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4일 오늘의 역사
2023년 방탄소년단 지민, 빌보드 1위 한국 솔로 가수로 처음
방탄소년단 지민 씨가 K팝 아티스트 솔로 역사상 최고 기록을 쓰고 빌보드 1위를 기록했다
미국 빌보드에 따르면 지민 씨의 첫 솔로 앨범 'FACE(페이스)'의 타이틀곡 '라이크 크레이지'(Like Crazy)가 팝스타 마일리 사이러스의 '플라워스'(Flowers), 컨트리 가수 모건 월렌의 '라스트 나이트'(Last Night) 등을 제치고 빌보드 핫 100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이전까지 K팝 솔로 가수 가운데 핫100의 종전 최고 순위는 지난 2012년 7주 연속 2위를 기록한 '강남스타일'이다.
지민 씨는 방탄소년단 그룹으로서 핫100 1위를 차지한데 이어, 솔로 가수로도 핫100 1위를 차지하는 역사를 썼다.
2023년 한국 대중가요계의 큰별 현미 사망
2022년 영국 참모차장에 첫 여성 3성장군 샤론 네스미스 임명
2017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순덕 할머니(100세) 세상 떠남
2016년 시인 송수권 세상 떠남
2014년 전남 여수 거문도 외곽 공해상에서 몽골 선적 화물선 침몰 북한 선원 13명 사망·실종
2012년 그리스의 은퇴약사 디미트리스 흐리스툴라스(77세) 국회 앞에서 연금삭감 항의 권총자살
2009년 OECD가 필리핀, 코스타리카, 라부안, 말레이시아를 조세 피난처로 악용되고 있다며 블랙리스트 국가로 지정했다.
2009년 미국의 원격조정 비행기 미사일이 파키스탄의 북 와지리스탄에 떨어져 13명 이상이 숨졌다.
2008년 삼성 특검 :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삼성 특검에 출석해 조사받았다.
2005년 강원도 양양 대형산불
2005년4월4일 밤부터 6일 새벽까지 30여시간 동안 강원도 양양군이 입은 화상은 컸다.
불은 4일 밤 11시 50분쯤 강원도 양양군 양양읍 파일리와 강현면 물감리 구간 도로 옆 야산에서 시작, 강풍을 타고 동쪽으로 계속 번져 150㏊의 임야와 민가 38채를 태웠다. 이 불로 12개 마을 800여명의 주민과 낙산비치호텔에 투숙한 관광객 등 90여명도 대피했다.
소방방재청은 양양군에서만 250ha의 산림과 주택 160채, 상가 27채 등 건물 246개 동이 소실됐고, 이재민은 376명이라고 밝혔다.
가장 큰 피해지역인 강현면 용호리는 주택 60여채 가운데 35채가 불과 20분 만에 쑥대밭이 됐다. 집들은 폭삭 내려앉아 쓰레기 더미로 변했고, 매캐한 연기만이 공중에 흩어졌다. 마을에는 털이 불에 그슬린 개가 돌아다녔다.
산불은 바닷가까지 번져 낙산사의 주요 문화재들이 불탔다. 낙산사 건축물 20여채 중 대웅전인 원통보전(圓通寶殿)과 이를 에워싸고 있는 원장(垣墻·시도유형문화재 34호), 홍예문(虹霓門·시도유형문화재 33호), 요사채 등 목조 건물, 보물 479호인 ‘낙산사 동종’등이 불에 탔다.
낙산사측은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지불인 ‘건칠관세음보살좌상’(보물 1362호)을 비롯한 신중탱화, 후불탱화 등 3개의 문화재를 지하 창고로 옮겼다. 스님들은 대피해 인명피해는 없었다.
20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산불 진화와 이재민 구호를 위해 팔을 벗고 나섰다. 7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은 6일 낙산사에서 불탄 기왓장을 치우며 복구를 도왔다. 군인들 수천명도 언제나처럼 이재민의 ‘친구’가 됐다. SK그룹, CJ를 비롯한 기업들은 라면 생수 햇반 담요 등 긴급재난구호품을 지원했다. 교보생명과 LG텔레콤 등은 보험료 납입을 유예해주고 전화요금도 감면해주기로 했다.
2003년 가짜 CNN 사이트에 속아, “빌 게이츠 총격피살” 오보 소동
2003년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와 갈등 빚은 초등학교장 끝내 자살
여교사에게 차 심부름을 강요하고 전교조 비하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전교조의 사과요구를 받아오던 초등학교 교장이 2003년 4월 4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날 오전 10시쯤 충남 예산군 보성초등학교 서승목 교장이 신양면 신양리 야산에서 목을 매 숨져 있는 것을 부인 김순희씨가 발견했다.
학교측에 따르면 이 학교에서 올 3월 초부터 기간제 교사로 일하고 있는 진모 교사는 지난달 20일 교육인적자원부와 충남교육청 홈페이지에 “교감이 ‘교장선생님께 잘 보여야 해. 아침에 교장선생님 차 좀 갖다 드리라’며 차 시중을 강요했으며 이를 거부한 뒤로 교장·교감이 수시로 수업 중 교실에 들어와 야단쳤다”는 등의 글을 올렸다. 이 교사는 이어 “학교 갈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져 병가를 낸 뒤 사직서를 냈더니 즉시 수리했다”며 교육청에 복직을 요구했다.
이에 전교조 충남지부는 지난달 3월 24일 이 학교를 항의 방문한 데 이어 31일에는 20여명이 예산교육청을 찾아가 “교장이 교권을 침해한 것은 물론 ‘윗사람이 시켰는데 못한다고 하는 사람은 전교조야’라는 등의 전교조 비하 발언을 했다”며 교장의 서면 사과와 교육청의 진상조사 등을 요구했다.
이에 대해 서 교장은 예산교육청의 진상조사에서 “이 교사에게 계약서에 있는 기타업무에 관한 사항을 잘 이행하라고 주지시켰을 뿐이며 수업시간에 들어간 것은 이 교사가 중등 교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어 교내 장학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고 밝혔다. 서 교장은 이어 복직요구는 수용했으나 서면 사과는 거부했다.
서 교장은 1989년 충남교육청으로부터 ‘제1회 충남교육대상’을 받은 바 있다.
2002년 송도·영종도·김포`경제특구` 확정
2000년 국내 최초로 용광로 설치한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 별세
2000년 4월 4일 별세한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은 한국 철강 역사를 이끌어온 주역이었다. 1965년 국내 최초로 용광로를 설치하고, 1966년에는 전기로 제강기술을 처음 도입해 국산화의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장 회장이 철강업계에 뛰어든 것은 1956년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당시 부친이 운영하던 동국제강에 전무취체역으로 들어가 1964년 3월 사장에 올랐다.
그는 현대식 경영 방식으로 기업의 규모를 확장하고 부실화된 동종업체를 인수해 나갔다. 장 회장은 허식을 싫어하는 성품이었다고 한다. 그가 `화장`을 유언으로 남긴 것만으로도 이런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사옥 지을 돈이 있으면 공장 설비에 투자하겠다"고 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재계 15위인 동국제강은 지난 1974년부터 서울 중구 수하동 소재 3층짜리 초등학교 교사를 개조해 사옥으로 사용해오고 있다.
1999년 80년대 물가안정 이끈 주역 신병현 전 부총리 별세
지난 1980년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을 2차례 역임했던 신병현(78) 전 부총리가 1999년 4월 4일 미국 워싱턴에서 뇌출혈로 별세했다. 신 전 부총리는 철저한 ‘시장경제 신봉자’ 이자 원칙론자로 우리나라 경제정책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특히 1980년 부총리 취임 직후 그 이전까지 재벌의 강력한 로비에 밀려 수차례 좌절됐던 공정거래법 제정을 강행, 이를 성사시킨 것은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힌다. 또 1981년엔 경기부양을 요구하는 재계의 압력에 굴하지 않은 채 끝까지 인위적인 경기부양을 거부하다 1982년 초 경질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통화긴축 정책은 1970년대 이후 우리 경제의 뿌리깊은 인플레이션 구조를 치유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번 원칙이 서면 절대 외압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곰바우’ 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으며, 두번째 부총리로 재직중이던 지난 1984년엔 군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산편성시 방위비 삭감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1997년 만화 `광수생각` 조선일보에 연재 시작
특유의 유머와 따뜻한 메시지를 전달해 준 만화 `광수생각`이 1997년 4월 4일 처음으로 조선일보에 게재됐다. 첫 만화는 `바퀴벌레 퇴치법`이었다. `광수생각`은 선풍적인 인기를 몰고 왔다. 팬클럽이 생겼는가 하면, 신문만화를 오려 암 투병중인 어머니 병상곁에 붙여놓은 중학생도 있었다. 만화가 박광수의 인기는 나날이 높아졌고 강연초청도 쇄도했다.
`광수생각`이 조선일보에 연재된 배경에는 당시 조선일보의 `레인보우`라는 섹션 창간때문이었다. `가장 조선일보답지 않고 파격적인 지면`을 시도한 `레인보우`팀이 `페이퍼`라는 무료 월간지에 `광수만가`라는 만화를 그리고 있던 박광수를 적임자로 판단, 그에게 만화를 의뢰한 것이 `광수생각` 탄생의 배경이었다.
`광수생각`은 이후 2000년 11월 21일 1095회를 끝으로 막을 내릴 때까지 3년 8개월 남짓한 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1994년 서재필 박사, 전명운 의사의 유해와 영정 환국
미국 LA를 출발한 서재필 박사와 전명운 의사의 유해는 1994년4월4일 오후 2시 25분 대한항공 061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 국군의장대원 10명이 도열하는 가운데 국제선 2청사 18번 출구를 통해 고국에 첫 발을 디뎠다.
유해를 실은 여객기가 공항에 도착하자 대한항공측은 일반 승객들을 먼저 내보냈으며 마지막으로 유해와 유족, 봉환단원들을 맞았다. 고인들의 영정, 훈장, 유해는 태극기를 앞세우고 차례로 운구병들의 손에 들려 입국장을 빠져나갔으며, 봉환단장인 김시복 보훈처 차장, 서박사의 종손인 서희원 전 이대 교수(70), 전명운 의사의 딸 전경령씨(71)등 유족들이 엄숙히 뒤따랐다.
고인들의 유해가 청사 밖을 나서자 귀빈주차장 입구에서 맞을 준비를 하고 있던 이영덕 통일원 장관, 이충길 보훈처장, 김승곤 광복회장, 장기욱 국회보사위원장 등 출영인사들이 고개를 숙여 추념의 정을 표시했다.
또 마침 공항에 있던 여행객들과 출영객들도 “유해봉환단이 지나는 동안 경건하게 추념의 정을 표시해 달라”는 공항공단의 안내방송에 따라 숙연한 모습으로 운구행렬을 지켜보며 독립운동가들의 유해 환국을 반겼다.
이어 고인들의 영정과 유해는 오후 3시 광복회원을 비롯한 독립유공자 등 2백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각각 3대의 운구차에 실려 경찰 기동순찰대의 호위를 받으며 국립묘지로 향했다.
오후 4시 국립묘지에서 있은 유해 안치식은 이 부총리, 이 보훈처장, 유족대표등 1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20여분만에 종료됐다. 두분의 유해를 모신 6대의 군용지프는 국립묘지 영현 봉안관(현충관)에 도착, 두분의 유해 및 영정, 훈장의 순으로 국립묘지 의장대 20명이 도열한 가운데 현충관에 차례로 모셔졌다.
1987년 광릉에 첫 산림박물관 준공
1983년 미국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발사
1980년 쿠바인 1만여명 아바나 주재 페루대사관에 몰려 들어 망명 요청
1980년 4월 4일 망명을 희망하는 1만여명의 쿠바인이 비자를 요구하며 아바나의 페루대사관에 몰려들었다. 처리에 곤란을 느낀 페루대사관은 유엔 난민고등판무관과 국제적십자에 지원을 요청했다.
1980년 4월 20일 쿠바정부가 반체제인사의 출국을 묵인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자 미국으로 망명하려는 쿠바인이 미국 플로리다로 쇄도했다.
난민이 급증하고 5월 6일까지 1만8천명의 쿠바인이 플로리다로 몰려들자 카터대통령이 이날 플로리다주에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플로리다는 도착한 난민과 미국 전역에서 마중나온 가족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미국정부는 이제까지 난민을 불법입국으로 간주해 벌금을 부과하며 가입국을 허용했지만 전면수용으로 방침을 변경했다. 쿠바가 출국을 묵인한 것은 악화된 식량사정을 해결하고 반체제 인사를 추방하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1979년 파키스타 대통령 줄피카르 알리 부토 사망
1974년 한국-터키 문화협정 체결
1969년 도입 일본쌀 6,600톤중 25%이상 불량미로 판정
1968년 마틴 루터 킹 목사 피살
1968년 4월4일 저녁 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상징 마틴루터 킹 목사가 미국 테네시 주 멤피스 시 로레인 모텔 306호 발코니에서 저격당했다
범인으로 체포된 제임스 얼레이는 자신은 단지 거대한 음모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주장해 그후 수많은 배후설이 제기됐다
5년전인 1963년 8월28일 워싱턴DC 링컨기념관 앞 광장을 가득 메운 30만 인파 앞에서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는 킹목사의 연설은 인종차별에 대한 강력한 항의였다
1961년 한국-네덜란드, 국교 수립
1960년 한국 대일본무역 재개
1952년 광무신문지법 45년 만에 폐지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 언론의 목을 조여온 광무신문지법(光武新聞紙法)이 1952년 4월 4일 시행 45년 만에 폐지됐다. 신문지법은 1907년 7월 24일에 이완용 내각이 법률 제1호로 제정·공포한 한국 최초의 언론관계법으로, 일제는 이 법을 근거로 신문 발행허가에서 처벌에 이르기까지 각종 언론통제를 자행해 왔다.
같은 날 정미7조약이라 불리는 한일신협약을 체결하고, 3일 후에 또 다른 악법인 보안법을 공포함으로써 일제는 한국인의 언론·출판·집회·결사를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게 됐다.
신문발행을 허가제로 하며 보증금제도를 도입함으로써 발행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납본제를 통한 사전검열로 우리 민족의 입을 막아보려는 것이 신문지법의 숨은 의도였다. 한편으로는 8월 1일 대한제국의 군대해산을 순조롭게 하기 위한 사전포석이기도 했다.
신문지법 위법시 한국인에게는 발행금지, 정간 등의 행정처분과 언론인에 대한 형사처벌까지 가능하게 해놓은 일제는 일본인에게는 ‘신문지 규칙’(1908)을 따로 제정, 신문발행을 자유롭게 했다. 1908년 4월에는 외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에도 적용할 수 있도록 신문지법을 개정 공포했는데 이는 당시 가장 적극적으로 반일논조를 펴고 있던 ‘대한매일신보’를 겨냥한 것이었다. 영국인 배설이 창간, 발행한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외국인이어서 사실상 치외법권적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
이 때문에 ‘언론의 암흑기’로 불리는 1910년부터 1919년까지 한국인에게는 단 한 건도 신문발행을 허락하지 않은 데 반해 일본인들은 26개나 되는 신문·잡지를 발행할 수 있었다. 1920년에 조선일보·동아일보가 창간됨으로써 비로소 민족지를 갖게 됐지만 신문지법에 의한 지면통제로 정간과 휴간을 반복해야만 했다.
1951년 국군 개성 입성
194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출범
북미와 유럽 서방국간의 집단방위체제, 경제협력 등을 내용으로 하는 북대서양조약이 20년을 기한으로 1949년 4월 4일 미국 워싱턴 국무성강당에서 조인됐다.
공산주의의 확산에 대항하기 위해 미국의 주도로 개최된 이날 조인식에는 서방 각국의 외교단, 상하원의원, 정부요원과 수백명의 보도관계자가 참석해 이날 조인식을 지켜봤다.
가맹국 각 대표들은 미 해병대 밴드가 연주하는 ‘포기와 베스(Porgy and Bess)’ 멜로디에 따라 입장했고, 미국 대표 애치슨 국무장관의 사회에 의해 조인식이 시작됐다. 먼저 가맹국 각 대표들이 짧게 연설을 한 후, 이어서 각국 대표들의 서명이 이루어졌다. 벨기에 대표 스파크외상의 서명을 시작으로 캐나다, 덴마크, 프랑스, 아일랜드, 이탈리아,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노르웨이, 포르투갈, 영국 등이 서명한 후 마지막으로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서명함으로써 조인식은 끝이 났다.
그러나, 이날의 조약은 서면의 약속에만 지나지 않았다. 조약 가운데 ‘가맹국에 대한 공격은 전 가맹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고 집단자위권을 발동한다’는 조항이 있었는데, 이는 곧 대서양조약기구(NATO)軍 창설의 빌미가 되었다.
1947년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발족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1947년 4월 4일 발족했다. 1944년 시카고에서 개최된 국제민간항공회의에서 공역자유의 확립, 국제민간항공협약의 제정, 국제민간항공기구의 설치에 관한 토의를 시작해 동년 12월에 확정된 국제민간항공협약(일명 시카고협약)이 설립의 기초가 됐다.
시카고협약은 공역을 규율하는 가장 중요한 법원으로 96개조로 된 국제항공에 관한 규율과 국제민간항공기구의 2부로 구성되며, 1954년부터 1990년까지 10번의 개정을 실시했다.
상공의 국제화를 실현하려는 공역자유의 확립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국제항공운송협정과 국제항공업무 통과협정의 보충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실질사항을 이 두 보충협정에 위임하고 있다.
1944년 이탈리아,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
1941년 이라크에 쿠데타 발생
1938년 조선도로령 공포
1933년 미국 에이크런 비행선 뉴저지해안 추락 73명 사망
1929년 가솔린 자동차 발명가 벤츠 사망
가솔린 자동차 발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독일 기계기술자 칼 프리드리히 벤츠가 1929년 4월 4일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염원했던 ‘말(馬)없는 마차’ 즉, ‘가솔린자동차’ 제1호를 완성한 것은 1885년 말, 1기통 4사이클 가솔린 엔진을 탑재한 3륜자동차였다. 이것이 역사상 최초의 실용적인 가솔린자동차가 된 벤츠의 3륜차이며, 1986년에 세계가 자동차 100년을 축하한 근거가 되기도 했다. 그가 4륜을 택하지 않았던 것은 키잡이가 말을 잘 듣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벤츠의 첫 작품인 이 자동차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과학자들로부터 장래성이 없다는 혹평을 받았다.
이후 1888년에 개량한 모델인 ‘3형’이 독일 뮌헨 박람회에서 금상을 수상. 1892년부터 이듬해에 걸쳐 4륜용 조타장치를 발명하고 그 후 다양한 차종을 생산해냈다.
자동차 창시자로서 다임러와 함께 오늘날 추앙되는 그이지만, 그는 자동차시대의도래를 끝까지 지켜보지 못하고 이날 눈을 감았다. 1926년, 벤츠사는 최대의 경쟁자인 다임러사(차명-메르세데스)와 합병, 다임러벤츠사(차명- 메르세데스벤츠)가 되었다.
1913년 다형 김현승 시인 출생 -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 시
1909년 태프트 미국 대통령 취임
1904년 시인.독립운동가 이육사 출생
1899년 중학교 관제 제정 공포
1858년 프랑스의 시인 구르몽 출생
1843년 헝가리 지휘자 리히터 출생
1841년 미국 제9대 대통령 윌리엄 헨리 해리슨 사망
1806년 이탈리아 극작가 고치 사망
1794년 로베스피에르, 당통 처형
1756년 암행어사 박문수 사망
1498년 영안도를 함경도로 개명
1481년 동국여지승람 편찬
1392년 정몽주 선죽교서 피살
고려 충숙왕 때 뛰어난 외교가이자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받은 고려 말기의 충신. 초명은 몽란, 몽룡, 자는 달가, 호는 포은이며 1367년 성균관이 중영되면서 성균박사에 임명돼 <주자집주>를 유창하게 강론, 당시 유종으로 추앙받던 이색으로부터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평가받았다. 얼마 후 왜구가 자주 내침해 피해가 심해지고 화친을 도모하기 위해 보내진 나흥유가 투옥됐다 돌아오자, 보빙사로 일본에 보내져 국교의 이해관계를 잘 설명해 일을 무사히 마치고 고려인 포로 수백 명을 구해 돌아왔다. 그러나 고려왕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왕조를 개척하는 데에 반대해 뜻을 같이하던 이성계를 찾아가 정세를 엿보고 돌아오던 중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 등의 습격을 받아 사망했다.
1292년 프란체스코 수도회 출신 최초의 교황 니콜라우스4세 사망
670년 신라, 말갈·당 연합군 대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