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천십지제일신마 제1권 제14장 무형천궁(無形天弓)-1 ━━━━━━━━━━━━━━━━━━━━━━━━━━━━━━━━━━━
지난 삼 일 간은 줄곧 폭우가 쏟아졌다.
찌는 듯한 무더위를 말끔히 씻어 주는 비...... 이 비가 그치면 가을(秋)이 시작되려나?
천우헌의 정원 내에 있는 꽤 넓은 인공 연못, 그 옆의 우아한 정 취를 풍겨 내는 팔각 정자에 한 소년이 걸터앉아 푸른빛 낚싯대를 연못에 드리우고 있었다.
집안의 연못에서 낚시질이라니...... 누가 봐도 우스운 일이 아닌 가?
허나 그 우스운 일을 하고 있는 혁련소천의 표정은 이 순간 그야 말로 진지하기 이를데가 없었다.
낚싯대 끝을 쏘아보며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는 그의 모습은 마 치 소중한 보물이라도 낚으려는 듯 몹시 신중했다.
그러나 그가 쏘아보는 낚싯대의 끝은 언제까지도 움직일 줄을 몰 랐다.
타는 듯한 노을을 받아서인지 혁련소천의 눈빛은 더욱 진지하게 불타올랐다.
낚싯대를 드리운 채 그는 꼬박 세 시진을 그러고 있었다.
"영호공자,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때 혁련소천의 등 뒤에서 컬컬한 음성이 울렸다.
바로 그 순간, 혁련소천은 낚싯대의 끝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보 았다.
"걸렸다!"
혁련소천은 탄성을 내지르며 낚싯대를 힘껏 잡아챘다.
그러자 팔뚝만한 비단잉어 한 마리가 낚싯줄에 걸려 따라왔다.
"하하...... 요놈! 드디어 걸렸구나!"
혁련소천은 퍼덕거리는 비단잉어를 옆의 바구니에 집어 넣으며 유 쾌한 웃음을 발했다.
이때 한 황의노인이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너털웃음을 쳤다.
"허헛...... 정원의 연못에서 낚시질이라...... 이 늙은이가 이해 하기 힘든 일을 하고 있군."
"아, 노인장께서 오셨군요."
혁련소천은 그때서야 반색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황의를 걸친 그 노인은 다름 아닌 감천곡이었다.
감천곡이 장군부에 온 지도 어언 닷새, 그간 감천곡은 영호대인의 배려로 혁련소천과 매일 같이 있다시피 하고 있었다.
감천곡은 웃음띤 얼굴로 혁련소천을 바라보았다.
"영호공자, 낚시를 통해 무엇을 얻으려는가?"
혁련소천은 눈에 이채를 담고 되물었다.
"노인장께서도 어제 한 시진 동안 이곳에서 낚시를 해보셨지요?"
이 무림에 군마천주 감천곡을 노인장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단 언컨데 혁련소천 한 명뿐이리라!
허나 감천곡은 왠지 그런 칭호가 그다지 싫게 느껴지지가 않았다.
감천곡은 껄껄 웃었다.
"헛헛...... 공자의 권유대로 하긴 했었지만 한 마리도 잡히지 않 더군."
혁련소천은 씩 웃었다.
"맨 처음...... 저는 한 시진에 열 마리를 잡았었죠."
그는 바구니 속의 비단잉어를 다시 연못으로 내던지며 말을 이었 다.
"허나 지금은 세 시진에 한 마리도 낚기 어렵습니다."
감천곡은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런가?"
"저는 잡은 고기를 모두 다시 놔줬는데 한 번 혼이 난 놈들은 다 시는 미끼를 물지 않는가 보더군요."
"흠...... 일리가 있는 말이로군."
"어쩌면 그놈들은 다른 놈들에게 주의를 주었는지도 모릅니다."
"무슨 주의를......?"
"밖에서 낚시하는 인간의 유혹에 절대 넘어가지 말라고 말입니 다."
감천곡은 그 말에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핫...... 재미있는 말이군."
허나 혁련소천은 웃지 않았다.
오히려 낚시질할 때보다 더욱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재미있지요. 어쩌면 인간의 삶도 그렇기 때문에 재미있는 것인지 도 모르고요."
감천곡의 얼굴에서 일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연못...... 물고기...... 세상...... 인생.......'
그는 갑자기 머리 속이 혼란해짐을 느꼈다.
'뭔가 깊은 뜻이 담겨 있는 듯한데......?'
그는 혁련소천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마치 그에 대한 해답을 혁련소천의 표정에서 찾아내기라도 할 것 처럼.
이때 혁련소천은 천천히 낚싯대를 거두어 들였다.
감천곡은 흠칫 물었다.
"왜...... 그만두려나?"
혁련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어떤 낚시꾼이 와도 이곳의 물고기만은 낚지 못할 것입니 다."
"그...... 그럴 테지."
감천곡은 얼떨결에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알 만하군. 어째서 감형이 공자에게 그 토록 반했는 지......."
이때 허공 어디선가 카랑카랑한 웃음이 울려 퍼졌다.
혁련소천과 감천곡은 약속이나 한 듯 거의 동시에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그 순간 한잎 낙엽이 떨어져 내리면서 두 개로 나뉘어지는 모습이 두 사람의 시야에 맺혀졌다.
헌데 이 무슨 조화인가!
둘로 떨어지던 낙엽이 다시 네 개로...... 또다시 여덟 조각으로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에 그것들은 이미 가루로 화해 있었 다.
헌데 바로 그 순간 가루가 떨어져내린 바로 그곳에 한 인영이 환 영처럼 신비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특징 따위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너무도 평범해 보이는 마의(麻衣)의 촌로(村老)였다.
허나 그가 나타날 때 보여준 신법은 이미 그가 평범한 촌로가 아 님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가장 평범한 것은 가장 뛰어난 것과도 통하는 법!'
혁련소천은 마의노인을 보는 순간 대번에 그렇게 느꼈다.
마의노인는 왼손에 손바닥만한 활(弓) 하나를 쥐고 있었다.
그것은 장난감처럼 예쁜 은빛 활이었다.
그가 나타나자 감천곡은 반색하며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어떤가, 공손형(公孫兄)? 노부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인정할 테지?"
마의노인은 혁련소천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 다.
"음, 노부가 너무 평범하게 생겨서 그런지 모르지만 영호공자는 너무 미남이야. 그게 마음에 들어."
감천곡은 그 말에 기대 어린 눈빛을 번쩍였다.
"그렇다면 공손형은......?"
"찬성이네. 노부는 전날 자네가 제안했던 의견에 무조건 찬성이 네......!"
감천곡의 얼굴에 일순 만족스런 미소가 흘렀다.
"후후...... 내 그럴 줄 알았네."
이어 그는 혁련소천을 쳐다보며 말했다.
"영호공자, 이 친구는 노부와 각별한 사이이며, 섬서성 천궁문(天 弓文)의 문주 무형천궁(無形天弓) 공손무외라는 위인일세."
혁력소천은 낚싯대를 내려놓고 정중히 포권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앞으로 많은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공손무외는 수중의 활을 만지작거리며 설레설레 고개를 내둘렀다.
"별로 가르칠 것도 없소. 노부의 특기래 봐야 고작 활줄을 퉁겨 계집의 치마끈이나 끊어 그곳이나 구경하는 재주밖에 없으니까."
혁련소천은 빙긋 웃었다.
"언제 시간이 나면 그것도 배워 보고 싶습니다."
"헛헛...... 공자의 외모면 그런 재주를 안 부려도 계집들이 스스 로 치마를 내려 보여줄 게요. 그렇게 따져 보면 공자가 오히려 나 보다 한수 위라고 말할 수 있지."
공손무외는 조금도 거리낌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마구 지껄여 댔다.
'무형천궁 공손무외...... 생각보다 재미있는 위인이군!'
혁련소천은 내심 생각하며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때 감천곡이 혁련소천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영호공자, 잠시 자리에 앉게. 내 할 이야기가 있네."
순간 공손무외가 혀를 차며 급히 손을 내둘렀다.
"쯧쯧...... 이곳은 낙엽 떨어지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이야 기할 장소가 못 되네."
감천곡은 빙긋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자네가 떨어지는 낙엽을 모두 가루로 만들면 되지 않나?"
공손무외는 땅이 꺼져라 탄식했다.
"휴...... 그것은 너무 피곤한 일이야. 차라리 낙엽을 한꺼번에 떨어뜨려 아예 소리를 없애 버리는 게 낫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는 활줄을 벼락같이 퉁겼다.
순간 요란한 진동음이 사위를 떨어 울렸다.
"...... 억......!"
뭔가 부러지는 듯한 음향과 함께 다급한 신음성이 근처의 한 나무 위에서 동시에 터졌다.
공손무외는 눈을 이상하게 뜨며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얼씨구...... 비명 지르는 낙엽이 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일인 걸?"
혁련소천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마 낙엽이 오래 묵어 영통한 모양입니다."
"허허...... 그런 것 같소. 아마 한 만 년은 묵은 낙엽인가 보 오."
공손무외는 자못 감탄을 짓더니 재차 활줄을 퉁겼다.
허나 이번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 오지 않았다.
공손무외의 눈에 언뜻 기광이 스쳤다.
"흠, 질긴 낙엽이군. 이런 낙엽은 좀 골치 아픈 것이지......!"
이어 또다시 활줄을 퉁기려는 순간 돌연 감천곡이 빠르게 제지했 다.
"그만두게. 우리가 천우헌으로 들어가면 그 뿐이니까."
공손무외는 활에서 손을 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일세! 아주 동감이야. 이곳에 더 있다가는 낙엽 귀신이 노부 에게 철천지 원한을 품을 것 같네."
이어 그는 지체없이 천우헌을 향해 신형을 쏘아 갔다.
감천곡은 혁련소천의 손을 부드럽게 움켜쥐며 말했다.
"우리도 들어가세."
"좋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감천곡은 혁련소천과 더불어 꺼지듯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바로 그 시각, 정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한 나 무 위에 한 인영이 나뭇가지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모습이 보였 다.
바로 영호검제였다.
그는 감천곡이 들어간 천우헌을 응시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과연 만마전의 고수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군......!"
이어 그는 엉덩이를 슬슬 쓰다듬으며 고통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이구...... 엉덩이야! 빌어먹을 셋째놈...... 어디서 저런 괴 물들을 끌고와서 이 형님의 귀하신 엉덩이에 피멍이 들도록 하다 니......!"
영호검제는 문득 어느 한쪽을 불만스런 눈으로 째려봤다.
"빌어먹을...... 이 귀여운 동생이 당하는 걸 첫째 형이란 위인은 구경만 하고 있다니...... 쯧쯧! 형제간의 의리가 이렇게 없어서 야 이거 정말 못해 먹겠군!"
그는 엉거주춤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그건 그렇고...... 여기에 더 앉아 있다간 엉덩이가 남아나질 못 하겠다."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비스듬히 미끄러지듯 허공을 갈랐다.
영호검제의 신형이 막 사라진 순간 동시에 그가 누워 있던 나뭇가 지가 다섯 토막이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그렇다면 그는 잘라진 나뭇가지 위에 누워 있었단 말이 아닌가?
이때 정자와는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꽃밭에서 한 인영이 그림 자처럼 나타났다.
영호환도였다.
그는 영호검제가 있던 나무를 쳐다보며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둘째 녀석, 의외인 걸......? 자칫 잘못했다간 이 큰 형님의 체 면이 말씀이 아닐 뻔했어......!"
그는 다시 천우헌으로 시선을 옮겼다.
"헌데...... 셋째 녀석은 진정 구천십지만마전에 뛰어들 생각인 가......?"
그의 입가에 문득 야릇한 미소가 번졌다.
"잘해 봐라, 셋째! 기왕 뜻을 세웠으면 초지일관(初志一貫)! 끝까 지 밀고 나가는 것도...... 엇!"
중얼거리다 말고 그의 눈이 아연 커졌다.
갑자기 온몸이 근질근질해졌던 것이다.
"이...... 이제 보니 둘째 그놈이...... 내 몸에 이를......!"
그는 느닷없이 머리와 온몸을 마구 긁기 시작했다.
"내 당장 둘째 놈의 머리통을 움켜쥐고 목욕탕에 처넣어 버리겠 다!"
영호환도는 신경질적으로 지면을 박찼다.
그가 쏘아 가는 방향은 영호검제가 사라져 간 바로 그 방향이었 다.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1권 제15장 천겁현오밀경(天劫玄奧密經)-1 ━━━━━━━━━━━━━━━━━━━━━━━━━━━━━━━━━━━
천우헌의 한 정실에 혁련소천과 감천곡, 공손무외 등 세 사람이 넓은 탁자를 중심으로 둘러 앉아 있었다.
이 순간 혁련소천을 바라보는 감천곡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 있 었다.
"영호공자, 그 동안 생각해 보았는가?"
혁련소천은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정도 내렸는가?"
"그렇습니다."
"어떤...... 결정인가?"
그렇게 묻는 감천곡의 두 눈엔 어떤 절망이 어리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노인장을 따라 만마전으로 가겠습니다."
나직하지만 확고한 결심이 서린 음성이었다.
감천곡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고...... 고맙네! 영호공자!"
그는 하나뿐인 손으로 혁련소천의 손을 힘있게 움켜쥐었다.
혁련소천은 빙그레 웃었다.
"고맙다는 말씀......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감천곡은 기쁨에 찬 표정으로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영호공자, 노부는 백이십 평생을 험난한 강호에서 살아왔네. 그 동안 죽을 고비만도 수십 번을 넘겼고...... 온갖 음모를 타개하 며 오늘의 위치를 굳혀 왔다네."
그는 두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말을 이었다.
"이제 나 감천곡에게 남은 것은 사람을 볼 줄 아는 이목밖에 없다 네."
"......."
"자네의 눈은 살아 있어. 겉으로는 차분해 보이지만 그 두 눈 깊 숙한 곳에서 번뜩이는 그 눈빛은 분명히 무섭게 살아 있어!"
"......."
"확신하네. 자네는 절대 노부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란 걸!"
쇠를 자르듯 단호하고도 신념에 찬 음성이었다.
이때 잠자코 있던 공손무외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암, 암! 그것은 노부도 장담하네. 영호공자는 너무 미남이기 때 문에 타인보다 최소한 한 수는 이기고 들어가는 셈이니까."
그는 입에 침을 튀기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미남계(美男計)! 장차 만마전의 계집들은 공자의 눈길 앞에서 그 저 추풍낙엽처럼 와스스 무너질 것이네."
그는 두 손을 부르르 떨며 괴상한 몸짓까지 연출해 보였다.
혁련소천과 감천곡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 았다.
다음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의 입에선 상쾌한 대소 성이 터져 나왔다.
허나 누가 알았겠는가?
그 웃음은 곧 또 하나의 음모(陰謀) 그 자체라는 것을......!
문득 감천곡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영호공자, 노부가 왜 자네를 군마천의 구대천주로 삼으려 하면서 도 제자로는 인정치 않으려는지 아는가?"
"저의 우매한 머리로는......."
"그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네."
"......?"
"첫째로는 자네에게 배분으로 인한 제약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고, 둘째는 노부에게 그러한 자격이 없기 때문이네."
그 말을 하는 순간 감천곡의 두 눈이 횃불처럼 무섭게 불타올랐 다.
혁련소천은 그 눈빛에 약간 섬뜩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감천곡...... 어쩌면 이 사람도 예상보다 훨씬 무서운 인물일지 모른다......!'
감천곡은 약간 상기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노부의 무공은 천하에서 단 한 명을 제외하곤 가장 강하다고 자 부하네."
혁련소천은 그 말에 퍼뜩 생각난 듯 반문했다.
"구천십지제일신마?"
"바로 그렇네."
감천곡은 진지한 표정으로 혁련소천을 응시했다.
"영호공자,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듣도록 하게."
"......?"
"지난 팔백 년 동안 구천십지만마전의 주인은 백 년을 주기로 여 덟 번 바뀌었네."
혁련소천은 궁금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였다.
감천곡은 얘기를 계속했다.
"만마전의 첫번째 규율...... 그것은 바로 만마전의 주인은 반드 시 제일신마의 직계 후손이라야 한다는 것이네. 허나...... 만에 하나 제일신마의 후손이 없다면 중원의 누구라도 제일신마가 될 수 있다네."
"......."
"현 제일신마 단우비 전주의 나이가 올해로 백여덟, 만마전주로 즉위한 지 꼭 구십 년이 되었지."
감천곡은 문득 두 눈을 기이하게 빛내며 말을 이었다.
"허나...... 그에게는 아직 후손이 없다네."
혁련소천은 그 말에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구십 년 동안이나 단 한 명의 후손도 얻지 못했단 말입니까?"
"아니지. 한 명의 아들이 있긴 있었네."
"그렇다면......?"
"허나 그 아들은 오십 년 전 장강(長江)에서 돌연 변사체로 발견 되었다네."
"......!"
"또한 그 아들이 남긴 혈육...... 즉 단우비 전주의 손자 역시 십 육 년 전에 병사(病死)했다네."
"병사......?"
혁련소천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지었다.
감천곡의 얼굴에 은은히 긴장된 기색이 떠올랐다.
"만마전에서는 그 두 가지 사건이 모종의 음모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으나 아직 아무런 단서나 증거도 찾아내지 못했다네."
이것은 실로 거대한 음모가 아닐 수 없었다.
혁련소천은 눈을 지혜롭게 반짝이며 말했다.
"어쩌면...... 만마전 자체 내의 분쟁일 수도 있겠군요?"
"음! 불행한 일이지만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
감천곡은 침중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말을 덧붙였다.
"지금 단우비 전주에게는 손자가 남긴 다섯 명의 증손녀가 있다 네. 허나 그들은 모두 여인인지라 제일신마가 될 자격이 없지."
감천곡은 문득 야릇한 눈으로 혁련소천을 응시했다.
"영호공자, 이제 노부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알 수 있겠나?"
혁련소천은 잠시 생각하더니 침착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구천십지제일신마의 보좌......?"
감천곡은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맞추었네!"
혁련소천의 눈빛이 어둡게 그늘졌다.
"어쩐지...... 어려울 것 같군요."
"그렇네. 노부는 천하에서 두 번째 고수라고 자부하지만...... 만 마전 내에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최소한 십팔 명(十八 名)은 더 있으니까."
"구천마제와 십지마황으로 불린다는......?"
"바로 그들이네. 구천마제와 십지마황은 팔백 년 전부터 만마전에 서 내려오는 직위이며 그것 역시 거의 백 년을 주기로 후계자를 즉위시킨다네."
감천곡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열아홉 단체의 주인들은 자신들의 후예들이 가장 특출하기를 바 란다네. 그렇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상상도 못할 고련(苦鍊)을 혹 독하고 무자비하게 시키지."
"......."
"지난 팔백 년 동안 전(全) 무림의 마도 고수들은 누구 여하를 막 론하고 구천십지만마전에 참배했고 또 그들의 마공절기(魔功絶技) 를 바쳐 왔다네."
감천곡은 목이 마르는지 침을 삼키며 말을 계속했다.
"허나 오직 구천(九天)과 십지(十地)의 주인들은 거기에 해당되지 않았네. 지난 팔백 년 동안...... 구천과 십지의 주인들은 수많은 무공을 창안했고 지금에 와서는 제일신마조차도 그들의 무공 수위 를 측정할 수 없을 지경이라네."
"......!"
"또한 그들 열아홉 단체의 힘은 가히 미증유(未曾有)의 것으로 성 장해 있다네. 그들 중 하나의 단체만 총력으로 움직이면 중원십삼 성(中原十三省) 중의 하나 정도는 단 한 달 사이에 모조리 초토화 시킬 수 있을 정도이니까......."
혁련소천은 내심 적잖게 놀랐다.
'구천마제와 십지마황의 힘(力)이 그 정도까지 커졌단 말인 가......?'
감천곡은 침중하게 말했다.
"만약 앞으로 십 년 이내에 단우비 전주의 후계자가 결정되지 않 으면...... 제일신마의 보좌로 인해 전 무림은 피의 폭풍에 휩쓸 리고 마네."
"......!"
"그것은 만마전의 첫번째 규율인 만큼 제일신마도 간섭할 수 없다 네."
그랬다.
지금 감천곡은 앞으로 십 년 후에 불어닥칠 엄청난 피의 폭풍(暴 風)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그는 기이한 눈빛을 쏟아내며 혁련소천을 정시했다.
"비록 영호공자가 노부의 무공을 모두 익힌다 해도...... 자네는 나머지 열여덟 단체의 후계자들의 실력밖에 안 되네."
"......!"
"다시 말해서 현 구천마제와 십지마황과는 결코 상대가 안 된다는 말이기도 하지."
혁련소천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1권 제15장 천겁현오밀경(天劫玄奧密經)-2 ━━━━━━━━━━━━━━━━━━━━━━━━━━━━━━━━━━━
"무공이란 서두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아직도 십 년 세월이 남았으니......."
"그 십 년 사이에 자네는 영문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어."
혁련소천은 움찔했다.
"그럼...... 어떻게......?"
"편법을 써야 하네."
"편법?"
감천곡의 눈에 일순 기광이 솟았다.
"그럼으로써 자네의 무공을 일 년 만에 노부와 동수로 만들어 놓 을 것이네."
혁련소천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 단 일 년 사이에 철장마제 감천곡과 동수......!
"편법...... 그것은 모두 세 가지라네."
"......?"
"첫번째는 황궁무고 즉 천추무상별부(千秋武相別府)의 무학을 얻 는 것이네."
― 천추무상별부의 무공을 얻는다!
"노부가 알기로는 천추무상별부에는 천하무학의 삼분지 일 정도가 비장되어 있다네."
"......!"
"모두 천고기학(千古奇學)이라고 말하지만...... 실상 그 중에서 는 노부의 무학과 비슷하거나 약간 낫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셋을 넘지 못한다네."
실로 엄청난 자존심(自尊心)이 아닐 수 없었다.
신비의 금역(禁域)인 황궁무고에 비장된 무학 중 자신의 그것을 능가하는 무학이 고작 셋도 안 된다니......!
감천곡은 진중하게 말했다.
"황궁무고에서 노부가 필요로 하는 무공은 단 한 가지."
"......?"
"천이백 년 전(千二百年前)...... 천축의 북방에 위치한 서하국에 서는 대대로 국왕(國王)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하나의 경전(經典) 이 있었네."
이때 공손무외가 불쑥 끼어들었다.
"천겁현오밀경(天劫玄奧密經)......?"
감천곡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것이네."
천겁현오밀경―!
그 말을 듣는 순간 혁련소천은 천기개천 사사무에게서 들었던 말 을 퍼뜩 상기했다.
― 혹자는 천축무학의 근원을 대뢰음사(大雷音寺)와 소뢰음사(小 雷音寺)에서 찾고, 혹자는 홍황이교(紅黃二敎)가 천축무림의 양대 산맥이라고 떠들어대지만 말짱 개수작이다.
― 실상 천축무학의 최고 정수는 서하국의 비전경전(秘傳經典)인 천겁현오밀경에서 찾아야 한다.
― 허나 서하국의 돌대가리 국왕 놈들은 그 무공을 섬신단련에만 사용했으니 돼지에게 진주 목걸이를 걸어 준 격이 아니겠는가?
자신이 모르는 것은 하늘조차 모른다고 떠들어댔던 천하만사무불 통지 천기개천 사사무의 그 말!
"천겁현오밀경에 어떤 무공이 실려 있는지는 노부도 모르네. 허 나, 그 무공이 가공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
"......!"
"이백 년 전 서하국의 멸망과 함께 천겁현오밀경은 황궁무고로 흘 러 들어갔지. 이 비밀은 천하에 오직 노부만이 알고 있을 것이 네."
"......!"
"바로 그 천겁현오밀경을 자네가 얻어야 하는 것이 편법의 첫번째 라네."
혁련소천은 어쩐지 가슴이 섬뜩해짐을 금치 못했다.
― 천겁현오밀경을 취하라!
허나 그것이 비장되어 있는 곳은 바로 황궁무고가 아닌가!
혁련소천은 불안한 기색을 떠올리며 물었다.
"헌데 제가 무슨 재주로 황궁무고에......."
"걱정 말게."
감천곡은 기이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황자에게 어린 공주가 한 명 있네. 바로 자하공주(紫霞公主)라고 하지."
"......!"
"그녀를 이용하면 되네. 그리고...... 그에 따른 모든 준비는 노 부의 친구인 홍포구마성(紅佈九魔聖)이 모두 해 놓았을 것이네."
"아......!"
혁련소천은 절로 탄성을 발했다.
'설마하니 공주까지 이용할 계획을 꾸몄다니.......'
그는 실로 감천곡이란 인물을 재평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천곡은 느긋한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러다 문득 감천곡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순간 그의 신형이 앉은 자세 그대로 창문을 향해 폭사되었다.
아니, 폭사되었다고 느낀 순간 그는 어느새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 다.
번개(閃)를 무색케 하는 실로 눈부신 빠름이 아닐 수 없었다.
헌데 지금 감천곡의 손아귀에는 한 마리의 야조(夜鳥)가 쥐어져 있었다.
감천곡의 두 눈이 일순 무섭게 빛났다.
야조의 발목에 붉은 고리 하나가 채워져 있는 것을 본 것이다.
"훈련된 새다......!"
"뭣이?"
공손무외는 흠칫 놀라며 야조의 몸뚱이를 재빠르게 훑어보았다.
순간 공손무외의 눈빛이 깊숙이 가라앉았다.
"그렇구나...... 이 새는 분명 보통 새와 눈빛이 다르다."
그는 눈썹을 찌푸리더니 감천곡을 응시했다.
"그렇다면...... 누군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단 말인가?"
감천곡은 눈에 이채를 담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음...... 동물을 이용하는 수법은 전설로 내려오는 전진(全眞)의 비기(秘技)인데...... 설마......?"
감천곡의 얼굴에 문득 살기가 떠올랐다.
"죽여야겠군!"
이어 막 손아귀에 힘을 주려는 순간, 혁련소천이 불쑥 제지했다.
"잠깐만......!"
감천곡은 의아한 눈으로 혁련소천을 쳐다보았다.
혁련소천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 새를 죽이면...... 새의 주인이 의심을 품게 됩니다."
감천곡은 미간을 찌푸리며 난색을 띠었다.
"그럼...... 어떡해야 되겠나?"
이때 공손무외가 나직한 괴소를 흘렸다.
"흐흐흐...... 그렇군. 이 새를 아예 바보 새로 만들어야 되겠 어."
이어 그는 가볍게 활줄을 퉁겼다.
순간 야조는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뒤이어 야조의 눈빛이 돌연 안개가 서린 듯 뿌옇게 흐려지는 게 아닌가!
"흐흐...... 됐어. 저 새는 절대 우리를 보지 못했고 아무말도 듣 지 않았던 것이야."
공손무외의 말에 감천곡은 빙긋 웃었다.
이어 그는 야조를 창 밖으로 훌쩍 내던졌다.
자유를 되찾은 야조는 어둠을 가르며 힘차게 야천으로 솟구쳐 날 아갔다.
감천곡과 공손무외는 서로를 마주보며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허나 혁련소천의 눈에는 어쩐지 음울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영호수아, 그녀가 설마......?'
영호수아, 귀엽고 깜찍하기 이를데 없는 천진난만한 소녀......
잠시 잊고 있던 천우신기 제갈천뇌의 말이 뇌리에 떠오른 것도 바 로 이때였다.
― 영호수아...... 모든 동물과 의사 소통이 가능한 신비한 능력 을 가진 소녀입니다. 조심하십시오.
마치 은싸라기같은 달빛이 소나기처럼 퍼부어 내리는 밤이었다.
■ 구천십지제일신마제1권제16장자하공주紫霞公主)와 봉황금시(鳳凰禁 )-1 ━━━━━━━━━━━━━━━━━━━━━━━━━━━━━━━━━━━
대광사(大廣寺).
금릉성 외곽에 위치한 방대한 규모의 대찰(大刹)로써 근 일천 년 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곳은 향화(香火)하러 오는 참배객들이 항상 줄을 잇고 있었다.
대광사로 이어진 곱게 뻗은 관도엔 따사로운 햇살이 눈부실 정도 로 내리비치고 있었다.
오가는 행인과 대광사로 향하는 참배객들의 몸은 온통 땀으로 흠 뻑 젖어 있었다.
혁련소천 역시 참배객들의 틈에 섞여 대광사로 향하고 있었다.
일신에는 산뜻한 백의, 머리에는 같은 색의 문사 건을 단아하게 둘러맨 채 섭선을 유유히 흔들며 걷고 있는 그 모습이 그렇게 멋 지고 귀풍(貴風)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를 한 번 본 사람은 예외 없이 입을 딱 벌리고 걸음을 멈추었 다.
모두 넋을 잃은 것이다.
개중에 꽃다운 나이의 처녀들은 꿈을 꾸듯 눈빛이 몽롱해졌고, 남 편과 같이 가던 중년 여인들은 아예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기까지 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아니, 이 여편네가 미쳤나?"
이런 때아닌 난리가 도처에서 발생했다.
허나 정작 혁련소천 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휘적휘적 걸음을 떼어놓고 있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영락없이 무공을 모르는 일개 서생의 걸음걸 이였다.
뒤쪽으로부터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온 것은 바로 이때였 다.
"아이쿠......!"
"저, 저런 망할 년......!"
동시에 여기저기서 갖가지 다급성과 욕설이 줄지어 터져 나왔다.
혁련소천은 흠칫 걸음을 멈추고 서둘러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야에 한 필의 연지마( 脂馬)가 관도 상을 무서운 속도로 치달려 오는 것이 보였다.
'허...... 사람이 많은 이곳으로 저렇게 빨리 달려오다니.......'
혁련소천의 눈썹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돌연 그의 눈에 언뜻 이채가 솟구쳤다.
'여자......?'
이제 십칠팔 세나 되었을까?
숨막히도록 아름다운 절색(絶色)의 소녀가 마상(馬上)에 올라 있 는 것이었다.
그 소녀의 일신에는 몸이 꽉 끼는 홍의(紅衣)가 걸쳐져 있었고, 가슴에는 금빛 제비 한 마리가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머리에 는 가운데가 뚫린 둥근 테모양의 모자, 어깨에는 백색 피풍(皮風) 을 걸치고 있었다.
헌데 지금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고 눈은 전면을 향해 잔뜩 부릅 뜬 채 말의 복부를 미친 듯이 걷어차고 있었다.
그녀를 태운 연지마는 순식간에 혁련소천의 옆을 지나쳐 갔다.
뿌옇게 피어오르는 황진 속에서 다시 행인들의 욕지거리가 줄지어 터져 나왔다.
"미친 년!"
"그래가지고 시집가기는 다 틀렸다!"
"빌어먹을...... 쿨룩! 쿨룩! 아이고, 이놈의 먼지......."
혁련소천은 홍의 소녀를 태운 말이 곧장 대광사 안으로 질주해 가 는 것을 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금빛 제비를 보아하니 금연방(金燕幇) 소속의 여자인 듯 한 데.......'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울고 있었어. 무엇 때문일까?'
그는 스쳐 지나가던 홍의소녀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 고여 있 는 것을 언뜻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혁련소천은 곧 그녀에 대한 생각을 떨쳐 내 버렸다.
'이러다간 운학대사(雲鶴大師)와의 약속 시간에 늦겠구나!'
그는 대광사를 향해 다시 빠른 걸음을 떼 놓기 시작했다.
운학대사.
불력(佛力) 깊기로 유명한 대광사 주지의 법호(法號), 오늘 혁련 소천이 만나러 온 사람이기도 했다.
온갖 기화이초가 흐드러지게 만발해 있는 대광사의 후원(後園)은 그윽하고도 신선한 꽃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혁련소천은 이곳에 이르자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뒷짐을 지며 느긋한 눈길로 유유히 주위를 살펴보았다.
마치 꽃밭을 감상이라도 하는 것처럼 지극히 한가롭고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가까이 있는 꽃 한 송이를 꺾었다.
얼굴에 가져다 대고 깊히 숨을 들이쉬자 싱그럽고 청초한 꽃내음 이 순식간에 콧속 깊숙이 스며 들어왔다.
'좋구나.......'
그는 마치 꽃향기에 도취라도 된 듯 스르르 눈을 감았다.
"대종사님, 무척 한가로와 보이십니다."
이때 땅 속 어디선가 한 줄기 가느다란 음성이 스며 나왔다.
'한단지마......!'
혁련소천은 여전히 꽃향기를 음미하여 미미하게 입술을 움직였다.
(알아낸 것이 있소?)
(있습니다.)
땅 속에서의 전음이 빠르게 이어져 나왔다.
(감천곡이 자하공주를 점찍은 것은 정말 잘한 것입니다.)
(이유는?)
(조사해 본 즉, 황제는 수많은 공주들 중 유난히 자하공주를 총애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자하공주가 잠시라도 안 보이면 황 제가 안절부절을 금치 못한다고 하니까요.)
(흠.......)
(석달 전 자하공주는 황제가 갖고 있는 봉황금시(鳳凰禁 )를 달 라고 떼를 쓴 적이 있었습니다.)
순간 혁련소천의 눈썹이 찡긋 움직였다.
(봉화금시라면...... 천추무상별부를 열 수 있다는 열쇠가 아니 오?)
(그렇습니다.)
(그래서?)
(황제는 처음엔 어이가 없었으나 자하공주가 막무가내로 떼를 쓰 고 우기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봉황금시를 건네주었답니다.)
혁련소천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수중에 있던 꽃송이를 내던지며 또 한 송이의 꽃을 꺾어 들 었다.
(대체 자하공주는 올해 몇 살이오?)
(십이 세입니다.)
'어쩐지.......'
혁련소천은 내심 실소를 금치 못했다.
문득 한단지마의 전음이 조심스런 어조로 이어져 나왔다.
(대종사님, 일곱 째의 말에 의하면 우리 칠 형제는 이번 일에 끼 어들 필요가 없는 듯합니다.)
(제갈천뇌가 무슨 말을 했기에......?)
(그는 감천곡의 계략이 대단히 출중하고 치밀하다고 감탄했습니 다. 아울러 대종사께서도 더욱 주의하시라는 말을 전해 달라 하셨 습니다.)
(음.)
(그럼.......)
혁련소천은 또 다시 한 송이의 꽃을 꺾으며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 다.
(한단지마, 그대는 꽃을 무척 좋아하는 것으로 아는데...... 어떻 소? 대광사의 꽃은 무척 아름다운데.......)
(흐흐흐...... 나중에 시간 나면 이곳의 꽃을 몽땅 뽑아 갈 생각 입니다.)
끝말은 먼 곳으로부터 희미하게 들려 왔다.
'갔군!'
혁련소천은 쥐고 있던 꽃을 바닥에 툭 떨어뜨렸다.
그의 발 밑엔 세 송이의 꽃이 버려져 있었다.
'후후...... 이 금작약(金芍藥)은 운학대사가 무척 아끼는 꽃이거 늘...... 이걸 보면 얼굴 꽤나 일그러지겠군!'
혁련소천은 내심 고소를 흘리며 천천히 걸음을 떼 놓았다.
그러나 미처 두 걸음을 떼 놓기도 전에 돌연 그의 안색은 크게 변 했다.
막 후원의 문으로 들어서는 한 인물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몹시 준수하고 차가운 얼굴의 중년인...... 분명히 혁련소천에게 는 낯익은 얼굴이 아니었다.
또한 혁련소천이 다른 사람에게서 이토록 강렬한 인상을 받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제 나이는 서른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칠흑같은 머리칼은 묶지도 않은 채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렸고, 이 마에는 검은 끈은 질끈 동여맨 모습, 일신에는 먹물같은 흑포에 옆구리에는 넉자 가량의 검은 장검을 비스듬히 꽂고 있다.
신발 또한 검은 가죽신으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먹빛 일색 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의 안색은 더욱 희고 창백해 보였다. 실같 이 가느다란 눈에 코는 날카롭게 우뚝 솟아 있었고 입술은 얄팍했 다. 특히 가느다란 눈에서 간간이 번뜩이는 그의 눈빛은 소름끼치 는 전율이 일 정도로 차가웠다.
'늑대의 눈빛이다!'
혁련소천은 자신도 모르게 온몸의 근육이 팽팽히 긴장되어 감을 느꼈다.
흑의인은 겨울의 삭풍처럼 차갑고 잔혹한 기운을 뿜어내며 서서히 혁련소천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흑의인의 유연하게 뻗어 내린 몸매, 내딛는 걸음 하나 하나가 그 렇게 여유 있고 가벼워보일 수가 없었다.
'어떤 고도의 특수 훈련이 아니고는 저런 몸가짐이나 분위기를 풍 길 수 없다!'
혁련소천은 더 이상 긴장하지 않았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흑의인에게서 자신에 대한 적의가 없음을 직감으로 간파한 것이 다.
'이쪽을 긴장시켜 공연히 상대의 주위를 끌 필요는 없으니 까.......'
이윽고 흑의인은 혁련소천의 바로 앞에까지 다가왔다.
흑의인은 혁련소천을 힐끗 응시했다.
순간 흑의인의 눈빛이 얼음처럼 차갑게 번뜩였다.
허나 그것은 극히 찰나였을 뿐, 그는 곧 혁련소천의 옆을 그대로 지나쳐 갔다.
'이 자...... 한 번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한 적이 있음직한 인물 이다!'
지나치는 순간 혁련소천은 또 한 번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인간의 한계에 대한 도전!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무서운지 혁련소천은 체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혁련소천은 흑의인이 후원 밖으로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 동안이나 움직일 줄을 몰랐다.
하늘도 모르고 땅도 몰랐다.
오늘의 이 짧은 만남!
이것이야말로 장차 무림의 운명을 크게 뒤바뀌게 하는 숙명(宿命) 의 만남이었음을!
혁련소천은 후원에서 벗어나 내당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이미 흑의인에 대한 생각을 접어 둔 그는 어느새 또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운학대사...... 아무도 모르고 있다. 그가 현 황제의 사촌형인 문성왕(文聖王)임을.......'
'그가 인생에 회의를 느끼고 출가하여 소림에서 무공을 수 련...... 대광사의 주지를 맡은 것이 어언 사십 년 전!'
문득 그의 입가에 신비스런 미소가 흘렀다.
'자하공주는 백부인 운학대사를 무척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 는 한 달에 한두 번은 황제도 모르게 이 대광사를 찾는다!'
그는 한 채의 불전을 돌아가며 생각을 이었다.
'문제는 자하공주가 갖고 있을 봉황금시인데......!'
그의 눈에 언뜻 기광이 스쳤다.
'황제는 마지못해 그것을 주었지만...... 분실을 염려, 공주 주위 에 다섯 명의 비밀 고수를 붙여 놓았다!'
'제갈천뇌의 추측에 의하면 그들 오 인(五人)은 영호대인이 조직 한 삼대 극비 세력 중 도감책을 제외한 나머지 두 세력에 속해 있 을 것이라 했다!'
그의 입가에 문득 득의의 미소가 번졌다.
'허나...... 후후...... 그렇다고 이번 계획을 벗어날 수는 없지.
봉황금시는 이미 내 손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 없다!'
멀쩡한 대낮에 개꿈을 꾼다고 비웃을 텐가?
허나 그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괴물이라 불리는 혁련소천이 었다.
■ 구천십지제일신마제1권제16장자하공주紫霞公主)와 봉황금시(鳳凰禁 )-2 ━━━━━━━━━━━━━━━━━━━━━━━━━━━━━━━━━━━
청향이 감도는 선방(禪房) 안에 눈썹이 희고 안색이 불그레한 팔 순 가량의 노승이 바둑판을 사이에 둔 채 혁련소천과 대좌해 있었 다.
노승은 바로 운학대사였다.
운학대사는 득도한 고승다운 품위와 타고난 듯한 위엄이 전신에 배어 있는 모습이었다.
혁련소천은 감천곡과 상의한 이후 의도적으로 그에게 접근하였고 어느새 이번이 다섯번째의 만남이었다.
운학대사는 득도한 고승답지 않게 바둑에 광적(狂的)인 취미를 갖 고 있었다.
누구의 입에서 흘러 나왔는지 모르겠으나, 장군부의 셋째 공자가 국수 급인 석대선생을 바둑으로 눌렀다는 말이 운학대사에게도 전 해졌다.
운학대사는 강한 호기심과 함께 꼭 한 번 셋째 공자와 만날 수 있 게 되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혁련소천이 불쑥 대광사를 찾아왔던 것 이다.
만나서 약간의 얘기를 해본 결과 운학대사는 혁련소천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금기서화(琴碁書畵)...... 도대체 무엇을 물어도 막힘이 없었던 것이다.
장군부의 자제답지 않게 온화하고 겸손한 셋째 공자의 인품은 순 식간에 운학대사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고야 말았다.
운학대사는 지금 아예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혁련소천의 우상변(右上邊) 대마(大馬)를 기웃거리다 보니 수비세 로 굳혀 놓았던 우하변을 반 이상 뺏겨 버리고, 반격으로 나선 좌 상변의 대접전에서는 아예 디딜 곳을 잃고 말았다.
대참패! 더 이상 두고 볼 것도 없었다.
운학대사는 마침내 백돌을 내던지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허! 이것 참......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구려. 석대선생이 두 손 든 이유를 알고도 남겠소."
혁련소천은 가볍게 미소지었다.
"과찬이십니다. 대사님의 기예는 웅혼하고 정통한 반면 소생은 극 히 변칙적인 것이라 견줄 바가 아닌 줄 압니다."
운학대사는 너털웃음을 쳤다.
"허허허...... 그런 말씀 마시오. 변칙은 무엇이고 정통은 또 무 엇이오? 만약 빈승의 기예가 진정 정통의 정수라면 결코 시주에게 패하지 않았을 것이오."
혁련소천은 담담히 웃으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했다.
그때 문 밖에서 소사미의 음성이 들려왔다
"주지님, 작은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순간 혁련소천은 흠칫했다.
'작은아가씨! 자하공주다......!'
원래 대광사에서 자하공주의 신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운학대사와 친척이라고만 알고 있었기에 작은아가씨라고 부 르는 것이다.
운학대사는 반색의 기색을 떠올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철부지 아가씨께서 또 오셨구먼......."
이때 선방의 문이 열리며 한 소녀가 모습을 나타냈다.
열두셋 가량의 나이에 아름답고 귀엽기가 마치 천상옥녀(天上玉 女)와도 같은 깜찍한 모습의 미소녀였다.
발그레한 뺨과 크고 서글서글한 두 눈이 유난히 돋보이는 그 어린 소녀가 바로 자하공주였다.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1권 제17장 귀신같은 솜씨-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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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공주는 선방에 들어서자마자 쪼르르 달려와 운학대사의 등에 매달렸다.
"백부선사님, 안녕!"
운학대사는 짐짓 눈살을 찌푸리며 나직이 혀를 찼다.
"쯧쯧...... 다 큰 녀석이! 손님 앞에서......."
자하공주는 그제야 혁련소천을 발견한 듯 급히 운학대사의 등에서 떨어졌다.
다음 순간 그녀는 큰 눈을 깜박거리며 혁련소천의 얼굴을 빤히 쳐 다보았다.
그 모습이 그렇게 귀엽고 깜찍할 수가 없었다.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겠군!'
혁련소천은 담담히 미소하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러자 자하공주 역시 생긋 웃어 보이더니 운학대사의 등을 쿡쿡 찌르며 물었다.
"백부선사님, 저 잘생긴 오빠는 누구야?"
운학대사는 껄껄 웃었다.
"허허허...... 녀석 말버릇하고는. 백부선사님은 또 뭐냐? 백부면 백부고 선사면 선사지......."
이어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인사드려라. 이 분은 장군부의 영호삼공자이시다."
자하공주는 깜짝 놀랐다.
"어머! 그럼 옥언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불쑥 외치다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옥언니......? 옥산랑을 말하려 했던 모양이군!'
혁련소천은 대뜸 눈치챘으나 내색치는 않았다.
자하공주는 어떤 호기심에 찬 눈으로 혁련소천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저 공자가 바로 옥산랑 언니의 약혼자였구나......! 어쩐지 옥언 니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늘어놓더니만.......'
문득 자하공주는 마음이 야릇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때 운학대사가 웃으며 말했다.
"허허...... 이 아이는 빈승의 조카 소연(少娟)이오. 아직 철이 없어 제멋대로이니 영호시주께서 이해하시오."
혁련소천은 빙그레 웃으며 정중히 포권했다.
"영호풍이라 하오, 소낭자."
자하공주는 문득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킥! 저는 소씨가 아니에요. 그리고 무슨 인사를 그렇게 엄숙하게 해요?"
이어 그녀는 혁련소천의 행동을 흉내내며 괴상한 목소리를 흘려냈 다.
"나는 영호풍이오, 소낭자."
그러더니 배를 움켜쥐며 까르르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호...... 아이 재미있어. 나는 영호풍이오, 소낭자. 까르 르르......."
이때 운학대사가 엄숙한 표정으로 꾸짖듯 말했다.
"이 녀석! 백부의 손님에게 이렇듯 버릇 없이 굴다니......!"
그러자 자하공주는 웃음을 뚝 그쳤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불안한 표정으로 혁련소천을 쳐다보았다.
"영호오빠, 제가 버릇없이 굴어 화났어요?"
혁련소천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오. 조금도 화나지 않았소."
그 말에 자하공주의 안색이 활짝 밝아졌다.
그녀는 운학대사를 향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것 봐요. 영호오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데 백부님은 괜히 야 단이셔?"
"쯧쯧......."
운학대사는 질렸다는 듯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이때 문득 자하공주는 바둑판을 응시하며 손뼉을 탁 쳤다.
"어머! 이제 보니 바둑을 두고 계셨군요?"
운학대사는 짐짓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너 때문에 더 이상 두지 못하겠다."
"피! 제 핑계를 대는 걸 보니 백부님이 지셨군요?"
일순 운학대사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험! 험! 글쎄 그게......."
"호호호...... 말씀 안 해도 알겠어요. 백부님이 지셨던 거예요.
그렇죠?"
운학대사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그래 백부가 졌다. 이제 속이 시원하느냐?"
자하공주는 감탄한 표정으로 혁련소천을 바라보았다.
"어쩜......! 백부님의 바둑 솜씨는 천하가 인정하는 것인 데......."
"허허...... 허나 이 백부는 미처 손도 써 보지 못하고 대패(大 敗)했다. 영호공자의 기예는 이미 신(神)의 경지에 도달해 있단 다."
"그렇군요......!"
자하공주는 연신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자하공주는 두 눈을 야릇하게 빛내며 말했다.
"영호오빠, 그럼 저하고 한 번 둬 볼래요?"
운학대사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만둬라. 이 녀석, 또 궁지에 몰리면 이번에는 영호공자께 떼거 지를 쓸 작정이냐?"
자하공주는 곱게 눈을 흘겼다.
"치! 백부님은 소연이의 바둑 실력이 옛날하고 똑같은 줄 아시나 봐?"
"똑같지 않고 백 배가 늘었어도 영호공자께는 안돼."
자하공주는 야멸차게 내저었다.
"저는 영호공자님의 실력이 그렇게까지 뛰어나다고는 믿을 수 없 어요."
혁련소천은 그녀의 그런 모습에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후후...... 격장지계까지......? 제법 영리한 공주님이시군!'
그렇게 생각한 뒤 그는 짐짓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핫핫...... 좋소. 내 소연 아가씨의 실력을 한 번 견식해 보겠 소."
순식간에 자하공주의 얼굴에 활짝 웃음이 피어났다.
그녀는 양 손을 허리에 턱 걸치며 자못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말했 다.
"거봐요, 백부 스님. 영호오빠는 소연과 한 판 겨뤄 보겠다고 하 잖아요."
운학대사는 짐짓 눈을 부라렸다.
"이 녀석! 백부 스님은 또 뭐냐?"
"킥킥...... 제 실력을 무시한 대가예요."
자하공주는 혓바닥을 낼름 내밀더니 바둑판 앞에 쪼르르 다가와 앉았다.
운학대사는 씁쓸한 고소를 지으며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자하공주, 그녀의 기예는 절대 석대선생이나 운학대사의 아래가 아니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난해하고 장대한 포석(布石)과 행마술(行馬術)을 펼쳐 공세를 퍼부었다.
뿐인가? 그녀는 혁련소천조차도 금세 읽어 낼 수 없는 수를 네 번 이나 놓았다.
'대단하군! 운학대사의 기예가 웅혼하고 장중하다면 이 공주는 칼 날처럼 날카롭고 집요하다!'
그럭저럭 접전을 벌인 지 한 시진이 지나고 드디어 승패가 결정났 다.
결과는 혁련소천의 패(敗)로써 두 집 반의 아주 근소한 차이였다.
"야! 소연이 이겼다!"
자하공주는 기쁨에 겨워 선방 안을 깡충깡충 뛰어다녔다.
운학대사는 그런 모습을 보며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혁련소천이 그녀에게 고의로 져 주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 다.
이때 자하공주는 운학대사의 바로 앞에 폴짝 내려앉았다.
"이제 백부님도 내 아래야. 그렇죠? 영호오빠......."
혁련소천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봐! 영호오빠도 인정하잖아요. 호호호......."
자하공주는 생각할수록 즐거운 듯 연신 짤랑짤랑한 교소를 터뜨렸 다.
운학대사는 문득 탄식같은 불호를 읊조렸다.
"아미타불...... 부처님이 웃으시도다."
자하공주는 교소를 그치고 붉은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피! 부처님이야 언제나 웃는데 뭐?"
"허허허......."
운학대사는 어이가 없어 껄껄 웃기만 했다.
이때 혁련소천의 조용한 음성이 자하공주의 귓전을 울렸다.
"소연 아가씨는 무척 예쁜 팔찌를 차고 있군."
자하공주는 생긋 웃으며 오른손을 쳐들었다.
"이거 말인가요?"
그녀의 팔목엔 금광(金光)이 휘황하게 번쩍이는 금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팔찌의 겉면에는 한 쌍의 봉황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고 두 봉황 사이의 표면은 마치 열쇠 모양으로 양각되어 있었다.
혁련소천의 눈에 언뜻 감탄의 빛이 어렸다.
"무척 귀한 것 같군요."
자하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버님이 제게 선물한 거예요."
"소연의 아버님은 무척 부자이신 모양이지?"
"응, 굉장히 부자예요."
이어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한 번 구경해 볼래요?"
"아니야. 그 귀한 것을 함부로 만질 수는 없지."
"피! 걱정 마세요. 아버님은 이걸 잘 간수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소 연이 보기엔 별로 대단한 물건같지도 않아요."
그러면서 그녀는 대뜸 팔찌를 벗어 혁련소천에게 내던졌다.
"음! 정말 아름답군......!"
혁련소천은 팔찌를 받아 이리저리 살펴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 다.
헌데 그때였다.
혁련소천은 갑자기 뼈를 깎는 듯한 날카로운 예기(銳氣)가 등뒤로 쏘아 오는 것을 느꼈다.
'자하공주를 뒤따른다는 오 인의 비밀 고수......!'
"잘 구경했소."
그는 태연하게 팔찌를 자하공주에게 돌려주었다.
그 순간 등 뒤를 찔러 오던 예기 또한 말끔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 다. 자하공주는 팔찌를 다시 손목에 차며 자랑스런 표정으로 재잘 거렸다.
"우리 집에는 이런 게 많이 있어요."
혁련소천은 낮게 웃었다.
"후후...... 그렇다면 언제 한 번 소연 아가씨의 집에나 놀러 가 볼까?"
"네?"
"왜 곤란하오?"
"그...... 그건......."
자하공주는 당황한 기색으로 일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렸 다.
허나 곧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나......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초청할께요."
알아듣기 힘들 만큼 기어 들어가는 듯한 음성이었다.
허나 혁련소천은 똑똑히 들었다.
'후후...... 황궁으로의 초청이라...... 그것도 괜찮겠군!'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1권 제17장 귀신같은 솜씨-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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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련소천이 대광사를 나선 것은 날이 거의 저물어 갈 무렵이었다.
그는 천천히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후의 하늘은 타는 듯한 노을을 받아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 다.
이때 한 줄기 가느다란 전음성이 그의 귓전으로 들려 왔다.
(한단지마입니다, 대종사.)
(음.)
(어찌 되었습니까?)
(성공이오.)
(흐흐...... 역시 대종사이십니다. 축하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한단지마의 전음은 더 이상 들려 오지 않았다.
혁련소천은 문득 왼손을 슬그머니 펼쳤다.
그의 손바닥에는 네모진 쇳덩어리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생고무보다 부드럽고 무엇이든 달기만 하면 그 자국이 뚜렷이 남 는 이 은형사철(銀型死鐵).......'
혁련소천의 얼굴에 문득 만족스런 미소가 어렸다.
'후후후...... 여기엔 봉화금시의 모양이 뚜렷하게 찍혀 있 다......!'
네모진 쇳덩이, 은형사철의 한 단면을 보라!
거기에는 자하공주의 금빛 팔찌에 새겨져 있는 것과 똑같은 문양 이 선명하게 찍혀 있지 않는가!
대체 어느 순간에 이런 수작(?)을 부렸단 말인가?
알 수도 또한 알 필요도 없다.
봉황금시!
어찌됐든 이 땅에 또 하나의 봉황금시가 괴물의 귀신같은 솜씨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될 뿐이다.
유난히 붉게 타오르는 오늘의 석양이었다.
■ 구천십지제일신마제1권제18장 귀검사랑(鬼劍邪狼) 잔혹한 살수(殺手) ━━━━━━━━━━━━━━━━━━━━━━━━━━━━━━━━━━━
달마저 구름에 가려진 이 밤, 먹물같은 어둠이 삼라만상을 파도처 럼 뒤덮고 있었다.
아름드리 거목(巨木)들이 빽빽하게 들어 찬 수림 속을 한 흑의인 이 걷고 있었다.
전체가 어둠보다 짙은 먹빛 일색의 흑의인, 치렁치렁한 흑발(黑 髮)을 허리까지 늘어뜨렸고 숯덩이와 같은 묵검(墨劍)이 옆구리에 비스듬히 꽂혀 있는...... 그는 바로 혁련소천이 대광사에서 보았 던 흑의인이었다.
흑의인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일정한 보폭의 걸음걸이로 걷고 있었다.
허나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사위로 퍼져 나가는 저 차갑고 무 정(無情)한 기운은 가히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흑의인은 깊고 짙은 어둠 속으로 자꾸만 걸어가고 있었다.
흑의인이 어느 한 거목을 지나치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바람 한 점 분 적이 없거늘 돌연 한 무더기의 낙엽들이 전방에 어 지럽게 휘날리며 떨어져 내렸다.
흑의인은 조용히 걸음을 멈추었다.
전면, 낙엽이 사람으로 변했는가?
어느새 세 줄기의 흐릿한 그림자(影)가 소리없이 나타나 있었다.
죽립을 깊숙이 눌러 쓴 삼 인(三人)의 혈포인(血布人), 그들의 전 신에선 피를 말릴 것 같은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겨 나왔다.
흑의인은 무심한 시선으로 그들을 한 차례 쓸어 본 뒤 다시 걸음 을 떼 놓았다.
이때 한 죽립객의 입에서 살벌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서라, 귀검사랑(鬼劍邪狼)!"
흑의인은 걸음을 멈추고 방금 말한 죽립객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나를 알고 있군."
더없이 짧고 무심한 한 마디의 음성이 흑의인의 입에서 흘러 나왔 다.
그것은 듣는 이에게 섬칫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 다.
허나 예의 죽립객은 태연하고도 메마른 괴소를 발했다.
"흐흐흣...... 천하의 귀검사랑을 모른대서야 말이 안 되지."
귀검사랑이라 불린 흑의인은 무표정하게 입술을 떼었다.
"용건은......?"
"간단히 말해서...... 혈궁천(血穹天)의 일에서 손을 떼라."
혈궁천!
바로 구천십지만마전 휘하의 열아홉 단체 중 하나를 칭함이었다.
귀검사랑은 조용히 말했다.
"쓸데없는 말을 하러 왔군."
"황금 일만 관을 대가로 지불하겠다."
황금 일만 관이라면 웬만한 성(城) 두 개를 사고도 남을 막대한 금액이 아닌가!
문득 귀검사랑의 눈가에 짧은 섬광이 스쳐갔다.
"누구냐? 너희들은......."
"승낙 여부만 대답해라."
"만약...... 거절한다면?"
순간 세 죽립객의 눈에서 소름끼치도록 시퍼런 안광이 뻗쳐 나왔 다.
뒤이어 예의 앞에 말한 죽립객이 살기 진득한 음성을 내뱉었다.
"죽인다. 너와 네가 거느린 백 마리의 늑대까지 모조리......!"
돌연 귀검사랑의 입가에 한 가닥 비릿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후후후...... 나의 사랑대(邪狼隊)는 피를 두려워하지 않지."
"결정한 것인가?"
"바보구나. 너는 똑같은 대답을 두 번 들으려 하다니."
"죽여라!"
순간 냉혹한 일갈과 함께 세 죽립객의 신형이 허공으로 번쩍 솟구 쳤다.
아니, 솟구쳤다 싶은 순간 이미 그들의 소매 속에서는 끝이 세 갈 래로 갈라진 기형도(奇形刀)가 빠져 나왔고, 빠져 나왔다고 느낀 순간 그것들은 이미 귀검사랑의 몸을 품자(品字) 형으로 쑤셔 가 고 있었다.
지독한 빠름이었다.
순간 위급함에도 아랑곳없이 귀검사랑은 흰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그러나 귀검사랑의 그 웃음은 너무나 서럽도록 창백하여 가슴이 찡할 정도였다.
츄아아아앗......!
찰나, 세 줄기 묵광이 귀검사랑의 옆구리를 떠나 유성(流星)처럼 공간을 내찢었다.
까까깡...... 깡......!
동시에 치떨리는 금속성과 함께 시퍼런 불꽃이 허공을 가득 뒤덮 었다.
"억!"
"이런......!"
세 죽립객들은 졸지에 자신들의 기형도가 두동강으로 끊어진 것을 보았다.
헌데 바로 그 순간 세 죽립객은 또 보았다.
묵섬(墨閃)!
시꺼먼 번갯불이 자신들의 몸을 환상처럼 뒤덮어 오는 것 을......!
미처 어찌 해볼 생각도 하기 전에 그들은 허공 중에 떠 있는 자신 들의 몸이 무척 가벼워졌다고 느꼈다.
어지럽게 떠오르는 여섯 개의 팔과 여섯 개의 다리!
어둠 속을 수놓은 선렬한 피보라!
"악!"
"으― 아!"
폐부를 도려내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 다.
찰나, 비명을 내지르던 죽립객들의 머리통조차 몸뚱이를 떠나 일 제히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때를 같이 해서 귀검사랑이 옆구리의 장검에서 손을 떼는 것이 보 였다.
언제 그가 검을 뽑았던가?
쾌(快)!
대체 이런 빠름을 무슨 말로 형용해야 되는 것인가?
팔과 다리, 몸뚱이와 머리통이 그제야 순서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숨막힐 듯한 정적이 그 자리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귀검사랑은 극히 무정한 눈길로 아래를 쳐다보았다.
눈을 허옇게 까뒤집은 머리통 하나가 그의 발 밑을 구르고 있었 다.
순간 귀검사랑의 입에서 무감동한 중얼거림이 흘러 나왔다.
"생사천(生死天)의 밥버러지들이었군......."
그러면서 그는 머리통을 지그시 발로 밟았다.
산산이 으깨어지는 소리는 참으로 끔찍했다.
허나 정작 그 일을 하고 있는 귀검사랑의 얼굴은 무서우리만큼 무 표정했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발을 떼며 고개를 바로했다.
다음 순간 귀검사랑의 몸이 갑자기 우측의 한 거목을 향해 전광 (電光)처럼 날아갔다.
동시에 그의 묵검이 형용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검집을 벗어났 다.
번개빛과 함께 묵광은 거목을 풀잎처럼 가르며 곧장 뻗쳐 나갔다.
허나 묵광은 거목의 뒤쪽에서 한 자를 더 뻗어 나가지 못하고 우 뚝 정지했다.
한 절색의 홍의 소녀가 나무 뒤에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그 소녀는 바로 연지마를 타고 대광사로 미친 듯이 질주해 갔던 소녀였다.
귀검사랑의 묵검은 그녀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두려움인가? 아니면 또 다른 격정 때문인가......?
그녀의 전신은 눈에 뜨일 만큼 거센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귀검사랑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리며 한 마디 내뱉었다.
"이제 보니...... 너였군."
홍의 소녀는 그를 똑바로 쏘아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잔인한...... 사람!"
귀검사랑은 예의 무심냉막한 표정을 되찾으며 조용히 말했다.
"나는...... 피를 사랑한다."
"무서운 사람!"
"나는 죽음을 사랑한다."
홍의 소녀는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깨물었다.
"당신...... 언젠가는 비참한 말로에 처할 날이 있을 거예요!"
"그럴 수도 있겠지. 허나...... 아마 내게 그런 날은 찾아오지 않 을 것이다."
순간 홍의 소녀의 눈빛이 시퍼렇게 불타 올랐다.
"당신...... 언니를 왜 죽였나요?"
"그녀가 먼저 나를 공격했어."
"언니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나는 사랑을 증오한다."
"악마......!"
새하얗게 질린 그녀의 뺨에 구슬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명심해라, 홍연(紅燕). 또다시 내 비위를 거스르면 너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말에 홍의 소녀 홍연의 눈에서 시퍼런 불꽃이 튀겼다.
그녀는 전신을 부르르 떨며 미친 듯이 악을 썼다.
"죽여라! 죽여! 이 악마......."
허나 그녀는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목덜미에 닿아 있던 묵검이 그녀의 왼쪽 뺨으로 옮겨지면서 긴 검 흔(劍痕)을 그렸기 때문이다.
홍연은 사색이 되어 황급히 왼쪽 뺨을 만졌다.
순간 따뜻하고 진득한 핏물이 손바닥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귀검사랑은 묵검을 거두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날 밤...... 한 차례의 인연 때문에 이 정도로 그친다."
귀검사랑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홍연의 얼굴은 일순 처절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애처러울 만큼 전신을 부들부들 떨더니 돌연 발악적인 흉 소를 터뜨렸다.
"오호호호홋...... 호호호홋......!"
피를 토하는가?
하늘을 울릴 듯 한(恨) 서린 흉소가 어둠 속으로 미친 듯이 퍼져 나갔다.
그녀는 흉소를 멎고 귀검사랑의 등 뒤를 쏘아보며 절규하듯 말했 다.
"기억해라! 나 홍연...... 이 순간부터 너를 증오하리라!"
새파란 독기를 뿜어내는 홍연의 그 눈빛!
"죽이리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리라! 너를 죽일 수 있다 면...... 네놈을 지옥검화 속에 처넣을 수만 있다면...... 내 영 혼이 갈가리 찢어져도 그렇게 할 것이다!"
죽음을 노리는 여인의 저주!
허나 귀검사랑은 아무런 대꾸 없이 묵묵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 고 있었다.
그것을 쏘아보는 홍연의 눈에서는 무서운 광기(狂氣)가 이글거렸 다.
한순간 그녀는 전신을 흔들며 미친 듯한 흉소를 터뜨렸다.
"오호호호홋...... 죽이리라! 내 너를 죽이지 못한다면 하늘마저 거역하리라! 호호호홋......."
통곡보다 더 서러운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는 어둠 속을 미친 듯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둠은 이내 그녀의 애처로운 모습을 삼켜 버렸다.
서럽도록 처절한 그 한(恨)마저도......
여인이 한(恨)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찬서리가 내린다고 했다.
허나, 모르리라!
이 한 여인의 한(恨)! 이것이 훗날 얼마나 큰 비극(悲劇)을 잉태 시킬 것인가를!
홍연(紅燕), 기억해야 될 이름이다.
이때 홍연이 서 있던 그 자리에 한 인영이 흡사 유령처럼 나타났 다.
바로 혁련소천이었다.
그는 귀검사랑이 사라져 간 방향을 한동안 또렷이 응시하더니 문 득 눈 앞의 거목을 슬쩍 떼밀었다.
그러자 아름드리 거목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앞으로 베어져 넘어 갔다.
거목은 귀검사랑의 묵검이 스쳐 갔을 때 이미 베어져 있었던 것이 다.
"틀림없구나. 저 자의 검법...... 이백 년 전 무림의 공적으로 몰 려 죽은 지옥도(地獄島)의 도주(島主) 지옥마제(地獄魔帝)의 지옥 사검(地獄死劍)이다!"
베어져 나간 거목의 단면을 응시하던 혁련소천의 얼굴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만마전 구천(九天) 중의 혈궁천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생사천의 고수들을 살해한 저 사나이......."
그는 가늘게 눈살을 찌푸렸다.
"한단지마는 저 자가 운학대사와 대화하는 것을 언뜻 보았다고 했 다. 그렇다면 운학대사와도 잘 알고 지내는 사이란 말인 데......?"
득도한 고승 운학대사와 무정한 검수(劍手) 귀검사랑!
혁련소천은 그 두 사람을 묶어 여러 가지 가능성을 추측해 보았 다.
허나 그가 얻어낼 수 있는 결론은 아무 것도 없었다.
"왠지 심상치가 않다."
막연히 그렇게만 느낄 뿐이었다.
문득 그는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며 씁쓸한 고소를 지었다.
"이 괴물의 머리도 점점 돌(石)을 닮아 가는 모양이군."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마치 공기가 흩어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 다.
기다렸다는 듯 피비린내를 실은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베어 넘어 간 거목 주위를 공허하게 맴돌았다.
심상치 않은 밤(夜)이었다.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1권 제19장 천추무상별부(千秋武相別府)-1 ━━━━━━━━━━━━━━━━━━━━━━━━━━━━━━━━━━━
자금성(紫禁城).
천하주인(天下主人)인 대명천자(大明天子)가 기거하는 황궁(皇 宮), 그 규모의 방대함과 화려함 등은 극(極)을 넘어 단연 천하의 으뜸이다.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가?
유난히 고요하고 적막한 밤이었다.
이곳은 자금성에서 약간 떨어진 한 객점(客店)으로 칠흑같은 어둠 이 객점 전체를 무섭게 짓누르고 있었다.
헌데 유독 이 층의 방만은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탁자 위의 굵은 촉불이 촛농을 뚝뚝 떨어뜨리며 신나게 타오르고 있었다.
탁자 옆엔 백옥 덩이를 깎아 빚은 듯한 절세미소년이 뒷짐을 진 채 타오르는 황촉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혁련소천은 파랗게 피어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리고 있었다.
' 천곡의 말에 의하면...... 홍포구마성 반태서(盤太瑞)는 황궁에 서의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내가 황궁무고로 들어가는 데 일말의 허점도 없게 한다고 했다!'
문득 그의 두 눈이 불빛으로 가득 채워졌다.
' 포구마성...... 과거 혁련소야가 손꼽은 지자(智者) 중의 한 명 이며 홍의교(紅衣敎)의 교주! 추악한 모습에 꼽추이나 삼국 시대 (三國時代)의 봉추선생을 무색케 할 만큼 대단한 두뇌(頭腦)의 소 유자라고 들었다!'
그의 입가에 문득 괴이한 미소가 감돌았다.
' 후후...... 궁금하군. 무공의 무(武)자도 모르는 줄 아는 나를 어떤 방법으로 황궁무고에 잠입시킬지.......'
혁련소천은 손 하나 까딱 않고 누워서 떡먹기를 기다리는 중이었 다.
이때 날카롭고 짤막한 한 소리 파공성이 일어났다.
동시에 한 장의 종이가 탁자 위에 깊숙이 쑤셔 박혔다.
'드디어......!'
혁련소천은 눈을 빛내며 선뜻 종이를 집어 가다 돌연 동작을 멈췄 다.
'아니지! 나는 무공의 무자도 모르는 책버러지이니까.......'
그는 빠르게 염두를 굴린 후 자못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이 단단한 나무에 종이가 꽂히다니......."
그러면서 그는 힘들게 종이를 뽑아 들었다.
종이에는 급하게 쓴 듯한 필치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시간은 자시(子時)를 알리는 북소리가 난 후부터 축시(丑時)까 지!
방향은 열두 개의 후문 중 자경문을 택하시오.
그곳에서 태화루를 돌아 십삼중문(十三中門)을 거쳐 곧장 가면 황 궁무고에 당도하게 될 것이오.
황궁무고 내의 모든 기관 장치는 정지되어 있고 십팔중천문(十八 中天門) 또한 모두 열려 있으니 안심하시오.
무고(武庫)에 당도하면 아홉 개의 석문(石門)이 있으니 그 중 건 문을 택해 봉황금시를 사용하시오.
천겁현오밀경이 그 안에 있을 것이오만 정확한 위치는 알아내지 못했소.
그곳을 나오는 시기는 반드시 사흘 후 자시(子時)를 택하시오.
그럼 행운이 함께 하길......!
홍포구마성 반태서.>
혁련소천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만약 이 서찰대로 아무런 저지 없이 황궁무고에 잠입할 수 있다 면......!'
그의 눈썹이 일순 묘하게 꿈틀거렸다.
'홍포구마성...... 이 자의 능력이야말로 무서운 것이다......!'
혁련소천은 두 눈을 야릇하게 빛내며 서찰을 황촉불에 가져갔다.
서찰이 재로 변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구천십지제일신마제1권제18장 귀검사랑(鬼劍邪狼) 잔혹한 살수(殺手) ━━━━━━━━━━━━━━━━━━━━━━━━━━━━━━━━━━━
달마저 구름에 가려진 이 밤, 먹물같은 어둠이 삼라만상을 파도처 럼 뒤덮고 있었다.
아름드리 거목(巨木)들이 빽빽하게 들어 찬 수림 속을 한 흑의인 이 걷고 있었다.
전체가 어둠보다 짙은 먹빛 일색의 흑의인, 치렁치렁한 흑발(黑 髮)을 허리까지 늘어뜨렸고 숯덩이와 같은 묵검(墨劍)이 옆구리에 비스듬히 꽂혀 있는...... 그는 바로 혁련소천이 대광사에서 보았 던 흑의인이었다.
흑의인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일정한 보폭의 걸음걸이로 걷고 있었다.
허나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사위로 퍼져 나가는 저 차갑고 무 정(無情)한 기운은 가히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흑의인은 깊고 짙은 어둠 속으로 자꾸만 걸어가고 있었다.
흑의인이 어느 한 거목을 지나치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바람 한 점 분 적이 없거늘 돌연 한 무더기의 낙엽들이 전방에 어 지럽게 휘날리며 떨어져 내렸다.
흑의인은 조용히 걸음을 멈추었다.
전면, 낙엽이 사람으로 변했는가?
어느새 세 줄기의 흐릿한 그림자(影)가 소리없이 나타나 있었다.
죽립을 깊숙이 눌러 쓴 삼 인(三人)의 혈포인(血布人), 그들의 전 신에선 피를 말릴 것 같은 죽음의 냄새가 물씬 풍겨 나왔다.
흑의인은 무심한 시선으로 그들을 한 차례 쓸어 본 뒤 다시 걸음 을 떼 놓았다.
이때 한 죽립객의 입에서 살벌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서라, 귀검사랑(鬼劍邪狼)!"
흑의인은 걸음을 멈추고 방금 말한 죽립객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나를 알고 있군."
더없이 짧고 무심한 한 마디의 음성이 흑의인의 입에서 흘러 나왔 다.
그것은 듣는 이에게 섬칫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 다.
허나 예의 죽립객은 태연하고도 메마른 괴소를 발했다.
"흐흐흣...... 천하의 귀검사랑을 모른대서야 말이 안 되지."
귀검사랑이라 불린 흑의인은 무표정하게 입술을 떼었다.
"용건은......?"
"간단히 말해서...... 혈궁천(血穹天)의 일에서 손을 떼라."
혈궁천!
바로 구천십지만마전 휘하의 열아홉 단체 중 하나를 칭함이었다.
귀검사랑은 조용히 말했다.
"쓸데없는 말을 하러 왔군."
"황금 일만 관을 대가로 지불하겠다."
황금 일만 관이라면 웬만한 성(城) 두 개를 사고도 남을 막대한 금액이 아닌가!
문득 귀검사랑의 눈가에 짧은 섬광이 스쳐갔다.
"누구냐? 너희들은......."
"승낙 여부만 대답해라."
"만약...... 거절한다면?"
순간 세 죽립객의 눈에서 소름끼치도록 시퍼런 안광이 뻗쳐 나왔 다.
뒤이어 예의 앞에 말한 죽립객이 살기 진득한 음성을 내뱉었다.
"죽인다. 너와 네가 거느린 백 마리의 늑대까지 모조리......!"
돌연 귀검사랑의 입가에 한 가닥 비릿한 미소가 머금어졌다.
"후후후...... 나의 사랑대(邪狼隊)는 피를 두려워하지 않지."
"결정한 것인가?"
"바보구나. 너는 똑같은 대답을 두 번 들으려 하다니."
"죽여라!"
순간 냉혹한 일갈과 함께 세 죽립객의 신형이 허공으로 번쩍 솟구 쳤다.
아니, 솟구쳤다 싶은 순간 이미 그들의 소매 속에서는 끝이 세 갈 래로 갈라진 기형도(奇形刀)가 빠져 나왔고, 빠져 나왔다고 느낀 순간 그것들은 이미 귀검사랑의 몸을 품자(品字) 형으로 쑤셔 가 고 있었다.
지독한 빠름이었다.
순간 위급함에도 아랑곳없이 귀검사랑은 흰 이를 드러내며 싱긋 웃었다.
그러나 귀검사랑의 그 웃음은 너무나 서럽도록 창백하여 가슴이 찡할 정도였다.
츄아아아앗......!
찰나, 세 줄기 묵광이 귀검사랑의 옆구리를 떠나 유성(流星)처럼 공간을 내찢었다.
까까깡...... 깡......!
동시에 치떨리는 금속성과 함께 시퍼런 불꽃이 허공을 가득 뒤덮 었다.
"억!"
"이런......!"
세 죽립객들은 졸지에 자신들의 기형도가 두동강으로 끊어진 것을 보았다.
헌데 바로 그 순간 세 죽립객은 또 보았다.
묵섬(墨閃)!
시꺼먼 번갯불이 자신들의 몸을 환상처럼 뒤덮어 오는 것 을......!
미처 어찌 해볼 생각도 하기 전에 그들은 허공 중에 떠 있는 자신 들의 몸이 무척 가벼워졌다고 느꼈다.
어지럽게 떠오르는 여섯 개의 팔과 여섯 개의 다리!
어둠 속을 수놓은 선렬한 피보라!
"악!"
"으― 아!"
폐부를 도려내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그 다음 순간이었 다.
찰나, 비명을 내지르던 죽립객들의 머리통조차 몸뚱이를 떠나 일 제히 허공에 둥실 떠올랐다.
때를 같이 해서 귀검사랑이 옆구리의 장검에서 손을 떼는 것이 보 였다.
언제 그가 검을 뽑았던가?
쾌(快)!
대체 이런 빠름을 무슨 말로 형용해야 되는 것인가?
팔과 다리, 몸뚱이와 머리통이 그제야 순서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숨막힐 듯한 정적이 그 자리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귀검사랑은 극히 무정한 눈길로 아래를 쳐다보았다.
눈을 허옇게 까뒤집은 머리통 하나가 그의 발 밑을 구르고 있었 다.
순간 귀검사랑의 입에서 무감동한 중얼거림이 흘러 나왔다.
"생사천(生死天)의 밥버러지들이었군......."
그러면서 그는 머리통을 지그시 발로 밟았다.
산산이 으깨어지는 소리는 참으로 끔찍했다.
허나 정작 그 일을 하고 있는 귀검사랑의 얼굴은 무서우리만큼 무 표정했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발을 떼며 고개를 바로했다.
다음 순간 귀검사랑의 몸이 갑자기 우측의 한 거목을 향해 전광 (電光)처럼 날아갔다.
동시에 그의 묵검이 형용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검집을 벗어났 다.
번개빛과 함께 묵광은 거목을 풀잎처럼 가르며 곧장 뻗쳐 나갔다.
허나 묵광은 거목의 뒤쪽에서 한 자를 더 뻗어 나가지 못하고 우 뚝 정지했다.
한 절색의 홍의 소녀가 나무 뒤에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그 소녀는 바로 연지마를 타고 대광사로 미친 듯이 질주해 갔던 소녀였다.
귀검사랑의 묵검은 그녀의 목덜미에 닿아 있었다.
두려움인가? 아니면 또 다른 격정 때문인가......?
그녀의 전신은 눈에 뜨일 만큼 거센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귀검사랑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리며 한 마디 내뱉었다.
"이제 보니...... 너였군."
홍의 소녀는 그를 똑바로 쏘아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잔인한...... 사람!"
귀검사랑은 예의 무심냉막한 표정을 되찾으며 조용히 말했다.
"나는...... 피를 사랑한다."
"무서운 사람!"
"나는 죽음을 사랑한다."
홍의 소녀는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깨물었다.
"당신...... 언젠가는 비참한 말로에 처할 날이 있을 거예요!"
"그럴 수도 있겠지. 허나...... 아마 내게 그런 날은 찾아오지 않 을 것이다."
순간 홍의 소녀의 눈빛이 시퍼렇게 불타 올랐다.
"당신...... 언니를 왜 죽였나요?"
"그녀가 먼저 나를 공격했어."
"언니는 당신을 사랑했어요!"
"나는 사랑을 증오한다."
"악마......!"
새하얗게 질린 그녀의 뺨에 구슬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명심해라, 홍연(紅燕). 또다시 내 비위를 거스르면 너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말에 홍의 소녀 홍연의 눈에서 시퍼런 불꽃이 튀겼다.
그녀는 전신을 부르르 떨며 미친 듯이 악을 썼다.
"죽여라! 죽여! 이 악마......."
허나 그녀는 말을 채 끝내지 못했다.
목덜미에 닿아 있던 묵검이 그녀의 왼쪽 뺨으로 옮겨지면서 긴 검 흔(劍痕)을 그렸기 때문이다.
홍연은 사색이 되어 황급히 왼쪽 뺨을 만졌다.
순간 따뜻하고 진득한 핏물이 손바닥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귀검사랑은 묵검을 거두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날 밤...... 한 차례의 인연 때문에 이 정도로 그친다."
귀검사랑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홍연의 얼굴은 일순 처절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애처러울 만큼 전신을 부들부들 떨더니 돌연 발악적인 흉 소를 터뜨렸다.
"오호호호홋...... 호호호홋......!"
피를 토하는가?
하늘을 울릴 듯 한(恨) 서린 흉소가 어둠 속으로 미친 듯이 퍼져 나갔다.
그녀는 흉소를 멎고 귀검사랑의 등 뒤를 쏘아보며 절규하듯 말했 다.
"기억해라! 나 홍연...... 이 순간부터 너를 증오하리라!"
새파란 독기를 뿜어내는 홍연의 그 눈빛!
"죽이리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리라! 너를 죽일 수 있다 면...... 네놈을 지옥검화 속에 처넣을 수만 있다면...... 내 영 혼이 갈가리 찢어져도 그렇게 할 것이다!"
죽음을 노리는 여인의 저주!
허나 귀검사랑은 아무런 대꾸 없이 묵묵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 고 있었다.
그것을 쏘아보는 홍연의 눈에서는 무서운 광기(狂氣)가 이글거렸 다.
한순간 그녀는 전신을 흔들며 미친 듯한 흉소를 터뜨렸다.
"오호호호홋...... 죽이리라! 내 너를 죽이지 못한다면 하늘마저 거역하리라! 호호호홋......."
통곡보다 더 서러운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는 어둠 속을 미친 듯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둠은 이내 그녀의 애처로운 모습을 삼켜 버렸다.
서럽도록 처절한 그 한(恨)마저도......
여인이 한(恨)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찬서리가 내린다고 했다.
허나, 모르리라!
이 한 여인의 한(恨)! 이것이 훗날 얼마나 큰 비극(悲劇)을 잉태 시킬 것인가를!
홍연(紅燕), 기억해야 될 이름이다.
이때 홍연이 서 있던 그 자리에 한 인영이 흡사 유령처럼 나타났 다.
바로 혁련소천이었다.
그는 귀검사랑이 사라져 간 방향을 한동안 또렷이 응시하더니 문 득 눈 앞의 거목을 슬쩍 떼밀었다.
그러자 아름드리 거목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앞으로 베어져 넘어 갔다.
거목은 귀검사랑의 묵검이 스쳐 갔을 때 이미 베어져 있었던 것이 다.
"틀림없구나. 저 자의 검법...... 이백 년 전 무림의 공적으로 몰 려 죽은 지옥도(地獄島)의 도주(島主) 지옥마제(地獄魔帝)의 지옥 사검(地獄死劍)이다!"
베어져 나간 거목의 단면을 응시하던 혁련소천의 얼굴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만마전 구천(九天) 중의 혈궁천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생사천의 고수들을 살해한 저 사나이......."
그는 가늘게 눈살을 찌푸렸다.
"한단지마는 저 자가 운학대사와 대화하는 것을 언뜻 보았다고 했 다. 그렇다면 운학대사와도 잘 알고 지내는 사이란 말인 데......?"
득도한 고승 운학대사와 무정한 검수(劍手) 귀검사랑!
혁련소천은 그 두 사람을 묶어 여러 가지 가능성을 추측해 보았 다.
허나 그가 얻어낼 수 있는 결론은 아무 것도 없었다.
"왠지 심상치가 않다."
막연히 그렇게만 느낄 뿐이었다.
문득 그는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치며 씁쓸한 고소를 지었다.
"이 괴물의 머리도 점점 돌(石)을 닮아 가는 모양이군."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은 마치 공기가 흩어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졌 다.
기다렸다는 듯 피비린내를 실은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베어 넘어 간 거목 주위를 공허하게 맴돌았다.
심상치 않은 밤(夜)이었다.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1권 제19장 천추무상별부(千秋武相別府)-2 ━━━━━━━━━━━━━━━━━━━━━━━━━━━━━━━━━━━
이건 확실히 괴변 중의 괴변이었다.
천라지망(天羅之網)의 철통같은 경계망을 자랑하는 황궁(皇宮)이 요, 쥐벼룩 한 마리의 통과조차 허용치 않는 황궁호위무사(皇宮護 衛武士)들이 아니었던가?
헌데 오늘은 허허벌판도 이런 벌판이 없었다.
도무지 거칠 것이 없었다.
술시(戌時)가 되면 물샐틈 없이 봉쇄되는 자경문이 자시가 넘어도 활짝 열려 있는가 하면, 태화루를 거쳐 십이중문을 모조리 통과할 때까지 단 한 명의 호위 무사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실로 괴변 중의 괴변이 아니겠는가?
황궁 깊숙한 곳에 위치한 밀전(密殿)의 밤은 유난히 적막하다.
혁련소천은 한 채의 웅장 거대한 전각 앞에 당도해 있었다.
그는 담담한 눈길로 전각 입구에 걸린 편액을 쳐다보았다.
<천추무상별부(千秋武相別府).>
금세라도 살아 꿈틀거릴 듯한 용비봉무(龍飛鳳無)의 웅휘한 필치!
아아! 바로 황궁무고의 또 다른 별칭임을 뉘라서 모르겠는가?
'황궁무고...... 이곳에는 늘 금위부의 고수 이십 인(二十人)이 지키고 있다고 들었거늘.......'
혁련소천은 천천히 주위를 훑어보았다.
대내 일급 고수 일백 명으로 구성된 황실 친위대(皇室親衛隊)로 서, 황족(皇族)이나 왕가(王家)의 친족들을 죽음으로써 호위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그러한 그들이 무려 이십 명이나 호위를 한다면 대내에서 천추무 상별부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이 얼마나 큰 것인가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헌데 어찌된 판인지 오늘은 혁련소천이라는 외인(外人)이 천추무 상별부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한 명의 금위부 무사도 보이지 않았 다.
괴변의 연속이었다.
십팔중천문(十八中天門).
황궁무고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죽음의 관문!
그 관문 하나 하나에 어떠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아는 무림인 은 아무도 없었다.
무림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은 오직 하나, 지난 이백 년 동안 도합 구십칠 명(九十七名)의 초강고수가 황궁무고에 잠입했으나 살아 나온 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 뿐이었다.
헌데 혁련소천 그는 그 죽음의 관문이라는 십팔중천문마저도 그저 일사천리로 통과해 버렸다.
마치 제집 안방을 거닐 듯 그렇게 유유히......!
'홍포구마성의 능력이 제아무리 뛰어나도 도무지 이럴 수는 없 다!'
십팔중천문을 모두 통과한 후 혁련소천이 떠올린 첫번째 생각이었 다.
'내가 알기로...... 황궁의 경계를 풀기 위해선 반드시 금위부 대 영반의 명령이 있어야 한다!'
혁련소천은 문득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렇다면...... 설마 금위부 대영반이 홍포구마성과 어떤 관계 를......?'
그런 생각과 함께 또 다른 추측이 뇌리를 스쳐 갔다.
'혹시 감천곡이 오늘같은 날을 위해 금위부 대영반을 미리 포섭해 놓았던 것은 아닐까?'
모두 그럴 듯한 추측이었다.
혁련소천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찬찬히 주위를 살펴보았 다.
지금 그가 서 있는 곳은 원형을 이룬 하나의 거대한 석실 안이었 다.
둥근 석벽에는 도합 아홉 개의 석문이 있었다.
혁련소천은 맨 오른쪽 석문에 시선을 멎으며 두 눈을 이채롭게 빛 냈다.
<건문(乾門).>
석문에는 지력으로 그렇게 새겨져 있었다.
또한 석문의 중앙에는 열쇠 모양의 문형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 다.
'바로 저곳이군!'
혁련소천은 건문 앞에 다가섰다.
이어 은형사철로 만든 또 하나의 봉황금시를 석문 중앙에 맞춰 보 았다.
순간 육중한 굉음이 일며 석문이 양쪽으로 쫙 갈라졌다.
그곳은 그야말로 엄청난 크기의 서고였다.
사방의 벽면에는 작게 잡아도 백 개는 됨짓한 서가(書架)가 들어 서 있었고, 각 서가마다는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만큼 엄청난 분량 의 책자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
'마치 온 천하의 책이란 책은 모두 수집해 놓은 것 같구 나......!'
혁련소천은 경악과 함께 전신의 힘이 쭉 빠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숫자만 세는 데도 하루종일 걸리겠다. 여기서 무슨 재주로 천겁 현오밀경을 찾아낸단 말인가?'
그의 입에서 절로 묵직한 한숨이 흘러 나왔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최소한 내가 만마전에서 활동 하기 위해선 일곱 노야의 무공의 다른 것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방도가 있을 것이다. 우직하게 이것을 모두 뒤진다면 절대 찾지 못할 것이다. 주어진 시간은 단 삼 일(三日)뿐이니 까.......'
그는 문득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어 두 눈을 감으며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철겁현오밀경...... 천이백 년 전 서하국의 국왕에게 전해 내려 온 비전무학...... 서하국 멸망 이후 떠돌아다니다가 황궁무고로 흘러 들어온 것은 불과 이백 년 전.......'
그는 눈썹을 모았다.
'천겁현오밀경...... 분명히 범어(梵語)로 돼있을 것이다. 그리 고...... 천이백 년 전이면 종이가 없었을 테니 양피지나 죽편(竹 片) 따위에 쓰여져 있을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그의 뇌리에 문득 천기개천 사사무의 말이 떠올랐다.
― 그 서하국의 돌대가리 국왕들은 천겁현오밀경을 고작 선심 단 련 하는 데만 사용했지. 그러면서 주제에 그것의 분실이나 남이 보는 것을 두려워해서 남이 모르는 방법으로 천겁현오밀경을 보존 했단다. 때문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설사 그것을 다른 사람이 얻 어도 절대 해독할 수 없다고 한다!
― 아마 천겁현오밀경은 황궁무고로 들어간 모양이다만 아무도 그 것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설사 얻었다 해도 비밀을 풀 수 없을 테니 얻지 못한 것과 진배없지. 클클...... 허나 이 사사무 어른이라면 코딱지 한쪽 뽑아 내기 전에 간단히 해독할 자신이 있 다!
'만약 내가 서하국의 국왕이었다면......?'
혁련소천은 눈을 떴다.
'특수한 약물을 쓴다......?'
그는 고개를 이내 내둘렀다.
'안 된다. 볼 때마다 다시 약물을 써야 하는 번거로움이 귀찮을 테니까.......'
그는 은근히 짜증이 났다.
'빌어먹을...... 아무 것도 아닌 무공비급 하나가 이 혁련소천의 머리를 이토록 어지럽히다니.......'
그는 벌떡 일어났다.
이어 천천히 거닐며 서가를 두루 살펴보기 시작했다.
각 서가는 대단히 희귀한 무공비급들이 유(儒), 불(佛), 선(仙), 도(道), 속(俗) 및 유파(流派)별로 분리되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또한 각 서가에는 서가명(書架名)을 적은 팻말이 각각 하나씩 붙 어 있었다.
'쯧쯧! 정말 아깝군. 이 출중한 무공들을 이렇게 썩히다 니.......'
혁련소천은 각 서가를 둘러보며 내심 탄식을 금치 못했다.
'만약...... 이것들 중 삼분지 일만 풀어놔도 천하의 무학수준이 크게 달라질.......'
내심 중얼거리다가 말고 돌연 그의 눈빛이 기이하게 변했다.
우측의 여덟 번째 서가, 거기에 붙어 있는 팻말이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천축오지무전서가(天竺奧地武典書架).>
'이곳의 서가가 천축 무공......?'
그는 서가 전체를 쭉 훑어보았다.
어림 잡아 일만 권은 됨짓했다.
'여기서 종이로 된 책자를 뺀다면......?'
혁련소천의 시선이 전체를 빠르게 훑었다.
'남는 것은 천여 권 정도! 이렇게 되면 의외로 쉬워진다!'
문득 그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어렸다.
'사흘...... 천여 권의 책자를 모두 읽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이어 혁련소천은 맨 상단에서 양피지와 죽편으로 된 책자만 뽑아 살피기 시작했다.
책장이 넘어가는 속도는 무섭게 빨랐다.
그는 마치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장의 수를 세고 있는 것 같았 다.
허나, 뉘라서 상상이나 하겠는가?
지금 눈으로 스치는 책자의 내용이 모조리 혁련소천의 뇌리에 새 겨지고 있음을.
심천독경광상술(心天讀經廣想術)!
책을 눈이 아닌 마음으로 읽는다는 천기개천 사사무만의 독문비공 (獨門秘功), 바로 그것이 혁련소천에 의해 재현되고 있는 것이었 다.
어느새 이틀이 지났다.
혁련소천은 점차 초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지막 한 권만 남기고 모두 읽었어도 천겁현오밀경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거...... 헛다리만 짚다가 끝나는 게 아닐까?'
혁련소천은 눈살을 찌푸리며 맨 하단 구석에 꽂힌 마지막 한 권을 쳐다보았다.
그것은 두께가 거의 한 자에 가까운 가장 두꺼운 책이었다.
'속 썩이는군. 겉모양을 보니 천겁현오밀경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 참은 멀겠다!'
허나 혁련소천은 드디어 그 책을 뽑았다.
<천방옥요비전결람(天房玉要秘傳訣覽).>
겉장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이거...... 혹시?'
혁련소천은 언뜻 이상한 예감을 느끼며 서둘러 첫 장을 넘겼다.
아니나 다를까?
책장엔 전라(全裸)의 남녀가 묘한 자세로 뒤엉켜 있는 춘화도(春 花圖)가 그려져 있지 않은가?
'비...... 빌어먹을......!'
혁련소천은 절망감을 느끼면 빠르게 다음 장을 넘겨 보았다.
장이 넘어갈수록 점점 더 진한 내용의 그림이 혁련소천의 눈을 아 프게 자극시켰다.
천방옥요비전결람, 그것은 한 마디로 천축에 전해 내려오는 모든 방중비술(房中秘術)이 기록된 희대의 음서(淫書)였던 것이다.
마지막 장을 덮는 혁련소천은 전신의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천겁현오밀경...... 과연 황궁무고에 있긴 있는 것일까?'
불현듯 그런 의구심마저 치솟았다.
허나 그는 이내 탄식했다.
'틀렸어......! 설령 있다고 해도 이젠 찾을 시간이 없다. 남은 시간은 겨우 하루뿐이거늘.......'
혁련소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천방옥요비전결람을 원래의 자리에 가져갔다.
이어 막 꽂으려는 순간 돌연 혁련소천은 멈칫하며 코 끝을 괴이하 게 씰룩였다.
천방옥요비전결람에서 문득 기이한 향기가 풍겨 나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이 냄새...... 분명히 사라용뇌향(沙羅龍腦香)!'
문득 그의 눈에서 한 줄기 기광이 흘러 나왔다.
'가뢰산...... 분명히 서하국의 영토 내에 있던 산이다! 또한 서 하국에서는 사라용뇌향으로 책이나 왕족의 시체가 부패되는 것을 방지했다고 들었다!'
그 말을 했던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천기개천 사사무였다.
혁련소천은 천방옥요비전결람을 두 손으로 힘껏 쥐었다.
'바로 이거다! 분명히 이 책에 문제가 있다!'
그는 문득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어 그는 천방옥요비전결람의 겉장에서 마지막 장까지 손끝으로 조심스럽게 만져 보았다.
'책 자체에는 어떤 문제도 없다. 그렇다면......?'
그는 눈을 감았다.
이어 책자에 적혀 있는 글자를 모조리 되뇌기 시작했다.
혁련소천이 감았던 눈을 번쩍 뜬 것은 그로부터 꼭 두 시진이 지 나서였다.
'몰랐다!'
문득 그의 입언저리에 신비스런 미소가 배어 나왔다.
"후후후...... 설마하니 서하국의 국왕들은 이렇게 기묘한 방법을 사용했을 줄이야......!"
혁련소천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괴이한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 다.
"천방옥요비전결람...... 그 첫 머리 글자는 곧 천(天)!"
천(天)!
"현록위박(玄鹿爲膊) 식지수오백세정력충천(食之壽五百歲精力沖 天)의...... 현(玄)!"
현(玄)!
"네 번째줄...... 오묘천기잉(奧妙天氣孕) 환락일체(歡樂一切)의 오(奧)!"
오(奧)!
"밀운불우(密雲不雨) 백아불능(百我不能)의...... 밀(密)!"
밀(密)!
"경락혈기(經絡血氣) 유십이경(有十二徑) 영십오격(永十五格)의 경(經)......!"
경(經)!
"첫 머리 글자를 모두 조합하면 천...... 겁...... 현......
오...... 밀...... 경!"
천겁현오밀경―!
"이 책...... 완벽한 천겁현오밀경의 진본(眞本)이다......!"
혁련소천의 눈에서 신비스런 광채가 흘러 나왔다.
"지금 이백 년 이래...... 이 책에는 누구의 손길도 묻지 않았다.
즉, 천하에 천겁현오밀경을 익힌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결 론......!"
그의 얼굴에 득의의 미소가 어렸다.
"전에도 없었지만 후에도 이 천겁현오밀경을 익힌 사람은 나타나 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이미 내가 얻었기 때문이다......! 최소한 나의 허락 없 이는 그 누구도 천겁현오밀경을 익히지 못할 테니까......."
혁련소천은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책자를 품 속에 넣었다.
바로 그때 밖으로부터 아련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자시를 알리는 북소리......!'
그때가 바로 혁련소천이 황궁무고에 들어온 지 꼭 삼 일째 되는 때였다.
그는 조금도 서두름 없이 밖으로 걸음을 떼 놓았다.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1권 제19장 천추무상별부(千秋武相別府)-3 ━━━━━━━━━━━━━━━━━━━━━━━━━━━━━━━━━━━
<자경문.>
한 인영이 달빛을 받으며 유유히 걸어나오고 있었다.
혁련소천이었다.
황궁무고를 벗어나 자경문 밖에 이르기까지의 상황은 들어갈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마치 산책이라도 하듯 혁련소천은 너무도 한가롭게 자금성을 빠져 나온 것이다.
혁련소천은 잠시 하늘을 쳐다본 뒤 서서히 걸음을 떼 놓았다.
헌데 그때 한 줄기 전음이 그의 귓전에 불쑥 스며들었다.
(수라마영입니다.)
혁련소천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고개만 가볍게 끄덕였다.
수라마영의 전음이 빠르게 이어졌다.
(조사해 본즉...... 금위부 대영반 금철성(金鐵成)은 홍포구마성 반태서의 동문사제(同門師弟)임을 알아냈습니다. 허나 황궁에서 이런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혁련소천의 눈에 짧은 섬광이 스쳐 갔다.
'역시 짐작이 맞았군!'
수라마영의 전음이 은근한 어조를 띠고 들려 왔다.
(대종사님. 천겁현오밀경은......?)
혁련소천은 씨익 웃기만 했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수라마영은 괴소를 흘렸다.
(후후후...... 역시 대종사님이십니다. 하기야...... 대종사님의 능력으로 얻지 못할 것이 지상에 존재할 리가 있겠습니까?)
(.......)
(그리고 참...... 대종사님께서는 이제부터 행동에 각별히 조심하 셔야 합니다.)
(......?)
(구천 중의 자소천(紫 天)에서 감천곡이 대종사님을 거두었다는 것을 알고 대종사님을 노리기 시작했습니다.)
혁련소천의 눈썹 끝이 가벼운 움직임을 보였다.
(너무 염려 마십시오. 저희 형제들이 있는 이상 그 누구도 대종사 님의 곁에 접근할 수 없을 테니까요.)
혁련소천은 그제야 처음으로 입술을 움직였다.
(나는 그것을 생각하는 게 아니오.)
(......?)
(황궁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예?)
(그 귀한 곳을 드나들면서 잠 한숨 자지 못하고 나온 것이 못내 아쉽구려.)
"......!"
수라마영은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 자소천 따위에 신경 쓸 시간이 있으면 잠이나 자겠다.
혁련소천의 말에 바로 그러한 뜻이 내포되어 있음을!
수라마영의 괴소를 흘렸다.
"후후후......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원하신다면 황제의 침소 라도 비워 놓겠습니다."
"황...... 제?"
혁련소천은 흠칫 걸음을 멈추었다.
다음 순간 그는 하늘을 우러르며 상쾌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그것은 쏟아져 내리는 달빛만큼이나 밝고 환한 웃음이었다.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1권 제20장 살인(殺人)...... 그 첫번째!-1 ━━━━━━━━━━━━━━━━━━━━━━━━━━━━━━━━━━━
십일월(十一月) 초여드레(八日).
이 날은 혁련소천이 장군부에 든 지 꼭 다섯 달이 되는 날이었고, 감천곡은 두 달이 채워지는 날이었다.
그리고 감천곡이 혁련소천과 더불어 장군부를 떠난 것도 바로 이 날이었다.
뿌연 먼지 구름을 일으키며 질풍처럼 질주해 가는 일진의 기마대, 그들의 가운데에는 흑단목으로 된 화려한 마차 한 대가 쾌속하게 치달려 가고 있었다.
마차에 걸려 찢어질 듯 펄럭이는 하나의 깃발엔 <군마천위(君魔天 威) 만웅앙복(萬雄仰伏)>이란 글귀가 쓰여져 있다.
바로 감천곡이 타고 왔던 그 마차였다.
마차와 삼백여 기의 인마(人馬)떼는 무서운 속도로 천궁산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장군부의 정문 앞에는 영호대인을 위시한 석대선생 등 많은 사람 들이 모여 멀어져 가는 마차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차가 시야에서 벗어난 지 이미 일각이 지났지만 영호대인은 웬 일인지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저 물같이 잔잔한 눈빛으로 먼 곳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더 흐른 후에야 이윽고 영호대인은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그리곤 담담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할 수만 있다면...... 그것도 괜찮겠지."
그 말뿐, 영호대인은 서서히 대문 안으로 멀어져 갔다.
그가 들어가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남은 사람은 석대선생 그 혼자뿐이었다.
석대선생은 마차가 사라져 간 방향을 쳐다보며 굳은 듯이 우뚝 서 있었다.
문득 꽉 다물렸던 입술이 떼어지며 한 줄기 조용한 음성이 흘러 나왔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감천곡...... 너는 실수했다. 네 능력으로는 감당키 어려운 인간 을 거둔 셈이지......."
문득 그의 두 눈 깊숙한 곳에 괴이한 광채가 피어올랐다.
"앞날이 보인다. 구천십지만마전...... 머지 않아 미증유의 대폭 풍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석대선생은 천천히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순간 베면 푸른 물이라도 뚝뚝 떨어질 듯한 푸른 하늘이 그의 동 공을 가득 메워 왔다.
헌데 무의식 중인가?
"무량수불......."
느닷없이 한 소리 도호가 그의 입술을 비집고 불쑥 새어 나온 것 이 아닌가?
그러나 그 소리는 그 자신조차 알아듣기 힘들 만큼 극히 미약한 것이었다.
석대선생은 은빛 수염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나직이 웃었다.
"허허...... 아직도 도호를 잊지는 않았군."
도호만큼이나 미약한 중얼거림이었다.
석대선생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곤 대문 근처의 수림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시선을 바로 하며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너무 강해...... 그것이 흠이야."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석대선생은 대문 안으로 휘적휘적 멀어져 갔다.
이때 수림 속의 바위 뒤에서 한 인영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낡은 마의에 목검(木劍) 한 자루를 품에 안고 있는 영호검제 바로 그였다.
영호검제는 대문 안으로 멀어져가는 석대선생을 응시하며 나직이 읊조렸다.
"너무 강하다고? 흐흐흐...... 물론 강하면 부러지기도 쉽겠지.
허나 강이 극(極)에 이르면 절대 부러지지 않는 법이야, 석대선 생!"
그는 끝말에 가장 확실한 억양을 주었다.
"셋째 아우, 너는 만마전...... 나 영호검제는 너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싸움은 이미 시작되었어!"
순간 영호검제의 눈빛이 섬뜩하리만큼 차갑게 굳어졌다.
"흐흐흣...... 머지않아 진정한 마종(魔宗)이 누군지 가려진다!"
차가운 괴소와 함께 영호검제의 몸이 연기처럼 흐려지더니 이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1권 제20장 살인(殺人)...... 그 첫번째!-2 ━━━━━━━━━━━━━━━━━━━━━━━━━━━━━━━━━━━
두두두두...... 두두두......
타오르는 석양 속에서 일진의 기마대가 질풍처럼 치닫고 있었다.
바로 장군부를 떠나온 군마천의 고수들이었다.
마차 안엔 네 명의 인물이 타고 있었다.
감천곡과 혁련소천, 무형천궁 공손무외와 또 다른 한 명이었다.
그 또 다른 한 명은 일신에는 피보다 붉은 홍의를 걸치고 있었고, 유난히 긴팔에 등이 낙타처럼 툭 불거진 꼽추 노인이었다.
헌데 그 노인의 얼굴을 어찌 인간의 얼굴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 가?
벌레가 기어가듯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상처로 뒤덮인 얼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어디가 눈이고 코인지 도무지 분간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무참하게 짓뭉개진, 진정 꿈에 볼까 두려운 끔찍스러운 모습이었다.
홍포구마성 반태서―!
사천(四川)에서 이 이름은 곧 죽음으로 통한다.
한 번 내뱉은 말은 절대 거두어들이는 법이 없고 또한 한 치의 오 차도 허용치 않는 치밀하고도 냉혹한 성격의 소유자!
팔십 년 전, 당시 사천제일(四川第一)의 귀공자로 일컬어지던 그 는 불과 이십육 세의 나이로 홍의교의 교주(敎主) 자리에 올라섰 다.
그후 십 년이 지났을 때, 그는 준수했던 용모를 스스로 무참하게 망가뜨렸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사천제일뇌(四川第一腦)!
일을 처리함에 있어 이성만 찾되 절대적으로 감정을 배제하는 냉 혹하고 치밀한 성격이 가져다 준 또 하나의 별호였다.
마차 안에는 오랫동안 기이한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장군부를 떠난 이후 그들 중 입을 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문득 감천곡이 침중한 음성으로 침묵을 깨뜨렸다.
"반노제, 자네는 이번 계획이 어떻게 되리라고 생각하는가?"
홍포구마성 반태서에게 묻는 말이었다.
반태서는 눈알을 한 차례 빠르게 굴린 후 냉혹한 어조로 대꾸했 다.
"만마전의 열아홉 단체는 그 실력이 모두 백중지세요. 또한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 왔을 터인즉......."
"결론은?"
"실로 어려운 일이오."
반태서는 문득 싸늘한 눈빛을 혁련소천의 얼굴에 꽂았다.
"문제는...... 오직 영호공자의 능력 여하에 달려 있소이다."
그 말에 감천곡은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점은 안심하게. 영호공자의 능력은 나 감천곡이 이미 인정하 고 있으니까."
반태서는 혁련소천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 다.
"아직...... 세 가지 편법 중 한 가지만 성공했을 뿐이오. 나머지 두 가지가 모두 끝난 후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감천곡은 나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후...... 역시 홍포구마성다운 말이야."
그들의 대화는 거기에서 끝났다.
이 순간 혁련소천은 문득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두 가지 편법...... 또 어떠한 것들일까?'
그는 일종의 호기심마저 느꼈다.
헌데 그때 느닷없이 한 줄기 전음이 혁련소천의 귓 속으로 파고들 었다.
(한단지마입니다.)
혁련소천은 내심 흠칫했으나 표정에는 티끌만큼의 변화도 없었다.
(귀찮은 일이 생겼습니다.)
(.......)
(자소천의 서열 육위고수(六位高手)인 철환(鐵丸) 소남붕(蘇南朋) 이 대종사님의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
(문제는 놈의 무공이 아니라 놈이 영호풍의 진면목을 아는 유일한 놈이라는 것입니다.)
(.......)
(일곱 째의 말에 의하면 놈은 오 년 전 천간산에서 영호풍과 마주 친 적이 있다고 합니다.)
혁련소천의 표정은 시종 담담했다.
한단지마의 전음이 침중하게 이어졌다.
(대종사님의 명령을 바랍니다.)
혁련소천은 잠시 생각하더니 불쑥 물었다.
(소담붕은 누가 쫓고 있소?)
그렇게 묻는 그의 입은 여전히 꽉 다물린 상태였다.
심기어전(心氣語傳).
최소한 이백 년 공력 없이는 시전이 불가능한 전음술의 최고봉(最 高峰)이 너무도 쉽게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한단지마는 즉시 대답했다.
(삼생다라(三生多羅)가 뒤쫓고 있습니다. 그들 삼 인의 능력이면 소담붕 정도는 충분히.......)
(추격을 중지하라 전하시오.)
(......!)
(내가 직접 처리하겠소.)
(알겠습니다!)
(어서 가시오. 마차의 밑바닥이라 오래 있기가 불편할 테니 까.......)
(흐흐흐...... 역시 대종사님은......!)
그 말을 끝으로 한단지마의 전음은 더 이상 들려 오지 않았다.
혁련소천은 문득 당혹한 기색을 떠올리며 감천곡을 쳐다보았다.
"노인장."
"......?"
"잠시 마차를 세워야 되겠습니다."
감천곡의 눈에 의혹이 솟았다.
"무엇 때문에......?"
혁련소천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모든 일은 완벽하게 끝내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헌데?"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일이 한 가지 남았습니다."
"......?"
"대광사에서 옥산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감천곡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때 공손무외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끼어들었다.
"허허...... 자고로 청춘은 즐거운 법. 영호공자, 그런 문제라면 조금도 망설일 필요가 없다네."
그러자 감천곡도 빙긋 웃으며 말했다.
"갔다 오게. 허나 너무 늦지는 말고."
"알겠습니다."
곧이어 마차가 멈추고 혁련소천이 밖으로 나갔다.
이때 문득 반태서가 두 눈을 야릇하게 빛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
"뭐가 말인가?"
감천곡의 반문에 반태서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 아무 것도 아니오."
감천곡은 그 순간 보았다.
반태서의 눈빛이 기이할 정도로 차갑게 굳어지는 것을......!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1권 제20장 살인(殺人)...... 그 첫번째!-3 ━━━━━━━━━━━━━━━━━━━━━━━━━━━━━━━━━━━
산신묘(山神廟).
말이 좋아 산신 묘지 흉가(凶家)도 이런 흉가가 없었다.
허물어진 담과 깨어진 기와, 거의 어른 키만큼이나 자라난 무성한 잡초가 어우러져 금세라도 뭔가 뛰쳐나올 듯 황량하고도 음산한 정경이었다.
불어 대는 이 바람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차고 매서운지......
이때 잡초 스치는 스산한 음향이 일며 열 줄기 인영이 산신묘 안 으로 들어섰다.
일신에 자의(紫衣)를 걸친 그들의 전신에서 풍기는 인상은 한결같 이 음산하고 사악(邪惡)했다.
그들의 맨 앞엔 푸르죽죽한 안색에 은은한 자광이 감도는 눈을 가 진 육순 가량의 노인이 서 있었다.
그는 왼손에 검은 쇠구슬 두 개를 습관처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철환(鐵丸) 소남붕!
자소천의 서열 구위(九位)에 올라 있는 고수, 그의 손에서 발출되 는 서른여섯 개의 철환은 아직까지도 실패한 적이 없다는 무적 병 기로 평가된다.
문득 철환 소남붕은 곤혹스런 어조로 중얼거렸다.
"정말 이상한 일이야...... 분명 영호풍의 모습이 그렇게까지 훌 륭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 년 동안 그렇게 많은 변화가 있을 수 있을까......?"
그의 눈빛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깊숙이 가라앉았다.
"뭔가 이상해...... 내가 본 영호풍은 비록 기재이기는 하나 감천 곡의 마음까지 단번에 사로잡을 정도는 아니었어......!"
중얼거림이 끝나는 그 순간, "킬킬킬...... 별놈 다 보겠군. 이상하게 생긴 놈이 이상하게 웃 긴단 말이야."
느닷없이 산신묘 밖에서 괴이한 말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떤 놈이냐?"
살기 돋친 냉갈과 함께 소남붕의 왼쪽 손이 벼락같이 번뜩였다.
슈― 욱!
순간 파공음과 함께 한 개의 철환이 뇌전처럼 벽을 뚫고 쏘아 갔 다.
"아이쿠! 인간 살려......!"
꽝―!
짤막한 폭음과 숨넘어가는 듯한 다급성이 동시에 터졌다.
그 순간 소남붕과 아홉 명의 자의인은 어느새 소리가 터져 나온 곳에 나타나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전신에 땟국물이 기름기처럼 번들거리는 거지차림 의 소년이 바닥에 퍼져앉아 울상을 짓고 있었다.
소년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박살난 밥그릇을 바라보 고 있었다.
이때 소년은 소남붕을 보자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벌떡 일어섰다.
"이 영감탱이야! 도대체 나하고 전생에 무슨 철천지 원한이 있다 고 내 밥그릇을 요꼴로 만들었느냐?"
다짜고짜 내뱉는 반말은 문제가 아니었다.
소년은 마치 소남붕의 콧구멍을 찌르기라도 할 듯 정신없이 삿대 질을 해대는 것이 아닌가.
소남붕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의 기억에 이토록 남에게서 호된 꾸지람(?)을 들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소남붕의 얼굴에 무서운 살기가 떠올랐다.
"네놈...... 지금 누구한테 뭐라고 씨부렁...... 억!"
그는 말을 하다 말고 흠칫 고개를 쳐들었다.
하마터면 소년의 손가락이 콧구멍을 찌를 뻔했던 것이다.
"이 영감탱이야! 내 죄라면 요 짐승보고 이상하다고 말한 죄 밖에 없다. 헌데 무슨 이유로 남의 밥그릇은 깨뜨렸냔 말이다!"
소남붕은 또 한 번 멍청해지고 말았다.
소년의 발 밑에 쥐처럼 작고 눈이 새파란 흰색 털의 묘한 짐승 한 마리가 깨진 밥그릇을 열심히 핥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고개를 아래로 홱 꺾었다.
"야! 이 심통 많은 놈아! 나는 밥그릇이 깨져 죽을 지경인데 네놈 은 뭐가 좋다고 처먹기만 하냐?"
그러면서 그는 짐승을 발길로 냅다 걷어찼다.
"끼아아... 악!"
짐승은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쏟살같이 숲쪽으로 달아 났다.
"통째 구워 먹어도 시원찮을 놈 같으니......!"
소년은 거친 숨을 토하며 씩씩거리더니 이내 소남붕을 매섭게 노 려보았다.
소남붕이 흠칫한 순간 소년은 그의 멱살을 냅다 움켜쥐며 이빨을 우두둑 갈았다.
"이 영감탱이야! 이 밥그릇으로 말하자면 지난 십구 년 동안 나를 먹여 살렸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장장 백 년은 더 먹여 살릴 생명 줄로써 값을 따질 수도 없는 것이다!"
"......!"
"물어내라! 물어내―!"
길길이 날뛰며 바락바락 악을 쓰는 소년의 모습은 진정 가관이었 다.
뿐인가? 소남붕의 얼굴에는 이미 구린내를 풍기는 침방울이 수도 없이 튀어 있었으니......
자의인들은 어이가 없어도 한참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았 다.
'미친 놈! 어디 붙잡을 게 없어 염라대왕의 멱살을 쥐고 흔들 어......?'
'삶에 염증을 느낀 놈이라면 임자는 제대로 찾은 셈이야!'
그들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소남붕의 참고 참았던 분통이 드디어 터지고 말았 다.
"이 새끼!"
그는 한 소리 대갈을 터뜨리며 소년의 복부를 사정없이 내질렀다.
퍼억―!
"어구구구......!"
소년은 죽는다고 비명을 내지르며 멀찌감치 나가 떨어졌다.
허나 다음 순간 소년은 벌떡 일어서더니 배를 움켜쥐고 더욱더 길 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아이고, 배야! 아이고, 궁둥이야! 인간 살려라! 이 영감탱이가 남의 쪽박 깨고 인간까지 죽인다! 아이고......!"
눈을 반쯤 까뒤집고 게거품까지 부글부글 뿜어내는 폼이 영판 아 귀모습 그대로였다.
이때 문득 소남붕의 눈에 번쩍 기광이 솟구쳤다.
'나의 발길질을 맞고도 저렇게 멀쩡하게 일어서다니......!'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살기찬 음성을 내뱉었다.
"이제 보니 숨은 고수였군!"
동시에 또 하나의 철환이 유성처럼 허공을 갈랐다.
"아이쿠!"
돌연 소년은 철환을 맞기도 전에 바닥을 뒹굴며 다 죽어가는 비명 을 내질렀다.
철환은 소년이 서 있는 자리에 그대로 쑤셔 박혔다.
다음 순간 소년은 기다렸다는 듯이 퉁기듯 몸을 일으켜 옆쪽에 있 는 바위 위에 폴짝 올라섰다.
이어 소년은 싯누런 이빨을 시원스레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헤헤헷...... 늙은 놈! 생각 같아선 당장 네놈의 모가지를 비틀 고 싶다만 우리 어른이 오셨으니 나는 이만 가 보시겠다."
말이 끝나면서 소년의 신형은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소남붕의 눈에 시뻘건 불길이 화락 치솟았다.
"이, 이놈! 서라!"
소남붕이 막 몸을 날리려는 순간 돌연 조용한 음성이 그의 등뒤에 서 일었다.
"그대가 철환 소남붕인가?"
흠칫 놀란 소남붕은 지체없이 몸을 홱 돌렸다.
그의 뒤에는 준수한 외모의 혁련소천이 태산처럼 우뚝 서 있었다.
소남붕은 말할 것도 없고 자의인들 중에서도 혁련소천이 언제 어 디서 나타났는지 알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수다......!'
소남붕은 대뜸 직감하며 안색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너는...... 누구냐?"
혁련소천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지금까지 그대는 나를 보고 싶어하지 않았던가?"
소남붕의 눈에 번쩍 괴강이 스쳤다.
"이제 보니 너는......?"
"영호풍."
소남붕의 눈빛이 가볍게 흔들렸다.
허나 그는 곧 평정을 되찾으며 음침한 미소를 머금었다.
"너는...... 영호풍이 아니다. 영호풍은 내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혁련소천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서 내가 왔다. 바로 그대를 죽이기 위해서."
소남붕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 죽이기 위해서.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치 예리한 비수가 목에 와 닿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허나 소남붕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괴소를 발했다.
"흐흐흐...... 이상한 일이군. 네놈은 대체 누구이기에 영호풍으 로 위장해서 군마천에 잠입하려는 것이냐?"
혁련소천은 조용히 말했다.
"이유는 알 것 없어. 단지 너는 죽어 주기만 하면 될 뿐이야."
살인 예고!
허나 그 음성은 너무도 조용하고 부드러웠다.
소남붕의 안면이 괴이하게 씰룩거렸다.
"흐흐흣...... 네놈은 나 소남붕을 허수아비로 착각한 모양이구 나."
"사실이 그러니까."
"미친 놈!"
순간 한꺼번에 대여섯 개의 철환이 소남붕의 손에서 벼락치듯 폭 사되었다.
"바보.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혁련소천은 태연하게 중얼거리며 오른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그러자 쏘아 오던 대여섯 개의 철환은 자연스럽게 그의 수중으로 빨려 들어갔다.
"헉......!"
소남붕은 대경하며 급히 뒤로 물러섰다.
■ 구천십지제일신마 제1권 제20장 살인(殺人)...... 그 첫번째!-4 ━━━━━━━━━━━━━━━━━━━━━━━━━━━━━━━━━━━
"후후후...... 놀란 모양이군."
혁련소천은 기소를 흘리며 오른손을 슬쩍 폈다.
순간 한 웅큼의 검은 쇳가루가 우스스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처...... 철환이 쇳가루로......?'
소남붕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뒈져랏!"
더 기다릴 것도 없이 소남붕은 발악적으로 양 소매를 앞으로 떨쳐 냈다.
순간 검은 파도와 같은 철환들이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혁련소천 의 전신을 폭우처럼 덮어 갔다.
소남붕이 자랑하는 최후의 절명초식(絶命招式)이 전개된 것이다.
"부질없는 것."
냉소적인 한 마디가 들려나오는 순간 혁련소천의 신형이 곧장 앞 으로 쏘아졌다.
이 얼마나 무모한 행동인가?
피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검은 비(雨)처럼 쏘아 오는 철환 속으로 몸을 날리다니.
아니다 다를까?
퍼퍽― 퍼퍼퍽!
서른여섯 개의 철환은 혁련소천의 전신에 바늘 끝처럼 고스란히 쑤셔 박혔다.
순간 소남붕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흐흐흐...... 미친......."
허나 그의 말은 나오다가 말았고 희색은 나타날 때보다 수 배의 빠르기로 사라져 버렸다.
당연히 피떡이 되어 나가 떨어질 줄 알았던 혁련소천이 그대로 쏘 아 오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 문제가 아니었다.
환상이었던가?
소남붕은 활짝 펼쳐진 혁련소천의 장심에서 또하나의 손이 불쑥 뻗어 나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슈아아앙―!
그 손은 마치 혈옥(血玉)을 깎아 만든 듯 지극히 정교하고 아름다 운 핏빛의 손이었다.
슈― 욱!
"으윽......!"
한순간 소남붕은 심장 부위가 불에 데인 듯 화끈해짐을 느꼈다.
핏빛 혈옥수(血玉手)가 그의 가슴을 앞뒤로 관통해 버린 것이다.
시뻘건 핏물이 이내 기세 좋게 가슴의 앞뒤로 뿜어져 나왔다.
그러나 소남붕은 비명 대신 불신과 경악에 찬 음성을 힘겹게 내뱉 을 뿐이었다.
"이...... 이것은...... 전설...... 마황궁(魔皇宮)의...... 미리 혈옥수(彌離血玉手)......!"
"진짜 바보는 아니었군."
어느새 혁련소천은 소남붕의 면전에 우뚝 서 있었다.
마치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소남붕의 안면은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미...... 믿을 수...... 어찌 사람의 몸 속에서...... 그것 이......."
혁련소천은 담담히 웃었다.
"과거 나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도전으로 몸 속에 여섯 개 의 무기를 박아 넣었다."
"모...... 몸 속에?"
"그 첫번째가 미리혈옥수, 그리고......."
순간 혁련소천의 시선이 좌우에 넋을 잃고 서 있는 자의인들을 빠 르게 훑어 지나갔다.
번― 쩍!
동시에 한 줄기 시뻘건 광채가 그의 오른쪽 소매에서 뻗쳐 나와 자의인들의 앞을 섬광처럼 스쳐 갔다.
파팍― 파파팍!
단지 스쳤을 뿐이건만 정확하게 아홉 개의 수급이 순식간에 핏물 에 휩싸인 채 허공 높이 떠올랐다.
자의인들 중 자신이 어떻게 무엇에 당해 죽어 가는지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니, 심지어는 죽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이것이 그 두 번째 무기이다."
혁련소천은 소매를 걷어 오른쪽 팔뚝을 내밀었다.
그의 팔뚝에는 실같이 가느다란 핏빛 혈선(血線)이 나선형으로 칭 칭 감겨져 있었다.
순간 소남붕의 전신에 격렬한 진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망혈사(死亡血絲)......?"
"뻗치면 백 장 이내의 생명체를 모조리 죽일 수 있다는 죽음의 마 사(魔絲)이지."
"어...... 어찌...... 인간의...... 몸 속에...... 무기 를......?"
소남붕은 서서히 뒤로 넘어갔다.
"감천곡...... 무서운...... 인간을...... 만...... 마전으 로......."
철환 소남붕, 그는 혁련소천에 의해 살해된 구천십지만마전의 첫 번째 희생자였다.
혁련소천은 소남붕의 시신을 향해 오른속을 확 펼쳤다.
슈아아― 앙!
미리혈옥수가 소남붕의 심장 부위에서 빠져나와 그의 장심으로 흔 적도 없이 사라졌다.
때를 같이 해서 혁련소천의 전신에 박혀 있던 서른여섯 개의 철환 이 모조리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어 혁련소천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전신을 툭툭 털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영호풍의 진면목을 안 것이 죽을 죄였다."
"헤헤헤...... 소인의 배를 찬 것도 죄라면 죄이지요."
그때 짓궂은 괴소와 함께 한 인영이 혁련소천의 면전에 가볍게 내 려섰다.
그는 바로 조금 전에 훌쩍 사라졌던 거지 소년이었다.
혁련소천은 담담히 미소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어찌 되었느냐?"
소년은 히죽 웃었다.
"헷헷...... 삼생다라의 첫째인 이 천수다라(千手多羅)의 두 손이 천하에 무엇인들 훔치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면서 품에서 두툼한 서찰 한 뭉텅이를 꺼냈다.
만약 소남붕의 영혼이 아직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외 쳤으리라.
― 내 거다!
혁련소천은 물었다.
"읽어 보았느냐?"
"대충 읽어 본 즉, 모두 대종사님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손은 썼느냐?"
"내용을 모조리 뒤바꿨습니다."
혁련소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다시 소남붕의 품에 넣어 두어라."
"알겠습니다. 헌데 이들의 시체는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습니까?"
혁련소천의 입가에 신비스런 미소가 번졌다.
"그대 막내아우의 능력이면 이 시체들을 환락천(歡樂天)의 놈들에 게 당한 것처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천수다라의 눈에 반짝 기광이 솟았다.
"환락...... 천입니까?"
"재미있지 않겠느냐? 환락천과 자소천이 반목하여 피터지게 싸운 다면......."
그것은 분명 또 하나의 음모였다.
혁련소천이 소남붕을 제거하기 위해 직접 나타난 것도 미리 이 음 모를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혁련소천은 천수다라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너희 삼 형제는 이번 일을 마치고 군산 제왕성으로 돌아오도록 해라."
군산 제왕성―!
당금 무림에 그런 이름의 문파는 없었다.
천수다라는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참......!"
"무엇이냐?"
"한단지마 육사숙을 만나시면 저희들을 그만 괴롭히라고 전해 주 십시오."
"음......?"
"그 분은 땅만 있으면 아무 곳에서나 불쑥불쑥 나타나 저희들의 머리를 쥐어박는 바람에......."
말을 하다 말고 천수다라의 눈이 돌연 커졌다.
바로 코 앞에 서 있었던 혁련소천이 어느새 연기처럼 증발한 것이 다.
천수다라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씁쓸한 고소를 지었다.
(제기랄...... 괜히 혼자 씨부렁.......)
"제기랄 이란 말까지 한단지마에게 전해 주마."
이때 한 줄기 전음이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아련히 들려 왔다.
천수다라는 대경하며 황급히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이어 그는 코가 터지도록 바닥에 얼굴을 처박으며 울부짖듯 외쳤 다.
"대종사님! 제발 그 말만은......!"
금릉성 외곽, 한 황량한 산신묘 앞에서 벌어졌던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