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크리스마스 / 양희용(일섶)
5월에는 밀양에 간다. 통일신라 시대에 농사를 짓기 위해 축조한 위양지를 산책하고, 수많은 물고기가 굳어져 너덜겅이 형성되었다는 설화가 있는 만어사를 둘러보고 나면 선조들의 지혜와 자연의 오묘함을 한껏 느낄 수 있다. 시골밥상으로 점심을 해결한 후, 밀양댐으로 가기 위해 ‘밀양시 단장면 고례리’를 내비에 찍는다.
고례리 일대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움막에 기거하면서 돌도끼로 삶의 터전을 일구었고, 수정처럼 흐르는 맑은 물과 수려한 산세에 구름을 타고 온 신선들이 쉬어갔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30여 년 전, 아늑하고 평온한 마을에서 260여 명의 주민이 농사를 짓고 살았지만 1991년 11월 공사를 시작한 밀양댐이 2001년 11월 완공되면서 전설과 농민들의 애환은 물속에 잠겨버렸다.
미물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 죽음을 맞이하려는 귀소본능을 갖고 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고사성어는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어느 가문이든 선산을 중시하고 누구든 세상을 떠나면 고향에 묻히기를 바란다. 살던 곳이 물속에 잠겨버린 수몰민들에게 고향은 향수, 동경, 바람과 같은 추상명사가 되어버렸다. 눈으로 볼 수도, 두 발로 걸어갈 수도 없어 “저기, 물밑이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야.”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적신다. 그들은 치유할 수 없는 서러움과 해결할 수 없는 숙제를 가슴에 안은 채 눈을 감아야 한다.
한국수자원공사에서는 수몰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망향정과 생태공원을 만들었다. 특이하게 밀양댐 입구, 6㎞ 도로변에 1,000여 그루의 이팝나무 가로수길도 조성하였다. 오래전부터 우리 선조들과 함께 살아온 이팝나무를 보면서 그리운 추억과 애달픈 심정을 달래보라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나라에 500년 이상 된 이팝나무 천연기념물이 몇 그루 있고 마을의 당산목으로 정해놓고 해마다 제사를 지내는 곳도 있다. 전국에 벚나무와 은행나무, 포플러와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은 쉽게 찾아볼 수 있으나 이팝나무 가로수길이 조성된 곳은 몇 곳에 불과하다.
이팝나무의 명칭은 꽃이 온 나무를 덮을 정도로 피었을 때, 멀리서 바라보면 꽃송이가 사발에 소복이 얹힌 흰 쌀밥처럼 보여 ‘이밥나무’라고 부르다가 ‘이팝’으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여름이 들어서는 입하入夏에 피기 때문에 ‘입하목’이라 명명하다가 입하가 연음되면서 ‘이파’ ‘이팝’으로 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농사꾼들은 이팝나무에 꽃이 만발하면 풍년이 들고, 꽃이 잘 피지 않으면 흉년이 온다는 민속신앙을 믿고 있다. 여전히 이팝나무의 ‘하얀 눈꽃’을 ‘쌀밥’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의미다.
봄이 오면 꽃들은 거사를 일으켜 노랗고 희고 붉은 꽃망울을 경쟁적으로 터트린다. 3월에는 매화를, 4월에는 벚꽃을, 5월에는 이팝나무를 보기 위해 상춘객들은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날, 매화는 1층에서, 벚나무는 2층 높이에서 꽃비를 뿌린다면 키가 20M까지 자라는 이팝나무는 3·4층에서 꽃눈개비를 흩뿌린다. 이팝나무꽃은 매화와 벚꽃보다 화려하지 않으나 만개한 꽃을 훨씬 오래 유지하는 넉넉함이 돋보인다. 운전하거나 길을 걷다가 잠시 쉬기 위해 이팝나무 아래에 서면 풍성함과 여유를 느낄 수 있어 좋다.
사람들은 언젠가 보았던 눈 내리는 멋진 장면을 추억하거나 마음속으로 상상하기도 한다. 나에게도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철책 근무를 서면서 눈이 펑펑 내리고 쌓일 때 전방에 보이는 비무장지대 야산에서 고라니 두 마리가 평화롭게 뛰어가는 그림.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폭탄으로 터진 옥수수가 팝콘이 되어 하늘에서 눈처럼 쏟아지는 화면. 몇 년 전 차를 몰고 밀양댐 이팝나무 가로수길을 달릴 때, 강풍이 불면서 이팝나무의 꽃잎이 시야를 가릴 정도로 퍼붓는 광경. 그중 이팝나무에서 대설 주의보가 내린 것처럼 꽃눈이 쏟아지는 풍경은 놀라움과 함께 두려움을 느낄 만큼의 장관이었다.
생전 처음 겪는 이팝나무 눈꽃 폭설에 마음이 설레고 신비스럽기도 했으나 너무 당황스러워 더는 운전할 수 없었다. 마침 ‘카페 평리’라는 휴게소가 보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눈꽃세례를 맞으며 가게로 들어섰다. 생각보다 손님이 많아 마음이 편안했다. 따뜻한 커피와 조각 케이크를 주문하고 창가에 앉아 하염없이 내리는 5월의 봄눈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부산의 남포동에서 해마다 열리는 ‘부산 크리스마스트리 축제’에 갔던 일이 떠오른다.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산타 복장을 한 젊은 남녀가 성탄절 축하 노래에 맞추어 흥겹게 춤추는 장면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날, 춤을 추던 젊은이들의 모습이 카페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서빙을 하는 30대 부부의 미소에 오버랩되어 나타난다. 실내에 놓인 화분의 키 큰 나무가 성탄 트리로 보인다. ‘아! 그래. 오늘은 하늘이 나에게 내려준 특별한 날, 5월의 크리스마스다.’ 살면서 최고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약간 묘한 감정이 풀리면서 얼굴이 상기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화이트 크리스마스’란 캐럴의 가사가 입안에서 계속 맴돌았다.
나는 평범한 무신론자에 불과하지만 삼십 대 중반까지 크리스마스날에 눈이 내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소망은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30년이 지나 이팝나무의 눈꽃을 보면서, 우리가 바라는 날은 평생에 한 번만 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 마음속에는 12월 25일뿐만 아니라 꽃잎이 눈처럼 쏟아지는 봄날, 단풍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날도 크리스마스다. 그날이 왔다고 특별히 좋을 것도 없지만 그리운 사람이나 생각지도 못했던 행운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괜히 밖으로 나가고 싶은 날이다.
여행은 혼자 다녀야 느낄 수 있다. 5월의 입하 전후로 바람이 강하게 분다는 예보를 들으면 밀양댐으로 차를 몰고 달려간다. 갈 때마다 그때만큼의 이팝나무 눈꽃을 볼 수 없더라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과거와 미래의 시간 여행을 떠난다.
수몰민들의 마음에도 이팝나무 눈꽃이 스며들어 풍요롭고 즐거운 날들이 이어졌으면 좋겠다.
첫댓글 홍윤선 카페지기님.
부족한 글, 카페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밀양댐 가는 길
저도 종종 갑니다
계절마다 꽃을 피워올리는 나무들의 축포같은 환영을 받는 날도 만납니다
봄이면 벚꽃 이팝나무 은행잎ㆍㆍㆍ
산 정상에 있는 댐도 엄마품처럼 안온한 곳
선생님의 그곳 추억을 읽으니 저도 함께 5월의 크리스마스를 느낍니다
조인혜 선생님.
봄가을에 밀양댐 가는 길은 멋진 드라이브 코스입니다.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즐겁게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동유럽 여행 갔다고 돌아 온 날입니다,
좋은 글 읽고 여행에서 지친 마음 힐링 하고 갑니다.
이삼우 선생님.
멀지만 좋은 곳에 다녀오셨군요.
바쁘신데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게 좋은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