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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만 해 먹고…” 거인병 몰라 희생된 2m5㎝ ‘코끼리 센터’
정영재입력 2023. 2. 11. 00:02수정 2023. 2. 11.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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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농구 스타 김영희
농구인 김영희(1963~2023)씨가 6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는 2월 1일자 부음 기사를 보고 잠시 멍했다. ‘코끼리 센터’라는 별명을 얻으며 1980년대 여자농구 인기에 한몫 했던 그는 ‘거인병’이라 불리는 말단비대증과 그로 인한 합병증으로 오랜 세월 외로운 투병 생활을 했다.
나는 2016년 1월, 김영희씨가 혼자 사는 경기도 부천의 다세대 월세방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나에게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얘기들을 들려줬다. 우리는 금세 “누님” “동생”으로 부를 만큼 친해졌다. 그는 몸도 아프지만 ‘이용만 당하고 버려졌다’는 배신감에 더 힘들어했다. 그럼에도 세상을 밝고 맑게 살려고 애쓰는 모습에 뭉클했던 기억이 난다. 그는 말을 재미있게 했고, 다른 사람 흉내도 잘 냈다. “생긴 건 이렇지만 마음은 솜사탕이랍니다. 호호호”하면서 짐짓 애교를 부리는 모습이 짠했다.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다.
1984년 LA 올림픽에서 김영희와 함께 대한민국 구기 사상 첫 은메달을 따낸 박찬숙 여자농구연맹(WKBL) 경기운영본부장은 “영희는 늘 먼저 전화해서 ‘언니, 도와줘서 고마워요’라며 안부를 묻던 싹싹한 친구였어요. 두 달 전에 넘어지면서 목뼈가 부러졌고, 병원에서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다고 해서 요양원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쳤다고 하네요”라며 안타까워했다.
놀리는 꼬마들 사탕 나눠주며 친구 돼
김영희씨가 2002년 10월 모교인 숭의여고를 방문해 슈팅 시범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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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씨가 2002년 10월 모교인 숭의여고를 방문해 슈팅 시범을 보여주고 있다. [중앙포토]
경남 언양에서 태어난 김영희는 아주 작은 신생아였다고 한다. 할머니가 “손녀딸이 너무 작아서 걱정이니 정상적으로 잘 크게 해 주세요”라고 백일기도를 드릴 정도였다. 다섯 살부터 키가 쑥쑥 크고 몸도 커지기 시작했다. 아버지(1m65㎝) 어머니(1m63㎝)도 보통 체격이고, 남동생(1m78㎝)도 평균보다 조금 큰 정도인데 김영희는 중학교 2학년 때 1m85㎝가 넘었다고 한다.
단지 키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부산 동주여중 농구부에 들어간 김영희의 인생은 박찬숙과 운명처럼 엮여 있다. 70~80년대 여자농구는 화장품업계 라이벌 태평양화학과 한국화장품의 맞수 대결이 불을 뿜었다. 숭의여고 1학년 때 이미 국가대표가 된 박찬숙(1m90㎝)을 영입한 태평양화학은 무적이었다. 한국화장품은 박찬숙과 맞설 장신 센터를 발굴하기 위해 전국을 뒤졌고, 동주여중의 김영희를 점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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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시절 부산에 온 실업배구팀 코치가 김영희를 본 뒤 서울로 ‘보쌈’을 해 버린다. 김영희에게 배구 기본기를 가르치던 코치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그를 경찰병원에 데려가 정밀검진을 받게 했다. 의사가 “이 아이는 그냥 놔 두면 앞으로 얼마나 더 클지 모릅니다. 그런데 수술을 받으면 성장을 멈추게 될 겁니다”고 말했다는 게 김씨의 증언이다. 코치는 이후 김영희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거인병 증세가 나타났는데도 말이다.
몇 달 뒤 김영희는 다시 동주여중으로 잡혀와 농구를 계속 했고, 숭의여고로 진학해 박찬숙의 후배가 된다. 2m2㎝까지 자란 김영희는 한국화장품에 입단해 1984년 농구대잔치에서 태평양화학을 누르고 팀에 우승을 안긴다. 본인은 득점왕·리바운드왕 등 5관왕에 오른다.
김씨가 당시를 회상했다. “그때가 내 인생의 최고 전성기였죠. 그런데 거울로 몸과 얼굴을 보면 이건 여자가 아닌 거야. 그 뒤로 3년 동안은 거울을 안 봤어요. ‘운동을 잘하라고 하늘에서 이런 몸을 준 모양이다’고 속으로 정리를 했죠.”
화려한 시절도 잠시, 거인병이 진행되면서 김영희는 87년에 쓰러져 뇌종양 수술을 받는다. 은퇴한 그는 합숙소를 나와 세상과 맞닥뜨려야 했다. 사람들은 등 뒤에서 수군거렸다. “아이고 엄청 크네. 저게 남자야 여자야?” 그런데도 2m5㎝까지 커진 김영희는 자신이 거인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2002년 10월 21일, 중앙일보 문병주 기자가 ‘키가 커서 슬픈 전 농구대표 김영희’라는 제목으로 김씨의 거인병 투병 사실을 특종 보도했다. 김영희 관련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던 KBS에서 그에게 정밀진단을 권했다. 자기공명영상촬영(MRI)을 통해 말단비대증임을 확인한 그는 사흘 밤낮을 울었다고 한다.
“나보다 힘든 사람이…” 장애인 시설 봉사
1984년 농구대잔치 신용보증기금과의 경기에서 골밑 슛을 시도하고 있는 김영희.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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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농구대잔치 신용보증기금과의 경기에서 골밑 슛을 시도하고 있는 김영희. [중앙포토]
“감독·코치님들은 왜 병원에 가 보자는 얘기 한 번 안 하셨나. 키 크다고 이용만 해 먹고…. 지금도 묻고 싶어요. 왜 나를 그렇게 학대했는지. 증상이 심해져서 체중이 130㎏까지 나갔을 때는 살찐다고 물도 못 먹게 했다니까요.”
그 후 김영희는 서울 제기동 집에만 틀어박혔다.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구름아, 나랑 친구 하자는데 어디로 가니’라며 혼잣말을 했고, 독한 양주를 병째 마시고 밤에는 속이 아파 데굴데굴 굴렀다. 유일한 친구였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마저 2년 뒤 암으로 돌아가셨다.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린 김영희는 7개월간 곡기를 끊었다. “누나까지 가면 난 어떻게 살아”라며 울부짖는 남동생과 친어머니처럼 돌봐준 지인의 정성에 그는 마음을 열었다. 미움도 원망도 놓아버리기로 했다. “거인 아줌마”라며 놀리던 꼬맹이들에게 사탕과 과자를 나눠줬고, 호박죽을 쒀서 독거 어르신을 대접하기도 했다. 파주에 있는 중증 장애인 시설에서 봉사하면서 ‘나보다 힘들게 사는 사람도 있네’라며 삶의 의지를 추스르기도 했다.
말단비대증은 성장호르몬 이상으로 인해 신체와 장기가 비정상적으로 커지는 병이다. 코·입·손발 등 신체 끝부분이 더 심하게 커진다고 해서 말단(末端)비대증이다. 씨름 천하장사를 거쳐 격투기 선수로 뛴 최홍만(2m17㎝)도 2008년 말단비대증의 원인이 되는 뇌하수체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다. 생전에 김영희씨는 최홍만에게 “빨리 병원에 가서 정밀진단 받아 봐라. 나처럼 이용만 당하고 버려지는 신세 되지 말고”라며 충고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스포츠에서 키가 큰 건 장점이지만 지나치게 큰 사람은 동작이 굼뜨거나 기본기가 떨어진다. 남모르는 질병이나 부상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다. 혹독한 훈련, 호기심 어린 시선, 원인도 모르는 병마로 힘들어하다 쓸쓸히 경기장을 떠난 ‘골리앗’ ‘기중기’ ‘코끼리’들이 있었다.
박찬숙 위원장은 “영희는 나보다 키는 컸지만 기본기가 확실하게 잡힌 선수가 아니었어요. 정상적이지 않은 몸으로 그 힘든 운동을 했으니 얼마나 고통이 많았을까요. 영희가 하늘나라에서는 아프지 않고 편안한 안식을 얻었으면 좋겠어요”라고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 ‘신체 자본’에 소모된 김영희…몸이 쓰는 한 편의 시 못 봐
「
김정효 서울대 외래교수 (체육철학)
김정효 서울대 외래교수 (체육철학)
스포츠는 인간의 몸으로 이루어지는 가장 아름다운 문화 장르다. 높이뛰기 선수 우상혁은 자신의 몸으로 날아올라 하늘의 문턱을 뛰어넘는 듯한 감동을 선사한다. 손흥민의 정교한 드리블, 허웅의 림으로 빨려드는 슛은 인간의 몸이 쓰는 한 편의 시다.
그러나 거기에 인간의 욕심이 개입하면 몸은 뒤틀리고 왜곡된다. 그걸 드러내는 말이 ‘신체 자본’이다. 몸이 자본이 되는 순간 이윤의 희생양이 된다. 김영희의 몸은 이윤(이익)을 추구하는 타자의 것이었다. 운동선수로서 김영희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고 언제나 타자의 이익과 영광을 위해 소모되었다.
소모품으로서 선수의 몸은 기계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골리앗이 되고, 기중기가 되고 공을 실어 나르는 코끼리가 되었던 것이다. 운동선수들의 몸에 붙는 이런 기호들은 몸을 대상화하고, 그 대상화된 몸을 즐기는 새디즘적 관음증을 부른다. 인간의 몸은 어떤 다른 기호로도 대체할 수 없다. 운동선수의 몸은 그 자체로 목적이며,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2m가 넘는 신장은 다만 그 선수의 삶의 조건일 뿐이다. 몸의 차이는 삶의 차이만큼 신성하다.
우리는 운동선수의 몸에서 아름다움을 보아야 한다. 슛, 드리블, 패스는 인간의 몸이 쓰는 시인데, 왜 우리는 김영희의 몸에서 시를 보지 못했을까? 김영희의 죽음은 이런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차이를 있는 그대로 보는 관용과 따뜻함. 그 마음의 부재가 김영희를 일찍 보내게 했는지도 모른다.
」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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