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이묘도 묵인한 전쟁의 약탈행위
자웅(雌雄. 원래는 ‘암컷[雌]과 수컷[雄]’이라는 뜻이었으나, 점차 ‘이기고[雄] 짐[雌]’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 인용자 잉걸. 아래 ‘옮긴이’)이 결정된 (일본 전국[戰國]시대의 – 인용자) 전장에서, 승자의 특권으로 행해진 일은 ‘아시가루(한자로는 “족경[足輕]”. 직역하자면 <가벼운[輕] 발[足]>이라는 뜻이며, 의역하자면 <발로 뛰어다니는 졸병>이라는 뜻을 지닌 일본어다. 평시에는 막일을 하다가, 전쟁이 터지면 병졸이 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다 – 인용자)’들의 약탈이었다.
(아시가루들은 전쟁에서 진 나라의 – 인용자) 논밭을 짓밟고, 민가에 쳐들어가 가축(집짐승 – 인용자)이나 돈 될 것은 모조리 빼앗았으며, 여성은 겁탈하고, 저항하는 자는 살해했다.
또한 여자나 어린아이를 납치해 노예로 팔아치우는 것 역시 당연한 일처럼 자행되었다고 한다.
‘란도리(乱取り[난취리. “어지러운(乱) 상황에서 [약탈할 것을] 골라 뽑는(取) 일”이라는 뜻이다. 乱은 “어지러울 난[亂]”을 왜국식으로 바꾼 한자다 – 인용자])’라고 불리는 이러한 약탈 행위는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비도덕적으로 보이겠지만,
당시는 전국(온 나라. 여기서는 대마도와 유구[琉球]와 아이누 모시르[아이누 모시리/일본식 이름 '북해도(北海道)']를 뺀 온 일본 – 인용자)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하던 일로, ‘전장에서 얻은 금품은 자신의 자산으로 삼을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그러나, 전국시대의 일본인들처럼 근세 사람들이었던 근세조선 사람들과 명나라 사람들과 다이 비엣[大越(대월)] 제국 사람들은 약탈을 좋아하지 않았고, ‘당연한 일’로 여기지도 않았음을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근세시대 사람이라고 해서 다 일본인들처럼 살지는 않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런 “약탈 행위”를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비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인용자).
대부분의 아시가루는 전쟁 때마다 징집되는 농민(農民. 순수한 배달말로는 ‘여름지기’ - 인용자)들이었기에, 본래대로라면 소중한 농작물을 내팽개치면서까지 생사(生死. 삶[生]과 죽음[死] - 인용자)가 오가는 전쟁터에 참가하고 싶을 리 없다.
그럼에도 그들이 손수 무기(병기[兵器]. 순수한 배달말로는 ‘잠기’ - 인용자)까지 장만해 전쟁에 나간 까닭은, 란도리로 일확천금을 노렸기 때문이다(같은 시대에 살았던 근세조선의 군사들은 이런 생각이나 행동은 안 했다! - 인용자).
당시 인신매매(人身賣買. 사람[人]의 몸[身]을 [물건처럼] 사고[買] 파는[賣] 일 = 노비/농노/노예 매매 : 인용자)의 시세는 지금(서기 2018년 현재 – 인용자) 기준으로 30만 엔(한국 원으로는 275만 7천원[참고로, 서기 2023년의 환율로 계산함] - 인용자). 농사일(순수한 배달말로는 ‘여름지이’ - 인용자)의 연 수입은 140만 엔(한국 원으로는 1286만 6천원[서기 2023년의 환율] - 인용자) 정도였으니, 상당한 거금이었음을 알 수 있다(좀 더 알기 쉽게 풀이하자면, 만약 아시가루 한 명이 전쟁터에서 한 명을 붙잡아 노예로 팔면, 여름지기로 일할 때 버는 한 달 수입보다 2.6배는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만약 두 명을 붙잡아 노예로 판다면, 그 수입은 5.2배는 더 많은 액수로 뛸 수 있다. 그보다 더 많은 수를 붙잡아 노예로 판다면, 얼마나 많은 돈을 한꺼번에 손에 넣을 수 있겠는가? 바로 이런 ‘이점’ 때문에, 원래는 여름지기였던 아시가루들은 전쟁터에서 양심이나 도덕을 저버리고 인신매매에 나섰던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는 비난/처벌받아야 할 악덕이지, 절대 ‘옳은 일’은 아니다! – 인용자).
또한 다이묘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이렇다 할 포상도 내릴 수 없는 아시가루들(당시 근세조선이나 다이 비엣 제국이나 명나라의 군사들은 녹봉, 그러니까 월급을 받고 일했다. 따라서, 그들은 아시가루와는 달리 굳이 약탈을 할 필요는 없었다. 예외가 있다면 명군이 6년 전쟁[서기 1592 ~ 1598년]때 근세조선 땅에서 근세조선 백성들을 약탈한 사실을 들 수 있으나,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원래는 명군이 우방인 근세조선에서 약탈을 안 하려고 했고, 종이돈과 동전을 두루 쓸 정도로 화폐경제가 발달했던 명나라에서 온 명군이, 명나라보다는 화폐를 덜 썼던 근세조선에서 돈을 주고 군수물자를 확보하려다 그 계획이 틀어지자 약탈을 한 것이라고 한다 – 인용자)의 전의(戰意. 싸우고자 하는 뜻 – 인용자)를 고취하기 위해 약탈행위를 용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개중에는(그 가운데는 – 인용자) 란도리를 장려하는 다이묘도 있었는데, ‘우에스기 겐신’은 함락시킨 성 아래에서 인신매매 시장을 열었다는 기록까지 남아 있다.
한편으로 약탈을 일절 금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오다 노부나가’였다. 노부나가는 부하들에게 ‘잇센기리(一錢切[일전절. “(훔친 것이) 동전(錢) 한(一) 푼(이라도) (훔친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다(切).”는 뜻 – 인용자])’라는 공고를 전달했는데, 이는 한 푼(一錢)이라도 남의 것을 훔친 자는 용서 없이 참수하겠다는 엄명이었다. 당시는 천하통일(일본 통일 – 인용자)을 목전(目前. 눈[目] 앞[前] - 인용자)에 둔 상황이었기에, (오다는 그 명령을 내림으로써 – 인용자) 국가 건설의 지침을 내외(內外. 안팎 – 인용자)로 드러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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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란도리(약탈 – 인용자)
이기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허용되는 무시무시한 관례
전쟁의 승패가 결정된 후, 다이묘는 종군한 병사들에게 내리는 포상처럼 적지에서의 약탈행위를 용인했다. 병사들은 전장 부근의 마을을 습격해 농작물이나 가축, 가재도구 등을 빼앗았다. 이를 ‘란도리’라고 한다.
# 란도리의 종류
- 방화 : 가옥(집 – 인용자)에 불을 질러, 패전국이 다시 세력을 키워 반격하지 못하게끔 했다.
- 약탈 : 작물(쌀이나 보리나 콩 같은 농작물 – 인용자)이나 가재도구는 물론(勿論. 말할[論] 것도 없고[勿] - 인용자) 온갖 물건들을 약탈했다.
- 납치 : 여성뿐 아니라 어린아이까지 사로잡았고, 저항하면 살해했다(죽였다 – 인용자).
- 강간(성폭행 – 인용자) : 패전국의 여성을 겁탈한 후 노예로 팔았다.
* 센고쿠(‘전국시대’를 줄인 말인 ‘전국[戰國]’의 왜국식 발음 – 인용자) FILE :
노예는 외국으로까지 팔려갔다
‘란도리’에서는 농작물을 송두리째 빼앗았을 뿐 아니라, 여자나 아이들까지 납치했다. 그리고 당시 교역하던 포르투갈을 통해 태국(타이[Thai] - 인용자)이나 캄보디아, 서구 국가들에 노예로 팔려간 이들도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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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와다 데쓰오(小和田 哲男[소화전 철남]), 『 61가지 주제로 알아보는 센고쿠 전쟁 이야기 』, 174 ~ 175쪽
→ 『 61가지 주제로 알아보는 센고쿠 전쟁 이야기 』 ( '오와다 데쓰오' 감수, '곽범신' 옮김, ‘마나북스’ 펴냄, 서기 2023년 )에서
# 오와다 데쓰오 : 서기 2023년 현재 시즈오카대학교 명예교수.
# 곽범신 :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
▶ 인용자(잉걸)의 말 :
내가 이 글을 인용/소개하는 까닭은, 이 글이 ‘일본인 학자가 전국시대의 왜군(倭軍) 군사들이 잔인한 살인마에 약탈자에 성범죄자에 인신매매범에 강도에 도둑에 방화범이었다는 사실/그리고 그들의 윗사람인 왜국(倭國)의 다이묘들이 그런 범죄를 부추긴 나쁜 놈들이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증언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글을 통해 왜국의 전국시대가 ‘끔찍하고 잔인한 시대’였음을 설명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일하는<조센징>/<지나(支那) 놈>의 거짓말’이 되지는 않고, 그렇게 공격당할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글에 나오는 내용은, 을묘왜변(서기 16세기 중반)과 6년 전쟁(서기 1592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근세조선 침략전쟁)때 왜 왜구(倭寇)들과 왜군(倭軍)이 학살이나 약탈이나 방화나 성범죄나 노예매매(그때 왜국의 노예 사냥꾼과 왜군이 붙잡아서 끌고 간 뒤, 세계 노예시장에 판 근세조선 사람의 수가 “10만 명”을 넘는다! 그리고 그 노예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마카오까지 끌려가서 팔려갔다)나 납치(왜국으로 끌려가서, 고국으로 못 돌아온 근세조선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다. 툭하면 ‘북조선[조선 공화국. 수도 평양]의 일본인 납치’를 들먹이며 평양에 “인정하고, 피해자를 돌려보내고, 사죄하라!”고 윽박지르는 왜국 정부에게 묻겠다. 왜군이 한 이 짓은 ‘납치’가 아닌가? ‘범죄’가 아니야? 왜 그건 인정하지 않고, 평양이 겨우 몇 명만 데려가서 가둔 것만 비난하는 거야?) 같은 전쟁범죄를 일으켰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국시대가 시작된 이래 그때까지, 그러니까 무려 1세기나 1세기 하고도 서른 해 정도를 자기들끼리 그런 짓(전쟁범죄)을 저지르며 전쟁을 했으며, 그런 짓을 다른 나라인 근세조선에 그대로 써먹은 것이다.
서기 1592 ~ 1597년에 아시가루들에게 이런 짓을 하라고 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에도시대 말기부터 지금까지 계속 왜인(倭人)들이 존경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고, 그것도 모자라서 아예 ‘신(神)’으로 모셔지며, 왜국(倭國) 땅 안에는 그를 위한 신사(神社)도 있고, 그의 동상(!)도 세워진 지 오래다. 얼마 전에는 왜국의 한 언론사가 “한국인 관광객”이 도요토미의 동상을 가리키며 욕을 했다며, 그 관광객을 비난하는 기사를 실었고, 그 기사를 읽은 왜구(倭寇)들은 불같이 화를 내며 “죽여버리겠다!”라고 소리질렀다.
상황이 이런데, 과연 왜국 전국시대의 아시가루들이 ‘죽은 지 오래되어, 잊어도 괜찮은 옛 사람들’일 뿐인가? 우리는 이미 근대에 그들의 정신과 기질을 이어받은 근대 왜군(倭軍)이 창칼 대신 소총과 군도(軍刀)를 차고, 대포와 기관총과 군함을 가지고 들어와 (서기 1592년과 마찬가지로) 근세조선과 대한제국을 쑥밭으로 만든 일을 겪지 않았던가(덧붙이자면, “가옥에 불을 질러”, 저항 의지를 꺾는 방화는 근대 왜군이 의병전쟁 때[서기 1907~1911년] 정미의병과 대한제국 신민을 상대로 써먹은 방법이기도 하고, “작물”을 비롯한 “온갖 물건들을 약탈”하는 짓은 근대 왜군이 2차 대전 때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중화민국에서 써먹은 방법이기도 하다. 이게 근대 왜국 정부가 자기 나라 전국시대의 전략과 전술을 참고한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나는 이 때문에라도, 아시가루들이 한 짓을 ‘지나간 옛날 일’로 여길 수 없다)? 그리고 이제는 왜국 정부가 자기 나라의 학교에서 교련 교육과 총검술을 되살리고,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려고 헌법도 고치고, 항공모함도 만들려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일본도와 창과 조총 대신 기관총과 소총과 수류탄과 대포와 군함과 전차로 무장한 이 ‘새로운 아시가루’들은 – 그들은 서기 2010년대부터 날뛰기 시작한 넷우익과 재특회 회원들일 가능성이 크다. 왜국 정부가 자기 나라 국민이자, 우익인 그들 말고 누굴 징집해서 병사로 만들겠는가? - 평소에 길거리에서 외치던 구호(“<조센징>을 죽여라!”/“<조센징> 박멸!”/“만약 길거리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그것들에게 돌을 던지세요!”)를 왜국 땅 안에서는 재일(在日) 코리안(Corean)을 상대로, 그리고 한국 땅 안에서는 한국인들을 상대로 실천할 것이고,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아시가루가 한 짓과 크게 다르지 않을(아니, 어쩌면 더 끔찍할!) 것이리라.
나는 그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리고 적이 될 조직(자위대가 탈바꿈해 만들어질, 새로운 왜군)의 특성을 알아 그 적과 맞서 싸우기 위해, 우리 동족인 한국인 여러분에게 이 글을 소개하는 것이며,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온(100)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 손자병법 』 의 기본 법칙을 바탕으로, 적의 조상이자 본보기인(따라서, 우리 배달민족에게는 엄연히 ‘적’인!) 아시가루들이 한 짓을 제대로 알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부디 이 글이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기를 빈다.
― 단기 4356년 음력 6월 29일이자, 광복절(한국 독립기념일)에, ‘우리가 과연 왜국으로부터 해방됐을까? 아니, “온전한 독립국가”이기는 한가?’하는 험악한 의문을 품는 - 그리고 우리는 현재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의 ‘뿌리’를 알기 위해 중세나 근세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 잉걸이 올리다
# 덧붙이는 글 :
내가 이 글을 인용/소개하는 까닭은 또 있다. 한국 사회의 청소년과 젊은 층에 독버섯처럼 퍼진 친일(좀 더 정확히는, 왜국을 무조건 찬양하고 따라가는 성향이자, 왜국의 잘못된 문화나 군국주의/신국사상/제국주의에도 박수를 보내는 성향)이 잘못된 것임을, 그리고 친일국가 출신 시민/국민들이나 제 4 세계의 사람들이 푹 빠진 친일도 올바른 것이 아님을, 왜국의 갈마('역사')와 현실은 왜국의 문화상품(대중문화)이나 왜국 정부의 선전과는 달리 잔인하고 비참함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그들의 환상을 깨뜨리고, 그들을 세뇌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나로 하여금 이 글을 인용/소개하고, 인용자의 주석을 달고, '인용자의 말'이라는, 걱정과 분노와 경계가 담긴 글을 (인용한 글 끄트머리에) 덧붙이게 했다. 그러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비록 이 글의 내용과 내가 덧붙인 글들의 내용이 거칠어도,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