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날짜 : 2019년 7월 27일(토)
유심사 터 (서울시 종로구 계동길 92-3, 계동 43)
만해 한용운 스님이 1918년 9월 월간지 "유심"을 창간하고 제3호까지 발행한 곳으로 만해 한용운 스님의 거처로 사용되던 곳이다
3.1만세운동을 위해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의 합작 교섭을 마무리한 최린이 한용운을 방문해 불교계의 참여를 허락받았던 곳이다
1919년 2월 28일 만해 한용운 선생이 중앙학교 학생 200여명을 이곳에 모이게 하고 독립선언과 거사 준비 경위 등을 설명하고 불교 청년의 역량발휘를 강조하면서 독립정신을 심어주었던 곳이다
한용운은 계동 43번지에 1918년 8월부터 살다가 1919년 3.1운동과 관련하여 투옥되었다
(지금은 게스트하우스 유심당으로 사용 중)
격외사 (자그마하고 조용한 선원입니다)
♤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된 한옥군(群)
석정보름우물 (서울시 종로구 계동길 110, 계동 58 앞)
우물이 돌로 되어 있어서 동네 이름을 석정골로 불렸으며, 이 우물물이 15일 동안은 맑고, 15일 동안은 흐려져서 ‘보름우물’이라 불렀다한다
석정은 조선시대 소문난 명천(名泉)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한다
물이 차고 맛이 좋아 궁에서도 길어 갔던 이 우물은 원래는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었던 물인데 지금은 폐정이 된 채 한길가에 방치돼 있다
보름우물은 초창기 천주교 역사와도 관련이 깊다
1794년 중국에서 입국한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사제 주문모 야고보(1752∼1801) 신부가 1801년 새남터에서 순교하기 전까지 계동 최인길 마티아 (1765 ∼1795) 집에 숨어 지내면서 조선 땅 첫 미사를 봉헌하였고, 이 우물물로 세례를 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요컨대 보름우물은 한국 천주교 최초의 성수이자 포교의 원천(源泉)이었던 것이다
천주교 박해당시 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하자 보름우물 샘물이 핏빛을 띠면서 물맛이 써져서 한동안 사람들이 먹을 수 없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또한 1845년 한국인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안드레아) 신부도 북촌 지역에서의 짧은 사목기간 동안 이 물을 성수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안내문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김대건 신부가 숨어서 활동하던 석정동은 중구 을지로1가, 소공동, 태평로 2가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돌 틈에서 물이 솟는 우물이 있어 돌우물골이라 하고, 이를 한자명으로 표기한데서 북촌의 석정골과 혼동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2014년 8월 16일 광화문에서 시복한 순교자 124명의 복자 중 주문모, 강완숙, 최인길 등 북촌출신 순교자가 무려 30여명이나 된다
석정보름 우물은 1987년에 한 차례 복원됐으나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돌로 채워진 우물을 2013년에 다시 복원하고 안내판과 안전을 위한 투명 덮개를 함께 설치했다
석정보름우물에서 골목길 벽화를 따라 창덕궁길로 넘어간다
골목길 끝자락에 개인집인데 너무 이뻐서 그냥 담아본다
고희동 가옥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5길 40, 원서동 16)
1918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서양과 일본 주거시설의 장점들을 한옥에 접목시켜 실용적으로 직접 설계하고 지은 목조 개량 한옥이다
실제로 외부에서는 흔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지만, 내부의 모습을 보면 마치 일본영화의 한 장면처럼 이국적인 구조가 인상적이다
가옥은 안채, 사랑채, 문간채, 곳간채로 구성되었지만, 변형과 훼손이 심했다고 한다
등록문화재 지정(제84호) 이후 안채와 사랑채를 복원했다
긴 복도와 유리문, 툇마루와 대청의 실내 공간화, 개량 화장실 등 근대 초기 한국 주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고희동은 이 가옥에서 1959년까지 41년 동안 거주하였다
앞마당(외부)
가옥 내부
담에서 밖의 모습
♤ 고희동(高羲東)
1886년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부친 고영철은 역관으로서 개화파 인사들과 어울려 지냈고 이러한 성향은 고희동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1899년 13세의 나이로 관립 한성법어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하였다
1904년 궁내부 주사, 예식관 등의 관직을 역임하며 대한제국의 궁내 프랑스어 통역, 문서 번역을 담당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일어나자 진로를 전환하여 동양화가가 되었다
처음으로 미술 세계에 발을 들인건 서양화가 아닌 전통회화 세계로, 도화서 소속으로 어진을 그리기도 했던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에게서 미술을 배우게 되었다
관직을 그만두고 1909년 국비 장학금을 받고 도쿄 미술학교 서양화과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일본에 최초로 서양 미술이론을 도입한 구로다 세이키 밑에서 그림을 배웠고, 이후 1915년 3월 29일 학교를 졸업함으로써 최초의 서양화가가 되었다
1918년 분가하면서 원서동에 집을 짓는다
이 때 직접 집을 설계했는데 이것이 바로 등록문화재
제84호 고희동 가옥이다
또한 1918년 일본인 서양화가로 조직된 조선미술가
협회에 대항하여서 조선인 화가들의 모임인 서화협회를 결성하여 스승 안중식을 회장으로 모시고 자신은 서화부문 총무로서 활동했다
8.15 해방 후 고희동은 조선미술건설본부 중앙위원장
으로 추대받아 취임하셨지만 첫 회의에 불참했고, "정치적 색채를 전혀 초월하여 중립과 순수예술 파지의 태도로써 나아가자" 라는 주장 아래에 세워진 조선미술가협회가 결성되면서 결성대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 당시 가톨릭 성화를 주로 그린 화가 장발(전 총리 장면의 동생)과 함께 김일성의 납북 리스트에 오르게 되어 납치 위기에 처한다
그는 막내딸의 집으로 몸을 옮겼다가, 인민군에게 납치당 할 위기를 맞은 후, 승려로 변장하여 서울 근교의 절로 피신했다
그러던 중 9.28 서울 수복과 함께 부역자 심사의 주체가 되었다
1.4 후퇴 당시 부산으로 옮겨가 영주동에서 피난 생활을 하다가 한국전쟁 이후 초대 예술원장이 되었다
1956년 제2회 예술원상(미술 공로상)을 수상하였고,
정치에도 참여하였다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반발하여 국가보안법 개악반대
투쟁위원회 발기인, 민권수호국민총연맹 상임위원장을 지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선거에서 민주당후보로 서울시 참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가 5.16 쿠데타로 물러났다
이후 1965년 3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투병하다가 10월 22일 타계하였다
창덕궁 외삼문 (서울시 종로구 원서동 9-11)
외삼문은 말 그대로 바깥담에 세칸으로 지은 문을
말한다
그러니 여기가 창덕궁 바깥문이다
원서동 빨래터 (서울시 종로구 원서동 30)
이곳은 창덕궁 신선원전의 외삼문 우측 궁장 아래로
흐르는 소하천에 마련된 조선시대 빨래터이다
궁궐의 궁인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다 함께 이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조선시대 도성 내에는 이름난 빨래터가 여러 곳에
있었는데, 이곳은 청계천과 함께 오래된 빨래터로 널리 알려진 곳의 하나이다
옛날 궁녀들이 뽀얀 피부를 위해 사용했던 당귀 달인물과 쌀뜨물이 이곳으로 흘러나와 빨래 하기엔 아주 좋았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백홍범 가옥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길 134, 원서동 9-8)
이 가옥은 원래 있었던 안채의 별채였던 건물로 ㄱ자형 평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안채 자리에는 근래에 지은 양옥이 자리잡고 있다
민속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비공개 가옥이다
이 집터는 장희빈이 창덕궁에서 쫒겨난 후 살었던 곳이며, 여기에서 사약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정설은 창덕궁 통명전에서 사약을 받았다)
한샘디자인연구소 안 뜰에서 바라본 백홍범 가옥입니다
(운이 좋아? 한샘디자인연구소 뜰 안까지 들어갈 수
있었다)
궁중음식연구원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5길 16, 원서동 34)
1971년에 조선왕릉 궁중음식이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로 지정되자 이를 보급하고 계승하기 위해 설립된 전수교육기관이다
전통음식의 정수(精髓)인 '궁중음식'은 조선 마지막
왕조 고종과 순종을 모셨던 한희순(韓熙順, 1889~
1971) 주방상궁으로부터 황혜성(黃慧性, 1920~ 2006)교수가 전수받아 계승한 것이며, 이는 다시 한복려(韓福麗, 1947 ~ 현 연구원장)로 그 전통의 맥이 이어져오고 있다
2007년 국가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첫댓글 장희빈도 계동에서 살았군요.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