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6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일본 자위대 헬기 이륙 10분만에 실종…사단장 포함 10명 탑승
일본 육상자위대 헬기가 오키나와 상공에서 이륙 10분 만에 사라진 사건이 발생했다. 해당 헬기에는 사단장 등 10명이 탑승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오후 3시 56분쯤 육상자위대의 헬기가 오키나와현 미야코지마(宮古島) 인근 상공을 비행하던 중 레이더에서 항적이 사라진 후 통신이 끊겼다. 실종된 헬기는 구마모토현에 사령부가 있는 육상자위대 제8사단 제8비행대 소속 UH-60JA다.
당시 헬기에는 제8사단의 사카모토 유이치 사단장과 조종사, 대원 등 모두 10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이 헬기는 이날 오후 3시 46분 미야코지마에 위치한 항공 자위대 기지에서 이륙해 오후 5시 5분 같은 기지로 돌아올 예정이었다. 보도에 따르면 당시 해당 지역의 풍속이나 시야 등 기상 상황에는 문제가 없었다. 헬기의 연료는 이륙 이후 4시간가량을 비행할 수 있는 양이 채워져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21년 제주 화물차와 버스 추돌 3명사망 59명 부상
2018년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2부(부장판사 김세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징역 24년 벌금 180억원 선고
2015년 ‘아웅산 순직’ 김동휘 장관 유족, 10억 기부
2015년 4월6일 아웅산테러로 숨진 고 김동휘 장관 유족이 서울대에 10억원을 기부했다
4월6일 서울대로 전화가 왔다. “아웅산 테러로 순직한 고 김동휘 장관의 유족입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한 그분의 뜻을 기려 모교에 기부하려고 합니다.” 김동휘 전 장관의 아내 박정혜(79)씨는 그 뒤 바로 10억원을 서울대에 전달했다. 소식을 들은 성낙인(65) 서울대 총장이 유족에게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고 했지만, 박씨 등 유족은 “어려운 형편에서 공부하는 후배들이 학비 걱정 없이 공부에 전념하길 바랄 뿐”이라며 거듭 사양했다.
박씨는 “기부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신신당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서울대는 고심 끝에 “기부자의 깊은 뜻과 고인의 애국·애교 정신을 널리 알려야 한다”고 판단해 기부받은 10억원으로 ‘김동휘 장학 기금’을 조성하기로 했다. 김 전 장관이 졸업한 정치외교학부 정치학 전공자 가운데 성적은 우수하나 형편이 어려운 이에게 장학금으로 전할 계획이다.
1982년 상공부장관에 임명된 김 전 장관은 1983년 10월 9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미얀마 공식 방문을 수행하다가 북한 공작원의 폭탄 테러로 순직했다. 주(駐)이란 대사와 외무부 차관을 지냈다.
2013년 싸이의 '강남스타일' 유튜브 15억 뷰 돌파
2012년 '중국의 사하로프' 팡리즈(方勵之·반체제 물리학자), 망명지 美서 별세
중국의 대표적 반체제 인사인 천체물리학자 팡리즈(方勵之·76·사진)가 망명지 미국 애리조나주 투산에서 6일 오전(현지시각) 별세했다 팡은 1980년대 중국 반체제 학생운동가들의 정신적 지도자로 평가받았다. 러시아 물리학자 겸 인권운동가 안드레이 사하로프(1921~89)와 비교돼 '중국의 사하로프'로 불렸다.
팡은 1989년 6월 4일 중국 당국이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학생 시위를 유혈 진압하자, 이튿날 아내와 함께 미국 대사관에 들어가 망명을 요청했다. 중국 당국은 1주일 뒤 그에게 반혁명죄로 수배령을 내렸다. 그는 미·중 간 13개월에 걸친 외교적 협상이 마무리되면서 1990년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입국했다. 그는 이후 투산에서 애리조나대 물리학 교수로 활동했다.
팡리즈는 1936년 2월 베이징에서 우체국 직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16세에 베이징대 물리학과에 입학해 이론물리학·핵물리학을 전공했고 중국 내 레이저 물리학 분야를 개척했다.
그는 12세에 공산당에 입당했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공개적으로 공산당 독재를 비판했고 인권 개선과 민주개혁을 촉구하는 글을 발표했다. '과학이 공산당 이론에 지배돼선 안 된다'는 신념을 펴기도 했다. 이런 집필 활동과 발언으로 인해 1987년 1월 안후이(安徽)성 허페이(合肥) 과학기술대학 부학장직에서 쫓겨났고, 덩샤오핑(鄧小平) 당시 최고지도자에 의해 당적을 박탈당했다. 1989년 1월에는 민주화 운동가 웨이징성(魏京生) 등 정치범 석방을 촉구하는 공개서한을 덩샤오핑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는 미국으로 간 뒤 중국인권이사회 공동회장을 맡아 중국 인권 개선을 위한 활동을 펼쳤디
2010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로 홍수 산사태 사망 104명
2010년 중국, 일본인 마약사범 사형 집행
2010년 4월 6일 중국에서 일본으로 마약을 밀수출하려다 체포된 일본인 마약밀매범이 중국에서 처형됐다. 일본인이 중국에서 사형에 처해진 것은 1972년 중·일 국교 정상화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6일 최고인민법원의 발표를 인용해 "이날 오전 랴오닝(遼寧)성에서 일본인 마약밀매범 아카노 마쓰노부(赤野光信·65)씨에 대한 사형 집행이 이뤄졌다"고 보도했다. 중국 최고인민법원은 "아카노씨는 마약 밀매에 대한 명확한 증거에 따라 사형 판결을 받았으며, 중국 법에 의거해 사형이 집행됐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중국 정부는 3월 29일 아카노씨에 대해 7일 뒤 형을 집행하겠다고 일본 측에 통지했다.
아카노씨는 2006년 9월 중국 랴오닝성 다롄(大連) 공항에서 필로폰 2.5㎏을 일본으로 몰래 보내려다가 다른 동료 1명(징역 15년형 확정)과 함께 체포돼 지난 2008년 7월 중국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중국 최고인민법원은 2009년 그에 대한 사형 판결을 승인했다.
일본 정부는 아카노씨에 대한 사형과 관련, 강한 유감과 우려를 표시했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는 "두 나라 사법제도에 차이가 있지만, 일본으로서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2010년 키르기스스탄, 반정부 시위 발생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에서 2010년 4월 6일 쿠르만벡 바키예프 대통령 사임을 주장하는 반정부 시위가 발생, 정부가 비상사태를 선언한 가운데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해 시위자 수백명이 숨지거나 부상당했다.
정부의 부패와 살인적인 물가에 불만을 품은 3천~5천명의 시위대는 야당 지도자들의 검거에 분노해 정부 건물과 검찰청, 방송국 등에 난입해 방화했다.
이튿날인 7일 수도인 비슈케크에서는 수천 명의 야당 지지자들이 대통령궁을 향해 거리 행진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경찰은 최루탄과 고무탄을 발사하며 진압에 나섰으나 시위가 격화되자 실탄을 사용하면서 사상자가 급격히 불어났다.
이외에도 동부 나린 시에서도 수백 명의 야당 시위대가 시 청사로 난입했으며 수도 외곽에 있는 토마크 시에서도 2천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런 가운데 경찰은 이날 대통령 후보였던 알마즈벡 아탐바예프를 비슈케크 수도 자택에서 검거하는 한편 다른 야당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하지만 야당이 과도정부를 구성하는 등 제2의 튤립혁명이 재현되고 있다. 이미 수도 비슈케크의 주요 관공서는 시위대에 의해 장악됐으며 쿠르만벡 바키예프 대통령은 수도를 탈출했고 총리도 사임해 시위를 주도한 야당이 사실상 정권을 장악했다.
이번 사태와 관련, 러시아는 7일 키르기스 정부에 시위대들에게 폭력을 사용치 말 것을 요구했고 미국도 깊은 우려를 표시했다. 러시아와 미국은 키르기스에 군사 기지를 두고 있다.
이번 시위가 확대된 것은 2005년 튤립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바키예프 대통령이 정치 개혁 실패와 부패 등으로 국민을 실망시켰고 최근에는 경제위기로 생활난이 극심해지면서 결국 국민의 불만이 폭발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2010년 전설적 외교관 아나톨리 도브리닌 별세
1919년 모스크바 근교 크라스나야고르카에서 배관공 아들로 태어난 도브리닌은 1946년부터 외교관 생활을 시작했으며 1952년 참사관으로 처음 미·소 외교무대에 등장했다.
도브리닌은 1962년부터 25년동안 미국 주재 소련 대사를 지냈다. 부임 첫해 미·소 핵(核)전쟁 직전까지 갔던 쿠바 미사일 위기를 극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72년에는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과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미·소 수뇌회담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1990년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외교고문을 지내며 한·소 수교에 직접 간여했다.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 간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을 성사시켰고, 남북 유엔 동시 가입에도 막후 역할을 했다.
그는 주미 대사 시절에는 공산당 정치국원 신분을 십분 활용해 외교부가 아닌 소련의 정치 실세들의 지원을 받아 활동했다. 이 때문에 수많은 비밀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1983년 사할린 상공 KAL기(機) 폭발사건 당시에도 안드로포프 서기장은 휴가 중이던 그를 불러 외교적인 대책을 주문했을 정도였다. 1990년 고르바초프 특사 자격으로 청와대를 방문, 노태우 대통령에게 수교 약속을 하면서도 러시아 외교부를 따돌렸다.
도브리닌은 지적인 이미지에다 영어와 프랑스어 등을 자유롭게 구사해 외교사절단장(1979~86)을 지내는 등 워싱턴 외교가에서도 인기를 누렸다. 그는 은퇴 이후에는 집필활동에 전념했으며, 스피리드노프카에 있던 한국대사관 근처에 살면서 대사관과 교류했다.
2009년 이탈리아 강진 사망자 272명..중상 100여명
이탈리아 중부 산간지역인 아브루초주(州)에서 2009년 4월 6일 강진이 발생해 주도 라킬라와 그 주변 20여개 도시, 마을에서 어린이 16명을 포함해 모두 272명이 숨지고 1천200여명이 부상당했다.
이 지역에서는 4월에 접어들면서 적어도 9차례의 작은 진동들이 있었다. 이번 지진의 규모를 미국지질조사국(USGS)은 6.3이라고 밝혔으나, 이탈리아 국립지구물리학연구소는 6.2라고 말했다.
이탈리아 정부에 따르면, 당초 예상과는 달리 집을 잃은 이재민의 수가 2만8천명 정도로 늘어날 것으로 추산됨에 따라 라킬라와 그 주변 도시.마을 곳곳에 31군데의 임시 천막촌을 조성하고 14개의 순회 의료팀을 구성했다.
이번 강진으로 인해 약 1만채의 주택, 건물들이 파괴되거나 훼손되는 등 물적 피해도 13억 유로에 달할 것으로 이탈리아 정부는 보고 있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기자회견을 통해 “지진 피해 규모를 정확히 산정하는데는 한달 반에서 두달 걸릴 것”이라면서 “내일부터 1천명의 전문가들이 공공건물과 주택들의 피해 규모를 산정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했다.
임시 천막촌에서 생활하는 것을 ‘주말 캠핑’에 비유해 비난을 받고 있는 것에 대해, 그는 “때로는 지금과 같은 비극적 상황에서도, 낙관이 없으면 성과를 얻지 못하기에 웃어야만 한다”고 일축한 뒤, “염세주의와 부정적 자세, 죽음과 같은 분위기를 쫓아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이와 함께 지진 피해 도시, 마을들이 빈 틈을 타 약탈과 절도 등이 늘어나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경찰들의 순찰을 강화하는 한편, 라킬라 교도소도 지진으로 훼손됨에 따라 중범죄자들을 다른 교도소로 이감했다.
2005년 모나코 국왕 레니에 3세 타계
그는 1923년 5월 31일 모나코 공국의 샤를로트 공주와 피에르 드 폴리냑 백작 사이에서 태어나 영국, 스위스, 프랑스에서 문학, 정치학 등을 공부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인 1944년 프랑스군에 자원 입대, 알자스 탈환 작전에 기여한 공로로 훈장을 받았다. 또 전후 베를린에서 프랑스 정부의 일원으로 근무했고 나중에 대령으로까지 진급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고 1949년 조부인 루이 2세가 서거한 뒤 왕위를 이어 받았다.
1956년 4월 18일 미모의 할리우드 스타 그레이스 켈리와의 결혼은 그와 모나코를 전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레이스 왕비가 1982년 교통사고로 숨지는 불행을 겪었다.
그는 결혼으로 인한 유명세 등에 힘입어 관광, 금융, 도박 산업 중심으로 모나코 경제를 크게 발전시키고 국제적 위상도 높여갔다. 특히 1990년대에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해 도박 산업 의존도를 4% 대로 낮추며 산업 구조의 변화를 이뤄냈다. 1974년엔 국제 서커스 대회를 창설해 오늘날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행사로 발전시켰다. 1962년 헌법을 개정해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국민회의와 권력을 공유했고 군주의 통치신성권 원칙을 폐지하는 등 정치개혁도 이뤘다. 1993년엔 모나코를 183번째 유엔 회원국으로 가입시키는 업적을 남겼다.
2004년 리투아니아 롤란다스 팍사스 대통령 탄핵 해임
2004년 4월 6일 리투아니아 의회는 독직(瀆職) 혐의를 받아온 롤란다스 팍사스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을 가결했다.
팍사스 대통령은 2003년 1월 대선 당시 재정적 후원자였던 러시아 사업가 유리 보리소프에게 시민권을 부여한 것과 대통령 취임선서 위반, 국가기밀 누설, 사적 이해관계의 개입, 국가기관 불신, 측근의 권력 남용 방치 등 6건의 혐의로 의회에서 탄핵안이 상정됐었다.
리투아니아는 우리와 달리 헌법재판소 판결 이후 의회 표결 절차로 탄핵안을 처리토록 돼 있다. 의회(전체 141석)에서 의원 36명 이상이 발의하면 대통령 탄핵안이 상정되며, 86명 이상이 찬성할 경우 탄핵이 확정된다.
리투아니아 의회는 2003년 12월 팍사스 대통령에 대한 의회 조사위원회 보고서 공개를 승인함에 따라 대통령 탄핵 수순에 들어 갔었다. 리투아니아 의회는 2004년 3월 16일부터 3주 동안 최종 심의를 벌인 헌재가 31일 대통령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리자 이날 표결 절차를 걸쳐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리투아니아 헌법에서는 탄핵된 대통령의 재출마 제한 규정이 명시되어 있지 않아 팍사스 전 대통령이 소속당인 자유민주당에 의해 대선 후보로 옹립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3년 국산 신약 폐렴치료제 팩티브, 미국 FDA 첫 승인
미국 식품의약품청(FDA)의 정식 승인을 받은 국산 신약이 처음으로 탄생했다. 바이오기업인 LG생명과학(대표 양흥준)은 자체 개발한 퀴놀론계 항균제 ‘팩티브(FACTIVE)’가 미국 FDA로부터 경·중증 폐렴(CAP) 및 만성 호흡기질환의 급성악화(ACEB) 환자들에 대한 새 치료제로 승인을 받았다고 2003년 4월 6일 발표했다.
1999년 FDA에 처음 신약 승인 신청을 낸 ‘팩티브’는 2000년 승인 유보 판정을 받았지만 2002년 재신청해 결국 국내 신약으로는 ‘FDA승인 1호’를 기록했다. 현재 FDA로부터 승인을 받은 신약을 가진 나라는 전 세계에서 10개국에 불과하다. 호흡기 감염증 치료제 ‘팩티브’의 FDA 승인은 제약업계에서 “월드컵 4강 진출과도 같은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106년에 이르는 국내 제약사상 최초로 ‘세계 시장에서 통하는 우리 약’을 만들었다는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LG생명과학은 신약 연구비로 작년에만 650억원을 투입하는 등 이번 신약 개발에 3000여억원 이상을 쏟아넣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신약이 FDA로부터 일단 공식승인을 받으면 말 그대로 ‘대박’이 터진다. 앞으로 세계 시장에서 매년 수백억~수조원의 수익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신약 개발은 ‘돈 먹는 하마’에 비유된다. 신약을 만들기 위해서는 매년 수백억원의 연구비가 투자되지만, 10년이 지나 신약 1개가 나오면 대성공이기 때문이다.
LG생명과학은 “앞으로 팩티브의 해외 판권을 가진 미국의 진소프트(Gene Soft)사와 함께 미국 등 해외 시장 마케팅을 본격적으로 펼칠 것”이라며 “앞으로 판매 로열티 등으로 해외에서만 연간 800억원 규모의 수익을 올릴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업계는 이번 신약개발을 계기로 SK 등 다른 대기업의 신약개발은 물론 바이오 벤처기업들에도 자극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2000년 튀니지의 초대 대통령(1957~1987) 부르기바 사망
1999년 500여년 전 잉카 어린이 미라 발견
500여년 전 잉카인들이 종교 제례의 희생물로 바친 소년, 소녀들의 미라 3구가 아르헨티나 북부 안데스 산맥에 있는 룰라이랄코 화산(해발 6700m) 정상에서 1999년 4월 6일 발견됐다.
1구는 소년이고 2구는 소녀인 미라들은 솜털과 머리카락까지 보일 정도로 완벽하게 보존돼 편히 잠들어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컴퓨터 단층 촬영 결과, 피부 뿐만 아니라 심장과 폐의 혈액, 콩팥 등 내장기관이 완전하게 보존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발굴팀 팀장은 "미라의 주인공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는 DNA 테스트에서 정확하게 밝혀질 것"이라며 "제물로 바쳐진 뒤 폭설과 강풍이 몰아치는 산 정상에 남겨져 그대로 동결됐기 때문에 형체가 완전히 보존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라들이 종교의식의 제물로 바쳐졌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또 다른 이유는 부장품들 때문이다. 제단에는 금, 은, 조개로 만든 35개의 작은 조각들 및 정교하게 짠 천조각, 신발, 육포 따위의 음식을 담은 도자기들도 함께 발견됐다.
1998년 파키스탄, 사정거리 1,500km에 달하는 장거리 지대공미사일 발사시험에 성공
1996년 금호그룹 박정구 회장 취임
금호그룹의 새 그룹회장으로 박성용 회장의 동생인 박정구 부회장이 취임했다. 1996년 4월 6일 박성용 회장이 명예회장으로 추대되면서 박 신임회장이 금호그룹을 책임지게 됐다. 광주고와 연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곧바로 삼양타이어에 입사, 광주여객-금호타이어 대표이사 그룹부회장 등을 지냈다.
활달한 성격에 리더십이 강해 학자풍인 친형 박성용 명예회장과 대조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박 신임회장은 박 명예회장이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따고 교수생활을 하는 동안 국내 경영현장에서 궂은 일을 도맡아 왔다. 지난 1981년 적자 50억원의 (주)금호 대표이사를 맡아 2년만에 순이익 1백20억원의 흑자기업으로 전환시키며 경영능력을 발휘한 박 신임회장은 지난 1976년부터 광주상공회의소 부회장을 3차례 역임하는 등 사회활동이 활발하고 교제폭도 넓다는 평을 받고 있다.
1995년 전기통신사업법 개정 시행
1994년 비행기 폭발로 르완다의 주베날 하비아리마나 대통령과 부룬디의 시프리엔 온타리아미라 대통령 사망
1994년 르완다 내전상태 돌입
1992년 미국 과학소설가 아이작 아시모프 사망
1990년 미얀마 여객선 미얀마 남부해상서 전복 310명 사망
1990년 상영금지된 `파업전야` 6개도시에서 상영
1984년 미국 챌린저호 발사. 우주에서 위성 수리 성공
1982년 헤이그 미국 국무장관 미국의 핵무기 선제사용 가능 시사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 시작됨
1979년 경주 보문관광단지 개장
1979년 북한 화폐개혁 실시
1978년 박정희 대통령, 국산 고성능탱크M48A3. M48A5의 성능시험 과정 참관
1973년 경주 155호 고분 발굴 시작
1973년 4월 6일부터 김정기 박사를 단장으로 한 고분발굴 학술조사단이 155고분 발굴에 착수해 9월 20일까지 5개월 반 동안 신라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각종 유물 1만1천2백97점을 출토했다. 유물 중 특히 학계의 관심을 끈 것은 새 날개 모양으로 만든 금제관식 2점, 자작나무 껍질로 짜서 천마도를 그린 장니 한 벌, 서조도와 기마인물도 등이다.
7월 15일에는 천마총에서 천마도가 발굴돼 학계를 놀라게 했다. 천마도는 지금까지 알려진 신라시대의 회화로는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꼽힌다. 천마도는 천마총에서 출토된 마구장비(馬具裝備)에 그린 장식화로 5~6세기 신라시대 그림이다. 천마도가 그려진 채화판은 마구의 일종인 장니로 추정된다. 중앙에 흰색으로 천마도를 그렸고 가장자리는 흰색, 붉은색, 갈색, 검정색 선으로 인동당초문을 장식했다. 천마는 흰 말이 말갈기와 꼬리털을 날카롭게 세우고 하늘을 달리는 모습이다.
천마도는 국보 207호로 지정됐다. 천마도와 같은 양식의 그림이 만주 집안현에 있는 5~6세기 무용총 천장벽화에도 남아 있어 고대 삼국문화의 상호관계를 밝히는데 매우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1973년 정부, 반사회적 기업인 73명 발표
1973년 태양계 탐사선 파이오니어 11호 발사
1971년 미국의 작곡가 스트라빈스키 사망
1969년 티우 월남대통령 6개항의 평화안 제기
1968년 정부, 지방자치백서 발표
1967년 홀트 호주 수상 내한
1960년 야당의원들 3.15 부정선거 규탄 데모
1954년 회오리 바람, 미국 달라스시 강타
1950년 농지개혁 실시
1950년 4월 6일 한국 역사상 최초로 농지개혁이 실시됐다. 농지개혁법은 정부수립 후 1949년 2월 5일 이승만 정부가 국회에 법안을 제출했으나, 지주출신 국회의원들의 반대, 그리고 정부와 국회의 의견출동 등으로 2차례에 걸친 법개정 공포의 파란을 겪었다.
이 농지개혁법은 수확물 평년작의 1.5배를 5년간에 걸쳐 지주에게 균분(매년 수확물의 30%씩) 상환함으로써 소작농에게 농지소유권을 넘겨준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농지개혁은 시행 시점이 해방후 5년이 지난 뒤여서 그동안 많은 지주들이 소작인에게 사적으로 땅을 팔았을 뿐 아니라 농민들이 광복 직후부터 줄기차게 바라던 무상몰수·무상분배를 거부하고 유상몰수·유상분배를 실시함으로써 농민들에게 큰 부담과 좌절감을 안겨주었으며 농지개혁 착수 2개월여 만에 발발한 한국전쟁과 인플레로 소작농을 자작농으로 육성하지도 못했고, 지주들을 산업자본가로 키우지도 못했다.
1950년 브라질서 철도붕괴 사고로 열차 추락 - 108명 사망
1949년 트루먼 평화를 위해 원폭사용 불사 발표
1945년 소련군 오스트리아 수도 빈 침입
1943년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출간
1941년 독일군 그리스-유고 진입
1936년 시인 신경림 출생
1930년 우리 나라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 중국에서 비행기 추락 세상 떠남
1930년 간디 2차 비폭력저항운동(소금행진) 시작
1930년 4월6일 마하트마 간디의 ‘소금행진’은 인도 정역에 두 번째 불복종, 비협력 운동을 불러 이르켰다. 간디는 지나는 마을마다 소금의 제조 판매를 독점하려는 영국 식민지 정부를 규탄했다. 간디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소금세법이 근비하는 해안에서 소금을 채취하자 지지자들도 그를 따라 항아리와 냄비에 염수를 담아 소금을 만들었다. 식민지 권력에 정면으로 항거하는 상징적인 행위 였다.
1928년 디옥시리보핵산(DNA)의 이중 나선 구조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은 제임스 왓슨 출생
1911년 콜레스테롤과 지방산의 대사작용 연구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은 리넨 출생
1909년 로버트 피어리 최초 북극탐험 성공
1909년 4월 6일 로버트 피어리가 인류 최초로 북극점 위에 자신의 발자국을 새겼다. 피어리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흑인 대원 매슈 헨슨과 에스키모인 4명이 감격의 순간을 함께 했다.
1902년에 발가락 여덟개를 동상으로 잃으면서 북위 84도 17분 지점까지 갔지만 발길을 돌려야 했던 피어리는 두 개의 발가락만으로 마침내 북극점에 도달해 20세기 탐험사에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성조기를 꺼내 기념사진을 찍은 피어리는 성조기의 가장자리를 찢어 “1909년 4월 6일 북위 90도에 닿았다. 피어리”라고 쓴 종이와 함께 얼음 속에 묻었다. 1908년 7월 6일 ‘루스벨트호’를 이끌고 뉴욕항을 떠난지 9개월 만이었다.
하지만 10월 1일 뉴욕에 돌아온 피어리는 프레데릭 쿡과 ‘북극 최초 발견자 논쟁’에 휘말리게 됐다. 논쟁은 9월에 피어리와 쿡이 불과 닷새 차이로 각각 자신이 최초로 북극 탐험에 성공했다고 본국에 타전하면서 촉발됐다. 쿡은 피어리보다 1년 앞선 1908년 4월 21일 북극점에 도달했다고 주장했다. ‘뉴욕 헤럴드’는 쿡을 지지하고 ‘내셔널 지오그래픽 소사이어티’와 ‘뉴욕타임스’는 피어리를 지지하는 등 논쟁은 미국 탐험계와 지식인 사이에 뜨겁게 불붙었다.
그러나 논쟁 중에 쿡의 거짓임이 들어나 역사는 여전히 피어리를 최초의 북극점 정복자로 기록하고 있다.
1901년 일제시대 최고의 부흥사 이용도 목사 출생
1930년을 전후한 시기 최고의 부흥사였던 이용도 목사가 1901년 4월 6일 출생했다. 그는 일반인에게는 낯선 인물이지만 개신교계에서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존재이다. 20대 초반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네 차례에 걸쳐 2년간 옥고를 치렀던 이용도 목사는 신학교를 졸업하던 1928년 금강산에서 짙은 종교적 체험을 한 후 대부흥사로 변신했다.
1933년 폐결핵으로 불꽃같은 삶을 마감할 때까지 5년간 이용도 목사는 한반도는 물론 만주 일대까지 100여 개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며 선풍적인 바람을 일으켰다. 예수 중심과 기도를 강조하는 그의 영향으로 개신교 신자는 크게 늘어났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목회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영감을 유난히 중시하는 그의 부흥회 방식은 기성 교단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신비주의’라는 딱지를 받고 목사직을 정지당한 채 1933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 66년이 지난 1999년 그가 속했던 감리교단은 그를 복권했다.
1896년 제1회 아테네 올림픽 개막 (-4.15)
제1회 근대 올림픽이 1896년 4월 6일 개막됐다. 장소는 그리스의 아테네였다. 판아테나익 스타디움에 운집한 6만여명의 관중은 열광했고 환호했다. 393년을 끝으로 1500년동안 중단됐던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 경기가 다시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10개 종목(육상,사이클,수영,체조,역도,레슬링,펜싱,사격,테니스,마라톤)에 13개국 311명의 선수가 출전해 열흘동안 힘과 기를 겨뤘다.
개막 첫 경기는 100미터 달리기였다. 근대 올림픽은 1894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설립을 주도한 프랑스의 쿠베르탱 남작의 공이 컸다. 2회 대회는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돼 오늘까지 그 명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
1887년 조선전보총국 창설
1883년 한미수호통상조약 조인
1877년 정언, 김기룡 등이 서얼금고제를 혁파할 것을 상소
1871년(조선 고종 8) 미군, 강화도 쳐들어옴(신미양요)
미국 상선 셔먼 호가 평양 관내까지 들어와 무역거래를 요구하다가 평양시민과 충돌하여 불태워진 진상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가 콜로라도 호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강화도의 초지진에 상륙한 미군은 광성진까지 함락시켰다.
백병전까지 벌인 치열한 싸움으로 중군 어재연 등 53명이 전사하고 24명이 부상당했다. 미군은 전사 3명에 부상 10명이었다.
미군은 결국 40여일만인 5월 16일에 철수하였다.
1830년 조지프 스미스, 몰몬교 창시 선포
1818년 독일인 칼 드라이스, 최초의 자전거 `드레지엔` 파리에서 공개
1803년 영국 고고학자-외교관 윌리엄 해밀턴 사망
1520년 화가 라파엘로 사망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3대 작가 중 한 사람, 라파엘로는 뒤늦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우르비노 지방화가에서 바티칸 교황청 궁정화가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사회적 영예와 세속적 성공을 누린 예술가였다.
1483년 우르비노의 화가 지오바니 산지오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시절의 대부분을 이곳에서 보냈다. 이 시절 그는 아버지로부터 그림의 기초를 배웠다. 이후 라파엘로는 아버지를 따라 페루자로 가 화가 페루지노의 문하에서 차분하고 정교한 화풍을 전수받았다. 1504년 예술의 중심지인 피렌체에서 일생의 스승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를 만나게 되는데, 1508년까지 4년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암법과 스푸마토(‘모나리자’에서 사용된 기법)를 비롯 미켈란젤로의 조형법을 연마했다.
그러던 1508년 라파엘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고 로마로 갔다. 그는 거기서 짧은 생애의 마지막 12년을 보냈는데, 이 시절 창작을 향한 그의 정열은 들끓는 용광로 같았다. 이로 인해 많은 걸작이 탄생했고, ‘화가중의 화가’라고 불릴 만큼 로마에서 그의 평판 또한 좋았다. 인생의 말년 라파엘로는 건축과 고대 유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514년 브라만테의 사후 뒤를 이어 ‘성 베드로 대성당’ 조영(造營) 사업을 지도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으로는 ‘기사의 꿈’ ‘마리아의 결혼’ ‘아테네 학당’과 ‘성체논의’ ‘다비드 상’ 등이 있다.
1483년 이탈리아 화가 라파엘로 출생
1086년 왕안석 사망
221년 유비 황제에 즉위(건안 26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