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앞서) 이번 이야기 '블랙 크리스마스'는 예전에 제가 연재했던 <기억의 지배자>의 에피소드 중 구상만 하고 공개하지 않았던 내용을 다룬 것입니다. 원래 <기억의 지배자>는 구상해 놓은 에피소드들이 다양했었는데 이번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마감해 버릴 생각입니다.
각설하고 '블랙 크리스마스'는 중편 정도의 분량이 될 것이며 장르를 구분한다면 정통 호러에 가까운 스릴러라 할 수 있겠네요. 하루에 한 편 정도씩 연재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참고로 <기억의 지배자> 시리즈는 전 에피소드의 제목들이 모두 유명 공포영화의 제목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번 이야기 '블랙 크리스마스' 역시 '로미오와 줄리엣''섬머타임 킬러'의 청순미 여왕 올리비아 핫세가 주연을 한 70년대 캐나다 호러의 걸작 '블랙 크리스마스'에서 제목을 따온 것입니다. 영화 '블랙 크리스마스'는 올리비아 핫세와 마고트 키더가 주연을 한 본격 호러 스릴러물로 유럽과 영어권 지역에서 크게 히트한 작품입니다. 호러 매니아들 사이에서도 큰 호응을 얻고있으며 IMDB에서도 높은 평가를 얻은 작품이죠. 아울러서 현재 미국에서 리메이크 작업을 준비하고 있답니다.
영화 블랙 크리스마스의 또 다른 제목은 'Silent Night, Evil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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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최후의 비극은 망각이다!
I'm draming of a black Christmas~
어디선가 미세한 노래 소리가 흘러나온다. 박자와 음정은 물론이고
가사까지 무시한 제 멋
대로 부르는 노래이다. 그렇지만 꽤 자기 감정에 도취된 듯한 선율이었다.
누군가의 발이 보였다. 검은 구두가 서 있는 그곳은 피가 흥건히 고인
타일 바닥 위다. 검은
구두는 움직일 때마다 붉은 피의 발자국을 도장처럼 남겼다.
이윽고 뭔가가 바닥 위로 툭 떨어졌고 그것은 두 눈알이 뽑혀나간 남자의 목이었다. 검은
구두는 공을 다루듯 잘린 목을 힘껏 차버린다. 그것은 축구공 마냥 포물선을 그으며 날아가
코너 벽에 부딪히며 욕조 속으로 풍덩 빠진다. 잘린 목은 욕조의 수면
위를 둥둥 떠다니며
먼저 표류해 있던 다른 목들과 만난다. 피로 물든 그 욕조 안에는 잘려나간 목들로 가득했
다.
검은 구두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화장실을 나와 2층 복도를 잠시
서성이다가 진열대로
발길을 향한다. 크고 작은 트로피들과 번쩍이는 계급장들이 빼곡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것들
이 엉망으로 파괴되는 데에는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검은 구두는 1층으로 내려가 주방에서 따뜻한 물 한잔을 여유 있게 마신 후 거실로 향한다.
거실의 샹들리에에는 노파가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가슴과
배는 해부되어 있고 당
연하다는 듯이 목도 잘려 있다. 잘려나간 노인의 목은 특별히 탁자 위에 놓여있다. 마치 모
든 공포를 최후까지 똑똑히 지켜보라는 듯이. 처참하게 일그러진 그
얼굴은 자신에게 불현
듯 닥친 이 끔찍한 공포가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밤, 느닷
없이 찾아온 잔혹한 살육!
들릴 듯 말 듯한 노래 소리는 계속 이어지고 그것은 지옥을 부르는 듯한 일종의 레퀴엠이었
다.
집안 곳곳에 나뒹구는 시체와 신체 조각들, 그리고 피의 향연……!
일가족 전원이 잔인하게 몰살당한 이 희대의 사건은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기엔 충분했다.
그러나 더 무서운 사실은 아직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는 것이다.
-호러 스릴러-
<블랙 크리스마스 Black Christmas>
by 살인교수 http://cafe.daum.net/suttlebus
<1>
산등성이를 덮어버린 겨울 저녁의 이른 어둠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시기하듯 거리마다 번져
나는 축복의 빛들을 조금씩 먹어 들어간다. 교회의 십자가와 거리의
가로수에 널려진 거룩
한 사랑의 장식물들은 아무런 저항 없이 암흑 속으로 빨려든다. 이제
곧 완연한 밤이 찾아
들고 찬바람이 천지의 모든 피조물들을 꽁꽁 얼려 버리면 사랑을 노래하던 목자들은 저마다
의 핑계를 대며 어둠 속으로 흩어져버린다. 성탄 빛은 냉기 속에 사라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 세상은 냉엄하게 변모한다. 기나긴 추위와 눈보라에 살아남기 위해 두꺼운 외투로 자신
을 덮어버린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사랑은 영하의 추위에 얼어붙고 차디찬 강물 저 아래로 하염없이 가라앉는다. 그것이 다시
수면위로 떠오를 때쯤 세상은 새로운 봄을 맞이하고 있을 테다. 추위와 고통으로 얼룩진 지
난 사랑들은 너무나도 쉽게 잊혀진다.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옛 사랑이 갈 곳을 잃어 방황
하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흔히들 너무나도 쉽게 사랑을 얘기한다. 사랑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순수하고 고결한 것이며 영원불멸한 것이라고 찬양한다. 마치
그것이 불변의 진리라도
되는 듯 구태의연하게 받아들인다. 나 역시도 그러했다.
내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 그리고 팔순을 바라보는 나의 노부. 그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나의 가슴은 뜨겁게 달아오른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고 세월이 아무리 흐른다고 한들 그들
의 존재를 내 사랑의 기억 속에서 덜어 없앨 수 있을까.
문득 의문이 든다. 그들에 대한 내 사랑의 확신도는 과연 어느 정도일까? 사랑은 정말로 영
원히 변치 않는 것일까? 절실히 기억되어 지는 고귀한 감정일까?
이제부터 나는 사랑에 관한 특별한 기억 하나를 이야기하려 한다. 지금 나는 두렵다. 이 무
섭도록 슬픈 기억 속에 어쩌면 내가 갈구하던 답이 있을 것만 같아서.
스스로 확신해왔던
견고한 신념의 탑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아서 두렵다.
기이한 사건의 시작은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 둔 어느 오후였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나는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아버지 댁을 찾았다. 예년에 비해 추운 날
씨가 계속되며 연일 폭설이 쏟아지던 악기후 속에서 무사히 아버지
댁에 도착했을 땐 이미
오후 4시가 지나있었다. 거리 상으로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였건만 꼭
6시간이나 걸려 도착
했던 것이다.
젊은 시절 부동산 사업으로 큰돈을 벌어 서울 도심에 몇 개의 건물을
운영하시던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모든 건물을 처분하시고 한적한 교외로 거처를
옮기셨다. 비록 혼자가
되셨지만 아버지는 자연에 둘러싸인 별장에서 붓글씨와 그림을 즐기며 여유로운 생활을 보
냈다.
작은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던 나로선 시간적으로 그렇게 여유가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
래서 이런 저런 사업 핑계를 대며 아버지께 소홀히 했던 것이 사실이다. 많이 찾아 뵙지도
못했으며 전화도 그리 자주 하는 편이 아니었다.
문득 생각해보니 어머니가 돌아 가신지도 어언 20년이 되었고 마침
이번 크리스마스는 어머
니와 아버지의 결혼 40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크리스마스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두 분이 처음 만난 날이 크리스마스였고 그로부터 정확히 1년 후 크리스마
스날 결혼식을 올렸다. 어머니는 아버지에 비해 무려 11년이나 어리셨고 아버지는 그런 어
머니를 마치 막내 동생 대하듯 어여삐 여기셨다. 결혼 당시 아버지의
나이는 서른 일곱이었
고 내가 태어났을 때에는 이미 마흔을 넘긴 나이셨다. 하지만 어째서
아버지가 그렇게 늦은
나이에 결혼을 한 것인지에 대해선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아주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왕소금 같은 굵은 눈발을 맞으며 언덕 배기에 위치한 아버지의 별장으로 들어서자 기다렸다
는 듯이 은주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은주는 아버지 댁에서 일하는 가정부이지만 거동이 불
편한 아버지에게는 수족 같은 존재인지라 식구나 진배없었다. 내 아내 유선은 은주가 지나
치게 어린 나이라는 것이 늘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것이 은주는 이제 겨우 스물 일곱밖에 되지 않는 젊은 처녀였다. 아버지의 친구분
소개로 알게 된 은주는 고아 출신이었다. 하지만 심성이 착하고 근면했던지라 벌써 5년째
아버지의 별장에서 일하고 있다. 솔직히 나도 처음엔 너무 어린 나이와 고아 출신이라는 것
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런 우려들을 단번에 일축시킬 만큼 그녀는 성실했다. 또 상냥하고 구
김살 없는 성격 탓에 아버지의 말벗도 되어 드리곤 해서 지금은 오히려 그녀가 일을 그만둔
다고 할까봐 걱정될 정도였다. 그만큼 은주는 아버지와 나에게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는 아직도 그녀에 대한 불신은 완전히 저버리지 않았다.
언제 그녀가 아버지의
재산을 훔쳐 달아날 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혹은 마음 맞는 사내들과
작당해서 아버지를 곤
경에 빠트릴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나로선 약 10년째 출판사를 경영하며 수많은 사원들을 채용하다보니 어느 정도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한 편이었다. 내 눈에 비친 은주는 결코 은
혜를 저버릴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 정도의 사악함이나 대범함은
없어 보였다. 그럴 때
마다 아내는 사람이란 겉만 보고는 절대로 알 수 없다며 인간이란 본래 사악한 존재라며 열
변을 토로했다. 아내가 어째서 은주를 그렇게 못 마땅해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은
주는 언제나 우리들을 진심으로 반겼다.
"사장님 사모님, 어서 오세요. 회장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마침 저녁을 하고 있었던지 은주는 하얀 앞치마를 두른 채 우리를 안으로 맞이했다. 은주는
나를 부를 때 사장님이라고, 아버지를 부를 때는 회장님이라 호칭했다. 내가 현재 출판사 사
장인 것은 분명하니 사장님이라 부를 만도 하지만 어째서 아버지를
회장님이라 칭하는지에
대해선 모를 일이었다. 아마 특별히 부를 만한 호칭이 없어서 나름대로는 존경의 의미를 담
아 그렇게 부르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회장님이라는 칭호 외 달리
더 좋은 칭호도 없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라 부르기도 그렇고 주인님이라 부르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선생님이라
부르기에도 왠지 뉘앙스가 야릇할 것 같았다. 회장님이라는 단어가
가장 적절해 보였다.
"어머나, 민구 민지도 같이 왔네. 민구가 그러니까… 이제 아홉 살이고, 민지가 일곱 살 맞
지? 이야 우리 민지 이제 내년부터 학교 가는 구나? 좋겠네~. 누나가
맛있는 거 많이 해줄
테니 조금만 기다려."
민구 민지에게도 잊지 않고 환한 웃음을 보내었다. 아이들의 나이까지 분명하게 기억해 내
는 세심한 배려를 보였다.
마당 정원에서는 정원사가 큼직한 소나무 한 그루를 손보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트리용 소
나무인 것 같았다. 그 정원사는 간간이 필요할 때마다 아버지가 부르는 출장 전문 정원사였
다. 우리 가족과도 안면이 몇 번 있었던지라 서로 친숙했다. 우리는 서로 멀리서 가볍게 목
례를 주고받았다.
은주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니 거실에서 아버지가 우리들을 반가이 맞아 주었다.
"그래 잘 왔다. 내 그렇지 않아도 지난 밤 꿈자리가 워낙 뒤숭숭해서
걱정 많이 했는데…
오느라고 수고 많았다."
아버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가화만사성이라는 멋들어진 시화를 액자에 담아 나에게 선물
했다. 이 정도 솜씨면 전시회를 열어도 손색이 없겠다며 아내가 칭송하자 아버지는 그렇지
않아도 내년쯤 해서 뜻 있는 사람끼리 모여 작은 전시회라도 열 계획이라 말씀하셨다.
"참, 아버님 이거 받으세요."
아내는 준비해왔던 선물을 조심스레 꺼내 놓았다.
아버지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선물 봉지를 뜯었다. 그것은 특별한
선물이었다. 멜로디가
나오는 사진첩이었다. 앨범을 넘길 때마다 명 팝송들이 아름다운 멜로디로 흘러 나왔다. 그
리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찍었던 사진들이 디지털로 깔끔하게 디자인되어 추억을 아름
답게 복원시켜 놓았다. 아내가 아버지를 위해 직접 디자인해서 주문
생산한 제품이었다.
"이 사람이 아버지께 아주 특별한 선물을 해드린답시고 몇 달 전부터
남편은 안중에도 없었어요. 그거 만드는 데만 아주 열성이었어요. 어때요, 마음에 드세요?"
"그래, 마음에 든다. 고맙구나, 고마워."
아버지는 대단히 만족한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 반응해서 아내도 대단히 만족해했다. 아내는
디지털 앨범이 완성하기까지 자신의 노력과 고생담 등을 길게 늘어놓았다.
아버지는 아내의 노고에 가끔씩 응수해주면서 찬찬히 앨범을 넘겨 갔다. 어머니와의 추억을
회상이라도 하듯 지그시 반쯤 눈을 감은 채 한 장 한 장 살펴 나갔다.
은은한 멜로디는 아
버지를 추억의 시간 속으로 한층 더 깊이 안내하는 듯했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문득 나의 머릿속에서도 어머니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어머니는 내가 열 여섯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다. 내 기억 속의 어머니는 유난히 아버지에
게 깊은 애정을 보이시던 분이었다. 그런 어머니를 아버지는 언제나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
시곤 하셨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빛 속에서 오가는 애틋한 연분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저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의 감정일 것이라고 믿고 자랐었다.
저녁을 먹고 난 후 나는 아버지와 바둑을 두었고 아내는 어딘 가로 오래도록 전화통화를 하
더니 저녁 연속극이 시작될 시간에 맞춰서 TV앞에 매달렸다.
소나무 손질을 끝낸 정원사는 아버지로부터 내일 다시 와 별장 주변
제설 작업을 할 것을
지시 받고 저녁 늦게 돌아갔다.
민구와 민지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는 아버지의 서재에
틀어박혀 꼼짝도 안했
다. 그들은 아버지가 오래 전부터 수집해 온 여러 가지 골동품들을 바라보며 신기해했다. 일
제시대 때 독립군으로 의병활동을 하던 시절의 빛 바랜 사진부터 여러 가지 장신구, 오래된
앨범, 영화 포스터 등이 모두 컴퓨터 시대에 길들여진 민구 민지에겐
색다른 느낌으로 와
닿았다.
은주는 우리들 모두에게 향긋한 차를 대접한 후 가족들만의 분위기를
깨뜨리지 않겠다는 듯
일찍 2층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예전 같았으면 좀더 오랫동안
남아서 특유의 쾌활
함으로 분위기를 살리곤 했었는데 은주가 너무 일찍 올라가 버리자
나로선 조금 섭섭한 마
음까지 들었다. 물론 그런 내 마음이 아내에게 읽히기라도 하는 날엔
가정 불화로 번질 위
험까지 있으므로 절대 내색은 하지 않았다.
8시 30분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별장 전체에 조용히 울리는 초인종 소리가 우리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별장을 찾는 손님이라기엔 다소 늦은 감이 있는 시간대였다.
"이 시간에 누구죠?"
"글쎄다…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정원사 이씨인가?"
보기 좋게 펼쳐진 바둑 포석들을 뒤로하고 나는 현관문 앞까지 성큼
다가갔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초인종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꼭 한번 울리고는
긴 여운만 남긴 채
뚝 끊어져 버렸다.
여운이 걷히자 음습한 정적이 밀려들었다.
현관의 벽에 걸린 스피커폰을 들자 자동으로 CCTV의 액정 화면이
떴다. 대문밖에 설치된
몰래 카메라가 작동했던 것이다.
하지만 화면에는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누군가가 초인종만 누른 후 달아난 것이다. 어
쩌면 철부지들의 장난일 수도 있었다.
"누구냐?"
돌아보니 거실 한가운데서 아버지가 목을 죽 빼고는 현관문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 뒤
로 아내와 아이들도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았다.
"글쎄요, 아무도 없는데요."
나는 조심스레 현관문을 열었다. 찬 기운이 물씬 엄습해왔다.
"잠깐 나갔다 와 볼게요."
잔뜩 몸을 움츠리고 현관을 나와 마당을 가로질렀다. 문득 올려다 본
밤하늘은 온통 함박눈
으로 가득했다. 어둠에 짙게 물든 눈발들은 마치 검은 설탕을 연상케
했다.
양쪽으로 우거진 정원의 사철나무들이 겨울바람에 시달리며 괴상한
바람소리들을 연주했다.
밤이라 그런지 휘히잉, 하고 울어대는 그 소리들이 꽤 으스스하게 느껴졌다. 금방이라도 저
쪽 느릅나무 아래 컴컴한 구석 모퉁이에서 시커먼 뭔가가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아 조마조
마했다. 어째서 그런 불길한 느낌들로 가득한지 딱히 그 원인을 알 지
못한 채 대문까지 바
삐 걸어갔다.
정작 대문을 열었을 땐 잠시 허탈감이 감돌았다.
정말로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어떤 철없는 꼬마 녀석의 장난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돌
아서려 했다. 그러나 뭔가 수상한 낌새에 발 아래를 내려다보고는 오싹한 한기에 사로잡혀
야만 했다.
무언가가 나를 말똥말똥 올려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흠칫 놀라며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자그마한 각시 인형이었다.
손가락 두 개 정도의 아주 작은 크기였다. 빨간 연지 곤지에 하얀 분을
바르고 쪽머리를 올
린 색동 저고리가 이제 막 시집 온 듯한 새색시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언뜻 보기에도 꽤 오래된 장신구임이 분명했다. 원래는 꽤 고급스러운 물건이었을 테지만
오랜 세월의 풍파 속에서 색깔이 벗겨지고 윤기가 바래져 이제는 영
볼품없는 모양새를 하
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말똥말똥한 눈빛만은 아직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각시인형을 손에 쥐어 든 후 다시 한번 사방을 둘러보았다. 역시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필
시 어떤 꼬마 녀석이 초인종을 누르고 급히 달아나다가 떨어뜨린 것이리라. 기괴한 기운이
대문 밖을 맴돌고 있는 듯했지만 나는 그렇게 결론짓고 일어섰다.
그냥 버릴까 하다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을 주머니 속에 넣어버렸다.
그리고 대문을 잠그고 서둘러 현관으로 향했다.
그때 나는 엄청 불길한 상상에 사로잡혀 치아까지 덜덜 떨고 있는 자신을 인지할 수 있었
다. 지금 다시 대문 밖으로 나가본다면 분명 누군가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재차 확인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다시 쪼르르 달려나가 문 밖을 확인한다는 것은
참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정말로 뭔가가 떡
하니 버티고 있기라
도 한다면 과연 그것을 내가 감당해낼 수 있을까. 나는 비정상적인 선택을 하고싶지 않았다.
그물처럼 얽히고 섞이는 복잡한 상념들을 모두 떨쳐버리고는 오로지
현관을 향해서 달렸다.
그것이 가장 정상적인 행동이었기에.
그렇지만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완전히 들어서기 전까지 내 뒤통수를 차갑게 응시하고 있
을 모호한 시선의 불길함은 계속되었다.
거실로 들어서니 어느 새 은주까지 내려와 있었다. 모두들 뭔가 잔뜩
기대하는 듯한 얼굴로
나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왔다.
"별거 아니에요. 동네 꼬마 녀석이 장난 친 것 같아요."
내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고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자리에 앉아버리자 이내 시
시하다는 표정들로 모두 흩어졌다.
아버지만이 내 눈의 움직임을 계속해서 유심히 살피는 눈치였다.
"저 둘 차례였죠? 아버지 포석은 갈수록 예리해 지시는 것 같아요."
나는 돌을 놓으며 완전히 화제의 방향을 돌려버렸다. 괴상한 기분들을 억지로라도 떨쳐버리
고 싶어서였다. 그제 서야 아버지도 바둑판으로 눈길을 돌리셨다.
아버지와 나의 대국은 밤 10시가 넘도록 계속되었다가 결국 11시가
다 되어서야 결판이 났
다. 치열한 전투가 오고 갔던 박빙의 승부였다. 아버지는 자신의 한집
반 승을 만족해하시며
먼저 자리를 떴다.
홀로 남은 나는 후끈 달아오른 승부 욕 덕에 잠시 잊고 있었던 미묘한
공포감에 다시금 빠
져들었다.
넓은 거실에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지고 보니 거실이 이렇게나 넓었었나 싶을 정도로 새삼
스런 횅댕그렁함이 밀려왔다. 응접 소파 위의 보라색 꼬마 전구를 소등한 후 나도 그만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로 그 때 정적을 꿰뚫는 공포의 비명소리가 별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잠시 넋 나간 사람처럼 거실 바닥에 우뚝 서서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내고자 했다. 분명 2층
에서 들여온 소리였고, 소리의 주인공은 민구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