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린 시절 이발소에는 대부분 푸시킨의 시가 걸려 있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나는 이 시가 참 싫었다. 내 삶은 수제비로 범벅이 되어 있는데 슬퍼하지도 말고
노하지도 말라니. 희망은 안 보이는데 견뎌 내라니. 세상은 이른바 배웠다는
위선자들로 가득 차 있는데 기쁨의 날이 올 것을 믿으라니.
돈 봉투를 안 가져온다고 나를 책망한 담임은 어느 날 모범 교사로 칭송을 받고
(나중에 교장까지 되었다), 나는 자원입대하였는데 멀쩡한 부잣집 친구들은
징집 면제되고, 그런데 지나가는 시간이 훗날 소중하게 된다니 그것을 나보고
믿으란 말인가. 나는 세상에 대한 나의 분노를 폭파시키고 싶었다. 그래서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처럼 세상이 뒤집힐 전쟁을 기다렸던 적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나 세상을 욕하고 가래침을 줄곧 뱉었지만 정작 나 자신도 크게
다를바 없었다. 언제나 눈이 시뻘겋게 일확천금만을 노리며 한탕할 기회만 노렸고
아무 하는 일도 없이 꿈틀거리기만 했다.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벌레처럼
나는 먹고 싸고 먹고 싸는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이었으며 내일은 다시 어제였다. 조그마한 차이도
없었다. 나는 내가 혐오스러웠다. 내가 분노하여야 할 대상은 세상이 아니었다.
나 자신이었다. 나는 혐오스러운 나의 삶이 너무나도 한심하였고 끝내는 저주스러웠을
정도로 스스로에게 분노하였다. 내가 나를 죽이고 싶었던 것도 어쩌면 그런 혐오감과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절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나는 나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내 삶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나는 5월의 찬란한 햇살 밑에서 향긋한 꽃 내음을
그대로 들이마시며 어깨를 펴고 살고 싶었다.
당신은 어떠한가? 내가 수집하는 것 중에 모형 자전거가 있다. 이미 50개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인생은 자전거와 같다. 뒷바퀴를 돌리는 것은 당신의 발이지만 앞바퀴를
돌려 방향을 잡는 것은 당신의 손이며 눈이고 의지이며 정신이다. 당신의 발이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을 움직이는 주지만 정작 당신의 손은 호주머니 속에 깊이
박혀 있는지도 모른다. 정작 당신의 눈은 당신 앞에 놓인 길을 바라보지 않고 옆에서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오토바이들과 스포츠카만 부러운 마음으로 바라볼지도 모른다.
때문에 비록 열심히 페달을 밟고는 있지만 당신이 탄 자전거는 제자리를 맴돌 뿐이다.
만일 당신이 말초신경이나 자극하는 것들에 현혹되어 채팅, 게임, 공짜사이트, 복권,
유명 브랜드 상품, TV, 술, 도박, 경마 등 일확천금과 한탕주의의 망상에만 몽롱하게
사로잡혀 있다면 당신이 바로 그렇게 제자리를 맴도는 사람이다. 그렇게 삶에 질질
끌려다니며 제자리를 맴도는 사람들이여. 이제는 그 삶을 정면에서 바라보아라.
비겁하게 외면하지 말라. 그 삶이 자랑스러운가? 이제는 그 삶에 대해 분노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파충류와 포유류의 차이 중 하나는 파충류는 본질적으로 화를 내거나
기쁨을 내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뇌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변연계가 퇴화되었기
때문이다. 악어 쇼에서 악어를 때려도 악어가 화를 내지 않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당신의 삶이 분노할 대상임에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이미 당신의 뇌는 썩어 버린 것이다.
차라리 강물에 빠져 죽어 버려라. 하지만 이제라도 삶이 당신을 속인다고 생각되면
그 삶을 던져 버려라. 내동댕이쳐라. 삶은 한 번뿐이다. 삶에 비굴하게 질질 끌려가지
마라. 명심해라. 당신이 분노하여야 할 대상은 이 세상이 아니다. 당신의 현재 삶에
먼저 슬퍼하고 분노하면서 'No!'라고 말하라. Say No! 그리고 당신의 삶을 스스로
끌고 나가라 당신이 주인이다.
- 데이원 간, ‘세이노의 가르침’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