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몽골 기행문
징기스칸이 태어나고 자라서 쟈무카와의 일전을 거쳐 대원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정치적 변신의 기회를 맞이한 땅!
서울과 부산보다도 더 먼거리를 지나는 동안 산하나 보이지 않는 광활한 대지!
청의 "강희"황제가 하늘아래 이같은 땅은 다시 없을것이리라"극찬하였다는 그땅!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순수의 땅 동몽골 방문에 나섭니다
관계자 여러분과 학계의 여러분등과 함께 기회의 땅 자연의 보고 동몽골을 일주하며 보고 듣고 느끼고 깨달은 점에 대하여 생생한 기행문을 작성하기 위하여 노력 하겠습니다
기간은 5박6일
당초의 일정은 10박11일이었으나 우연히 헬기가 교섭되어 헬기로 돌아본후 비행기로 돌아오는 다소 사치스러운 여행이 될것 같습니다
9월7일에 출발하여 12일 돌아옵니다
농,축산업, 광업,관광분야등 전 분야에 걸쳐 되도록 자세한 여정을 기록하도록 애쓰겠습니다
아침 일찍 서둘르며 짐을 챙기고 나니 5시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우연히 교섭된 헬기 이륙 시간에 맞추기 위하여 동행키로 한 이교수와 이사장에게 연락을 취하니 각자 얘기한 장소에서 대기 중이었다
13구역에서 이교수를 태우고 보야지 호텔에 도착하니 로비에 여러 사람의 형상이 어른 거린다
내려서 보니 초면인듯한 사람이 두엇이 보이고 이사장과 통역 가나
헬기를 예약한 00화장품의 장실장이 보였다
간단히 수인사를 나누고 나니 00화장품의 계열사 사장인 차이나 tv 사장님이 내려 오시고 뒤이어 회장님이 내려 오셨다
또 다른 계열사 사장님과 인사를 나누라고 하여 보니 뜻밖에도 여사장님이셨다
대충 인사를 나눈후 공항으로 향하였다
공항으로 떠나는데 매니져 바쑤흐의 운전이 예사롭지 않다
조심해서 운전을 하라고 하니까 걱정말라고 답하였다
공항가는 중간에 끼여들기 추월을 반복하는데 운전솜씨가 거의 내 수준으로 위태위태하다
급기야 선탑한 이사장이 "오땅(천천히라는 몽골어) 오땅"을 외쳐대신다
너는 오늘 저녁 10시가지 쵸이발산에 도착하면 되니까 천천히 오너라 다시 한번 당부 하였다
울란에 쵸이발산 까지는 직선거리 665km이니 시간은 충분하리라 생각 되었다
공항에 도착하니 대사관에서 나온 H서기관이 나와 있었다
짐을 내리고 청사 안으로 들어가니 오른쪽 가장끝쪽으로 출입구가 있었다
배낭한개만 메고 온 나와 달리 화장품 계열사는 준비한게 제법 많았는데 그중 가장 많은 것은 음식물 같았다
간단한 짐검색과 몸수색을 끝내고 차량으로 공항한켠으로 이동하니 헬기가 보였는데 상태가 상당히 노후해 보였는데 족히 50년은 지난듯한 고물같았다
어쨌든 기념 사진을 한컷 찍고 나니 기장과 정비사인듯한 사람이 오고 탑승하여 내부에 오르니 좌석 중간에 400리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노란통이 두개 보이는데 기름통(노후 헬기로 기름연결파이프가 부실하여 실내에 설치한것임) 같았다
이륙을 준비하는 헬기의 엔진음 소리를 들으며 시간을 보니 8시를 갓 지나고 있었다
어릴때 자주 보던 미국식 헬기는 동체 바닥에 스키날같은 받침이 붙어있어서 앉은자리에서 뜨고 내리는것만 보았는데 소련제인 이 헬기는 비행기처럼 한참을 이동하더니 비로서 육중한 동체를 요란한 프로펠러 소리와 함께 하늘로 비상시키기 시작하였다
이게 왜이리 안 뜨나 생각하고 창밖을 내려다 보니 어느새 지상 2-300M 상공으로 오른 후였다
동체를 틀고 잠시 진행후 컴파스를 보니 E극을 가르키고 있는데 정동쪽으로 날아가는 것이 그 방향이 대통령궁 바로 위 같았다
“설마”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역시나 바로 밑에 대통령궁의 푸른색 지붕이 바로 눈아래 있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일이 이곳에서는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었으니
한반도의 분단이 빚어낸 슬픈 역사의 단면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5분정도 지나니 이박사의 “우리 농장이 보이네“하는 외침이 들린다
창아래 빨간 지붕 주택과 감자농장이 펼쳐져 있었다
30만평 정도라고 하니 100ha정도의 제법 큰규모의 땅이었다
저 땅에서 이교수의 꿈과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마음으로 빌어 주었다
조금 더 지나니 파란 잔디가 군데군데 점처럼 박혀있는 초원이 눈아래 들어와 자세히 보니 징기스칸 골프장의 인조 그린이었다
삭막한 느낌이 드는 것은 주변이 이제 완연한 가을색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리라....
그후 나타나는 산하는 어쩌다 나타나는 구릉과 점점이 박힌 나무 끝없이 펼쳐진 초원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간혹 보이는 것이 무덤같은 작은 동산같은 것이 보였는데 가을걷이를 끝낸 밀농장의 북데기 모듬 같았는데 산재한 밀밭의 크기는 1-2십만평 정도의 크기 같았다
처음 타본 헬기에서 내려다보는 미지의 세계에 눈이 팔려 시장기를 잊었었는데 단조로운 차창의 풍경이 이어지자 잊었던 시장기가 되살아나기 시작하였다
옆에 앉은 장차장에게 아침을 먹고가자고 얘기했더니 징기스칸의 고향에서 먹기로 하였다고 답하였다
시간은 11시가 가까웠는데........
잠시후 창아래 펼쳐지는 풍경이 눈에 익은것처럼 느껴졌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점점이 박힌 호수는 알프스아래 펼쳐진 스위스의 어느 마을 같이 느껴졌고 한폭의 비단을 풀어 헤친 듯이 초원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강은 그림이나 사진에서 많이 본 그런 풍경이었다
이사장에게 물어보니 “다달솜”이란다
징기스칸이 태어나서 자란 역사의 숨결이 고즈넉이 잠들어 있는 바로 그곳이었다
“오논강”의 의연함은 여전한데 영웅의 후손들은 세계를 정벌했던 기백과 풍요로움을 상실한채 기울어가는 통나무집과 몇 마리의 가축에 만족한채 양지를 찾아 옹기종기 모여앉아 나른한 한낮의 따사로움을 즐기는 나태함에 젖어 있었다
동네를 한바퀴돌아 착륙을 하였다
헬기 밖으로 나오니 날씨가 장난이 아니게 추웠다
고도계는 해발750m를 가르키고 온도계를 보니 영하3도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 추운 날씨에도 이름모를 야초들은 막바지 가을을 보내는 아쉬움에서인지 저마다의 용태를 뽐내며 짙은 향을 피워내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첫눈에 들어오는 것은 울란근교에서 보던것과는 전혀 다른 에델바이스, 즉“차강(하얀) 오-ㄹ(구름)체체크(꽃)”였다
크기도 한참 컸고 색깔도 선명하여 푸르스름한 옥빛 몸통전체에 뒤덮인 하얀 솜털이 더욱 선명하였다
밖에서 밥을 먹으려 하였으나 너무춥고 바람이 강해 헬기 안에서 먹기로 하였다
도시락을 받아들고 내용을 살펴보니
이제껏 보던 도시락과는 차원이 달랐는데 고기와 생선에 구수한 된장국물까지 다양하였다
이사장이 만원짜리니까 맛있게 드십시오 하신다
ㅎㅎㅎ 역시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장기가 더한 맛있는 아침을 마치고 왼편 언덕에 보이는 탑을 향해 가보았다
몽골 고어로 씌여 있는 글이 보여서 동행한 “소미야 바타르”박사(이분은 김일성대학에서 유학하신 분으로 한국어의 고사성어를 비롯하여 웬만한 한국사람보다 한국어를 더잘하시는 서미달 이라는 한국이름을 가지고 계신 역사학 박사이시다)에게 물어보았다
“언덕에 오르면서 하늘과 땅과 물에게 기원을 드렸으니까 이제는 말해줄수 있습니다”하시며
“우리 몽골사람들은 우리의 일을 외부 사람에게 발설할때는 꼭 이렇게 기원을 드려야 합니다 한국의 天(천)地(지)人(인)에게 고하는 풍습과 같지요” 하시며 비문을 해석하시는데
“1262년 여름 1월 16일(양력 5월30일) 징기스칸께서 이곳에서 태어나셨다”는 내용 이었다
결국 비석은 탄생석 이었다
징기스칸과 관련된 유물은 이것 단 하나였다
몽골은 유목민의 특성상 문화재가 없다
그나마 있는 것은 원을 거쳐 명대에 만들어진 골동품들이 많이 유통되고는 있으나 그마저 거의가 중국에서 만들어진 가짜이다
그당시 만들어진 진품중의 대부분은 소련이 몰락하면서 찾아온 민주화의 혼돈속에 거의가 장물로 팔리거나 금, 은 등으로 만들어진 불상등의 보물들은 제련소의 용광로에서 녹여져 일반적인 금붙이로 거래되었다고 하니 통탄할일이다
사진을 찍고 헬기쪽으로 내려오니 짚차 한대가 달려오는데 우리에게 오는 차 같았다
역시나 달려온 차량에 타고온 정복입은 경찰은 헬기 조종사에게 운항허가 서류를 요구하는 것 같았고
아무 이상이 없자 징기스칸이 먹던 우물이 근처에 있다고 가볼 것을 권하였으나 시간 관계상 사양하고 다음 행선지인 쵸이발상으로 향하였다
1시간여를 비행하는동안 눈아래 펼쳐지는 것은 막막한 초원이었고
멀리 보이는 커다란 웅덩이는 노천에서 채굴하는 석탄광산 같았다
제법 커 보이는 동네가 눈아래 들어와 얼마 안가면 쵸이발상인가 생각하는데 제법 규모가 큰 활주로가 눈에 들어온다
군사비행장인 것 같았는데 건물에 씌여있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쵸이발산”이라는 붉고 선명한 글씨였다
어느새 다음 기착지에 도착한 것 이었다
잠시 급유를 위해 30여분을 지체한후 영접나온 도르노트 아이막의 부지사에게 간단한 아이막의 현황을 브리핑 받고 이동 준비를 하는데 H서기관이 “안사장님 차 사고 났다네요” 한다
전화기를 바꿔들고 들어보니 대사관 기사인데 같이 오던 나의 애마가 뒤집어지면서 굴렀다는 것이었다
운전자의 안위를 물으니 이상이 없어서 자기는 잠시후 출발한다고 하였다
“몇시에 사고가 났느냐” 물으니 “10시20분 정도”라고 한다
“사고난 지점은?”
“울란에서 330KM 지점쯤 되는데 무릉을 조금 지나서...”라고 답한다
“속도는?” “30KM정도로 왔어요” 한다 순간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세상에 30KM로 운행하다가 빵구가 났다고 전복되는 차가 있을까?
더군다나 나의 애마는 일반 타이어보다 1㎝정도는 더 두꺼운 오프로드용 타이어인데...갑자기 어제 저녁에 회원들이 왁자지껄 농을 건네던 생각이 났다
동몽골을 예정에 없던 헬기를 타고 간다고 하니까
몽골의 유력인사들은 모두 헬기 사고로 유명을 달리 했다고 하며
갑자기 “명복을 빌며”,
“내일 아침 사고 수습 대책반을 미리 짜 놓자”,
“가시기 전에 재산양도 각서를 써주시요”등등 난리가 아닌 난리를 겪은 것이 생각났다
“아! 이것으로 액땜을 했구나” 하는 생각에 순순히 현실을 받아 드리기로 하였다
브리핑이 끝난후 부지사를 함께 태우고 다음 행선지인 보이르 노루(보이르호수)로 향하였다
비행거리를 줄이기 위해 중국 영공을 통과해 간다는 간단한 설명이 있었고 출발전에 인적사항을 알려준 것이 생각났다 미리 허가를 득하여야 한다는 얘기였다
30여분을 비행하였으나 언덕하나 없는 초원이었고 잠시후 눈아래 펼쳐진 호수는 호수가 아니라 바다 그자체였다
상공에서 바라본 호수는 좌우를 둘러봐도 아득한 수평선뿐이었다
헬기 아래서는 제법 거친 파도가 출렁이고 있었고 흙탕물같은 호수는 상당히 얕은 느낌을 주었는데 조금 지나자 검푸른 파도가 일렁이는 심해같은 음침함을 간직한 수면이 보였다
족히 30분은 걸려서 호수 건너편에 도착하였는데 기다리기로 약속한 할흐골 군수가 보이지 않았다
전화가 안된다고 하여 호수가에 위치한 초막으로 들어가니 노부부가 반갑게 맞이하며 말젖, 소젖등 가축의 젖으로 만든 버터같은 간식거리를 내오는데 그 정겨움이 어릴적 이웃 할머니의 애틋한 사랑을 느끼게 하였고 그 정성에 아련한 향수를 느꼈고 맛을 보니 제법 괜찮았다
이어지는 영감님의 이야기와 덧붙여지는 소미야 박사의 첨언은 나에게 또 다른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이 보이르 호수는 우리의 먼 선조들이 형성하여 명성을 떨쳤던 옛 부여의 발원지라는 설명이었다
현재 이곳에서는 연간 200톤의 어획고를 올리고 있는데 어종은 34종에 17종의 식용 가능한 어류가 잡히고 있으며 호수 주변의 주민들은 어업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고
어종중에는 우리가 잘 알고있는 철갑상어(몽골이름 토-ㄹ)도 잡힌다는 설명이었다
우리가 조금의 신경을 쓴다면 훌륭한 관광상품으로 개발할수 있을 것 같았다
헬기를 타기위해 돌아가다보니 주변에 밀밭이 있었다
수확이 끝났는지 널브러진 밀짚을 들어 살펴보고 손으로 비비니 이방인의 손길이 낮설은지 밀알이 수줍은 듯 머리를 내민다
우리가 흔히 보았던 알찬 곡식이 아니라 탈곡이 끝난건지 안한건지 구분이 잘 안갔으나 샘플로 챙긴후 다음 행선지로 향하였다
잠시후 일행중 누군가가 야!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창밖을 내다보니 수천마리의 “젤”(영양종류)들이 헬기의 소음에 놀라 초원을 떼지어 달리는데 그 모습이 장관이었다
군데 군데 보이는 소와 말들의 체구가 여타 지방에서 본것처럼 왜소하지 않고 제법 커 보였고 상대적으로 둔중한 몸집에 어울리게 헬기 소리에 익숙해졌는지 한가롭게 풀을 뜨고 있는 것이 이색적이었다
몽골은 현재 3300만마리의 가축을 사육하고 있는데 초원의 크기와 야초의 생육상태를 감안한 적정 사육두수는 1억마리라고 하는 통계를 접한적이 있는데 미국영화나 선전에서 자주 접한 수천마리의 “버팔로”(미국의 야생소)들이 “우두두두"하는 지축을 울리는 굉음을 내며 내달리는 장관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나는 어릴적 꿈이 대 농장의 농장주가 되는 것이 꿈이었었다
고등학교 2학년때부터 학교에서 직영하던 농장에서 온갖 가축을 다 만지고 다루어 본 경험이 있는지라 졸업후 목장을 경영하며 새벽1시30분에 일어나 16마리의 소젖을 손으로짜서 인접한 포천시까지 완행버스에 우유통을 운반하여 납품차에 실어주고 돌아오면 9시에서 9시30분...
늦은 아침을 먹고 경운기를 글고 “꼴”을 베러 가는데 경운기 옆구리에는 항상 小斗(소두)한말짜리 막걸리 주전자가 매달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양조장에서 일하는 아저씨가 담아준 진뗑이(쌀로빚은 막걸리 원료인데 독하지만 영양가는 듬뿍)막걸 리가 가득 넘쳐있었다
12시에 한짐해온 소먹이(꼴)를 목장에 풀어놓은 소에게 먹이고 점심 착유를 한후 나른한 오수를 한시간 즐기고 다시 경운기에 진뎅이 막걸리를 한주전자 매달고 6시까지 꼴을 베어 목장으로 돌아와 저녁 착유를 한후 저녁을 먹고 친구들을 만나 정담을 나누거나 술한잔 하고 들어오면 빠르면 10시 늦으면 12시였다
당시는 젊음이 좋았는지 하루에 많으면 4시간 짧으면 2시간30분 정도의 잠을 잤는데도 별로 피로를 느끼질 못했는데 지금와 생각하니 내 성격에 그 원인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나는 성격이 낙천적이다
우리 집사람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메바”란다
깊이 고민을 안하고 “이거다 생각하면 바로 실천에 옮기고 실패하면 다시 하면되지” 하는 아주 단순한 성격이다
당시의 나는 대중가요를 거의 사전처럼 꿰고 살았는데 그 이유는 힘든 목장일을 소화하기 위하여 경운기를 몰고 갈때나 “꼴”을 벨떼나 소젖을 짤때나 심지어는 소똥을 치울때도 신나게 노래를 불렀는데 하루 약 100여곡을 수회는 부른 것 같았다
막걸리를 진뗑이로 하루 한말을 먹어도 술먹은줄 몰랐던 것은 소꼴을 베면서 흘린 땀이 너무 많아서 였던것으로 아는데 지금 생각하면 점심때 라면으로 끼니를 때울때가 많았는데 어찌나 식욕이 왕성했던지 당시 삼양라면에서나온 군대 납품용 라면이 6개들이가 한 봉지 였는데 그 많은 양을 어떻게 먹었나 싶어 실소를 베어물곤 한다
약 20분을 날아 부지사가 아래를 가르치며 뭐라고 소리를 지르는듯하여 잠시 젖어들었던 상념에 께어서 내려다 보니 눈아래 거대한 불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지상에서는 전면촬영이 불가할 것 같아서 열심히 셔터를 눌러대었다
착륙하여 돌아보기 위하여 내려가려고 하니 서미달 박사가 만류한다 불상의 아래로부터 둘러보는 것이 정상이라고 하여 밑으로 돌아 내려가니 위에서 본것과는 달리 군데 군데 쇠락한 부분이 많이 눈에띈다
불상 전면에 자리한 토탑은 작은 토불이 모셔져 있는데 그중에 반은 없어져 버렸고 우리의 일주문과 유사한 문을 통과하여 안으로 들어서니 우리의 사천왕과 같은 4분의 신들이 모셔져있는데 앞서가는 서미달박사는 각각의 불상마다 지극한 정성을 드리곤 하였다
나도 덩달아 치성을 드린후 대불앞에서 티벳식으로 오체투지하여 삼배 드렸다
잠시후 강회장님이 치성을 드리고 나니 계열사의 여사장님이 정좌하여 치성을 드리는데 예사롭지가 않았다
그러더니 뒤를 향하여 “두번 실패한 사람 앞으로 나와”하시는데 나를 가르키는 것 같았다
망설이다가 다가가 저요? 하고 물으니 “당신은 여자를 빨리 만나”하신다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싶어 어벙하게 서 있자니 뒤에서 이교수가 한마디 한다
“장가들라는 소리지 뭐요” 하고 농을 건넨다
이어지는 사장님의 소리
“부인을 얻으라는 소리가 아니고 사업적으로 도와줄 사람이 필요해”
“당신은 여자가 항시 보필해 줘야해”하신다
속으로 만감이 교차한다
몽골 생활 30개월동안 안사람과의 불화로 인하여 별거아닌 별거를 하게 되었고
이제는 어느정도 극복하고 살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여자 얘기라니.........
당혹 스럽기도 하였고 은근한 기대감에 가벼운 미소까지 베어 물게 되었으니...
이래서 “남자는 열계집 마다않는 전부 도둑놈” 이라고 하는가 보다
하시는 말씀 참고로 하겠습니다 하고 사의를 표한후 대불 전면을 바라보니 굽이쳐 흐르는 강자락의 초원과 한가롭게 풀을 뜯는 가축들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이곳이다 싶었다
낙후한 이곳에서 적은 돈으로 나의 꿈을 실현시킬수 있을것으로 생각 되었다
울란으로 돌아가면 계획을 세워 반드시 돌아오리라
잠시후 군인인듯한 젊은 사람이 다가오더니 거수경례를 하고
"이곳은 국경지대이니 조심해서 움직여야 합니다"고 공갈아닌 공갈을 치고 있다
사실 국경이야 내 고향 철원이 세계에서 가장 살벌한 국경지대가 아니던가?
어서 남북이 좋은 방향으로 협심하여 자유로운 왕래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다가온 군인에게 이곳에서 가축을 키울수 있느냐고 물으니 안된다고 대답하였다
당신들은 가축을 어떻게 키우 식량으로 조달하느냐 물으니 근처 주민들에게 위탁사육한다는 얘기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주민들을 몇사람 지정하여 국경근처에서 가축사육을 할수 있도록 묵인하여주고 그 댓가로 가축을 조달받아 식량으로 충당하고 있었다
하긴 그것도 위탁사육의 한가지 방법이 될 수 있으리라........ㅎ ㅎ ㅎ
광활한 초원은 황토빛으로 일견하기에도 내 고향 철원의 산하와 다르지 않은 비옥함이 느껴졌고 이곳에서 농사를 지을수만 있다면 중국으로의 직수출도 가능하게 생각되었다
다시 헬기에 탑승을 한후 잠깐동안 비행을 하니 눈아래 거대한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아이들과 허름한 판자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서미달교수가 전승기념비라고 일러주셨다
300톤의 구리를 녹여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요즘 시세로 상당한 금액이 들어간 조형탑이었다
눈아래 펼쳐진 마을에는 제법 규모있는 건물이 몇 개 눈에 들어왔고 헬기는 아래로 서서히 착륙을 시도하였다
출입문을 열고 나가니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까만눈동자를 빛내며 우리 일행주위에 주욱 둘러선다
사탕같은 작은 기념품이 없느냐고 물으니 이슬시가 봉투째 가지고 나와 하나씩 나눠주니
모두들 좋아하는 모습이 어릴적 미군차가 지날때마다 give me chocollet을 외쳐대던 그 시절이 생각난다
지독히도 배가 고팠던 그시절 동네에 있는 사격장에 훈련나온 미군들이 시가지 전투훈련을 하는지 기관총을 쏴대며 동네를 휘돌아 다녔는데 총구옆에서 튀어나온 탄피가 쉬임없이 튀어오르며 바닥을 나뒹굴곤 했는데 그것을 하나라도 먼저 줍기 위해 악다구를 써대던 형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도 어쩌다 몇 개를 줏곤 했는데 채 식지 않은 뜨거움에 화들짝 놀래곤 했던 기억이 새롭다
마중 나온다는 군수를 기다리고 있는데 잠시후 군인이 한사람 다가온다
이교수가 통역을 하는데 국경을 지나치게 많이 침범하여 운행을 한 관계로 중국측에서 항의하여 왔다는 전언 이었다
다시한번 국경을 침범하면 발포할지도 모른다고 은근히 협박한다
짜샤들..번데기 앞에서 문자 쓰네........
지금이 냉전시대도 아니고 평화시대의 동맹국끼리 구시대적 공갈 치고 있네.......
하니까 영문도 모르고 웃어댄다
군수를 기다리는 막간에 주변을 기웃거리던 말칭을 불러 말좀 타자고 하니 선뜻 내어준다
자기가 고삐를 잡겠다고 하였으나 “쭈게르” 하면서 내쳐 달려 보았으나 아직은 기마술이 형편없어 시원스레 달리지를 못한다
근자에 이르러 몽골에서 낙마사고로 심각한 부상을 입은 사람도 부쩍 증가하였는데 개중에는 전신마비로 인해 국내로 긴급 후송된 사람도 여럿된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모든 것이 성질 급한 코리안들이 지나친 자신감으로 말을 대하여 생긴 결과인데 말이란 놈이 얼마나 영리한지 자기 등에 올라탄 사람이 초보인지..몽골사람인지..외국사람인지 기가 막히게 알아보고 주인만 한눈을 팔면 여러 가지로 애를 먹이곤 한다
가자고 재촉해도 풀만 뜯으며 듣는둥 마는둥 너는 짖어라 나는 먹는다 하질않나..
방향을 잡아 틀어도 지맘대로 가질 않나..
심지어는 물로 뛰어들어 온몸을 적셔놓아 추위에 떨게 하질않나..
가끔씩 고약한 놈들은 달리다가 급정거를 하여 사람을 내동댕이쳐 큰 부상을 입히곤 하는데 이 모두가 기승한 사람을 우습게 보아서 이다
처음 말을 대할때는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듯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볼을 어루만져 친근감을 표시한뒤 잔등에 오를때도 등을 가볍게 2-3차례 두드려주고 오르면 말이 놀래서 갑자기 뛰는 일이 없어 돌발사고를 미연에 방지할수 있다
특히 명심할 사항은 말의 후면으로는 절대 가지 말아야 하는데 자칫하면 말뒷굽에 채여 심각한 부상을 입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동네를 한바퀴 돌아보니 시골마을 치고는 제법 커보였다
말에서 내리며 아이들을 바라보니 하나같이 슬리퍼 차림이었다
날씨가 따뜻해서 인가 하고 물어보니 신발 살돈들이 없으니 가장 싼 슬리퍼만 신는데 대부분 겨울에도 저렇게 하고 다닌다는 대답이었다
어릴적 어머니가 사주신 “타이어표” 고무신이 지겹도록 헤지질 않아 시멘트 바닥에 대고 문질러 구멍을 내곤 새 신발을 사달라고 조르던 사치가 새삼 부끄러워진다
기다리던 군수가 오래도록 도착하지 않아 "누므르크 자연공원“의 방문은 포기하고 다시 초이발산으로 향했다
오르는 헬기에서 사위를 훑어보니 그제서야 국경근처를 흐르는 할흐골강이 눈에 들어온다
굽이굽이 휘돌아치는 강줄기의 풍경이 새삼 아름답게 느껴졌다
옹기종기 자란 관목들은 제법 푸르름을 지닌채 넓고 평화로워 보이는 초원을 부드럽게 감싸돌고 있었다
“이곳에서 농업과 축산과 관광을 겸한 복합 영농단지를 이루어 봐야지” 하는 막연한 꿈을 꾸면서..........
갑자기 눈아래 작은 동물이 보인다
자세히 보니까 여우 한 마리가 헬기를 따라오면서 야릇한 몸태질을 해보이는데 마치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구미호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동안을 재롱을 떨다가 사라지더니 꽃사슴같아 보이는 사슴이 무리에서 떨어졌는지 한 마리 보인다
몽골은 참 신비한 곳이다
메마른 이곳에 무엇이 있겠나 싶어서 지나치려 하면 동, 식물등이 없는게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아프리카의 사막에 서식하는 낙타같은 열대성 동물을 비롯하여 해발 4000m이상에 서식하는 “설표”에 이르기 까지 정말 다양한 서식 분포를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어류도 마찬가지 인것같다
9월20일의 이차 탐방때는 타이거샤크가 어떤것인가 궁금하여 “미가”에게 미리 잡아놓고 보여주길 부탁하였는데 다음날 보이르 호수가는길에 낚시를 하자고 하더니 동네 뒤편 언덕에 우리 일행을 끌고 올라가 한참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더니 한군데를 가르키며 입가에 손을대고 “쉿”하며 강 한가운데를 가르키는 것이었다
바라본 강 복판에는 거의 1.5m-2m는 됨직한 괴물 두 마리가 유유히 헤엄을 치고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였다
타이거샤크, 타이멘, 톨크, 메기 붕어등 수많은 어류가 있는데
크기는 우리네 물고기의 거의 몇배가 되는 괴물 수준이다
물은 수정같이 맑고 유속은 빨라 수량은 풍부하며 주변의 토지는 비옥하여 조금만 노력하면 농사던 축산이던 아주 용이하게 꿈을 펼칠수 있을것으로 생각되었다
길가에 지천으로 널린 이름모를 약초는 할흐골에만 420종이 서식하소 있다는 미가의 설명이었다
쵸이발산 공항으로 돌아오니 아이막 관계자가 여럿 마중 나와 있었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후 먼저 출발한 공관의 기사 “바이라”를 찾으니 도착하여 있었다
사고경위를 자초지종 물어보니 자기는 먼저가고 뒤에 오던 매니져 바쑤흐의 차가 뒤뚱거리더니 2바퀴를 굴러 넘어졌다는 것이었다
"몇킬로 로 왔느냐“ 물으니 시속 30km로 왔다고 대답한다
“어디서 사고 났느냐”물으니 “운드르항” 근처에서 그랬다고 답하여 거기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느냐 물으니 320km정도 된다고 답하였고 “몇시에 출발했느냐” 물으니 7시30분즈음에 출발하였고 사고가 난 시간은 10시를 조금 넘어 일어났다는 대답이었다
몇가지 질문으로 사고 개요가 정확히 파악 되었다
우리 헬기가 8시 조금 넘어 출발하였으니 7시 30분에 출발하였다고 하여도 2시간 30분만에 320km를 주파하였으니 시속 120km를 주행하였다는 계산이 나오고 매니저의 운전 습관으로 보아 차체가 낮은 공관차를 앞서 보내고 차체가 높은 랜드크루져를 몰고 말타듯이 “츄츄"하며 스릴 넘치는 랠리를 하다가 갑자기 작은 웅덩이가 나타났고 그 웅덩이에 앞바퀴를 갑자기 충격하게 되었고 다른 차보다 10㎝정도는 더 높은 강력한 코일 스프링을 장착한 내차는 그 충격으로 하늘높이 튀어 오르고 돌발 사태에 익숙치 못한 기사는 핸들을 튀는 방향으로 꺾지 못한채 반대 방향으로 틀게 되었고 그 여파로 전복되어 수차례 구르게 된것으로 생각 되었다
사막에도 도로가 있고 대부분의 운전자들은 꼭 그 도로만을 따라 주행하여 한때 이상하게 생각한적도 있어지만 그런 의혹은 지난번 자밍우드 여행길에 충분히 이해할수 있었다
그 이유는 멀쩡하던 지면이 도로를 조금만 벗어나도 갑자기 2-3m깊이의 웅덩이로 나타나기도 하였고 작은 구덩이는 수시로 형성되어 수차례의 전복 위기를 맞기도 하였던 것이다
몽골 사막이나 거의 대부분의 토층은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는데 상부10-70㎝정도는 흑갈색의 부엽토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부분은 수만년동안 가축의 분뇨등이 축척된 고품위 유기질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웬만한 소나기에도 표토 아래로의 침투를 허용하지 않아 지표면을 그대로 겉돌게 만들만큼 단단한 표층을 형성하고 있고 바로 아래 토층은 대부분 모래와 작은 자갈이 혼합된 沙(사)層(층)을 형성하고 있어 겉 표면이 유실되어 버리면 그 바로 아래의 토양은 순식간에 유실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특이한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순간 내가 다치고 죽을수도 있는일을 남이 대신 “액땜”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더 이상 묻지 않고 잊어버리기로 하였다
호텔에 들러 여장을 풀고 밖으로 나오니 바로 옆에 아이막 오피스가 있었다
우리의 도청인데 크기는 시골 면사무소 크기였다
도청에 들러서 도지사의 한국 정부에서 관심을 가져 줘서 고맙다는 환영사를 겸한 간단한 상견례가 있었고 저녁을 겸한 좌담회를 가졌다
간단한 몽골식 식사가 나오고 그 뒤에 연이어 따라 나오는 칭기스 술병이 공포 스럽게 보였다
무슨 자리만 있으면 계속되는 이들의 술 폭탄은 한국의 웬만한 술고래들도 두손 두발을 다 들고 마는데 우리야 한번 먹고 며칠을 쉬지만 이들은 매일 먹으니 우리가 당해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수없이 이어지는 건배 제의에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술잔을 냉수로 채우고 그 위기를 무사히 넘긴후 호텔로 돌아와 간단한 맥주 파티를 열었다
오늘 돌아본 몽골 견문에 대한 토론이 시작되었다
축산, 농업, 관광등 전 분야에 걸쳐 토론이 이어었고 주 토론자는 자칭 농업전문가인 이 교수와 나와의 논쟁이었다
농업의 구상부터 실행, 전망에 이르기까지 토론이 이어졌는데 종래에는 이교수가 자기는 농업전문가가 아니라 지역 개발전문가라는 고백을 끝으로 논쟁은 종지부를 찍었고 시골 농고 출신인 나의 의견이 존중되는 뜻밖의 소득을 얻게 되었다
사실 몽골의 농, 축산은 발전의 여지가 무궁무진해 보였는데
축산부터 예를 들자면 몽골의 가축은 5대 가축으로 분류 되었고 그 대상은 소, 말, 양, 염소, 낙타를 지칭하는데 하나같이 이동이 편리하고 빠른 것이 특징 이었다
자연 초지에 자유롭게 방목을 하는데 인위적인 조절 없이 이루어지는 난교는 잡종강세로 이어져 종자의 하향 평준화를 가져와 우량종자 생산과 육질 개선은 고사하고 가축의 관리와 질병의 방역에 굉장히 취약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후진적 축산업은 일정부분 면적에 울타리를 두르고 순환 이동하는 방법을 통하여 종자개량 및 육질 개선에 상당한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생각 되었다
농업은 원시적인 천수 전, 답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밭갈이에서 수확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인 교육이 미흡하여 대표 작물인 밀의 경우 ha/600kg에 불과한데 경작 방법을 개선한다면 최소 ha/3t은 가능할것으로 생각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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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치 제가 몽골을 방문한 듯 합니다. 감사 합니다.
댓글 감사드립니다
흥미 진지하게 보았습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현지에 있는 기분입니다.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재가 마치 몽골을 다녀온듯 합니다 님의 글을 통해 몽골여행 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좋은글 정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글 잘보았습니다..
저는 철원과 인접한 포천 일동이 고향인 68년생입니다..거의 같은 지역의 선배님되시는거 같군요..
저도 축산(양계)쪽에 관심이 많아서 자그마하게 농장을 하다가 여의치 않아서 지금은 접고
양계사료 전문으로 운송하는 사료차를 운영 하고있습니다..
이글을 보니 저넓은 땅에 축산업을 하면 딱이라는 생각에 제가 그곳을 둘러보는 착각이 드는 듯합니다..
아무튼 선배님의 맹활약 응원합니다..힘내십시오...
그렇군요. 언제든 도전해 보시는것도 좋을겁니다. 연령대도 딱 좋고....일동 농협 조합장하던 신모씨, 포천군수 박모(호수가에 두분이 찍은 사진중에 선그라스 쓰신 분.저와 막역한 친구입니다)씨의 사진도 게재되어 있습니다.ㅎㅎ
저는 예전에 카자흐스탄에 농업 관계로 다녀온 적이 있는데 몽골은 조건이 더 좋아 보입니다. 잘 봤습니다.
그럴겁니다. 일단 거리, 풍습, 비용, 통역등 모든 면에서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