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붉은 비단이 깔린 숲길을 걷는다. 한없이 깊고 아늑한 길을 걷는다. 동백나무와 소나무, 대나무, 두충나무가 뒤엉켜 자라
터널을 이룬 숲길을 걷는다. 봄을 시샘하던 차가운 꽃샘바람도 범접 못할 사무치게 아름다운 길이다.
지상에 드러낸 소나무의 뿌리를 무심코 힘껏 밟고 지나가다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 옛날 한양을 떠나 머나먼 남도땅으로 유배길에 나선 실학자의 애달픈 눈물이 숲을 적신 그 길임을 새삼 떠올린다. 숲길 뒤로 대쪽같은 학자의 아픔을 위로하듯
붉디 붉은 동백은 처연히 떨어져 숲길을 따라 온다.
길의 끝자락 산사로 드는 길엔 싱그럽고 달콤한 동백꽃향기가 가득하다. 헝클어진 머릿속도 맑게 헹궈줄 것 같은 상쾌함에 온몸이 찌르르 울린다.
어쩌면 이 길은 현세가 아닌 피안에 이르는 길인지도 모른다.
남도 강진땅에 있는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이어지는 숲길은 지리산 둘레길처럼 긴 길도 아니고, 올레길처럼 유명세를 치른 길도 아니다. 하지만 '한국의 아름다운 숲'에 선정될 정도로 자연과 함께 숨 쉴 수 있는
명실상부한 최고의 길이다. 풋풋한 녹차 냄새와 코끝을 간질이는 동백향기, 발바닥에 폭신하게 느껴지는 촉감까지 모두
느낄 수 있는 그런 곳이다.
3월말의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린 뒤끝이다. 남도답사 1번지로 불리는 강진땅 다산(茶山) 유배길로 가는 발걸음은 휑하니 춥다. 하지만 문명의 이기랄까 시원스레 뚫린 고속도로는 멀게만 느껴졌던 남도의 마을들을 짧은 시간 안에 닿게 해 준다.
다산유배길은 강진 다산수련원에서 영암 구림마을까지 이어지는 61km 길이다. 구간이 길다 보니 총 4코스로 나뉜다. 1~3코스는 강진에 마지막 4코스는 영암을 지나게 된다. 하지만 이맘때 걷기에 가장 좋은 길이 1코스인 다산수련원에서
백련사숲길로 이어지는 길이다. 왕복 2시간 거리로 짧은 구간이지만 숲길이 평탄해 어린아이들도 쉬엄쉬엄 산책하듯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유배길의 시작은 다산초당 초입인 도암면 귤동마을이다. 돌담장과 커다란 나무들이 오랜된 시골 정취를 더한다. 다산수련원에서 나서 오솔길로 접어들면 '정약용 남도유배길'이라고 적힌 노란 리본이 곳곳에서 길안내에 나선다. 길을 나서 처음 만나는 것은 자작나무처럼 창백한 하얀 껍질을 지닌 두충나무 숲이다. 인위적으로 만든 산책로이지만 제법 운치가 그럴 듯 하다.
껍질을 벗겨 한약재로 쓰는 두충나무지만 최근 중국산에 밀려 그냥 방치한 게 숲을 이루게 됐다고 한다. 마치 버드나무 같이 죽죽 뻗은 나무들이 아름답게 늘어서 있다. 이 숲으로 다산 유배길은 처음부터 탐방객을 매료시킨다.
두충나무숲을 지나 한옥민박과 상가가 몰려있는 마을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다산초당으로 가는 유배길이 시작된다. 유유자적. 유배길을 걷는 방법이다. 동네 뒷산을 산책하듯 슬렁슬렁 마땅히 걸음이 그래야 할 시점이다.
돌계단을 오르고 무성한 대나무숲을 지나면 울퉁불퉁한 나무뿌리가 고스란히 드러나 원시적인 야성미를 느끼게 하는 길을 만난다.
대나무밭에서나 보던 땅 위로 솟은 뿌리들을 소나무 숲에서도 볼 수 있는 길이다. 나무의 힘줄이 툭툭 불거져 꿈틀꿈틀 살아 움직일
것 같은 기묘한 모습이다.
정호승 시인은 이 길을 '뿌리의 길'이라고 이름 붙였다. "지하에 있는 뿌리가 더러는 슬픔 가운데 눈물을 달고 지상으로 힘껏 뿌리를 뻗는다는 것을ㆍㆍㆍ/나뭇잎이 떨어져 뿌리로 가서 다시 잎으로 되돌아오는 동안 다산이 초당에 홀로 앉아 모든 길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ㆍ"
다산초당에는 다산의 정취가 묻은 3개의 길이 있다. 그 하나가 바로 '뿌리의 길'이다. 다른 하나는 초당의 동암을 지나 천일각 왼편으로 나 있는 '백련사 가는 길' 다른 하나가 다산의 제자 윤종진의 묘 앞에 나 있는 '오솔길'이다.
오솔길과 뿌리의 길은 바로 연결된다.
뿌리의 길을 지나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강진만이 내려다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이 모습을 보였다.
다산은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인 1801년 신유박해에 뒤이은 황사영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된다. 사의재, 고성사 보은산방 등을 거쳐 1808년 봄 외가(해남윤씨)에서 마련해준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 일생에 가장 빛나는 10년의 시간이 시작된 바로 그곳이다.
그는 초당의 동쪽에 동암을 지어 거처했다. 물을 끌어다 인공의 폭포를 만들었고 연못도 팠다. 연못 가운데는 해변에서 주어진 돌로 탑을 세웠다. 흑산도에 있는 형에 대한 그리움의 표현이었다.
잉어와 붕어를 길렀고, 화초를 심었다. 산 중턱에 밭을 일궈 채소도 길렀다.
바위 절벽에는 징표를 새겼다. 정석(丁石),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내면에 쌓았던 다산은 겉으로 화려하지 않았다. 바위에 새겨진 달랑 두 자가 다산의 깊이를 말해준다. 다산초당은 지금 다산을 만나는 가장 확실한 공간이다.
그는 이곳에서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하고 주변의 인재들을 불러 모아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학문연구에도 물두해 그 유명한 '목민심서','경세유표' 등 600여권의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오히려 이곳에 오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수 많은 책들이다.
현실 정치판에서의 실패가 그의 삶 자체를 온전히 망쳐 버리지는 못한 것이다.
다산초당에서 샛길로 빠지면 동암과 천일각이 나온다. 동암은 다산이 손님을 맞거나 저술 작업을 하던 곳이다. 동암 옆의 천일각 자리는 다산이 형 정약전을 그리며 강진만을 바라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지만 다산이 살았을 때는
없었던 누각이란다.
천일각에 오르면 강진만과 장흥 천관산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전망이 좋다. 누각에서 바라본 도암면 일대는 봄기운을 잔뜩 머금고 있다. 들녘 곳곳에 푸릇푸릇 올라오는 보리와 나물을 캐는 아낙네들의 모습이 정겹다.
이제부터 백련사 가는 길이다. 천일각에서 백련사로 이어지는 숲길은 다산유배길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다산유배길에서 만날 수 있는 3가지 길 중에서 다산의 체취를 가장 짙게 느낄 수 있다.
유배생활 동안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혜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던 통로였다. 1㎞가 채 안 되는 거리에 야생
녹차밭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아름드리 동백숲을 만날 수 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된 길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이 길을 따라 오가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동백과 야생녹차,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오가는 길 위의 아름다운 자연에 흠뻑 젖어 분명 선문답 같은 대화를 주고받았으리라.
야생녹차밭을 지나 대나무숲, 사스래나무 등이 등산로 옆을 지키고 있었다. 이 길은 녹차와 대나무 등으로 인해 사철 내내 푸를 것 같았다. 야생녹차는 이미 관목으로 자리 잡은 숲의 터줏대감이었다.
다산초당을 떠난지 25분여만에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백련사 동백림에 도착했다. 3㏊ 이상에 달하는 동백림의 수목들은 300~500년 이상 된 것들로, 일일이 번호를 붙여 관리하고 있다. 일설에는 꽃이 핀 채로 100일, 꽃이 떨어진 채 100일이라고 해서 동백이라 했다고도 전한다. 실제로 100일이 안 될지는 몰라도 핀 꽃이나 떨어진 꽃이 상당히 오래가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3월말 백련사의 동백들은 일부는 나무에 잔뜩 꽃을 피우고 있고 일부는 바닥에 또 꽃을 피우고 있었다. 꽃을 피우는 시기에 따라 춘백(春柏), 추백(秋柏), 동백(冬柏)으로 나누기도 한다.
1500여 그루에 이르는 동백나무는 갖가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미끈하게 잘생긴 동백부터 울퉁불퉁한 동백까지 동백나무의
모든 부분을 보여주고 있었다. 큰 줄기에 울퉁불퉁한 동백은 상처 난 부위를 스스로 아물게 하기 위해 내뿜은 수액이 오랜 세월
굳어져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기묘한 모양이 나름대로 멋을 내고 있었다. 주변에 비자나무, 후박나무, 푸조나무 등도 함께
자라고 있어 운치를 더한다.
백련사 내려가는 길도 가로수가 동백이다. 낙화한 꽃들로 길은 완전 꽃길로 변했다. 마치 소월의 '진달래'와 마찬가지로 동백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는' 길이었다. 언제 이런 길을 다시 밟아볼 수 있겠나싶을 정도로 감동의 연속이다.
백련사를 나서는 길 마지막 동백나무 끝에 한 송이 붉은 등이 대롱 대롱 매달려 길손을 배웅하고 있다.
다산초당 탐방정보^^
구강포. 옛 사람들은 강진만을 그렇게 불렀다. 9개의 하천이 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다산수련원에서 시작한 발걸음은 대숲이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 다산초당을 향해 간다. 다산초당은 다산이 그의 학문과 사상을 집대성 하던 곳. 정조가 죽은 후, 한양에서는 혼란스러운 날들이 계속됐다. 신유박해와 황사영 백사사건으로 경상도 기장에서 유배 중이던 다산은 한양으로 불려가 갖은 고초에 시달린다. 다산의 큰 형이 죽고 다산은 강진으로, 둘째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간다. 강진에 온 다산은 주막집 제자의 집을 전전하다 외갓집 사람들(해남 윤씨)이 써왔던 다산초당으로 옮겨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른다.
다산초당에서 백련사까지 다산의 삶처럼 굽은 나무뿌리들이 초당으로 오르는 숲길 위로 드러난다. 길을 조금 오르면 편백나무와 대나무로 이뤄진 짙푸른 숲 사이로 다산초당의 추녀가 얼굴을 내민다. 잠시 마루턱에 걸터앉아 마루를 쓸어 보면 그가 손수 만들었을 공간 속에서 그의 삶이 오롯이 느껴진다. 다산이 제자들과 손수 꾸민 축대와 뒷산은 마찬가지로 직접 심은 나무들로 울창하다. 아늑하게 들어앉은 건물들을 지나 구강포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천일각에 오른다. 이곳에서 다산은 오매불망 흑산도로 유배 간 형을 그리워하며 오가는 배들을 바라봤을 것이다. 마재에 두고 온 가족들과 한때 정도의 곁에서 나랏일을 돕던 한양에서의 기억도 떠올랐을 것이다. 천일각을 뒤로 하고 이어지는 좁은 산길을 따라 백련사에 이르는 길. 산 너머 살았던 젊고 총명한 승려 혜장은 다산과 친구처럼 가까운 사이로 20분 정도 걸리는 이 산길은 두 사람을 그리고 유교와 불교라는 전혀 다른 사상을 이어주던 의미 있는 길이다. 길 양 옆으로는 야생 차나무들이 찻잎을 떨친다. 고려 말 백련사가 번성하던 시기에 심었던 차나무들, 거기에서 번성해온 몇백 년 된 나무들이다. 고개 하나를 넘자 울창한 동백숲이다. 이른 봄이면 떨어진 꽃잎에 바닥까지 불게 물든다는 이곳 동백숲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될 만큼 아름답다. 길 끝에 도도하게 자리한 천년고찰 백련사가 몸을 드러낸다. 고려 말 불교혁신운동의 요람이었던 사찰에는 원교 이광사의 현판글씨가 남아 있다.
백련사에서 사의재까지 백련사를 뒤로하고 내려오면서도 바다 소리는 내내 곁을 따른다. 구불구불한 밭두렁을 지나 이리저리 하늘거리는 억새의 물결을 따라가니 어느새 바다가 보인다. 여행자의 발 아래로 갯벌이 펼쳐진다. 먼 바다를 깊이 품은 듯 바지락과 꼬막 같은 것이 지천, 그 맛은 어디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뛰어나다. 풍성한 갯벌은 수많은 새들을 불러들인다. 철새관찰 포인트로 이름난 철새도래지에서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고운 회색 개펄 위로 날아드는 새들을 바라본다. 겨울이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고니들이 이곳에서 한 계절을 난다.3.km의 제방을 따라 바다 그리고 새가 함께하는 외길을 걷는다. 제방이 끝나는 곳에는 탐진, 강진의 옛 이름을 기억하는 곳, 남포마을이 자리한다. 이곳이 바로 제주와 한양을 오가던 육지와 뱃길의 교차점. 사람과 물건들로 붐비던 큰 포구였으나 지금은 간척이 되어 들 가운데 있는 고즈넉한 마을이 되어버렸다. 논길을 따라 목리로 접어든다. 이곳 역시 탐진강이 민물이 바다와 만나는 큰 포구였으며, 기름진 논이 많아 ‘옴천면 장보다 목리이장이 좋다’는 우스개소리가 전할 정도로 큰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읍내의 작은 마을로 남았다. 다산이 1년 반 정도 머물렀다는 제자 이학래의 집이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고 있다. 읍내로 들어서면 시골 장의 정겨움이 마중한다. 이곳이 강진읍내이다. 읍내는 시장골목으로 시작하는데, 월출산이 내준 산채부터 탐진강과 강진만의 수산물로 가득하다. 강진 5일장에서 쉬다 나오니 길은 50년전 풍경으로 접어든다. 여인숙이며 구멍가게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어 시간을 건너온 듯하다. 이 길 끝에 사의재가 있다. 강진으로 유배를 온 다산이 처음으로 여장을 푼 곳. 누구도 권력자 눈 밖에 난 다산을 가까이하려 하지 않고,아전의 감시까지 있어 다산의 외로움은 더해졌다. 그때 다산을 거둔 것이 주막집의 주모였다. 늙은 주모는 한양을 떠나 땅 설고 물 선 강진 땅에서 다산에게 처음으로 의지할 곳을 내어준 사람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안정을 찾고 몸과 마음가짐을 단정히 하려는 네 가지 뜻을 세운다는 의미에서 자신이 머물던 방에 ‘사의재’라 이름 붙였다. 다산에게 따스한 마음을 주었던 주모가 불을 지폈을 아궁이 앞에 앉아 한 잔 술로 목을 축여본다.
▲ 가는길 서해안 고속도로로 종점인 목포 IC를 나와 2번 국도로 나와 영산강 하구둑을 지나 40여분 달리면 강진읍에 닿는다. 읍내에서 강진만 해안도로를 따라 10분 가면 백련사와 다산초당길이 나온다. 호남고속도를 이용하면 광산IC를 나와 13번 국도를 타고 나주 지나 강진읍으로 간다. 소박하면서도 화려한 조선시대 목조건물 극락보전이 있는 무위사와 경포대계곡을 빼놓을 수 없다. 부근에 녹차밭도 있어 운치를 더한다. 또 병영면의 전라병영성 유적(하멜 체류지), 시인 영랑 김윤식 생가, 고려시대 청자를 생산해냈던 대구면 고려청자 도요지, 월남사터 삼층석탑과 진각국사비 등이 있다. 특히 상록수림 울창한 까막섬 등 바다경치가 수려한 마량항 등도 꼭 둘러볼 만하다. 청자골 종가집(061-433-1100), 명동식당(061-434-2147), 해태식당 061-434-2486), 흥진식당(061-434-3031) 등은 푸짐하고 맛깔스런 남도 한정식의 진미를 맛볼 수 있다. 완도횟집(061-432-2066)도 있다. 시어머니의 손맛을 이어받은 김순자(59)씨가 35년째 맛깔스런 남도 맛을 낸다. 다산수련원에는 조금만 한옥민박들이 있어 숲내음 맡으면서 우아한 밤을 지낼 수 있다. 또 프린스관광모텔 (061-433-7400), 테마모텔 (061-432-2626), 부성파크모텔 (061-434-2081) 등 마량항과 강진읍에 모텔급 숙박시설들이 많다. 강진군에 문의하면 농촌체험마을 등을 안내받을 수 있다.
|
|
첫댓글 조용하고..좋을꺼 같긴한데...힘든.. 난위도가...중정도 되죠?^^;;
중은 아니고..중하~그냥..조용히 산책코스정도^^
글 한줄한줄 읽는내내 첫사랑을 오랜만에 만난듯 설레였네요 책.. 정약용과 형제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미쳐야미친다,책벌레들 조선을 만든다 ..등등 책속에서만 만나오다 다산초당 사진을 보니 이번주말에라도 괘나리봇짐싸서 강진으로 출발해야겠는데요 좋은정보 감사해요 ^^
다산초당 가볼만합니다~~초당에서 보면 강진만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고...다산 전시관도 있어서요..조용히 산속을 산책하면 정약용의 유배시절을 떠올리며 그가 했을 고뇌와 저서를 집필할때의 감흥을 조금이나마 느낄수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