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7
태준은 여자란 알다가도 모르는 게 여자라고 누군가 한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는 듯 생각했다. 그런 그녀에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는 경험한 바도 없고 모든 게 애매했다. 오래전 친구였던 두 사람, 혜영과 영전, 한 사람에게는 친구로서 도리를 다 했고 또 한 사람에게는 사랑을 다 했지만 결과로는 모든 걸 다 잃고 방황하던 중 오랫동안 그를 기다린 혜영을 다시 만나 어떻게 해야 할지 그의 상식으로는 난감했고 고민이었다. 사랑을 알만한 나이에 한 사람에게 모든 걸 쏟아부었고 정진했던 그는 그 사랑이 파국으로 끝날 때 자기는 더 이상의 사랑은 없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혹 결혼이라는 걸 할 때는 사람 사는 한구석의 평범한 결합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오랫동안 기다린 혜영을 만나고 또 다른 사랑이 있을 수 있느냐 하는 이원론적 사랑이 존재할까 곰곰 생각해 봤다.
태준은 혜영의 시를 읽고 있다. 혜영은 그리움에 대한 시를 많이 썼다. 찢고, 까불고, 헐뜯는 시대를 부정하고 저항하는 시니시즘에 대한 시도 썼지만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애틋함을 표현한 순정적이고 애잔함에 절은 시도 꽤 썼다. 그녀는 사랑이라는 본디의 절실함에 주안을 두고 자기 고통과 슬픔을, 그리고 그리움을 절절하게 써 내려갔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혼자라는 어설픈 외로움은 그녀의 시작(詩作)의 원천인 듯 자신의 시를 더 성찰케 더 성숙하게 했다. 태준은 요 며칠 혜영을 접하거나 시를 읽으면서 그녀의 마음을 확실히 알았지만 모든 여건이나 여러 상황에서 어쩌지 못하는 자기 모습을 다시 한번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춘천에서 헤어진 지 4 일이 됐고, 오늘도 저녁 10 시쯤 하는 혜영의 전화는 어김없다. 되도록 같은 시간에 걸려오는 그녀의 전화는 첫 대화가 매일 똑같다.
"저녁은 먹었어요."
"응, 먹었어."
걱정하는 말로 시작해서 별 실없는 이야기는 말리지 않으면 끝이 없다. 그녀는 경험이나 실생활에서 얻어지는 가지가지를 어떻게 하든 20 분 이상 이야기하며 시간을 채우려고 작정하듯 막무가내로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하지만 지금은 캔버스에 밑그림 작업을 하고 있는 터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하소연하듯 자제를 요구한다.
"혜영아, 지금 통화하기가 뭐 한데 내가 이따 전화할게"
"형 누구랑 같이 있어요?"
뭔가가 반갑거나 항상 혼자라는 결코 유쾌하지 못했던 그였다. 강원도에서 돌아와서 며칠 혜영과 통화하고 후의 태준은 그녀와 멀어졌던 모든 것들이 많이 너그러워져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그동안 친구나 일터에서 용무나 의식적인 안부 전화 통화 외에는 긴 대화가 없었는데 혜영과 긴 통화에서 그가 아직 세상에 존재하고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그렇게 싫다거나 의식적으로 피해야겠다는 그런 마음은 많이 누그러졌다. 지금 무얼 하고 있다는 그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애교 섞인 말로 자기가 알면 안 되냐 하는 말에 태준은 결국 붓을 놓고 탄식하듯 그녀의 이름을 또박또박 말한다.
"인, 혜, 영!"
그녀는 이제 한 술 더 떠 능청을 보탠 듯 간드러지게 두 마디로 그의 마음을 누그러트린다.
"으응... 왜 허니"
태준은 그가 하던 작업에서 손을 놓고 창가로 가 창문을 활짝 열어 방 안 공기를 순환시키고 심호흡을 한 뒤 본격적으로 그녀의 의도에 순응이라도 할 듯 기분 좋게 대꾸한다.
"매일 전화하지 말고 이틀에 한 번씩 했으면 해, 하루는 되도록 같은 시간에 내가 할 테니까, 그리고 저녁에 한 번만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때?"
태준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한두 번씩 하는 그녀의 전화가 부담되고 미안했다. 하루 씩 번갈아 하는 게 그로써는 마음이 편할 듯싶었다. 그녀와 만남에서 차츰 일어날 수 있는 많은 일들에 그의 생각과 의지를 분명히 해 줌은 그녀에 대한 배려가 아닌가 생각했다. 당장 그녀에게 어떻게 해보리라는 마음이나 생각은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자격지심이다. 또한 그녀의 지금 모습에 무턱대고 밀어내려는 그의 생각이 혹시 오만이 아닐까 도 생각했다.
"형이 하루하구 내가 하루하구 그렇게 말이지?"
"그래, 하루에 저녁에 한 번만!"
"콜, 콜, 좋아요. OK."
작은 합의지만 서로 숨겨져 있던 심경을 토로하고 서로의 뜻을 일치하는 그들의 표정은 밝았다. 특히 혜영은 그의 말에 행복해했다. 이제는 부담을 느끼지 않고 마음 놓고 전화를 해도 되기 때문에 홀가분해했다. 며칠 안 됐지만 그녀의 일단 저지르고 본, 계획된 의도는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면 매일 만나야만 어떤 결과든 확인할 수 있지만 서로 먼 곳에 떨어져 있다 보니 그럴 수는 없었다. 부담을 주건 어떻게 생각하든 그저 하루에 한두 번씩 끈질기게 전화하리라 마음먹은 게 통한 것이다. 그와 또 한 번의 만남은 이제는 그녀만의 의지가 아니고 상호 화합에 의한 노력만이 좋은 결말을 볼 수 있을 것 같아 하나씩, 하나씩 첫 단추 끼 듯 의도한 바를 시도한 것이다. 인터넷 찾기에서 첫 글자만 두들겼는데도 자동모드로 전환되어 죽 나열되어 클릭만 하면 찾아지듯 이제는 만사가 순항일 것 같았다. 혜영은 이제 대범해졌다. 오랫동안 애만 태우고 그리워했던 그녀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할 자신이 있었다. 그를 처음 봤을 때, 새파란 청춘에 속으로만 앓고 그리워하며 산 자신이 억울하다고까지 생각했다. 그와 영전이 그녀가 부러워하는 사랑을 할 때 둘이 눈치채지 않게 억지웃음을 짓거나 뒤돌아 울거나 하며 자신을 모질게 이끌어가면서까지도 지나쳐버린 세월들이었다.
8
내일이면 10 월의 마지막 토요일, 또 한 번의 낭송회 날이다. 혜영은 태준과 함께 하는 낭송회를 항상 상상으로만 그리곤 했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것도 일 년 행사 중 제일 중요한 '시와 음악과 깊은 가을에 그대와 함께'라는 타이틀이 있는 낭송회에 그와 함께 하는 것은 기쁨이고 설렘이었다. 벅차고, 이루 말할 수 없고, 숨길 수 없었던 그리움에 자기 사랑의 믿음을 확인한 그녀의 그윽한 안도의 미소가 입가에 그득했다. 좀 더 적극적이고 과감한 그에 대한 표현은 더욱 자신감을 갖게 했다.
"저녁은 먹었어요."
"응 먹었어. 내일 지하철을 10 시쯤 탈 예정이니까 11 시 반 즈음에 도착할 것 같다. 그 시간 괜찮아?"
"괜찮아요. 시간 맞춰 역으로 나갈게요."
"운전 조심하고, 조금 늦는다고 누가 안 잡아가니까!"
"호호, 꼭 내 남편 같네, 알았어요. 허니."
혜영은 한 번 '허니'라고 부른 뒤에 이젠 입에 붙어 틈만 나면 그에게 허니라고 대놓고 부른다. 태준이 자꾸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이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사랑이라 생각하고 악착같이 더 하는듯했다. 그 기분은 예전에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촉촉한 설렘이었다. 말을 할 때 아무것에서도 숨기지 않고 꺼리지 않는 마음이지만 조금은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모르며 그에게 내 보이고 싶은 노골적 욕망의 언저리에서 배어 나오는 말이었다. 사랑은 모자라고 부족한 걸 채워주는 어떤 열정으로 시작되는 게 사랑이다. 자기감정을 충실히 내 보일 때 일말의 계기가 되고 언젠가는 그 사랑이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혜영은 잠이 오지 않는 듯 앉거나 이리저리 뒤척이다 커튼이 젖혀진 창문 밖 구름 사이로 지나가는 듯한 그믐달을 보았다. 저 그믐달이 지면 곧 여명이 오겠지, 하는 생각을 하고 그리고 찬란한 태양이 떠 저쪽 동쪽 창을 밝게 비추면 아침이 오고 정오가 될 즈음 그를 다시 볼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하다 잠이 들었다.
9 시 13 분에 은영이가 전화를 안 했으면 세상모르고 더 잦을 것이다. 분명 휴대폰 알람을 맞추어 놓았는데 확인해 보니 아주 멀쩡한 휴대폰은 오전 오후 중 오후 8 시를 가리키고 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이따구 정신 어디다 쓸 거야! 인 혜영.' 혜영은 자책 끝에 멋쩍은 듯 피식 웃으며 서둘러 샤워실로 갔다. 느긋하게 콧노래가 나올 판에 이렇게 서둘러야만 하는 자기 자신이 한심하고 바보 같다 느꼈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 그래도 20 분 정도 여유시간이 있어 진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이 씨와 그리고 김 교수와도 통화를 끝내고 보고 싶은 그를 맞으러 거길 떠났다.
토요일이라 춘천 역사는 인파로 넘쳐났다. 형형색색의 울긋불긋한 옷차림에 절정의 단풍 구경을 하려는 사람들로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고즈넉한 소양 호수에 비치는 주변 야트막한 산들의 단풍들은 풍경은 삶에 찌든 도시 사람들을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혜영은 개찰구에서 나오는 태준을 보고 두 팔로 목을 껴안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다. 그러나 사람도 많고 그런 모습이 좀 특이할까 봐 꾹 참고 대뜸 팔짱을 끼고 행복한 함박웃음을 지으며 스무 살 처녀가 하듯 내내 걸어가면서 깡충깡충 뛴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그의 팔에 팔짱을 끼고 얼굴을 기대어 나란히 하는 자기 모습에, 지금 지진이 일어나 이 에스컬레이터가 엿가락처럼 구부러져 완전히 망가지더라도 나는 그의 옆에서 꿈쩍도 안 할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형 우리 밥 먹고 가요. 가는 길에 괜찮은 집이 있어"
"난 산 머루 식당이 좋은데. 왜?"
"지금 그 집에서 먹으려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해요. 레스토랑에 예약해 놨어요."
두 사람은 옴팡진 숲 속에 예쁘게 들어앉은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안내되어 창가 쪽으로 가 자릴 잡고 앉았다. 식당이 언덕에 있었던지라 창밖 풍경은 여기저기 심어진 가을꽃과 함께 여느 곳에도 비길 수 없이 대단했다. 바로 건너 계곡 사이로 흐르는 물은 아무 데서나 똑같은 조건으로 흐르지 않는 묘한 침묵(?)의 이야기였다. 식당 안에서 듣기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 분위기는 낭만적 감상이었다. 여기 오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에 젖어 맛있는 식사, 서로 애틋한 마음으로 연민마저 포옹해 버리라는 듯 모두에게 축복과 평화를 주는 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혜영이 '여기 분위기 어때?' 하며 생긋 웃는 게 꼭 어릴 적 태준이 은근히 좋아했던 초등학교 짝꿍 같다 생각했다.
"형 스테이크 좋아해서 형 건 안심스테이크를 미리 주문했는데 괜찮아?"
"음, 기대되는걸, 넌 파스타겠지?"
오랫동안 헤어져 있어 늘 궁금했었는데 서로 호혜 하는 것에 잊지 않고 관심을 가져주는 건 특별한 주고받음이다. 혜영이 울컥하며 꼭 해녀 숨비 소리 내듯 안도의 긴 숨을 내쉰다. 혜영은 선듯 그가 저쪽 너머에 있는 어떤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아무 꾸밈도 없고 자유분방한 그의 우직한 사랑 같았다. 그와 먼 훗날이나 어떤 가능성의 바라봄에 대해서 드러나는 윤곽을 희미하게나 어렴풋 상상해 보는 혜영의 마음은 조금은 서글프지만 편안했다.
둘은 식사를 끝내고 밖으로 나와 차가 있는 곳까지 천천히 걸어간다. 혜영은 '어제 만난 사람이 누구게?' 하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식당 쪽으로 뛰어갔다. 태준이 무슨 영문인지 의아해하며 뛰어가는 혜영에게 왜 그러냐고 소리쳐 물었다. 순간 그녀는 '바보 멍청이 머저리'를 속으로 자꾸 외치며 대꾸도 없이 식당 안으로 사라졌다. 화장실 거울 앞에서 헉헉거리는 숨을 고른 뒤 큰 실수라도 한 듯 주먹을 쥐고 위아래로 흔들며 또 한 번 바보 멍청이 머저리를 누가 보건 말건 이번엔 소리 내어 말한다.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그를 다시 침울에 빠트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은 '만난 사람이 누구게'의 누구게라는 단어가 입 밖에 나올 때 영전을 생각하며 말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제 영전과 약속해 만난 날이었다. 전전 번 주 일요일에 전화를 해 이번 시 낭송회에 오기로 약속한 것이다. 금요일 오후에 와서 일요일 오후에 갈 예정으로 일정도 잡아 놓았었다. 잡혔던 약속을 혜영은 전화로 태준을 만났다는 얘기를 하지 않고 만나서 자기 현재의 태준에 대한 생각과 입장을 이야기하려고 취소하지 않고 어제 만난 것이다.
"미안해요. 깜박 놓고 온 게 있어서……"
"그런데 조금 전 무슨 말하려고 했나?"
혜영은 조금 당황하며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장난이라도 칠 듯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넣은 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머리를 도리질하며 태준의 가슴팍으로 파고들며 그를 뒷걸음치게 한다.
"어-어 넘어져 그만"
외치듯 말하며 그녀의 어깨를 잡고 백팔십 도로 돌려 한쪽 팔로 어깨를 껴안아 꼼짝 못 하게 한다. 혜영은 순간 세상을 다 얻은 듯 그의 품에 안겨 자신의 팔로 그의 허리를 감싸고 얼굴을 올려다보며 행복에 취한 듯 입가에 웃음이 가득하다. 그러나 하나의 행동에 각기 다른 생각을 한다는 건 참 슬픈 일이다. 태준은 장난을 저지했다고 생각했고 혜영은 그의 행동이 언뜻 얼핏 긍정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