 시켰다고 합니다.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도쿄)에 도쿠가와 막부를 설립하고는 전국에 260명의 번주
들이 도쿄에도 집을 짓게 하고 번주가 1년은 지방의 자기 번에서 지역민들을 통치하지만
그 다음해 1년은 도쿄로 올라와서 가족과 함께 생활하라는 참근제도(参勤交代) 가 있었습니다.
이 제도는 막부의 쇼군이 지역 영주(번주)인 다이묘들의 반란을 방지 하기 위해, 에도 지역에 일정
기간 머무르도록 했던 제도라고 하는데.... 도쿄에 가족을 인질 로 잡아둘 뿐만 아니라
전쟁은 돈으로 하는 것이니, 자기 번과 에도(도쿄) 를 오가며 길에서 돈을 쓰게 함으로써
반란을 일으킬 재력을 소진 하게 하며.... 또 에도 경제를 활기차게 하는 목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 쇼군의 후손이 대가 끊길까 염려해 세 아들을 지방에 배치하니 고산케
(御三家 어삼가) 라고 하는데...... 9男 도쿠가와 요시나오(徳川義直) 는 오와리 번
(나고야성 名古屋城, 62만석), 10男 도쿠가와 요리노부(徳川頼宣) 는 기슈 번(와카야마성
和歌山城, 56만석), 11男 도쿠가와 요리후사(徳川頼房) 는 미토번 (미토성 水戸城, 35만 석) 입니다.
오늘 우리 부부가 보는 이 정원은 저 미토 水戶(수호) 번 에서 조성한 것이니 메이지유신
이후 폐번치현이 된지라 번주는 화족(귀족) 제도에서 후작을 받았다가 1929년에
공작 으로 승급했으며... 현(現) 종손은 15대 도쿠가와 나리마사(徳川斉正) 라고 합니다.
현재 미토번의 치소였던 미토 水戶(수호) 시 는 도쿄 동북쪽에 위치한 이바라기현의
현청 소재지이니 행정중심 도시인데.... 미토역 북구 광장에는 미토코몬 동상 이
세워져 있으니 미토코몬은 미토번 2대 번주 도쿠가와 미쓰쿠니의 별칭 이라고 합니다.
저 "미토코몬" 水戶黃門(수호황문) 은 일본의 텔레비전에서 무려 40년이나 넘게 방영 된 장편 사극
의 이름이기도 하니 40년간 주인공이 여러차례 바뀌었다고 하는데..... 도쿠가와 미쓰쿠니
가 마치 조선의 암행어사 처럼 지방을 다니며 탐관오리나 나쁜자들을 혼내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고이시카와 고라쿠엔은 초대번주 도쿠가와 요리후사가 착수하여 2대 번주 미토코몬, 도쿠가와 미쓰쿠니 가
완성시켰다는데.... 미쓰쿠니는 미토시에도 수천그루의 매화나무로 유명한 가이라쿠엔 偕樂園(해락원)
을 만들었으니 가나자와시의 겐로쿠엔 및 오카야마시의 고라쿠엔과 더불어 일본 3대 정원 중에 하나입니다.
여기 정원에는 세열단풍과 거먕옻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등이 심어져있으며 11월 하순부터
12월 초순에 물든다는데, 교토의 아라시아먀를 본떠서 만든 오오이가와(大堰川) 부근과
간토쿠테이(涵徳亭) 를 등지고 도게쓰(渡月) 교 에서 바라 보는 단풍은 유독 예쁘다고 합니다.
고이시카와 고라쿠엔 정원을 구경하다가 보니 문득 동해(일본해) 후쿠이(福井)시에 에도시대 중기에 만들
어진 “회유식(回遊式) 임천 정원” 인 요코칸 정원 養浩館(양호관) 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동양의 정원은 "조형미" 를 살린 서양과는 달리 "정신적인 관점" 에 영향을 받았으니
자연친화적 이며 인간 중심적 으로 명상과 함께 자연을 생각하면서 보는 기쁨 을
얻는데 목적이 있으니 "도가" 사상 혹은 "선" 사상의 영향으로 비정형적인 형태 를
띄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세부적인 면은 중국, 한국, 일본이 차이 가 있습니다.
3국에서 공통적으로 쓰인 자연적 요소는 "수목과 물 그리고 암석" 이라고 생각되는데
일본의 전통적인 정원을 보자면 정원에서 바위의 배치, 그림자의 형태, 식물
상호간의 조화 등에 "상징적이고 비유적" 인 의미를 부여했으니 일본 정원의 4대
양식으로 고산수식 정원, 선정식 수경정원, 문인조 정원 및 다정식 정원 을 들수 있습니다.
고산수 정원 의 대표 료안지 竜安寺(용안사) 정원 은 고요한 명상의 장소 이자 추상적
이며 축소의 정수 라고 불리우니 " 바다를 상징하는 흰 모래 가 깔려 있고 파도를
상징하는 빗질 이 된데다가 섬을 상징하는 바위 가 15개" 로 구성된 정원으로
"인간은 불완전하므로 적당할 때 만족 해야 한다" 는 메세지 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 정원에서 가나자와의 겐로쿠엔 이나 오카야마의 고라쿠엔 등 회유식 정원
에는 다실 이 산재되어 있기는 하나 그 숫자와 규모에 있어서 중국에는
못미치는데, 정원내의 건물에서 "차경된 바깥 경관" 을 감상할 수 있도록
건물의 동향 혹은 남향에 문이나 창문 을 두는 방식을 많이 이용한다고 합니다.
일본은 중국에서는 볼수 없는 기하학적 형태로 전정된 수목 이나 잘 다듬어진 잔디 나
그리고 긴카쿠지 (銀閣寺 은각사) 에서 보듯 이끼 종류 를 많이 사용하는데... 좁은
공간의 정원에서 수목의 크기를 정원에 맞추기 위함이라 여겨지며 연못, 폭포,
분천등의 다양한 수경기법 을 도입하는데 여기 정원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구조 입니다.
일본 정원의 수경기법은 물을 상징화 시켜, 물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수경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고산수기법 이니 료안지 정원에 암석과 왕모래로 바다속의 섬 을 상징화합니다.
이런 상징화 는 교토 은각사 나 야마구치시의 조에이지 정원도 그러한데..... 암석 활용은
재질, 크기 및 비례를 고려해 시각적 균형 을 이루도록 배치하는 기법을 쓰며
또 정결한 모래 를 나무 밑동이나 바위의 가장자리까지 빈틈 없이 깐후 갈퀴로 긁습니다.
모래는 직선, 유선, 타원과 동심원 등이 나타나면서 의도된 형상이 모래위에 표현 되니
맑고 정숙하여 흐트러짐이 없는지라.... 사람들도 자세를 흐트러지게 할수 없으니
교토 료안지나 오사카 사천왕사 마당이 그러한데 하지만 여긴 모래는 보이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