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楚汉志) 1-044
•始皇帝
秦王政은 6국을 정벌하여 天下을统一하고 나자, 문무백관들을 咸阳宫으로 불러들여
축하연을 성대하게 베풀었다.진왕은 그자리에서 문무백관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시를 내렸다.
"나는 천하를 통일함으로써 战国时代의 종말을 고하게 되었소. 이제는 어느 누가 감히
나에게 싸움을 걸어 올 것이오? 앞으로는 전쟁은 없을 것이니, 각국에 있는
무기를 모조리 거두어들여 무쇠로 만들어, 铁人을 만들어 버리도록 하시오. 나는 宫庭에 철인들을
장식물로 세워 놓고, 战国时代를 회상하며 평화를 즐기기로 하겠소." 진왕은 또 이렇게도 말했다.
"과거에도 聖王이 많았겠지만, 나처럼 천하를 통일한 임금이 나 이외에 또 누가 있었고.
그렇게 따지고 보면, 나는 <王>이라는 칭호 자체부터가 너무도 왜소하게 느껴져서 마음에
들지 아니하오." 그리고 丞相李斯를 돌아보며 묻는다. "승상은 역사에 밝으시니까 하나 물어 보겠소.
오늘날까지 역사상 위대했다는 임금에 어떤 임금들이 있었소?"
이사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역사상 위대했던 임금에는, 三皇과五帝가 있사옵니다."
"삼항이란 누구 누구이며, 오제는 누구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삼황이란 고대의 天皇氏(천황씨),
地皇氏(지황씨), 人皇氏(인황씨)의 세 임금님을 말하는 것이옵고,
오제란 그 다음 시대의 小昊(소호), 颛顼(전욱),帝嚳(제곡),堯(요),舜순)의 다섯 임금님을
말하는 것이옵니다." "그들의 聖业을 나의 통일 천하와 비교해 보면,
어느편이 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겠소?" 진실로 거만하기 짝이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중신들은 약속이나 한듯 입을 모아 이렇게 대답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삼황오제가 제아무리 聖君이셨다 하기로, 그들의 업적을 어찌 감히
대왕의 통일 천하의 大聖业에 비교할 수 있으오리까.그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진왕은 그 대답이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크게 웃으며, 승상 이사에게 다시 묻는다.
"삼황오제의 업적과 나의 업적에는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말하는데, 승상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이사가 대답한다. "그것은 사실이옵나이다.삼황오제가 善政을 베푸셨더고는 하지만,
그들은 일부의 지방만 통치했을 뿐이온데, 大王께서는天下를统一하셨으니, 어찌 삼황이나 오제의
업적으로 비교할 수 있으오리까. "옳은 말씀이오. 업적이 별로 대단치도 않았던 그들조차
<삼황오제>라 불러 왔다면, 내게 대한 칭호도 무언가 새로운 칭호로 불러야 옳을 것이 아니겠소?"
春秋战国时代에는 대소 국가가 70여개나 있었고, 그들은 자기나라의 임금을 한결같이
大王이라고 불러 왔었다. 말할것도 없이, 秦王도 그중 한사람에 불과했었다.
그런데 모든 국가를 정벌하여 천하를 통일해 놓은 지금에 와서도, 그 흔해 빠진 <대왕>이라는
칭호로 불리기에는 불만이 너무도 많았다. 조무라기 <대왕>들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위대한 임금님>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무언가 새로운 칭호로 불리고 싶었던 것이다.
승상 이사는 진왕의 그러한 심리를 재빨리 알아차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품한다.
"천하 통일의 위업을 완수하신 지금에 와서는, <대왕>이라는 칭호는 너무나도 왜소한
칭호인 줄로 아뢰옵니다.고대에는 성군을 <天子>라고 불러 왔사오므로, 오늘부터는 대왕께서도
<천자>라고 부르시게 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천자?..... 천자라는 칭호는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아닌가. 그 칭호도 별로 나쁜 칭호라고는
볼 수 없을것 같구료. 그러나 <天子>라는 칭호는 이미 남들이 써오던 칭호가 아니오?
그보다는 <삼황오제> 모양으로,
나의 업적을 뚜렷하게 부각시켜 보이는 새로운 칭호로 불리고 싶구료"
"물론 그래야 하실 것이옵니다. 대왕께서는 어떤 칭호로 부르게 하심이 좋으시겠나이까?"
진왕은 잠시 생각해 보다가, 문득 힘있게 머리를 들며 말한다. "과거에는 별로 대단하지도 않았던
임금조차 <三皇>아니 <五帝>니 하고 불러 왔던 모양이니, 나의 경우에는 숫제 <三皇五帝>를
하나로 뭉쳐서 <皇帝>라고 부르면 어떠하겠소?"그 제안에 승상 이사는 크게 감탄하고,
"과연 기발하신 착상이옵니다. 대왕께서는 삼황과 오제의 모든 업적을 통합한 것보다도
더 위대하신 업적을 이루어 놓으셨으므로, 칭호도 마땅히 <황제>라고불러야 옳을 줄 아뢰옵니다.
이리하여 그날부터 진왕 정을 <皇帝>라는 새로운 칭호로 부르게 되었는데, 그칭호는 秦王 자신이
창안해 낸 칭호였던 것이다. 秦王은<皇帝>라는 새로운 칭호가 지극히 만족스러워 유쾌하게 웃으며
다시 말한다. "천하 통일을 내가 이루어 놓았으니, 이제부터는 나의 자손들이 대대로 물려 내려가며
황제의 자리를 누리게 될 것이오.그러므로 나 자신을<始皇帝> 또는 <秦始皇>이라 부르고,
그 다음부터는 <이세 황제>, 또는 <삼세 황제>라고 부르게 하겠소.
그 모양으로 이 나라는 나의 자손들이 만대를 누려가며 통치하게 될 것이오."
이리하여 秦王은 그날부터 자기를 <始황제> 또는 <진시皇> 이라고 부르게 하였다.
그나 그뿐이랴.시황제는 그것만으로도 만족스럽지 않아 이런 말까지 하였다. "지금까지 <大王>들은
자기 자신을 寡人(과인)이라고 자칭해 왔었소. 그러나 대왕이 아니고 황제인 나에게는 그 말도
격에 어울리지 않으니, 그 말을 어떻게 바꾸는 것이 좋겠소?"
이사가 잠시 생각을 해보다가 입을 열어 말한다. "<과인> 이라는 말은 대왕들이 써오던 어휘이므로,
<황제>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어휘옵니다. 황제께서 신하들에게 자칭하실 때에는 <朕(짐) >이라고
하심이 어떠하겠나이까?" "짐?..... 짐이란, 어떤 글자를 쓰는 것이오?" "짐..... 이란, 나 짐(朕) 자를
말하는 것이옵니다." "그거참 좋은 생각이요.그러면 이제부터 나자신을 말 할 때에는 <朕>이라고
부르겠소. 그 대신 <朕>이라는 글자는 나 이외에는 아무도 쓰지 못하도록 해야 하오."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황제께서 쓰시는 <짐> 이라는 글자를 누가 감히 쓸 수 있으오리까?"
이리하여 <皇帝>와 <朕>이라는 말이 秦始皇에 의하여 새로 생겨 나게 되었다.
(그로부터 2천여년 후에 우리나라의 고종 황제도 자기자신을 <짐>이라고 말했다.
일본천황도 자기 자신을 <짐>이라고 말해오고 있다. 그것은 모두 진시황에서 연유되었다.
始 황제는 그때부터 국정을 근본부터 개혁하여, 전국을 36 郡으로 나누어,
각 고을 郡守를 직접 임명하는 中央集权体制를 확립하는 동시에, 모든 법률도 전국적으로 통하도록
하였고, 글자와 度量衡도 전국적으로 동일하게 통용되도록 만들어 현대 국가 체계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 당시 진나라의 영토는, 동으로는 요동반도와 东胡 인접(후 고구려영토)까지 이르렀고,서로는 멀리
临洮(현.甘肃省)에 까지 이르렀으며, 남으로는 安南国(현 云南省),북으로는 阴山(현 내몽고)에 까지
이르렀으니 일찌기 어느 시대에도 볼 수 없었던 광대한 지역으로 현 중국의 기틀이 되었다.
秦始皇은国基를 튼튼히 다져놓고 나자, 그때부터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富豪 12만호를 모조리 함양으로
불러들여 함께 살게 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도 阿房宫이라는 거대한 궁궐을 지으며, 지방의 미녀
3천명이나 궁궐로 모아 들였다.
그뿐만 아니라, 死后에 대비하여 자신의 墓宫도 조축하게 했는데, 그 무덤의 봉분만도 높이가
4백자에 길이가 2천자, 무덤 내부에는 黄河와阳子江까지 만들어 놓고, 물 대신에水银을 흐르게 했으니,
그 규모가 얼마나 거대했던가를 가히 잠작할 수 있다. 그처럼 거대한 토목공사를 수없이 일으키는데,
그 모든 공사가 오로지 백성들의 赋役으로 충당되었으니, 천하통일의 기쁨을 즐기는 사람은
오직 진시황 한 사람 뿐이었고, 백성들은 苛敛诛求에 언제나 죽어나는 형편이었다.
게다가 승상 이사는 철저한 法治主义者여서, 그는 새로운 법령을 선포하고 나서, 法을 어기는 자는
형량에 따라 五刑에 처하기도 하였다. 오형이란, 얼굴에 글자를 새기는 형벌, 코를 베어 내는 형벌,
불알을 까는 형벌, 음경을 자르는 형벌, 거리에서 공개적으로 허리를 자르는 다섯 가지의
잔인한 형벌을 말하는 것이다.
1-045편에 계속 해서
초한지(楚汉志) 1-045
始皇帝는 나라의 기틀을 확고하게 다져 놓고 나자, 그때부터는 낮이면 사냥을 즐기고, 밤이면 미녀들과
酒宴으로 밤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40평생을 战云 속에서만 살아왔으니,
天下를统一한 지금에 와서는 여생을 즐겁게 보내려고 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바람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승상 이사는 황제의 그러한 태도가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져서, 하루는 이렇게 품한 일이 있었다.
"자고로 聖君은天下를 끊임없이 순회하시며, 民情을 소상하게 시찰하시와,
모든 民愿을 정치에 반영시켰던 것이옵니다. 九重宫阙 속에 깊이 앉아 계셔서는 어찌 천하의 痼疾을
아실 수 있으오리까. 그러므로 황제께서도 전국을 친히 순회하시며, 민심을 널리 보살피심이
좋으실 줄로 아뢰옵니다.始황제는 그 간언에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서, 즉석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거 참, 좋은 말씀을 들려주셨소. 그렇잖아도 짐은, 짐이 다스리고 있는 모든 국토를 짐의 눈으로
직접 순찰해 보고 싶소이다. 우선 陇西地方으로 떠나 보기로 할 테니, 짐의 행차에 불편이 없도록,
농서까지 새로운 길을 닦아 주도록 하시오."함양에서 농서까지는 첩첩 태산이 가로막는 천리길이었다.
그 험난한 곳에 皇帝专用道路를 새로 닦아 놓차니 거기에 또 죽어날 사람은 백성들뿐이었다.
만여명이 한 달 동안이나 끼니를 굶어가며 신작로를 닦고 있었건만, 시황제는 백성들의 그와 같은
노고에는 추호도 배려함이 없었다.이윽고 황제는 지방 순행의 길에 올랐다.
황제가 타고 다니는 온량차<輼辌车>는 창문이 여섯개나 달려있는 거대한 수레여서 거기에는 시녀들도
10명이나 동승하게 되어 있었다. 게다가 앞뒤에는 5천여명의 기마대가 호위하였다. 그리고 온량차가
진행하는 좌우편 길가에는 황제를 전송하고 황제를 영접하는 백성들의 도열이 끝없이 계속되었고,
그들은 저마다 <시황제 폐하 만세.....>의 환호성을 올려야만 했다. 시황제는 그때마다 온량차의 창문을
열고 손을 들어 환호에 응하며, 백성들에게 자기 자신의 얼굴을 보여 주는 것을聖者의聖德이라고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그를 영접하는 백성들은 모두가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이어서
개중에는 "우리나라를 빼앗아간 자가 바로 저자였구나!" 하고, 노골적으로 원한을 털어놓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건만, 시황제는 백성들의 그와 같은 원성을 개의해 본 일 조차 없었다. (버러지 같은 것들에게
나의 거룩한 얼굴을 직접 보여 주는 것 만으로도, 나는 얼마나 자비로운 성군이냐.) 진시황 자신은
속으로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시황제의 순찰에는 大夫(비서실장) 趙高가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일행이 농서에 도착하니, 城 안에는 환영 인파가 30만 명이나 운집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한결같이 어둡기만 하였다. 입으로는 환호성을 외치지만 얼굴에는 怨色이
넘쳐 있었던 것이다.그도 그럴것이,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이 새로운 통치자를 달갑게 여길 리가 없었다.
대부 조고는 그런 눈치를 재빠르게 알아차리고, 황제의어전에서 젊은 청년 한명을 붙잡고,
"황제께서 지금 이 지방으로 순찰 나오신 것을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하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 청년은 황제의 발아래 엎드려 울면서 대답한다. "聖恩이 망극하옵게도, 황제께서 저희 지방에
临御해 주시와, 저희들 民草는 눈물겨운 감격을 금할 길이 없사옵니다."
조고는 그 대답을 듣고 시황제에게 품한다. "이 청년의 말을 들어 보시옵소서. 황제폐하의 성덕은
방방곡곡까지 골고루 미쳐서, 만천하가 태평성대를 讴歌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시황제는 그 말을 듣고 빙그레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고가 미리 꾸며놓은 造作剧이었다는것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조고는 워낙
꾀가 많은 위인인지라, 황제를 기쁘게 해주려고 문제의 청년을 뇌물로 매수하여,
그렇게 대답하도록 미리 꾸며놓았던 것이다.그러나 그런 비밀을 알 턱이 없는 황제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한다. "이제부터는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태평성대를 마음껏 즐기게 하리라."
문서에는 계두산(鸡头山) 이라는 높은 산이 있다.황제가 계두산 정상에 올라와 사방을굽어 살펴보니,
저 멀리 하늘가에, 오색이 영롱한 이상한 구름이 몇 조각 떠돌고 있지 않은가.
"저게 무슨 구름이냐. 저 구름이야말로 이상한 구름이로구나." 시황제가 묻자, 조고가 대답한다.
"글쎄올시다. ..... 수행원 중에 宋无忌라는占星士가 있사오니, 그를 불러 물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 점성사 송무기가 즉시 불려와, 구름을 유심히 살펴보고 나서 대답한다
. "구름에는 祥云, 彩云, 霁云, 庆云등의 여러가지 구름이 있사옵니다.저것은 구름이 아니옵고
단순한 云气일 뿐이옵니다. 저 운기에는 妖气가 감돌고 있사온데, 저 요기를 제압해 버리려면,
황제께서 남방으로 행차하시어, 邹峄山위에 거대한 돌로 황제의 功德碑를 세우셔야만 좋으실 줄로
아뢰옵니다."시황제는 妖气가 발동했다는 말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공덕비를 세우는 것만은 기쁜 일이기에, 즉석에서 "그러면 지금부터 <추역산>
으로 가보자" 하고 명령하였다. <추역산>은 笼西에서 동남방으로 5백여리나 떨어져 있는 太山이다.
황제 일행이 추역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황제 전용 도로>를 다시 만들어야만 하였다.
이윽고 황제 일행이 추역산으로 행차하다가 도중에서 갑자기 소나기를 만났다.
그리하여 황제는 길가에 있는 거대한 느티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할 수 있었으므로 황제는
그 느티나무에게 <五大夫>라는 벼슬을 내렸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왕조때에 세조대왕이 속리산에
불공을 드리러 갔다가 소나무가지가 가마에 걸리자 가지가 저절로 올라가 길을 비켜주어,
그 나무에게 正二品 벼슬을 내린바 있는데, 그것은 진시황의 故事를 본딴 것이다.)
시황제가 추역산에 도착해보니, 추역산은 정상에서 동서남북으로 2백여리가 한눈에 굽어 보이는
명산이었다. 시황제는 점성사 송무기를 불러 물어 본다. "鸡头山 정상에 감돌고 있는 妖气를
제압해 버리려면 이 산 꼭대기에 짐의 공덕비를 세워야 한다고 말했것다?"
송무기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예, 그러하옵니다. 허공에 배회하는 요기를 제압할 수 있는
방도는, 오직 이 산 정상에 성상의 위업을 기리는 공덕비를 세우는 길 밖에 없사옵니다."
"그러면 이 산 정상에 짐의 공덕비를 세우도록 하라. 공덕비를 세우려면 거대할수록
효과가 있을 것이니, 이왕이면 거대하게 세우라." 이리하여 추역산 정상에 시황제의 거대한
공덕비를 세우게 되었는데, 그 비문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황제, 天位에 임하시사,
官制를 새롭게 제정하시고, 法度를 분명히 밝혀 놓으시니, 만천하의 백성들이 한결같이 복종하여,
사상처음으로 태평성대를 이루었도다. 이로써 治世의道를 천지와 더불어 운행하시니, 大义가昭明하여,
만백성들은 생업이 날로 반성해 갔도다. 황제께서는 천하를 평정하신 이후,
날이면 날마다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시고, 저녁에는 늦게까지 주무시지 아니 하시고,
오로지 国利民福에만 전념하시니, 贵贱이 융통하고 상하가 융합하여, 황제의 德化는 천지와 더불어
무궁하도다. 시황제는 거대한 비석에 아로새겨진 자신의 공덕 비문을 읽어보고 적이 만족스러워 했다.
시황제는 함양으로 돌아 오다가. 지부산(之罘山)에도 들러보았는데, 지부산도 경치가 매우 빼어나므로,
그 산 위에도 똑같은 공덕비를 또 하나 세우게 하였다. 그냥 그 뿐이랴,琅玡山에 들렸을 때에는
눈앞에 보이는 황해 바다 경치가 너무도 뛰어나, 그곳에 석 달간이나 체류하면서 그곳에도 또 하나의
공덕비를 세우게 하였다.공덕비를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전제 군주들의 공통적인 생리인지도 모른다.
1-046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