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그 말만을 되뇌며 아주 오래 눈물지었다. 그의 손가락이 안경알의 금간 선을 따라가며 흔들렸다. 그는 손에 들린 안경을 계속 매만지며, 그렇게 조용히 눈물 흘렸다. 소리 내어 통곡하는 것이 아닌, 가슴으로 삭이는 슬픔이었다. 나는 그가 차라리 쓰러질 만큼 울어주길 바랐다.
"이것…제발 가져가 주세요."
그는 간절하게 말하며 창백한 손을 가슴께로 그러모았다. 한번도 행복을 쥐어보지 못한 손이 내게 찬란한 영광을 건넸다. 금속 특유의 묵직함이 느껴졌다. 바로 얼마 전 그것을 마지막으로 손에 쥐었던 때가 떠올랐다. 조금 닳은 듯한 매끄러움이 나를 더욱 슬프게 했다. 이것을 닳도록 만진 사람 중에 그가 있다. 내 마음 속에 그의 눈이, 그의 손길이 아프게 스쳤다. 눈을 질끈 감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 펜던트는 사실 반역자의 물건이라고 낙인 찍혀서 받아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지만 내가 그것을 받음으로 그의 슬픔이 조금이라도 덜어지길 바랐다.
"그 안경도 맡기시겠습니까?"
나는 그의 손에 묻어나고 있는 오래된 핏자국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아니오. …이것은…이것만은… 안 되겠군요…."
"그렇…습니까."
슬픔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그것을 당당히 받아내려는 그의 모습은 오래 전에 깨어져 버린 그의 자존심이 빛을 잃지는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 했다. 나는 더 말하지 못하고 안경을 꼭 쥔 채 눈물 흘리는 그와 그 옆에선 그의 여동생을 뒤로했다. 정신이 나가버린 그의 여동생은 내 뒷모습을 보며 웃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손 내밀고도 바보 같이 놓쳐버린 내 친구의 마지막을 함께 보았다. 마음이 시리다. 친구가 사라진 현실 같이 차가운 겨울바람에 스치는 내 마음은 그들이 있는 매음굴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는 벌레 먹었어도 장미였다.
여긴 정말 시골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끊임없이 덜컹거리는 마차는 속을 완전히 뒤집었다. 언제나 수도의 잘 닦여진 길 위로 달리던 마차는 험한 시골길을 이기지 못하고 자주 고장이 났기에 그나마 추한 꼴을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나는 사정이 좋은 편이었다. 어머니는 진작 기절하셨고 누이들 역시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나와는 달리 몸이 약했던 형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몸도 가누지 못하고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그렇게 도착한 이곳에서 어머니와 누이들은 또 한번 기절해야 했다. 나조차도 욕지기가 나왔다. 이건 집이 아니라 움막이다. 지금 생각하면 시골에서도 꽤 큰 편에 속하는, 모자랄 것 없는 집이긴 했지만 당시의 충격은 무엇보다도 컸다. 평민들이나 살 집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도망자의 신분으로 수도의 그 호화스런 집처럼 넓은 홀과 분수, 승마장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메이드도 주방장도 없는 집이라니….
아버지는 화를 내셨던 것 같다. 이 집을 구하고 여기까지 따라온 집사는 몸 둘 바를 몰랐다. 가엾은 누이들은 같은 방을 써야 했다. 그들은 하녀도 없이 스스로 단장을 해야 했다. 짐을 푸는 것도 익숙하지 못해 온종일 난장이었다. 나와 형도 같은 방을 쓰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어차피 나는 형 방에서 자주 잠이 들곤 했었기에 그다지 거리낌이 없었다.
뜨거운 물도 나오지 않고 정원도 없는 믿어지지 않는 작은 집. 그 곳에서 담담한 것은 한 사람, 형뿐이었다. 사실 그는 평소에도 침착한 성격이었다. 이곳에 막 도착했을 때는 몸이 안 좋아 내 부축을 받았지만 이내 원래의 침착함을 되찾고 집을 둘러보았다.
"난 이런 곳에서는 못살아요!"
어머니가 눈 뜨자마자 제일 먼저 하신 말이다. 누이들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엾은 그들은 서로의 치마끈을 묶어주며 울었던 것이 분명했다. 여동생의 리본은 그나마 모양이 있었지만 누나의 것은 형편없어서 마음이 더욱 아팠다. 당차고 아름다운 누나의 눈가에 그려진 눈물자국을 우리는 모른 척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제길!"
아버지는 욕설로 받았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시골로 와야 했죠?"
내가 물었다.
"도련님…. 죄송합니다, 마님. 죄송합니다, 아가씨."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우린 모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우린 목숨을 부지한 것만 해도 행운이다. 단지 수도에서 화려한 생활을 하던 우리가 이런 두메산골로 쫓겨 와야 했던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내 아버지는 이 황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귀족이었고, 내 어머니는 가장 아름다운 귀부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그래, 그분들은 이제 반역자이며 우리는 반역자의 자식이다.
폐하께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제 1황자께선 몸이 매우 약하셨다. 어릴 때부터 그분은 무사나 학사보다는 약사들과 더 가까이 지내셨을 정도였다. 대신 그분은 영민하시기가 따라올 자가 없다는 것이 하나의 위안이었다. 제 2황자께서는 반대로 매우 건강하셨다. 그분은 폐하의 세 번째 언약자인 라일락의 귀비 소생으로 두 황자와 많은 황녀들 중에서 폐하와 가장 많이 닮으셨고 사랑도 많이 받았다. 사냥대회에서 우승은 늘 그분 차지였고 연회에서는 늘 영애들이 따랐다. 사실 내게도 우상이었다. 그러나 그는 제 2황자일 뿐이었고, 당연하게도 황위는 제 1황자에게 있었다. 제 1황자야 말로 폐하의 첫 번째 언약자이며 가장 고귀하신 황비이신 모란의 황비 소생인 것이다. 많은 귀족들이 건강하지 못한 그를 불안해했다. 그리고 암암리에 귀족들은 갈라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제 2황자를 선택하셨던 것이었다.
형은 법도를 거론하며 아버지를 극구 말렸다. 게다가 제 1황자와 형은 퍽 절친한 친구였다. 그들은 학원에서 함께 수학한 동문이었다. 형도 몸이 건강하다기보다는 머리가 뛰어나게 좋아 진작 학원에서 수학하였고, 이내 학원에서 손꼽히는 수재로 이름이 높았다. 그런 그를 제 1황자가 많이 아꼈음은 두말할 나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결정은 단호했다. 솔직히 나도 제 2황자를 믿었다. 제 1황자는 너무 몸이 약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생겼다. 누군가가 제 1황자를 암살하려 한 것이다. 제 1황자의 물 잔에 푸른 독이 묻어있는 것을 발견한 것은 황자의 가련한 시종이었다. 아니, 정확히 그 시종은 몰랐다. 그가 절제된 치장으로 품위를 다한 제 1황자의 방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진 것은 제 1황자가 예정에 없던 친구와의 다과시간을 가진 사이였다. 제 1황자는 평소보다 무리한 탓에 피로감을 느꼈고 의원에게 자신의 방에서 대기하라는 명을 내렸다. 황자가 갑작스레 몸이 편찮으신 것은 흔한 일이었기에 황자의 전속 의원은 시종과 함께 서둘러 제 1황자의 방문을 열었다. 그 때 그들은 탁자 옆에 쓰러져있는 시종을 본 것이다. 시종의 손가에는 검게 변한 물 잔이 뒹굴고 있었다. 감히 제 1황자의 물 잔에 천한 입을 대려했으니 죽음은 정당한 대가라 할 수 있겠지만, 만약 그자가 아닌 제 1황자께서 그 잔을 드셨을 것을 생각하면 그 어리석은 자에게 고마움을 보내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천인공노할 암살은 실패로 끝났고 노하신 폐하께서 이름 있는 기사들에게 명해 암살의 수괴를 잡으라 하셨다. 그들은 모두 문무에 뛰어난 자들이었으며 폐하의 영예를 더욱 빛내는 존재였으므로, 그들에게 그런 임무가 맡겨진 것은 당연했다. 그들은 폐하의 영을 받들어 수도 전체를 뒤져, 죽음과 가장 가까운 푸른 물을 판 자와 산 자를 찾아내었다. 그렇게 시작된 죽음의 선은 황궁으로 이어졌다. 결국 사주한 자로 제 2황자가 지목되면서 제 2황자에 대한 폐하의 애정은 싸늘히 식었다. 제 2황자는 무릎을 꿇고 황좌까지 기어가 형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을, 그리고 충성을 변호하셨지만 이름 있는 기사들이 찾아낸 증거는 검은 벨벳 위의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고 있었기에 제 2황자를 지지하던 자들마저도 그의 결백을 믿을 수 없었다. 반론의 여지없이 제 2황자께서는 변방의 공작이 되셨고-사실 유배되셨으며 제 1황자께서 황태자의 위를 이었다.
그리고 우리를 비롯한 제 2황자의 많은 추종자들이 목숨을 잃거나 직위를 박탈당했다. 오랜 세월 명예를 지켜온 많은 명문가가 어리석은 상민들에게 모멸을 당했으나 그들에게 가장 큰 수치는 반란이라는 오명이었다. 명예로운 피를 지닌 귀족 중 어느 하나가 검은 마음을 품었겠는가. 그들은 진정 나라에 충성할 마음이었다. 그것이 정당한 황위 계승자에게는 반란일지 몰라도 말이다. 현명한 형님의 권고를 듣지 않은 아버지의 오판은 컸다. 황태자와 형과의 사이에 친분이 없었다면 우리 식구는 삼대가 멸족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아버지는 열성이셨다.
이 낡고 허름한 집에서 우리는 지난날을 회상했다. 이곳에 온지 하루도 되지 않았지만 천년은 지난 것 같았다. 활기찬 수도와는 달리 이곳은 무서울 만큼 적막했다. 형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어머니와 누이들은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짐도 채 풀지 않은 곳에서 아버지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의 어깨가 떨리는 것이 보기 싫어 나는 방으로 올라가버렸다.
잠깐 잠이 들었다. 눈을 뜨자 형의 뒷모습이 보였다.
"형?"
"…깼어?"
달빛 아래서 형의 모습은 섬뜩하게 위태로웠다. 나는 마음이 떨려서 형의 손을 꼭 잡았다. 형도 내 마음을 짐작했는지 씁쓸하게 미소 지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형은 나에게 잡힌 손이 아닌 다른 손으로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형의 손은 이상하게 차가웠다. 나는 그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형…. 피곤해?"
"아… 조금…."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누이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형은 이 암담한 현실 앞에서 어떻게 그렇게 담담한지….
"아버지는 술에 취해 잠드셨어."
형은 그렇게 말을 꺼냈다.
"어머니는 울다 지쳐 쓰러지셨고. 아이들이 곁에 있어. 넌 가보지 않아도 좋아…."
내가 황급히 몸을 일으키자 형이 잡고 있던 내 손을 잡아당겼다. 나는 힘없이 그의 곁에 털썩 소리 내며 앉았다. 집 전체가 흔들리는 것 같아 두려웠다. 형은 움찔하는 나를 보았는지 상냥하게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가봐야 신세한탄 뿐이지. 어머니는 지금 아무것도 못하셔. 지난날을 돌아보는 것 외에는."
"형…."
"우린 아직 살아있어. 알겠니, 내 사랑하는 동생아?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도망칠 게 아니야. 부모님과 아이들을 돌봐야 해, 우리가."
형의 말이 백번 옳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해?"
나는 열여섯이었다. 형도 열여덟이었다. 우린 아직 어렸다.
문제는 돈이었다.
모든 것이 압수되었기에 가지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대로 전해져 오던 펜던트는 지킬 수 있었지만 그것을 팔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비록 반역자의 물건이라 해도 그 아름다운 펜던트는 고가에 팔릴 것이 분명했지만, 그것은 우리 가문의 마지막 남은 영광이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위대한 선조 용사 로드릭이 황제께 받은 훈장이다. 순금으로 만들어져 있어 언제라도 빛을 잃지 않았고 가운데 박힌 금강석이며 홍옥은 그 순도가 매우 높은 고가의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당대에 가장 이름 높은 장인이 식음을 전폐하고 자신의 영혼을 쏟아 부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데 과연 그것을 볼 때마다 어떤 고귀한 정신과 혼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의 가슴에서 찬연하게 빛나던 때가 바로 어제 같은데.
형과 나는 암담한 마음을 가다듬으며 우선 집사에게 지금의 사정을 물었다. 그의 오래된 얼굴이 예전과 다름없이 우리를 맞이했다. 마치 그의 어조는 어린 아이들이 다음 날 축제의 일정이 어찌 되는지, 어떤 음식이 나오는지 묻는 것에 답하는 듯 했다.
"아니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아저씨…!"
"도련님들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있습니다. 제가 나리와 마님, 그리고 아가씨들과 도련님들을 아무 문제없이 보살펴드리겠습니다."
그의 충성은 다른 귀족들 사이에서도 이야깃거리가 될 정도였다. 내 부모님 두 분 모두 그를 매우 신임했다. 사실 옹색하긴 하지만 이 안전한 집을 구한 것도 그였다.
"저는 그저 도련님들과 아가씨들이 다 못 배우시고 좋은 혼처를 잡지 못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 얘기는 그만둬요."
형은 집사가 그 말만 꺼내려고 하면 질색을 했다. 조금 웃음이 났다. 웃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세상에 즐거운 일이란 이미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나는 형과 집사가 이상하게 보는 데도 계속 킥킥대며 웃었다. 나중엔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났다. 열이 있나 하고 짚어보는 형의 손이 시원해서 기분이 좋았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사람이 사는 것은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못 살 것만 같았던 이 곳에 조금씩 적응해갔다. 여느 때처럼 아버지는 술에 만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술이 다 어디서 왔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날따라 어머니의 신경도 더욱 날카로웠고 누나도 어딘가 나가고 없었다. 형은 누나와 여동생이 쓰는 방의 창문에 덧창을 단다고 열심이었다. 옛날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지금은 어느새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원래대로라면 형과 함께 덧창을 만들고 있었겠지만 집사의 부탁 아닌 부탁으로 나는 무언가를 잡겠다며 산으로 올라와 있었다. 날씨가 정말 좋았다. 몸이 고되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즐거웠다. 토끼 세 마리를 잡았다. 정말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집사의 시체를 보았다.
"이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로이엘."
형의 침착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형!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추적자인가…산적이 오기라도 했단 말인가…. 내 심장은 수도를 도망쳐 나온 날처럼 미친 듯이 뛰어대기 시작했다. 이제 우린 어떻게 해야 하지…? 모든 것을 도맡아서 해오던 집사가 당하다니…역시 내가 자리를 비우면 안 되는….
형의 흥분 섞인 목소리가 내 귀를 울렸다. 형은 침착함을 가장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형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를 다시 듣고 다시 보니 형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붉었다.
"그가 내게서 펜던트를 빼앗으려고 했어. 너를 내보낸 것도 계획적이었던 거야."
"…그가…?"
우리 가문의 몰락을 보고서도 곁에 있어주던 그가, 헌신하여 우리를 보살피던 그가 사실은 기회를 노리고 있었단 말인가. 우리의 마지막 자존심인 가보를 빼앗으려고… 내 자랑스런 조상인 용사 로드릭이 폐하로부터 하사 받은 이 우아한 펜던트를 가로채려고…. 맙소사.
하나하나 밝혀질수록 절망이 더욱 짙어졌다. 마치 내리쬐는 태양이 강할수록 더욱 짙어지는 내 그림자처럼.
집사가 구해오던 술이 다 떨어졌다. 아버지는 소리를 지르거나 가구를 부수며 난동을 부리다가도 제정신이 들면 눈물을 보이며 형을 또는 어머니를 안고 미안하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이런 모습들은 상상도 못해봤다. 늘 당당하셨다. 연회에선 어머니와 함께 뛰어나게 세련된 모습으로 주목 받으셨던 분이, 사냥대회에서도 훌륭한 무위를 보이시며 폐하의 총애를 받으셨던 분이 지금 거리의 부랑자와도 같이 더럽고 추레한 모습으로 눈물을 흘리고 계신 것이다.
어머니는 누워계실 때가 많아졌다. 힘든 도피여행과 이곳의 적막한 분위기는 어머니께는 어울리지 않았다. 누이들의 고운 손은 찬물에 닿아 텄다. 발그레했던 아름다운 뺨은 수척해졌다.
그리고 그 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를 돈도 뭣도 없어 집 뒤편 산 중턱에 어머니를 묻을 땅을 파며, 형과 나는 끝없이 울었다. 아버지는 그 날 또 어디서 구했는지 술을 입에서 떼지 않았다. 로이나는 쓰러져서 울었지만 누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누나의 슬픔이 작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의 눈은 이미 슬픔을 건너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집사의 주머니에 들어있던 돈은 금세 바닥났다. 시골 사람들이라고 해서 마냥 순박하지만은 않았다. 우리는 이런 시골에서 집 한 채 살 수 있는 돈을 한달 남짓 식비로 썼음에도 생활이 늘 빠듯했다. 우리가 더 순진했다. 로이나는 사과 궤짝을 살 수 있는 돈으로 사과 세 알을 바꿔 오기도 했다. 누나는 어딜 나다니는지 집에 없을 때가 많았다. 힘들었다.
형이 아니었다면 우린 벌써 굶어죽었다. 나는 계속 사냥을 해야 했으며 어느새 산을 타는 것이 익숙해졌다. 누이들은 아름다운 것을 보아온 안목으로 바느질감을 맡아 푼돈을 벌었다. 그들의 손이 헤지는 것은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갈라져 피가 흐르는 손을 서로 부여잡고 우는 누이들을 몰래 보며 마음 아파 같이 눈물 흘렸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계속 술을 드셨고, 난폭해질 때가 많아졌으며, 사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나는 술에 취한 아버지를 보기가 괴로워 종종 고개를 돌리곤 했다.
그리고 달이 빛나는 밤이었다.
"로이엘. 내 말 잘 들어."
형의 어조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우리 그날 밤 나눈 얘기 기억하지?"
"…응. 우리 살아야 한다고."
"그래."
형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얼마나 힘든 결정이었을지 나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깊이 의지하고 있었고 서로밖에 위안 삼을 사람이 없었다. 한 순간도, 난 정말 한 순간도….
"떠나라."
형의 곁을 떠날 것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응."
한 순간도 형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지난 가을 다 낡은 마차를 타고 올라갔던 길을 늦은 눈을 맞으며 터벅터벅 걸어 내려오면서 나는 괜히 눈물이 흘렀다. 분하게 눈을 비볐다. 거친 옷감이 눈가에 닿자 눈이 더욱 아팠다. 형이 챙겨 준 펜던트를 매만지니 떠나라고 말하며 나를 붙들고 오열했던 형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형이 과연 아버지와 누나, 여동생을 건사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으며 발걸음을 떼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용병이 되었다.
막말로 가진 건 몸 밖에 없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몸을 파는 것뿐이었다. 그나마도 좋은 용병단에는 들지 못하였는데, 내 신분이 들통 날까 두려워서였다. 용병이라 함은 그 어떤 가치보다 돈을 우선시하는 게 당연한데, 그들이 내가 반역자의 자식이란 걸 알고서도 살갑게 대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그렇다고 그들이 내게 살갑게 대했다는 것은 아니다- 썩는 시체가 악취를 풍기지 않을 거라 믿는 것이나, 미로에서 길을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바와 다를 것이 없었다.
폐하를 위해 벼렸던 검을 돈을 위해 들다니…. 나는 늘 자괴감에 싸여 다른 용병들과도 어울리지 못했고 그들도 나를 싫어했다. 다른 용병들 때문에 목숨을 잃을 뻔한 적도 많았다.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 그러나 시린 달빛을 보면 기억에 남아있는 그날 밤 형의 위태로운 모습이 생각나 나는 다시금 이를 악물었다. 다행이 나는 여러 교사들에게 검에 재능이 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어느 정도 실력이 있었는지라 전쟁터의 무의미한 창에 죽어나가지는 않았다.
그렇게 모은 돈을 얼마간에 한번씩 집에 가지고 갔다.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직접 움직일 수밖에 없어 그만큼 수입이 줄었으나 집에 가는 것은 즐거웠다. 집에는 잠깐 앉아보고 나서야 할 정도로 시간이 모자랐지만 그럭저럭 안정을 찾아가는 집이 보기 좋았다.
“오빠!”
집에 가면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로이나였다. 그 애는 어려서인지 식구 중에서 가장 밝게 웃을 줄 알았다. 그 애를 보면, 저 남쪽의 일터보다 황량한 북쪽 산이 더 따스하다는 것을 낯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주장하고 싶어지곤 했다.
“로오! 잘 지냈어?”
“오빠야 말로 밥은 챙겨먹는 거야?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온 거야.”
투정부리듯 말 하는 그 애의 얼굴이 평범한 소녀 같아서 슬며시 웃음이 났다. 이 사랑스럽고 귀여운 녀석만은 이대로, 밝게 자라주었으면 했다. 나는 그 애를 크게 보듬어 안았다. 아직 어린 몸이 생기를 발하고 있었다.
“형이랑 누나는? 아버지는?”
“늘 그렇지, 뭐. 큰오빠는 뒷산에 있고, 언니는 몰라. 아버지는… 음, 늘 같아.”
로이나가 미간을 약간 찌푸리며 말했다. 그 작은 입이 삐죽이는 것만큼 귀여운 것이 또 있을까. 내 입가에 웃음이 걸리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누나를 생각하면 젊은 화가가 대담하게 내리그은 난초의 고아한 이파리가 떠오른다. 반면 이 꼬마는 아직 풋풋한 향내가 나는 작고 여린 들꽃 같았다. 나는 말투가 완전히 저잣거리 계집아이 같아진 로이나의 머리카락을 있는 대로 흩트려 놓았다. 로이나는 버둥대며 손을 피하려했지만, 이 정도 아이를 다루지 못할 내가 아니었다. 집 앞에서 로이나와 나는 한참 장난을 쳤다.
“오빠.”
그 애는 작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킥킥 웃던 여운이 남아 난 별스럽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언니 말이야. 어디를 가는 걸까?”
“네가 나한테 물어보면 어쩌자는 거야? 그런 건 네가 알아야지.”
“하지만.”
로이나는 내게 안겨들며 가만히 속삭였다.
“난 언니를 모르겠어. 언니는 늘 당당하고 예쁜 걸. 나랑은 달라.”
“너도 예쁘다고, 이 사랑스러운 꼬마야. 좀 더 웃어봐.”
“오빠. 난 겁쟁이인지도 몰라. 아니, 겁쟁이가 맞아.”
웃으라는 말에 지은 웃음은 힘이 하나도 없어서 순간 가슴이 아렸다. 이 작은 아이도 현실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무언가 크게 잘못된 듯 보였다. 나는 괜찮다는 듯 웃어보려고 했지만 형처럼 능숙하게 되지는 않았다.
“더듬더듬. 이렇게 손으로 짚어봐야 안심하고 가. 내가 앞으로 나아가 가야 할 곳에 도착하는 것보다 쇳덩어리가 눈물에 녹는 것이 더 빠를 거야. 하지만 언니는 다르잖아. 어쩌면 그렇게 거침이 없을까.”
“로오.”
“난… 언니 동생에는 어울리지 않아….”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 같아 황급히 그 작은 머리를 그러안았다. 쾌활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나는 날이 빠진 검을 들고 수만의 적과 맞서는 기분이 되어 그 애를 힘껏 안았다. 그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너, 그런 소리 하면 누나가 네 뺨을 후려갈길 거야. 알잖아, 누나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마, 말하지 않을 거지?”
“아마, 누나가 널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잊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말이야.”
로이나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작은 진동이 되어 가슴에 닿았다. 수도에 있었더라면 이 작은 아이에게 주워들은 멋들어진 말이라도 해 주었을 테지만, 전장에서 들리는 소리는 나를 저주하며 죽어가는 소리나 짐승이 내지르는 마지막 비명뿐이었다.
형이 돌아오기 전까지, 나는 그 애를 안고 겨우 한 마디를 생각해 낼 수 있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전혀 믿을 거리가 못 되는 힘없는 목소리였다.
“결국 나아간다는 게 중요한 거야. 로오, 더듬어서라도 가는 건, 가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형이 돌아왔을 때 우리는 아무 일도 없이 형을 기다렸다는 표정을 지어주었다. 형은 늦은 것을 매우 미안해했다. 게다가 누나가 집을 비워 얼굴을 보지 못하자 형은 더욱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로자는 왜 그리 밖으로 나도는지 모르겠어. 로이나처럼 집안일을 돕지도 않고 말이야."
누나는 형과 쌍둥이로 태어났다. 좋은 혼처가 있었지만 도망쳐올 때 상대 가문은 우리에게 파혼을 통보해왔을 뿐이었다. 그 탐스러운 검은 머리칼과 벌꿀 같은 금빛 눈동자는 사교계의 여왕으로 추대 받기에 걸맞았다. 아름다운 누나는 늘 내 자랑이었다. 그래서 그를 보지 못하고 내려가야 할 때는 큰 기쁨을 잃은 것만 같았고, 형은 그런 서운함을 달래주기 위해 일부러 투덜거렸다. 나는 그런 형이 좋았다.
"이봐. 도련님. 일이야."
이들은 날 도련님이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이름으로 불리는 자는 없었기에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 호칭이 어리바리하던 내 초창기를 비웃는 것이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어떤?"
어떤 일이건 상관없었다. 돈만 벌 수 있다면. 나는 꽤 잔혹하기로 이름이 났을 정도였다. 우리가 잃었던 것을 생각하면 그 어떤 것을 빼앗아도 나는 미안하지 않았다.
"시골 마을에 몬스터가 나온다네. 그거 없애 달라는데? 갈래?"
"어디?"
"그게 좀 멀어서 말이야. 너 마법사의 탑 탐사단에도 지원했지? 아주 빡빡하긴 한데……."
"어디야? 가."
무슨 일이든 상관없었다. 어디라도 상관없었다. 잠시라도 지긋지긋한 시선들에서 멀어지는 것은 오히려 반가운 일이었다. 그러나 다음 날 어느 쪽에서 태양이 뜨는지 내기하지 말라는 말처럼, 그 뒤에 일어난 일은 내가 상상도 못했던 것이었다.
나는 친구를 믿지 않았다. 우리가 도망칠 때 내 친구들은 아무도 곁에 있지 않았고, 용병 일을 하면서도 나에게 도움을 주는 이가 없었다. 순진하기 그지없었던 나에게 배신이란 시린 칼날과도 같았다. 베이면 나을 수 없는 독을 가진 날카로운 비수 말이다. 그 비수를 든 자는 언제나 내가 아니었다.
"혼자 가긴 그렇고 누구와 갈래?"
우스운 질문이었다. 누구도 체력을 낭비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랑 가는 것은 더욱 그랬다. 나 역시 기대하지 않았다. 이미 기대하지 않았다.
"나! 내가 갈래!"
얼마나 놀랐는지 말할 것도 없었다. 용병단 최고의 인기인, 누구에게나 신뢰 받고 사랑 받는 레시였다.
"나, 갈래. 가도 되는 거지?"
"간다면야 가는 거지. 그런데 괜찮겠냐, 너?"
"로이가 괜찮다면 나도 괜찮은 거야. 가겠어."
며칠 전부터 유난히 눈에 많이 보인다 싶었더니, 경쟁심 내지 우월감이 있구나하고 생각했다. 용병단의 사람들 중에서 그와 친하지 않은 것은 나뿐이었으니까. 주변 사람들은 역시나 그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아무 말도 않더니… 포기한 마음에도 괜스레 씁쓸했다. 그러나 레시의 답은 가관이었다.
“나 반드시 로이랑 친해질 거야.”
지금 이게 애들 장난이냐고! 욕이 절로 나왔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남일 뿐이다. 남에게 신경 쓸 시간 따위 절대로 없다, 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마음이 조금 유쾌해지는 것이 가증스러워 들떠 보이는 가슴께를 툭 쳤다. 레시가 빙긋이 웃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 고개를 돌렸다.
“우와아아앗!!!”
래시가 간다고 했을 때의 그 떨떠름한 눈동자들! 이것은 나를 죽이려고 계획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정도로 체력을 소비한 후에는 여기서 안 죽어도 마법의 탑에서 반드시 죽고 말 것이다. 미노타우르스가 나오는 시골마을에 용병을 단 두 명 보내다니, 아니 나 하나를 보내려고 했다니…
“역시 널 죽이려고 하는구나.”
레시가 나직이 말했다. 힐끔 본 그 표정은 여태까지의 그의 표정과는 확연히 달랐다. 장난기 넘치던 눈동자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왜 왔어?”
“응?”
“알고 있었다면 왜 왔냐고.”
말을 주고받는 사이 그 저주 받은 소머리 괴물이 다가왔다. 그 날 없는 도끼는 인간의 몸을 단번에 절단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팔뚝에 힘줄 솟은 것이 강한 생명을 느끼게 했다. 역겹지만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그 정도의 근육을 가지고 있다면 투 핸디드 소드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것이다. 저 놈이 우리랑 말이 통한다면 우리 사는 것도 좀 덜 피곤해질 텐데. 힘든 일은 저 놈들이 하면 좋을 걸.
…….
쓸데없는 생각이 많이 늘었다. 하마터면 베일 뻔한 -혹은 뭉개질 뻔한 적도 많았지만 레시는 의외로 강했고 나를 보호해주기까지 했다. 용병단에 있으면서 그저 얼굴로 먹고 사는 녀석은 아니었다. 미노타우르스 녀석도 역시 얼굴로만 먹고 사는 놈은 아니었다. 한 번 내리칠 때마다 땅이 쩍쩍 갈라지는데 등골이 다 오싹했다. 그러나 비록 강한 놈이었지만 아직 세상물정을 몰랐는지 협공을 통해서 이길 수 있었다. 인간을 좀 아는 녀석이었다면 성공 못했을 테지만 레시가 미끼 역할을 잘 해준 덕에 그 녀석의 상징인 뿔을 부러뜨릴 수 있었다. 뿔이 부러지고 나니 식은 죽 먹기였다. 그냥 소 한 마리 잡는 일과 다름없었다.
완전히 지쳐서 땅바닥에 주저앉았을 때 레시가 말했다.
“널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 무슨 소리야?”
“아까 대답.”
피비린내가 역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손에 뭉클, 하고 잡히는 것은 소의 내장이었으며 발에 차이는 것은 넓적다리였다. 내가 내뱉는 말에서도 피비린내가 나는 듯 했다. 죽음으로 가득한 그 언덕배기에서 레시와 나는 오랜 친구마냥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때 그의 이름이 스피레시이며 그 역시 귀족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뭐, 나는 할아버지 때 쫓겨난지라 아무 것도 몰라. 아버지는 좀 느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아버지도 어렸을 때라, 결국 심각한 것은 할아버지뿐이었다.”
“내가 …그렇다는 것은 어떻게 알았어?”
“누가 널 보고 여염집 아들이라고 하겠어? 넌 처음 왔을 때부터 ‘난 너희들 같이 천한 것들과는 어울릴 수 없어!’ 하는 눈빛이었어. …할아버지랑 같은 눈빛이었다고.”
“난 단지 좀 어색했던 것뿐이었는데…”
“아 그러셔, 도련님?”
“…”
“야. 삐졌어?”
“아니. 그저….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서.”
형. 마음속으로 그를 부르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다. 형은 그저 웃었다. 그 시린 달밤처럼 위태롭게. 불안해졌다. 나는 몸에 힘을 주어 벌떡 일어섰다.
“으왓. 깜짝이야. 놀랐잖아!”
“일어서는 것도 허락을 받나?”
조금 유쾌해졌다. 이런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과거에 그 때의 친우들에게서 느꼈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별 시덥지않은 고민들을 그 때는 심각하게 주고받으며 위로를 주고받고는 했었지. 그리고 그 녀석들은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겠지. 나 같은 것은 잊었겠지. 이젠 잊었겠지. 내가 그들을 잊었듯이.
이왕 일이 이렇게 된 거, 바로 도망쳐버리기로 했다. 죽었다고 생각해주면 좋겠지만 분명 그렇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레시가 얼핏 들었다며 해 준 이야기로는 절대 가능성 없었다. 언젠가 나섰던 전투에서 내 얼굴을 알아보는 자가 있었고, 그는 그의 상관에게 알렸다. 그 상관은 용병단에 압력을 넣었다. 갑자기 짐이 된 나는 바로 폐기처분 되었다. 웃음이 나왔다. 그저 용병단에 두고 온 짐이 아까웠다. 결국 레시가 조용히 가지고 나와 주기로 했다. 무엇보다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돈이었으니까.
레시가 다른 용병단을 알아보는 사이 나는 집에 다녀오기로 했다. 그와 만날 장소를 정하고 뒤돌아선 후 나는 불안한 마음에 다리를 바삐 놀렸다. 형의 위태로운 미소가 눈앞을 떠나지 않았다. 계속.
이보다 더 어두울 수는 없다. 집은 겉에서 보기에 거의 폐가였다. 울타리도 망가져 있었고 창문마다 덧창이 닫혀져 있거나 커튼이 쳐져 있었다. 한여름에 말이다.
“형? 로오?”
문을 열자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랐지만 그것은 문이 낡아서 나는 소리에 불과했다. 발을 디디기가 겁날 정도로 부실해 보이는 현관 바닥 위로 내 그림자가 강렬한 태양을 동반하고 그려졌다. 흡사 내 그림자가 아니라 따로 움직이는 끔찍스러운 생물 같았다.
“오빠.”
로이내 얼굴은 파랗게 보일 정도로 질려있었다. 여름이 시작되고 밖에 나가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가슴에 모여 바들바들 떨리는 손목이 애처로울 정도로 가늘었다.
“집이 왜 이래?”
“…저기….”
이 가엾은 아이는 그저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그 애의 시선 끝에 눈물이 날 정도로 수척해진 형의 모습이 있었다. 형은 사람 같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달려가 형의 손을 부여잡았다. 형이 순간 비틀거렸다.
“형!”
“쉿. 조용히 해라.”
형의 목소리는 예전처럼 아름답지 못했다. 나는 울컥 눈물이 솟았다.
“형…왜 이래? 돈이 모자랐어? 왜, 왜 이렇게 말랐어…? 집은 또 왜 이래, 형, 형….”
“쉿. 진정해라. 올라가자….”
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안쪽에서 굉음이 울렸다. 무언가 단단한 게 부서지는 소리 같았다. 어딘가 낯익은 느낌의 것이 짐승 같은 괴성을 질러대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형… 저…저게 무슨 소리야…?”
“…올라가자.”
“형!”
형의 어깨를 움켜쥐었을 때 난 형이 얼마나 말랐는지 단박에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손아귀에 잡히는 형의 어깨가 어린 소녀 같았다. 형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금세 휘청거렸다.
“…그, 아버지야.”
흔들림처럼 불안한 어조의 말에 난 너무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었다. 저 광기어린 괴성이 아버지의 목소리라니…. 예전 사병들을 다스리던 그 패기 넘치는 목소리였다니…. 저 역한 소리를 듣고 있자니 구역질이 넘어올 것만 같았다.
형이 이끄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이 사실이 주는 충격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어서 이 모든 일에 대한 설명을 듣기 바랐다. 예전의 아버지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라 저 안에 있는 것이 사실은 내 아버지가 아니며,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불행으로 다른 이가 아버지의 행세를 하고 있다고 믿고 싶었다. 아니면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형과 누이들이 나에게 짓궂은 장난을 하려니, 하고 믿고 싶었다.
형의 발걸음은 누이들의 방 앞에서 멎었다. 형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어 구멍에 넣고 힘겹게 돌렸다. 문은 목이 찢기는 새처럼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방 안은 다른 곳과 다름없이 어둡고 무거웠다.
“로자. 로이엘이 왔구나.”
형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리자 침대에서 약한 움직임이 보였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처럼 파랗게 보이는 가녀린 손이었다.
“누나!”
그는 전염병이 돌던 마을에서 보았던 비쩍 마른 시체 같았다. 밤의 빛깔로 아름답게 윤기 흐르던 머리카락은 거칠게 갈라져서, 당장에 조각조각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다행히도 힘겹게 들어올린 눈꺼풀 아래 내가 가장 사랑했던 꿀 빛의 눈동자는 그대로였다.
“…로이.”
누나의 목소리는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소리를 너무 많이 지른 탓일 거다. 온 몸이 상처로 가득했다. 대리석 같던 고운 피부가 가뭄 아래의 땅처럼 갈라져 있었다. 한 마디로 누나는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 있었다.
“형…,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누, 누나가…. 저 더러운 진흙에 구르는 무지한 자들의 짓인가? 짐승의 역한 냄새를 뿜는 무례한 자들이야? 말해봐, 형. 말해봐. 이, 이게 도대체…….”
“…로오는 여기 있어라. 나가자. 내방에 가서 얘기하자꾸나.”
“아니!”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났는지 누나는 비명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별빛 같은 눈이 어둠을 뚫고 형을 바라보았다. 형은 그 눈을 피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또렷하게 울렸다.
“우리가 쫓겨 온 것부터 시작해. 하나도 남김없이. 로이도 알아야 해.”
“그래….”
그의 말은 무너진 동굴에서 새어나오는 것처럼 가냘프고 또한 무거워서 그 말을 들으며 가슴이 답답하고 무서웠다. 한숨과 함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로이, 날 용서해. 아니, 용서하지 마.”
“…형? 난데없이 그게 무슨 말이야. 형을 용서하고 말 게 어디 있겠어.”
“지금의 우리 처지를 잘 아는 네가, 이 모든 게 내 탓이라면 날 용서할 수 있을까. …하지만 네게 용서를 빈다. 로이, 내 사랑하는 동생.”
“…….”
어두운 방 안에 달빛이 비치고 있다. 그림자 없는 빛이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형의 얼굴이 푸르게 보였다. 형의 얼굴도, 머리카락을 넘기는 형의 손도, 금빛 눈동자도, 형의 말도 푸르게 보였다.
“우리 식구가 이 곳까지 쫓겨 온 것은 모두 내 탓이다. 내가 황태자전하께 그런 말씀을 올렸기 때문이지. 배신과 속임수를 가르쳐드렸어. 로이엘. 넌 이상하다고 느낀 적이 없니? 제 2 황자님은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황위가 손에 들어올 텐데 어째서 무리하여 황태자전하를 암살하려 하여 그 기회를 내차버렸는지.”
“그…그럼 설마….”
“내가 황자님께 고했단다. 로이엘. 내가 말이다. 자작극을 꾸며 제 2 황자님을 내치라고. 당신의 자리를 확실히 하라고.”
“형!”
“…진정해, 로이. 끝까지 들어.”
나는 하마터면 형을 칠 뻔했다. 누나의 목소리가 나를 가로막지 않았다면 쳤을 것이다.
“네가 화를 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하지만 저 애는 날 위해서 그런 거야.”
“누나를 위해서?”
“그래, 로이. 날 위해서였어.”
누나는 미소 지었다. 아름다웠다.
“생각해보렴, 로이. 저 애가 황태자전하의 친우였는데도 제 2 황자님은 어째서 …그…를 받아들여줬을까? 내 약혼자는 어째서 우리를, 나를 외면했을까?”
“무, 무슨 말이야?”
듣고 싶지 않았다. 싫었다.
“그, 아버지는 로자를 황자님께 드렸어. 노리개로 말이야.”
내가 동경해오던 모든 것. 내가 자랑스러워하던 모든 것. 그 모든 것이 부서져 갔다. 나를 지탱하던 내 모든 자존심마저도.
“너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만…, 네가 가져온 거의 모든 돈은 그의 술값이 되었다. 그는 술을 마시지 않는 모든 순간에 난동을 부려. 집사가 죽기 전부터 그는 이미 중독 되어 있었던 거야. 집사가 일부러 가지고 온 술에 말이야.”
“‘그’가 누구야?”
“로이엘.”
“맙소사!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아버지가 누나를, 누나를…!”
“팔았다고.”
누나의 목소리는 담담하다 못해 건조하기까지 해서 섬뜩했다. 로이나도 형도 차가운, 아니 어쩌면 희망을 잃어버린 눈빛이었다. 절망의 창살에 갇힌 새처럼 이제는 노래 부를 기운도 날고 싶은 마음도 전부 잃은 빛이 없는 눈이었다.
“나는 그를 아버지로 인정할 수 없다, 이젠. 더 이상은 말이야. 로이엘. 집사가 죽고 그에게 술을 준 것은 로자였어. 안 된다는 건 알았지만 우린 너무 힘들었고 그가 조용히 있어주기를 바랐어.”
“그래서 아버지를 술에 빠지게 만들었다고? 그런 거야?”
“로이엘.”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야! 아버지! 형도 누나도 이럴 수는 없는 거야. 왜 이제 와서 가둬 놓았어? 계속 술을 갖다 바치지 그….”
“내가 어땠는지 몰라서 하는 소리지! 내가 이 시골에서 술을 구하기 위해서 몇 명의 사내 밑에서 굴렀는지, 그리고 결국 무슨 짓을 당했는지!”
이제 알겠다. 이것은 꿈이다. 이 모든 것은 꿈이다. 집에 오는 길에 나도 모르게 잠이 든 것이다. 꿈이 아니라면 내 고귀한 누나의 입에서 저런 절망으로 물든 소리가 나올 리 없지.
집을 떠나기 전 형과 함께 쓰던 방에 들어오자 형은 침대에 쓰러져 버렸다. 나는 다가가서 형의 안경을 벗겨 주었다. 형의 눈은 피로로 가득 차 있었다.
“황태자 전하께선 매우 영특하신 분이야.”
“그래.”
“난 그 분께 아무도 믿지 말라고 했지. 믿지 마시옵소서,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되나이다. 아무도…”
형의 여윈 뺨이 안타까웠다. 까슬한 감촉은 내 손이 거친 탓이라고 믿고 싶었다. 예전에 그 건강했던 모습은 어디로 간 거지. 누이들만이 아니라 형도 말도 못하게 초췌해졌다. 나는 형이 어떻게 웃을 수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물어봐야 시원찮은 답이 나올 것이다. 어쩌면 아무렇지 않게 씩 웃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웃으면서, 형은. 형은. 나는 그의 뺨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물방울이 떨어져 바위에 구멍을 내듯, 죽은 자들의 피가 떨어져 내 손에 못이 박혔어.
나도 모르게 든 생각에 흠칫 놀라 황급히 손을 떼었다. 그건 형의 탓이 아니다. 내가 해야 했던 일이다. 마땅히 해야 했던, 사람을 죽이는 일.
“이걸 봐라.”
형의 미소가 씁쓸했다. 형의 가는 손이 옷깃을 풀었다. 형의 몸은 변방의 어린 소년을 떠올리게 했다. 겨울 산 마른 나뭇가지처럼 뼈가 드러난 몸은 한대 치기만 해도 부스러질 것 같았다. 그리고 설원에 길게 그어진 핏자국처럼 하얗게 도드라지는 상처가 있었다.
“황태자 전하 앞에 무릎으로 기어 가 아버님의 선처를 청했을 때 그 분이 하신 답이다.”
피가 하얗게 번졌다.
“그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지. 피를 보고 놀란 것은 내가 아니라 황태자 전하셨다. 어둠 속에 있던 공포의 실체를 보듯, 생전 다시 보기 힘든 끔찍한 눈으로 나를 보셨어. 그 입술이 심하게 떨려,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드릴 말씀이 없었어.”
“형, 어떤 것도 형 잘못이 아냐.”
형은 내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옹색한 집의 벽을 뚫고, 높고 날카로운 산을 넘어 형의 눈동자는 황태자 전하의 심장을 보고 있었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 피를 토하듯 내뱉은 말.
“‘네 가슴에 새겨진 상처가 내게도 있다.’”
그것은 형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약하디 약한 자의 목소리였다. 그래, 버텨낼 수가 없어 흐르는 피를 모두 얼려 버리고, 찌르는 가시가 아파 손에 쥔 장미를 멀리 던져 버리는 자의 목소리였다. 던져진 장미는 눈밭에 하얗게 도드라진 핏자국이 되었을 것이다.
“상처는 깊지 않아 피는 곧 멈췄다. 금세 나아 딱지가 지고, 그 딱지는 떨어졌는데, 억지로 떼어낸 것도 아닌데, 로이, 보려무나.”
형은 그 틈새로 기력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았다. 진작 알았다면 나는 눈물을 흘리며 두 손으로 막았을 것이다. 피를 굳혀 만든 진홍의 보석만이 그 틈을 메울 수 있다면, 나는 그리 했을 것이다. 내 피를 굳혀서라도 그리했을 것이다.
“황태자 전하의 상처는 아직도 낫지 않았는가보다. 이 흉터를 볼 때마다 생각한단다. 그 분의 상처는 아직도 피를 흘리고 있는 거야.”
형의 눈이 실잠자리의 가느다란 날개처럼 떨리고 있었다. 형은 버림받은 거야. 나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다시 꾹 눌러 삼켰다. 그 말이 철없는 손이 되어 형의 눈동자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이 두려워서였다. 그런데, 형. 형은 버림받은 거야. …형.
“로이엘. 너는 알 거다. 나는 널 떠나보내고 한 순간도 후회하지 않은 적이 없어. 늘 네 걱정뿐이었고, 또 너에게 위로 받고 싶은 생각뿐이었지.”
“형. 난 다 알아.”
“그래….”
어둠 속에서 형의 앙상한 모습 위로 희미한 빛이 돋았다. 그것은 꺼져가는 희망의 이름으로 불러도 좋을 것이었다.
“로자를 데리고 가거라. 그 애가 어디서 무슨 일을 한다고 해도 여기보단 나을 거다.”
“응.”
“그리고 로이엘. 미안하지만 저…방의 덧창과 덧문 좀 손 봐 주겠니?”
“…응.”
점차 빛이 약해졌다. 눈물이 스밀 정도로.
창문에 못질을 하며 나는 울었던가. 문에 밥을 집어넣을 구멍을 남기고 널빤지를 대며 나는 이를 악물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것은.
레시는 그와 약속한 장소에 함께 간 누나의 모습을 보고 매우 놀랐다. 병자처럼 초췌한 모습 때문이었다. 그러나 누나는 그 집을 나서면서 오히려 모습이 더욱 나아졌다. 마치 그 집이 누나의 모든 생기를 빼앗고 있었던 것처럼. 레시와 만났을 때에는 예전만큼은 아니더라도 삶에 대한 약간의 집착과 희망이 피어 있었고 그것이 누나를 돋보이게 했다. 웃음 짓는 금빛 눈동자를 본 것이 언제던가. 험한 길을 골라가는 힘든 여행도 누나는 웃으며 받아들였다.
레시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나와 누나를 안내했다. 생각해보면 그 때 이미 누나와 나는 사람을 의심하는 것도 지쳐 그저 무작정 그를 따라가기만 했던 것이다. 물론 레시가 딴 마음을 먹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신실한 마음으로 우리를 대해 주었기에 내가 지금 그를 평생에 두고 가장 자랑스러운 친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가 우리를 이끌고 간 곳은 국경을 넘어 이웃 나라였다. 결국 나라의 이름에까지 검을 들이대야 한다는 현실이 서글펐지만 잠시였고, 곧 복수라는 희미한 쾌감마저 느끼게 되었다. 들리는 소식에 형을 버린 황태자전하께서는 날로 건강해져갔다. 마치 누군가의 생기를 빨아먹고 사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것이 내 형의 생기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 형을 그리 만든 건 황태자전하시다. 나는 그 말을 되뇌며 내 동족을 베었다.
그리고 누나는 그 근처에서 몸을 팔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형은 ‘분명히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던’ 그 곳보다는 나리라고 말했었다. 나 역시도 그 말에 동의하였다. 누나는 팔려간 것은 아니었기에 그나마 대우가 나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찾아갈 때마다 모조보석과 짙은 화장으로 가린 미소에서 그의 고귀했던 과거가 떠올라 웃고는 했다.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가 미치도록 불쌍했다. 그가, 그리고 우리가 정말 화가 날 정도로 불쌍했다.
누나와 나는 모든 정신을 돈을 버는 것에만 집중했다. 진작 국경을 넘었더라면 이렇게까지 비참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린 형과 여동생을 어서 데리고 오려는 생각뿐이었다. 그,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은 무언의 약속이었다. 사실 우린 그가 어서 죽어주기를 바랐다. 그럼 우리 남매는 그의 과거만을 생각하며 그 역시 불행했던 사람이라고 씁쓸하게 웃었을 것이다.
계속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누나와 내 삶은 치열했고 가끔 서로의 변한 모습을 가지고 놀릴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집은 떠올리지 않았다. 둘 다 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으며, 레시도 눈치를 보아 우리 남매 근처에서 식구에 관련한 이야기나 고향 이야기 따위는 절대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국경을 넘었는지라 집에 가는 것이 어려웠다. 보이지 않는 나라 간의 벽이란 걸 넘는 건 천근이 된 발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기회만 보면서 나는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잊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곳에 남아있는 내 형제들을….
새벽이 가까운 어느 깊은 밤, 누나는 잠옷차림에 숄 하나만을 걸친 채로 내가 소속된 용병단에 달려왔다. 발은 벗었으며 손에는 어디서 긁혔는가 알 수 없는 상처가 피를 맺었다. 그의 얼굴은 공포로 가득했다. 보초를 서던 경비에게 붙잡혀 희롱을 당하면서도 그는 나를 불렀다. 오직 내 이름만을 불렀다. 누나의 얼굴을 아는 자가 나와 레시에게 알렸다. 우리가 달려갔을 때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나와 누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로이! 맙소사, 로이, 로이, 로이….”
“누나, 진정해.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악몽이라도 꾼 거야?”
“로이, 세상에, 신이여…!”
“누나….”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며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쥐고 꺽꺽대며 괴롭게 울었다. 사려 깊은 레시가 나와 누나를 수습하여 우리 숙소로 쓰고 있는 작은 방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누나는 말없이 내 품에 안겨 울기만 할 뿐이었으므로, 나는 그의 신상에 어떤 큰 이변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를테면 이런 사창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버지 모를 아이를 가진 게 아닌지 의심이 되었다. 그러나 당장 누나는 숨이 넘어가게 울 뿐이었다.
“누나, 진정해. 이거 좀 마셔봐.”
나는 그를 토닥이며 레시가 떠 온 물 잔을 건넸다. 누나는 그 잔을 손으로 밀어 거절하며 날 바라보았다. 금빛의 눈동자가 다시없을 정도로 반짝이며 아름답게 빛났다. 그 빛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어서 누구라도 누나의 눈을 보면 울지 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로이, 꿈을 꾸었어.”
그의 목소리는 예전 그가 푸른 침대에 누워있을 때를 떠올리게 했다. 나는 순간 그 때와 비슷한, 아니 더욱 어두우며 절망으로 가득한 불안을 느꼈다.
“로이…로이…. 나는 걱정이 되는구나.”
“집…말이야? 안 그래도 한번 가보려고 했어. 이제 어느 정도 자리도 잡았고 형과 로오를 데리고 와도 될 것 같아.”
“그렇다면 네가 출발하는 날짜를 앞당겨주지 않겠니?”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그건 너무나도 끔찍한 꿈이었어.”
누나는 눈물을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모든 것이 부서지는 꿈이었다고. 큰 소리와 함께 세상이 부서지고 형이 로이나에게 소리쳤다고. 나가라고, ‘나가! 로오!’ 라고. 나가, 로오! 살아라. 너만은 살아….
로오. 그 어린 것의 생각을 하니 문득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을까. 때 이른 사과처럼 풋풋한 향내를 내던 내 누이. 마지막으로 잡았던 손은 불에 타 형태만 갖춘 나뭇가지처럼 언제 부러질지 몰라 불안할 정도로 애처로웠다. 나는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것을 애써 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누나와 함께 그 집을 떠난 지 반년 뒤 나는 레시와 함께 돌아갔다. 돌아가는 저녁이 유난히 어두웠다. 바로 등 뒤에 있는 누나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아 몇 번이나 뒤돌아 봤는지 모른다. 아무래도 기억나지 않았다.
“로오? 형? 다들 어디 있는 거야?”
나는 불안감에 가득 차 소리 질렀다. 무서웠다. 집 안은 믿어지지 않는 습기와 썩는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그것이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이 집이 문제야. 다 이 집 탓이야.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으며 구역질을 참았다. 집 안이 온통 어두워 앞이 보이지 않았다.
“맙소사! 로오!”
계단 아래에서 발견한 로이나는 찢어진 옷을 걸치고 있었다. 로이나는 천한 것들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것들이나 하는 양으로 몸을 웅크리고 쉴 새 없이 무언가를 중얼댔다. 나는 누나의 일이 떠올라 로이나를 부축해 일으키며 다급히 물었다.
“로이나! 대체 무슨 일이야?”
“오빠…?”
“그래, 나야. 로오. 아, 가엾은 아이.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봐.”
“오빠…오빠….”
그 애는 비에 젖은 강아지처럼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가녀린 몸이 떨렸다. 그 애는 너무 말라 가득 안아도 그 사이로 흘러나갈 것 같았다. 눈물 같은 말이 흘렀다. 한숨 같은 비명이 흘렀다.
“…아…오빠를 먹었어. 내가 먹어버렸어. 아버지가 먹어버렸어…. 손도 발도 먹어버렸어…먹어버렸어…. 내가 먹었어…. 오빠의 뼈는 아직도 식탁 위에 있어…. 오빠…오빠를…내가….”
완전히 정신이 나가 있었다.
레시가 옆에서 함께 로이나를 부축했다. 나는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천천히 걸어갔다. 벽에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바닥에 부서진 나뭇조각들이 보였다. 이 집의 벽이다. 그것들은 거센 힘에 의하여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산산이. 절대로 다시 붙을 수는 없다.
부서진 잔해를 따라 식당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은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맥이 없었다. 나는 분명 미쳐버린 거다. 아니면 이렇게 웃음이 나올 수가 있을까.
대체 내가 여태까지 발버둥친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얼마나 벗어날 수 있었지? 아무리…아무리…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손에 넣을 수 없었던 것은 내 식구의 웃음이었다. 함께 웃을 수 있는 행복이었다. 이젠 다 끝이다.
“크르르르….”
이미 인간의 말을 잊은 것인가. 저 추접한 손아귀에 무엇을 쥐고 으르렁대는 것이지…. 식탁 위에 있는 썩어버린 고깃덩어리. 그리고 발치의 이것은 내가 벗겨주기를 즐겨 했던 내 형의 안경. 진물이 흐르는 인간의 팔을 물어뜯고 있는 ‘저것’은 내 아버지.
그는 나를 ‘먹이’를 빼앗으려는 적으로 간주했는지 적의를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나는 즉시 검을 빼어 그를 베었다. 단지 돈을 위해 더한 짓도 했는데 이런 것쯤은 너무나도, 너무나도 쉬웠다.
“레시.”
나는 꿈틀대는 그의 몸을 바라보며 그에게 말했다.
“로이….”
“레시. 너는 내 친구지? 나는 늘 믿고 있어. 항상 고마웠어.”
“새…새삼스레 왜 그래?”
“로오를 누나에게 데려다 준다고 약속해주겠지?”
레시는 황급히 내게 다가오려 했지만 로이나를 부축해야 했기 때문에 쉽지 않았다. 나는 그가 다가오기 전에 그를 보며 한번은 미소 지었던 것 같다. 그것은 아주 잘 한 일이다. 내 식구를 제외하고 나는 오직 그에게만 의미가 되었기에 그를 매우 사랑하고 아꼈던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테지만 많이 웃어주지는 못한 것 같아 미안했다.
“누나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줘.”
나는 그에게 가슴에 품고 있던 펜던트를 던졌다. 그리고 언젠가 레시가 선물했던 상아빛의 단검을 빼어 들었다.
로이나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달려오려는 레시의 모습이 보였고 비명을 지르는 로이나의 모습이 보였다. 몸이 천천히 아니면 빠르게 기울어졌다. 의자에 부딪혀 넘어졌지만 아프지도 괴롭지도 않았다.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눈앞에 형의 안경이 보여 손을 뻗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꿈틀대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아아. 저런… 조금 더 세게 벨 걸 그랬다. 마치 핀으로 표본에 고정시켜 놓은 벌레 같았다. 저 질긴 생명력을 보라지. 부럽군, 부러워. 수치를 안고도 살아갈 수 있는 그 뻔뻔함이 부럽군. 하하. 이건 당신을 위한 눈물이 아니야.
아버지를 진작 죽여야 했다. ‘아버지’는 명예를 숭상하는 귀족의 표본이었다. 지위와 부귀를 모두 잃고 망가져 가는 그의 모습은 견디기 힘들었지만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그래, 내 형이 그리 한 일이다. 내 형은 얼마나 잔인한 사람이었나.
첫댓글 이야.... 환타지 장르 인가요? 문장력이 남다르시네요. 요즘 흔히 나오는 쓰레기 장르문학과는 분명 다른 모습입니다. 계속 기대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