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날짜 : 2019년 7월 27일(토)
구간 : 경우궁 터 ➡ 북촌문화센터 ➡ 여운형 집터 ➡ 한옥지원센터 ➡ 김성수고택 ➡ 배렴 가옥 ➡ 유심사 터 ➡ 석정보름우물 ➡ 고희동 가옥 ➡ 창덕궁 외삼문 ➡ 궁중음식 연구원 ➡ 창덕궁 요금문 ➡ 은덕문화원 ➡ 박인환 집터 ➡ 개천절행사 발상지 ➡ 관상감 관천대 ➡ 계동궁 터 ➡ 카페 onion
소요시간 : 6시간 10분(10시 ~ 16시10분, 점심식사시간 포함)
지하철 3호선 안국역
3번 출입구에서부터 걷기를 시작한다
한학수 집터 (서울시 종로구 계동길 5, 계동 146-1)
계동 입구(계동 146-1)에는 을사늑약을 끝까지 반대한 한규설의 손자 한학수의 집이 그대로 남아 현재는 한정식집(산내리 식당)을 거쳐 카페(onion)로 이용되고 있다
해방 3일 뒤(1945년 8월 18일) 이곳 사랑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우익 정당인 고려민주당(위원장 원세훈)이 창당되었고, 1945년 8월 28일에는 고려민주당계를 포함한 김병로계ㆍ홍명희계ㆍ이인계의 우익인사 2백여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가운데 조선민족당 발기인 총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 한규설(韓圭卨)
(1856. 2.29 ~ 1930. 9.22)
구한 말 시대의 무관 겸 정치가이다
호는 강석(江石), 자는 순우(舜佑)이다
1880년 음서천거 후 1884년에 무과 급제하여 사복시 장위사 시절 갑신정변 진압 관련 작전에 참전키도 한 그는 그 훗날 1892년 한성 포도청 우변관아 포도대장·1896년 의정부찬성 등을 지냈다
그 후 1905년에는 의정부 참정에 제수되어 같은 해 의정부 참정으로 내각을 조직하였다
그 해 일본의 전권대사인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의 여러 대신들에게 을사조약 체결에 대해 의견을 물었을 때, 이에 끝까지 반대하였다
한때 고종 치세기에 잠시 우의정 직무대리 겸 좌의정
직무대리를 거쳐 영의정 직무대행 서리를 지내기도
했다
이어 경술국치 때 일본 정부에 의해서 남작 작위가 수여 되었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나는 죄인이니 죽거든 통부(通訃)도 하지 말고 번화
(繁華)스럽게 대여(大輿)도 쓰지 말고 사인방상(四人方床)을 써라.”
스스로 죄인이라 여겨 죽음도 알리지 말고 큰 상여도
쓰지 말라는 유언이다
중명전에서 그는 최후까지 저항하고 마침내는 지하방에 갇히게 되었다
그리고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이후 칩거 생활을 하다가 1920년 이상재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를 창립하였으며, 1920년대 초에는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참여하여 이상재, 윤치소 등과 민립대학 설립운동 발기인의 한사람이 되었다
그 뒤 민립대학기성회로 발전시켰으며 교육을 통한 민족역량을 배양으로 국권을 회복하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했다
한편, 한규설이 살던 한옥(중구 장교동)은 국민대학교
에서 구입, 해체하여 정릉 소재지로 옮겨 짓고 학생들의 예절교육관으로 쓰고 있다
외부 손님의 교내 탐방 코스, 다도 수업 등에 쓴다
원래 99칸의 큰 집이었다고 하나, 국민대학교의 위치가 산 중턱이라 일부만 옮겨 놓았다
한규설의 아들 한양호는 1926. 4. 1 종로구 견지동의
동아학교 교실 일부를 빌려서 경성여자상업학교를 설립했다
1951. 8.31 서울문영여자중학교와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로 분리했다
오늘날 관악구 봉천동에 있는 문영여자고등학교, 문영여자중학교의 전신이다
♤ 고려민주당(高麗民主黨)
일명 고려사회민주당(高麗社會民主黨)
해방 직후 1945년 8월 18일 발기된 우익진영으로서는 최초의 정당이다
광복 직후에 만들어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구성에
자극되어 원세훈(元世勳)이 만들었다
발기 후 원세훈은 이 정당을 거점으로 범민족세력의
규합을 위해서 노력한 결과 1945년 8월 조선민족당
(朝鮮民族黨)에 발전적으로 흡수되었고, 다시 1945년 9월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으로 통합되었다
조직은 위원장에 원세훈, 총무에 이병헌(李炳憲)·현동완(玄東完), 재정에 유흥산(劉興山)·한학수(韓學洙 - 여기에서 말하는 한규설의 손자), 섭외에 박명환(朴明換)·송남헌(宋南憲), 조직에 이민홍(李敏弘) 등으로 구성되었다
실질적인 존립기간이 짧았고 특별한 활동도 거의 하지 못하였지만, 사회주의적인 성격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반대하였던 최초의 우익진영 정당이었다는 점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반대하여 민족진영의 인사가 사회민주주의를 강령으로 채택하여 발족시킨 최초의 정당이었다는 점에서 한국정당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조선민족당(朝鮮民族黨)
1945년 8월 28일 서울 계동에서 200여 명이 모여, 해방 후 처음으로 태극기를 벽에 걸고 조헌영(趙憲永)의 사회와 조병옥(趙炳玉)의 개회사로 발기인 총회를 가졌다
광복과 동시에 여운형(呂運亨)이 주도하는 조선건국
준비위원회(약칭 건준)가 일방적 독주를 하는 동안,
민족진영 일부 인사들은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安在鴻)과 합작하여 건준을 개조하고 민족진영 인사들이 대거 참가하여 강력한 민족대표기관으로서 건국대책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건준 내부의 일부 좌익계의 방해로 합작공작이 성공을 보지 못하자, 김병로(金炳魯)·이인(李仁)·
백관수(白寬洙)·박명환(朴明煥) 등은 건준과의 합작을 포기, 8월 18일 발족한 원세훈(元世勳) 중심의 고려민주당과 합류하여 발족하였다
경우궁 터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67, 계동 146-2)
♤ 경우궁(景祐宮)
1820년(순조 20)에 수빈(순조의 생모 박씨)이 졸서(卒逝)하자 이듬해 그 신위를 창경궁 내 전각에 봉안하고 봉안된 곳을 현사궁(顯思宮)이라 불렀다
그러나 왕이 된 순조의 사친 사묘를 궁에 두는 것은 전례가 없다고 하여 1824년(순조 24) 신위를 옮겨 모셨다
북부 광화방(廣化坊)에 있던 용호영(龍虎營) 터에 별묘(別廟)를 영건하고 그곳에 신위를 옮겨 모셨으며, 경우궁이라는 궁호를 내렸다
1870년(고종 7) 인빈김씨(仁嬪金氏), 영빈김씨(寧嬪金氏), 화빈윤씨(和嬪尹氏)의 사우를 이곳에 합봉(合奉)했다
1884년(고종 21) 10월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開化黨)이 갑신정변을 일으키자, 고종이 경우궁으로 이어(移御)하기도 하였다
그 후 1885년(고종 22)에 인왕동(현 옥인동)으로 옮겨지었다
1907년(융희 1)에 궁내부령으로 내수사와 궁장토의
도장(導掌)을 폐하면서 경우궁에 소속된 토지도 제실재산 관리국으로 넘어갔다
1908년(융희 2)에는 위패를 육상궁으로 옮겨 봉안하고 1년에 2번만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현재는 궁정동 칠궁 내에 있다
임용상 집터 (서울시 종로구 계동길 31, 재동 84-2)
본래 일제강점기 마포 거부 임종상이 지은 저택이었는데, 1945년 해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청사로 사용됐던 역사의 현장이다
2000년대 초반 등록문화재 제도가 시행된다는 소문이 돈 이후 청사 건물이 헐려고 보헌빌딩이 들어섯다
보존·관리에 대한 법적 강제성이 없는 등록문화재 제도의 맹점으로 숱한 사적(史跡)이 사라지고 있다
♤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
1945년 8월 15일부터 9월 7일까지 한국의 군정기에
여운형, 안재홍 등을 주축으로 일본으로부터 행정권
(총독부에 5개 항을 요구하며, 치안권 요구)을 인수받기 위하여 만든 조직이다
(1944년 8월 비밀조직한 건국동맹이 모체)
5가지 요구 조건
① 전조선의 정치범, 경제범을 즉시 석방하라
② 집단 생활지인 경성(서울)의 식량 8, 9, 10월 3개월분을 확보하라
③ 치안 유지와 건설 사업에 아무런 구속과 간섭을 말라
④ 조선에 있어서 추진력이 되는 학생의 훈련과 청년의 조직에 간섭을 말라
⑤ 전조선에 있는 각 사업장의 노동자들을 우리 건설
사업에 협력시키며 아무런 괴로움을 주지 말라
한반도 남부에는 여운형과 안재홍 등을 주축으로, 한반도 북부에는 조만식 등을 주축으로 결성되었다
여러 과정을 거쳐 1945. 9. 7일 인민위원회 각지역지부로 개편되었으나, 1945. 9. 9일 '맥아더 포고 1호' 로 불인정되었다
줄여서 건준(建準)이라고도 부른다
구 민형기 가옥 (서울시 종로구 계동길 37, 계동 105)
1921년 지어진 등록문화재 [서울 계동 근대 한옥]으로 구 민형기 가옥으로 알려졌다가 최근에 민형기의 부인인 유진경 가옥으로 고증이 진행되고 있다
북촌 내에서는 흔히 [민재무관댁] 또는 [계동마님댁]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원래 안채, 바깥채, 앞행랑채, 뒷행랑채,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한옥 개보수 기준 조례에 따라 최대한 한옥 원형을 보존하고 복원하는 데 중점을 두어 개보수 되어 현재는 <북촌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주민커뮤니티 및 방문객 안내센터 역할을 하고 있다
♤ 북촌문화센터
이곳은 구한 말 탁지부 재무관을 지낸 민형기의 집터
이다
그러나 지금은 '민형기가옥'이라고 불리기보다는 '계동마님댁'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 말하는 계동마님은 이규숙을 말한다
이규숙이 12살 되던 해 1916년, 탁지부 재무관을 지낸 민형기의 외아들인 민경휘와 결혼한 분으로 민형기의 며느리이다
결혼 당시 이규숙의 남편 민경휘는 학생이었는데, 나중에는 연희전문학교 상과를 나오게 된다
이규숙이 자신의 일생을 구술한 책 [이 계동마님이 먹은 여든살 - 양반가 음식에 대해 구술한 책]에 학생이던 남편을 집에서 기다리는 외로운 마음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집이 처음 지어졌을 때는 1921년이며, 대궐목수에 의해 지어진 집으로 창덕궁 후원에 있는 연경당을 모범으로 해서 지었다고 한다
안채와 사랑채를 마당에서 보면 담으로 구분되어 있어 마치 독립된 채이듯 하다
그러나 안채와 사랑채의 대청을 이어주는 툇마루가
있어 내부에서는 연결되어 있다
특히 안채 옆에 있는 사당은 그 원형이 잘 남겨져 있어 조선시대 도성에 있던 중규모의 한옥이 갖고 있던
건축적 특징을 잘 말해주고 있다
이집에서 이규숙은 1935년까지 살았으며, 바로 옆
동네인 재동으로 이사하게 되어 주인이 바뀌게 되었다
현재 이집은 서울시가 매입하여 북촌을 소개하는 북촌문화센터로 사용하고 있다(2002.10.29 개관)
2006년 3월 2일 등록문화재 제229호로 지정되었고
서울시 도시개발공사 소유이다
승문원 터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1길 41, 계동 140-55)
조선시대에 외교 문서를 관장하던 관청의 터
조선 건국 초 조칙(詔飭), 중국이나 일본에 보내는 문서 등을 관장하기 위하여 문서응봉사(文書應奉司)를 설치하였으며 1410년(태종10) 승문원이라 개칭하였다
♤ 승문원(承文院)
괴원(槐院)이라고도 하였는데 성균관, 교서원(校書院)과 합하여 삼관(三館)이라고도 하였다
처음 설치할 때 이곳에 있었으나 이후 여러 곳으로 이전 하였다가 1787년(정조11)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다가 1895년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중국에 가지고 가는 표전문(表箋文)은 예문관에서 작성하여 임금에게 보고하며 승문원에서는 그 내용에 잘못이 없는지 살폈다
표문을 봉하는 날에는 의정부, 육조, 승정원 제조, 사신으로 가는 정사, 부사가 모여 검토한다
사신이 출발한 후에도 황주, 평양, 안주, 의주에서 대조하여 만약 잘못 된 것이 발견되면 보고하여 고치도록 되어 있었다
일본 등에 보내는 문서는 예조에서 통지가 오면 제술관이 작성하여 재가를 받은 후 정서하여 예조로 보내도록 되어 있었다
최소아과의원 터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4길 28, 계동 109)
붉은 벽돌이 설립됐던 시대(1940년대)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든이 넘은 최익순 원장선생님이 진료하였다(원장님은 2018년에 돌아가셨다 함)
병원(최소아과의원)은 1963년부터 2017년까지 54년의 역사를 갖었었다
오른쪽부터 차례대로 심우섭집터, 홍증식집터, 여운형집터
심우섭 집터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1길 31, 계동 140-50)
♤ 심우섭(沈友燮)
충청남도 당진이 가문의 고향이지만 1890년 경기도
시흥군(현 서울시 금천구) 출신이며 충청남도 당진, 경기도 과천, 경성부에서 성장한 그는 막내 동생인 심훈(沈薰, 상록수의저자, 본명 심대섭沈大燮, 필명 심훈은 필명)과 11살 차이가 난다
휘문의숙을 제1회로 졸업하였고, 최남선, 이광수 등과 가까이 지내면서 1918년에 최남선이 발기한 계명구락부에 출입하고 기관지<계명>의 주간을 맡으며 문화계 인사들과 교류했다
1910년대 중반에 <매일신보>에 입사하여 언론인으로 활동하였으며 <형제> 등 신소설을 쓰기도 했다
이광수의 장편소설 <무정>에 나오는 신문기자 신우선의 모델이 심우섭이다
1920년대에는 매일신보를 나와 조선여자교육회에서
고문으로 근무하는 등 여러 사회 활동을 벌였다
이 시기에 심우섭은 사이토 마코토 총독과 자주 면담한 기록이 있어 직업적 친일 분자로 활동한 것으로 보고 있다
동민회에서 이사를 지내고 구일회도 참가하였다
1927년 경성부의 학교 평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조선교육연구회에서도 활동하였다
1935년에 경성방송국에 입사하여 제2방송과장이 되면서 초창기의 방송계에서 업적을 남겼다
태평양전쟁 시기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순회강연반 연사가 되어 함경남도 지역에서 연설을 하고 조선임전보국단에도 참여하는 등 일본제국에 협조한 행적이 있다
1941년에 매일신보 편집고문으로 복귀하여 1945년에 태평양전쟁이 종전될 당시 매일신보 이사대우 촉탁을 맡고 있었다
1946년 3월 7일에 발행된 자유신문 2면에 따르면 심우섭은 1946년 3월 6일 서울 계동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명단 중 언론/출판 부문에 포함되었다
이 명단의 종교 부문에는 동생인 목회자 심명섭도 들어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
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홍증식 집터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1길 29, 계동 140-49)
♤ 홍증식(洪增植)
1895년 경기도 고양 출신
1915년부터 1920년 사이에는 주로 북경에 체재하면서 서울, 상해 등지를 왕래하여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조성환(曺成煥) 등과 접하며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1920년 2월 노동문제연구회에 참가하였고, 4월에는
조선노동공제회 창립회원으로 교육부 간사를 맡았다
1921년 1월 서울청년회 창립위원, 1921년 3월 조선노동공제회 총간사를 맡았는데 1921년 9월부터 1924년 5월까지 동아일보 영업국장으로 활동했다
1924년 9월엔 조선일보 영업국장을 맡았고 1934년엔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중앙일보의 영업국장으로 활동했다
일제강점기 3대 민간신문 영업국장을 모두 역임한 셈이다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일명 신의주사건) 때 검거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1946년 2월에 결성된 좌익 세력의 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이 되었다
이후 월북하여 1948년 8월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1954년 5월 남한의 민주주의민족전선, 북한의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 우익의 정당 및 사회단체가 망라되어 결성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1949년 6월 결성) 서기국장을 지냈다
1964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선전부장이 되었다
여운형 집터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1길 25, 계동 140-8)
여운형의 집터(계동 140-16)에는 안동칼국수라는 음식점이 들어서 있다
37년간 이곳에서 장사를 했다는 사장은 “1982년 현대그룹이 오면서 길이 생기기 전에는 도로 중앙선까지가 여운형 선생의 집이었다”면서 “그래도 2013년 불이 나기 전까지는 여운형 선생의 집 모습이 남아 있었다”고 말했다
♤ 여운형(呂運亨)
경기도 양평 출신(1886. 5.25 ~ 1947. 7.19),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회숙(會叔), 호는 몽양(夢陽)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14세 때에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하였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에 힘썼으며 임시의정원 의원과 외무부 차장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쑨원(孫文)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고 중국혁명운동에 참여하였다
1926년 중국혁명운동이 실패한 후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9년 상하이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1932년 출옥하였다
1933년 조선중앙일보사(朝鮮中央日報社) 사장직에
취임하였으며, 1934년 조선체육회 회장직을 맡았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문이 폐간되어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42년 치안유지법 등의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44년 8월 일제의 패전을 예상하고 독립운동과 국가건설을 위하여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을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건국동맹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농민동맹(農民同盟)·부인동맹 등을 조직하였으며, 옌안(延安)의 독립동맹(獨立同盟)과 제휴하여 연합작전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건국 준비를 위해 조선건국준비
위원회(朝鮮建國準備委員會)의 결성을 주도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해체되고 수립된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의 부주석(副主席)이 되었다
1946년 2월 북한을 방문하여 조만식(曺晩植)과 김일성(金日成)을 만나 미소공동위원회의 대처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1946년 8월 조선인민당 당수직을 사임하였으며, 9월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 3당 합당문제를 포함한 남한 현안에 대한 의견교환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였다
11월 사회노동당(社會勞動黨) 준비위원회의 위원장
으로 활동하였으며, 남조선노동당(南朝鮮勞動黨)과
합동을 제의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정계은퇴를 선언
하였다
김규식·김창숙(金昌淑)과 함께 통일적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민족통일전선운동을 펼치는 등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를 반대하는 세력에게 십 여 차례 테러를 당하였다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하였다
♤ 여운형 서거지 (서울시 종로구 혜화로 1, 혜화동 111-3 혜화동우체국 앞)
1947년 7월 19일 아침(IOC 가입 축하기념으로 서울운동장에서 한국과 영국의 친선축구경기가 열린 날이다) 당시 체육부장관이던 여운형은 경기 참관 다음 남조선과도입법의원 민정장관 수락을 논의하는 약속예정을 잡았다
그 전에 여운형은 '옷을 갈아입겠다.'고 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오후 1시, 서울 혜화동 로터리 근방에서 트럭 1대가 갑자기 들이닥쳐 여운형이 탄 자동차를 가로막았다
이어 한지근(韓智根)이 나타나 여운형이 탄 자동차로 달려가 2발의 총탄을 쏘았다
2발은 여운형의 복부와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고, 병원으로 호송 중에 그는 절명하였다
(사형 구형을 받은 한지근은 미성년자라고 나이룰 속여 무기징역형을 선고 받아 사형을 면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일어난 한국전쟁 때 인민군에 의해 끌려간 뒤 그의 생사는 아무도 알 수 없게 되었다)
당시 여운형의 옆에 있던 고경흠은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조국..." 그리고 "조선..." 이었으며, 미소를 띤 얼굴로 죽었다.'고 전한다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피습, 절명하여 암살되었을 당시 갑작스런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1947년 8월 3일 광화문 인민당사 앞에서 발인식이 거행되었다
그의 영결식은 인민장으로 치러졌다
영결식에 약 60만명의 수 많은 추모인파가 몰렸다
영구는 영결식장인 서울운동장(현 동대문 역사문화공원)으로 향해 서서히 갔고, 장례 행렬은 11시 40분에 서울운동장에 도착하여 영결식이 치러졌다
서울운동장에서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과 역도선수 김성집 등 체육인들이 그의 관을 운구하였다
1974년 2월4일, 몽양 암살의 공범을 자처하는 네 사람의 남자가 등장한 깜짝쇼가 벌어져 세인을 놀라게 했다
이 사건의 공범이라며 나타난 일당은 김흥성(54), 김훈(49) 김영성(49), 유순필(49) 등 네 명의 중년 남자였다
범행의 총지휘자는 김흥성이었고 한지근은 제1저격수, 김훈은 제2저격수, 나머지 두 사람은 저격 후의 현장 확인, 수사상황 파악 및 도피로 등을 맡는 확인조 등으로 각자 범행을 분담했노라고도 했다
한지근은 본명이 이필형으로 범행 당시 나이도 19세가 아닌 21세였다는 말도 나왔다
이들은 ‘민족의 분열과 공산화를 막기 위해서’ 암살계획을 세우고 실행했으며, 범행 직후 한지근의 체포과정 및 진술은 사전 각본에 따른 연출이었다고 했다
(공소시효가 지나 더 이상 처벌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 생가 터, 묘소, 몽양기념관
♤ 조선인민당(朝鮮人民黨)
1945년 11월 12일 여운형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직을 모체로 해 결성한 정당이다
1945년말, 인민당은 중경 임시정부에 인공과 각당
각파를 합쳐 건국회의를 열고 거기서 참된 임시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임정 측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기존의
중경 임정 추대운동만 계속 전개하였다
임정 측은 1946년 1월 4일 김구 명의로 중경 임시정부를 계승하여 과도정권을 수립할 비상정치회의를 즉각 소집할 것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기존 주장과 다를 게 없어 좌파는 이에 호응하지 않았다
인민당은 특정 계급이 아닌 노동자, 농민, 근로 인텔리, 양심적 자본가 등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중도좌파
정당을 추구했으나, 1946년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휴회로 들어간 후 인민당내의, 이른바 48인파로 불린 좌파가 당을 이탈, 남조선시민당과 조선공산당과 합당,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하자 곧 해체되고 말았다
여운형은 남은 인물들을 모아 사회노동당을 창당했다
사회로동당은 1947년 2월 28일 해체되었다
첫댓글 계동에 가 본지도 참 오래된 것 같습니다. 잘보았습니다^^*
4년 넘은 글을 다시 올려 봅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