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카포네도 꼼짝못한 한국인 마피아 보스~ 알 카포네도 어쩌지 못하는 마피아 보스가 존재했었고, 그 마피아 보스는 분명히 한국 태생의 한국인이었습니다.1971년 사망할 때까지 약 50년 가까이 미국의 라스 베가스, 헐리우드 등지를 중심으로 캘리포니아 지역의 밤을 완전히 장악하여 한때 미국의 서부 대통령이라고까지 불리어졌던 사람이지요.알 카포네가 살아 있을 때에도 알 카포네보다 훨씬 더 광대한 지역과 자금을 지배하고 있었고, 알 카포네도 감히 건드릴수 없었던,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마피아 보스 중의 하나였습니다.종로 시장의 상인들에게 보호비 명목으로 푼돈이나 얻으면서 주먹여행으로 큰소리치며 한때 조선 총독 한 달 봉급의 두 배도 넘는 수입을 올렸으면서도 자금관리를 잘못하여 결국에는 건축업을 하던 하야시 패의 도움을 받아서 겨우 연명하기도 했던 김두한 씨의낭만적인 아마추어 주먹패와는 본질적으로 그 차원을 달리 하는 사람이었지요.
그는 미국에서 정식으로 쇼비지니스, 영화사업, 카지노 사업 등 다양한 사업으로 크게 성공하였고, 그 험악한 미국 마피아 세계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마피아 보스 중의 하나였지요. 그리고 다른 많은 마피아 보스처럼 총 맞아 죽지도 않았고, 알 카포네처럼 체포된 적도 없었지요.---사실 알 카포네가 그 때에 경찰에 체포가 되었기 때문에 유명해진 것이지, 사실 따지고 보면 미국의 대표적인 마피아라고 하기에 어려운 형편이지요---그는 동양인이었던 관계로 그토록 막강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마피아 역사에서 크게 취급하지 않으려 했고, 마피아였기 때문에 한국의 미국 이민사에서도 애써 외면하려 했던 비운의 영웅이었고, 죽을 때까지 한국을 그리워 한 코메리칸이었습니다.
근데, 그 유명한 사람 이름이 무엇이냐구요? 참, 제가 말씀 안 드렸던가요? 그의 이름은 바로 "제이슨 리"입니다. 한국 이름은 "이장손"이었지요. 처음 듣는 이름이라구요? 네, 처음 듣는 분도 제법 계실 겁니다. 원래 마피아의 거물급은 일반인들에게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지요. 그리고 아직 국내에서는 본격적으로 크게 다룬 적도 없고요. 그가 미국으로 건너 간 시기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마는, 하와이 이민선이 처음 인천을 출발했던 1902년 경이 아닌가 보고 있습니다.1896년생인 그는 경기도 양평 태생으로, 여섯 살 때인 1902년 12월 부모님과 함께 인천항에서 출발하는 하와이 첫 이민선을 타고 요코하마를 경유하여 하와이로 가게 되었지요
---당시 하와이는 사탕수수 농장의 일꾼이 엄청나게 많이 필요하던 때였다. 독립국 섬나라 하와이였을 때에는 농장에서 부리는 노예로 작업을 할 수 있었으나, 노예가 없어진 미국의 한 주로 합병되면서 더 이상 노예를 쓸 수 없게 되어 전세계로 이민 유치광고를 내었고, 대한제국의 고종이 우리 나라 사람들 중 희망자를 골라서 보내기로 한 것이었다. 1905년 을사조약 후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접수하면서부터는 이 하와이 이민도 일본인 위주로 보내는 현상이 발생하여 지금도 하와이에는 일본 출신들이 하와이 원주민 행세를 할 정도로 숫자가 엄청나게 많다.-----
그러나 이 여섯 살 꼬마 아이는 하와이로 가는 배 안에서 갑자기 고아가 되어 버리는 비운을 맞이하게 됩니다. 배라고는 양평의 남한강에서 조그마한 쪽배밖에 타 본 적이 없는 아빠, 엄마가 심한 배멀미로 거의 동시에 세상을 뜨고 만 것이었습니다. 이 불쌍한 아이를, 그 때에 같이 타고 가던 이씨 노인이 거두어서 그 때부터 이씨 노인과 한 가족이 되었지요. 그 때부터 이 아이가 이씨 성을 쓰게 되었는데 이 아이의 원래 성씨가 무엇이었는지는 현재로서는 알기 어렵지요. 경기도 양평의 그 동네 면사무소에 1902년 해외이민 기록이 한국동란 때 불타지 않고 아직도 남아 있다면 확인해 볼 수도 있을텐데...
그리고 이름이 "장손"으로 되어 있는데, 원래부터 이름이 "장손"이었는지, 배에서 죽은 부모가 "우리 집 장손이오"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인지, 아이를 거두어 준 이씨 노인이 자신의 "맏 손자"로 삼겠다고 해서 "장손"으로 불렀는지 그 내막은 확실하지 않고... 어쨌든 이 아이의 이름은 이 때부터 "이장손"으로 불리게 되었고, 미국식 이름은 "제이슨 리"가 되었지요. 그러나 이 아이의 운명은 너무도 기구하여 이 씨라는 성씨를 물려 준 이씨 노인마저도 몇 년 후 세상을 떠 버리고, 이 아이는 머나먼 하와이 이국 땅에서 정말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는 천애고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하와이 어느 고아원에 보내졌는데, 이 고아원에서 12살 때(1908년) 무슨 이유에서인지 탈출하게 됩니다. 그 때부터 이 아이의 새로운, 그리고 파란만장한 인생이 시작됩니다.
앞으로는 어차피 혼자 살아야 하고 또 홀로 살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독립정신으로 똘똘 뭉친 이 어린 아이는 미국 본토로 가는 배를 몰래 숨어 타고서는 좁은 하와이를 떠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당도하게 됩니다. 이 때가 14살 때인 1910년이었지요...그 이후 샌프란시스코의 중국인촌 차이나타운에서 지내는데, 이 때부터 이장손, 아니 제이슨 리의 전혀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지요. 일가친척은 물론이고 책임지고 돌봐줄 수 있는 사람 하나 없는 천리만리 객지 땅에서 겪는 이 아이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지요. 굳이 말로 표현한다면 "극한상황"이라는 말 정도가 가장 가까운 말이겠지요. 아무도 지켜주는 사람이 없다는 심리적 외톨이 상황에서는 사람들이 대부분 자포자기 심리상태나 정면돌파 심리상태, 이 두 가지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는데..이 아이는 강력한 자기보호 본능과 함께 정면돌파 성향으로 인생의 방향을 잡은 것 같네요.. 어차피 인생에서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일단 자기가 살기 위하여 틈틈이 익힌 호신술은 샌프란시스코의 어떤 카지노 경호대의 눈에 띄게 되었고... 그리하여 먹여주고 재워주는 데만 있으면 되었던 제이슨 리는 샌 프란시스코의 어느 카지노에 취업하게 됩니다.딸린 식구 하나 없고, 언제 누구한테 맞아 죽어도 아무 부담이 없는 이 아이의 채용은 카지노 측에서도 별로 손해될 것이 없는 현명한 선택이었지요.어쨌든 카지노 경호단 -- 쉽게 말해서 중국 마피아단 -- 에서 선배들로부터 어깨 너머로 익힌 다양한 중국 격투기 무술은 이 어린 아이를 점점 더 강하게 만들었고... 어차피 의지할 곳도 없고 자기를 인정해 주는 데도 없었던 객지에서 어떻게든 살아 남아야겠다는 제이슨 리의 강인한 의지는 전투력 향상에 더욱 많은 상승작용을 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정신없이 카지노에서 몇 년간 좌충우돌하다 보니 18세가 되던 1914년의 어느 날, 제이슨 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마피아계에서 주먹왕이 되어 버렸고... 본의 아니게 자동적으로 마피아 작은 보스 중의 하나로 데뷔를 하게 되지요. 네? 18세의 이장손, 아니 제이슨 리의 체격이 어땠느냐고요?그건 말씀 드리기 곤란한데요... 김두한이 18세 때 177cm에 94kg이었으니,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정복한 이장손은 최소한 190cm는 넘었을 거라구요?허-- 참-- 할 수 없이 비밀을 말씀 드려야겠군요. 그 당시 이장손의 키는 162cm에 불과하였고, 그 이후에도 더 이상 키가 자란 적이 없다는군요.. 그러나 162cm의 단신으로 미국의 장신숲을 헤치고 미국 마피아의 대표적 거물급으로 성장했으니 정말 전설적인 인물이 아닐 수 없지요...
어쨌든 중국인, 일본인, 그리고 미국인과 멕시칸들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조직이 만들어지게 되는데, 이 조직은 헐리우드, 라스베가스 등을 차례로 정복하고 시카고의 알 카포네보다 더 거대한 조직으로 발전하였지요... 작은 체구의 동양인으로서의 주먹왕...이소룡(브루스 리)이나 성룡(재키 찬)은 영화 속에서만 주먹왕이었지만 제이슨 리, 아니 이장손은 어엿한 현실 속의 주먹왕이었고...참, 그리고 중요한 사실 한 가지...연일 총소리가 난무하는 미국 마피아 세계에서 주먹만 쓰는 제이슨 리가 어떻게 끝까지 살아 남았을까요? 그건 제이슨 리가 평소에 총칼을 안 쓰고 손과 발만 주로 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건 또 무슨 이야기냐구요. 미국은 경찰이나 마피아들이나 총을 가지고 다니는 놈 한테만 총을 쏘는 이상한(?) 버릇이 있대요. 그래서 제이슨 리는 총 맞을 기회가 많이 없었고, 총을 가지고서는 제이슨 리 근처에 접근시켜 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더 오래 살 수가 있었지요......
네? 그래도 미국 영화에 보면 총 안 가져도 잘 죽더라고요? 허-- 참-- 되게 끈질기시네.. 제이슨 리의 사주팔자가 빨리 안 죽게 되어 있는 걸 어쩌란 말입니까? 아니면 평소에 인간관리를 엄청나게 잘 했거나.. 하여튼 제이슨 리는 75세까지 잘 살았고 지금도 아들 손자들이 그 사업의 일부를 물려 받아 운영하고 있지요.. 그럼 마피아 보스 역할까지 물려 받았냐구요? 그거야 마피아 업무상 비밀인데 그런 건 절대로 공개가 안 되지요.....네? 아직도 궁금한 게 한 가지 더 남았다구요? 아.. 그러니까 알 카포네와 제이슨 리가 한판 붙은 적이 있었느냐고요? 에이- 참-- 무슨 실례의 말씀을... 노는 동네가 달라서 둘이서 한판 붙은 적은 없고.. 다만 알 카포네가 암살의 위기에 처했을 때에 제이슨 리가 목숨을 구해 준 적은 있었지요. 제이슨 리 조직이 워낙 막강하기도 했지만, 알 카포네가 자기 생명의 은인이라면서 항상 깍듯이 대우해 주었지요. 아무튼 1947년 알 카포네가 죽을 때까지는 절친한 친구로 지냈다는 건 확실해요.
알 카포네보다 제이슨 리 조직이 훨씬 더 탄탄했던 것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지요. 제이슨 리는 밀주나 마약 같은 불법적 사업보다는 연예사업, 카지노 사업 같은 합법적 사업을 주로 한 것이 그 이유인 것 같습니다. 1950년에는 일본 야쿠자의 자존심을 완전히 무시해 버리고 일본 한 복판에 대형 도박장 카지노를 개장한 일도 있지요. 참, 그리고 또 한 가지 재미있는 사건 하나가 있었는데...어린 시절의 고아 생활은 제이슨 리로 하여금 눈치밥에 이골이 나게 하였고, 이 눈치밥 생활은 상대방의 의도를 누구보다도 빨리 눈치챌 수 있는 독심술의 대가가 되게 하였지요...이 독심술은 모든 도박꾼들의 필수적인 요소인데... 제이슨 리의 독심술은 가히 세계적인 것이어서 제이슨 리의 도박 실력 또한 가히 세계적인 수준이었지요..언젠가 한번은 도박의 도시 모나코에서 몬테 카를로 은행의 돈을 몽땅 다 따 버려 전세계의 도박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일도 있었지요.. 고아 출신 특유의 독심술에다 어차피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는 두둑한 배짱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서 도박 부문의 세계신기록을 세우게 된 거지요...
그리고 또 제이슨 리는 헐리우드의 최고 실력자로 군림하면서 프랑크 시나트라, 에바 가드너 등 수많은 배우들을 후원하는 막강한 배후 실력자이기도 했지요..또 나중에 모나코의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를 일찌감치 발굴하여 영화계에 데뷔시킨 배후인물로서 한때 헐리우드 뉴스의 촛점이 되기도 했지요.미국의 어떤 배우도 제이슨 리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었으며, 제이슨 리의 영화산업 투자는 바로 헐리우드 영화의 성공을 보장하는 보증수표였지요..한때 헐리우드 영화배우였던 전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도 제이슨 리 앞에서는 고양이 앞의 쥐였지요..한때 전세계 남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미국 영화배우 에바 가드너가 그 많은 남자들을 다 제치고 162cm의 단신 제이슨 리와 동거를 한 것만 봐도 제이슨 리의 힘을 가히 짐작할 수 있지요.일제시대에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흥사단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 독립자금을 지원해 주기도 하고.. (덕분에 나중에 안창호 선생의 손자 "필립 안"도 헐리우드의 영화배우가 되었지요)1960년대 한국의 작곡가 길옥윤(패티김 전 남편)이 일본서 고생할 때 길옥윤을 도와 주기도 했던 미국 서부 마피아의 거물급 보스 제이슨 리 ---
몇 년 전에 모 신문에서 "거인의 전설"이라는 이름으로 제이슨 리의 "동경대첩(야쿠자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에 카지노 개업을 한 사건)"이 연재소설로 나오기도 했고, 모 영화사에서는 젊은 "제이슨 리" 역에 유승준, "알 카포네" 역에 알 파치노를 캐스팅하여 영화까지 만들 뻔 했던 제이슨 리 ---1902년 12월 말 제물포 부두(지금의 인천역 바로 뒤)에서 하와이 이민선을 탔던 분들을 위하여 1952년 12월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 이민 50주년 기념 연설에서"하와이 교민들이 조국 독립에 써 달라고 나에게 맡겼던 독립자금을 한국의 M.I.T 공대를 건설하는 데에 쓰겠습네다. 학교 설립을 위한 특별법도 제정할 것입네다. 돈이 부족하면 내가 개인적으로라도 자금을 보태겠습네다."라고 공표하였던 일이 있지요.
이러한 이승만 대통령의 꿈은 마침내 실현되었습니다. 정말 특별법도 만들고 대통령 사재도 털어서 인천에다 대학을 만들었지요.. 그 대학 이름이 뭐냐구요? "인천"의 "인"과 "하와이"의 "하"를 합치면 무슨 말이 될까요? 네, 맞았군요. "인하공대"가 정답입니다. 지금은 종합대학으로 바뀌어 있지요.. 1954년도에 개교하고... (그 때는 인하공대가 국립과 마찬가지였지요) 처음에는 하와이 교민 대표들도 찾아 와서 학교 운영에 보태라면서 돈도 좀 놓고 가고 그랬지요..근데, 지금 인하대에 이승만 대통령이나 하와이 교민들의 흔적이 있느냐구요? 물론...... 없지요....참, 원래 인하대에는 학교 설립자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하나 있었던 것 같네요..1980년대 중반의 어느 해인가 전두환 대통령 독재가 싫다면서 학생들이 애꿎은 이승만 대통령 동상을 쓰러트리고서는 질질 끌고 다니다가 학교 한 구석에 처박아 두었는데... 아직까지 이승만 대통령이 그 구석에 잘 처박혀 계신지 모르겠네요...
젊었을 때는 독립신문 기자로, 고종 임금의 미국 밀사로 활약했고... 하와이 교민들로부터 성금을 모아 상하이 임시정부 운영자금을 계속 대 주다가 임시정부와 해방조국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내는 등 거의 전 평생을 이 나라 독립을 위하여 고생을 하신 분이고....인생 말년에 주위의 부하들 잘못을 가지고 독재자 누명을 뒤집어 쓴 것도 억울한데...하와이 교민들의 피눈물로 얼룩진 독립자금을 한푼도 안 떼어 먹고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하여 큰맘먹고 대학을 하나 세워 주었건만...이제 와서는 학교설립자를 독재자라 그러면서 천하의 몹쓸 놈으로 취급하다니...아, 불쌍한 이승만 대통령이여..어쨌든 이승만 대통령이 계획한 하와이 이민 50주년 기념사업이 지금은 거대한 종합대학으로 발전했으니 분명히 성공작은 성공작인데,학교 설립자를 그런 식으로 취급하는 것이 어째 좀 ....이역만리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먼저 가신 교민들의 명복을 빕니다...... - 옮긴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