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무임승차 하지 말자
날짜 : 2019년 7월 27일(토)
북촌단청공방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5길 4, 원서동 41)
북촌 불교미술 보존 연구소와 서울시가 함께 하는 열린 공방으로, 전통문화 발전을 위해 2대째 가업을 있고 있다
불교미술과 문화재수리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전문 교육기관으로, 일반인도 쉽게 단청과 친숙해 질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단청에 대한 교육을 해주신 김다래 원장님 이시다
(교육생 학습시간 임에도 어려운 시간을 내어 단청에 대한 설명을 해주신 원장님 고맙습니다 꾸벅~)
단청(丹靑)은 한국의 전통 목조건축물에 여러 가지 색으로 무늬를 그려 아름답고 장엄하게 장식하며, 나무에 벌레가 먹지 않게 하고 썩지 않게 하기 위해, 또 한국에서 건축재로 흔히 쓰이는 소나무의 균열을 감추고 건축의 결함을 가리기 위하여 색을 칠하는 것을 말한다
송진우 집터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길 117, 원서동 74-1)
1920년대 초부터 1945년 13월 30일 피살당할 때까지 살던 곳이다
지금은 일반주택(레스빌)으로 변했다
♤ 송진우(宋鎭禹)
전라남도 담양군 고지면 출신이다
일본 유학 후 귀국, 김성수와 함께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교감에 취임했다가 1919년 2월 교장이 됐다
3.1 만세 운동을 주동한 민족대표 48인의 하나로 체포되었다가 복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아 1년 반 동안의 미결수 구류를 치르고 풀려났고, 이후 현실주의자로 변신한다
김성수 등과 동아일보를 창립, 동아일보사장, 주필, 고문 등을 역임하며 언론활동에 종사하였고, 실력 양성이 민족의 독립을 가져온다는 신념하에 물산장려운동 등에 참여하였고, 태평양전쟁 전후에는 병을 핑계로 창씨개명 과 임전 협력을 거부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직전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권인수를 제의받았으나 거절하였고, 광복 직후 여운형으로부터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를 요청 받았으나 거절했다
이후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항하여 국민대회준비위원회를 조직, 임시정부 법통론을 주장하며 참여를 거부하였다
1945년 9월 16일 한국민주당이 창당되자 한민당 초대 수석총무(당수)에 추대되었으며, 1945년 12월 1일 복간된 동아일보의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45년 12월 27일의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 찬반 문제를 놓고 신중한 반탁론의 입장을 펼쳤다가 찬탁론자로 몰려 12월 30일 새벽 6시경 원서동 자택에서 한현우 등 6인의 총격을 받고 피살됐다
♤ 국민대회준비위원회(國民大會準備委員會)
1945년 9월 7일 송진우가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항하여 '임시정부 봉대'(임정봉대론)를 주장하며 설치한 기관이다
여운형은 좌-우를 떠나 합작을 원칙으로 송진우에게도 건준에 참여를 권고하였으나, 송진우는 '경거망동 하지말라. 중경 임정을 맞아야한다.'며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를 거부하였다
송진우는 여운형의 요청을 거절한 후 3.1 운동 직후부터 상해, 중경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독립운동을 해온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면서, 건국준비위원회에 반대하여 국내 민족주의자와 지주 계급, 우파 지식인층들을 소집하여 '국민대회준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국민준비대회준비위원회의 회원들은 9월 6일과 9월
7일 각각 고려민주당, 조선민족당, 한국국민당을 창당했는데 9월 16일 이들을 통합하여, 천도교 강당에서 한국민주당을 창당, 결성하였다
미군정 주둔 이후 라이벌 격인 건준은 해산되었고, 한민당 창당 이후 회원들은 거의 한민당 활동에 치중하고 있었으므로 조직은 사실상 소멸된 상태였다
1945년 12월 30일, 모스크바 3상 회의에 신탁통치안 문제 논의과정에서 송진우가 암살되고 나머지 회원들은 한민당 정치활동을 하거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로 건너가면서 국민대회 준비위원회는 흐지부지 해산되었다
최송설당은 고종의 후비인 엄비의 도움으로 궁에 입궐하여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의 보모 생활을 하고 김천으로 낙향하여 육영사업에 정진하였다
전재산인 30만 2100원을 기부하여 지은 김천고보가 현재의 김천중, 고등학교로 발전되었다
고종으로부터 귀비에 봉해지고 송설당(松雪堂)이라는 호를 부여 받았다
노수현 집터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길 121, 원서동 75)
간송 김형필의 후원으로 1944년에 화실을 마련하고
1956년 6월까지 거주하였다
♤ 노수현(盧壽鉉)
1899년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1913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이듬해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 동양학과를 나와 그림공부를 하다 1917년 다시 안중식 화숙(安仲植畵塾)에서 수학하였다
1921년 동아일보에 입사했다가 1923년 조선일보로
옮기고, 1926년 조선미술전람회에, 1929년 조선박람회(朝鮮博覽會)에 입선하여 금패를 받았다
194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가 되고 1962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명예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에 선임되었으며 1974년 회고전을 열었다
조선미술상·은관문화훈장(銀冠文化勳章) 등을 수상하고,《고금영서(古今迎書)》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친일 잡지 <신시대>에 만화 <멍텅구리>를 통해 전쟁 지원을 역설하는 등 일제에 협력한 행적이 있다
임 규 집터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길 108, 원서동 54)
♤ 임 규(林 圭)
전라북도 익산 출생이다(1867. 9.23 ~ 1948. 3. 7)
일본의 게이오의숙을 졸업하고 경성부에서 일본어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19년 2월 27일 최남선에게 선언서와 통고문을 받아들고(일설에는 선언서를 갖어가지 않고 외윘다고도 함) 서울을 출발하여 3월1일 도쿄에 도착했고, 3월 3일 우송을 마쳤다
귀국하던 중인 3월9일에 체포되어, 미결수로 1년 7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10월 복심에서 무죄로 판결되자 석방되었다
그는 같은 일본 유학생 출신으로 사전 편찬 모임인 조선광문회를 함께 했으며 최남선의 권유로 운동에 참여하기로 했다
일본어 실력이 능통하므로 도쿄로 이동하여 기미독립
선언서와 통고문을 일본 정부와 의회 등 공식 기관에
전달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선언서는 우리가 조선독립을 꿈꾸는 것은 조선인을 위한 것인 동시에 일본이 사악한 길부터 벗어나 동양을 지키는 중책을 완수시키기 위해서라고 적혀 있었다
조선뿐만 아니라 길을 벗어난 일본을 구하기 위해서
라고 선언서는 또, 아시아의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1963년 독립유공자 표창, 1977년 건국훈장이 추서
되었는데 그것은 1919년 3.1만세 운동과 관련된 행적 때문이었다
육당이 3주간에 걸쳐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한 곳이
임규의 집 바로 이곳이다
(부인이 일본인이라 의심을 덜 받았을 수 있다)
♤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
1910년 경술국치와 함께 일제가 한국사 교육 금지와
고전문화재 반출을 자행하자, 최남선 등은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우리 고전의 수집, 간행과 보급운동의 필요성에 주목하게 되었다
최남선은 1910년 12월 초 신문관 2층에 조선광문회를발족하고, 고전 간행, 귀중 문서의 수집, 편찬, 개간을 통한 보존, 전파를 꾀했다
(최남선은 1907년 여름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을지로 2가 2번지 자신의 집에 인쇄소 겸 출판사로 신문관을 설립하였다)
주요 간부는 장지연, 유근, 이인승, 김교헌 등으로, 수사, 이언, 입학을 3대 지표로 했다
첫 사업으로 <동국통감>, <열하일기>를 간행하고, 유근, 이인승을 편집으로 옥편 <신자전>을 간행했다
이어 주시경, 권덕규, 김두봉 등이 조선어 사전인 <말모이>의 편찬을 준비했으나, 주시경의 죽음으로 중단되었다
일제의 문화적 말살정책에 대해 '조선정신'의 발견과
전통문화의 보존, 계승으로 저항했다
♤ 말모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사전
개화기 이후 국한문 또는 국문 중심의 문자생활이 이루어지면서 국문의 정리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고 언어생활의 규범이 될 만한 사전을 편찬해야 한다는 요구가 증대되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 주시경·김두봉·이규영·권덕규 등의
4인이 참여하여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에서 1911년부터 <말모이>의 편찬에 착수했다
1914년 주시경이 세상을 떠나고 <말모이> 편찬의
바탕이 되는 <조선말본>을 간행했던 김두봉이 상하이로 망명하자 <말모이>편찬은 거의 완성 단계에서 중단되어 책으로 발간되지 못했다
현재는 그 첫째권으로 보이는 'ㄱ~걀죽'까지의 표제어가 포함된 1권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최근에 동명으로 이에 대한 영화가 제작, 상영되었다)
요런 재밌는 건물도 만나고 ㅎㅎ
훼손된(되고 있는?) 창덕궁 담벼락이 보이고 ㅠㅠ
창덕궁 요금문이 나온다
창덕궁 요금문 (서울시 종로구 와룡동 2-71)
창덕궁의 서북쪽 문으로 태종 임금 때 만들어졌지만 편액(扁額, 문 이름이 적힌 판)이 없어 성종 6년 서거정을 불러 이름을 짓게 하였다
요금(金)의 ‘요(曜)’자는 빛난다는 뜻이고 ‘금(金)’자는 오행에서 서쪽과 가을을 상징한다
때문에 ‘금빛이 빛난다’는 의미로 해석 할 수 있다
성종 12년에는 대궐문을 여닫는 데에 도총부 낭청(都摠府郞廳) 1명, 겸사복(兼司僕) 1명, 중궁사약(中宮司鑰) 1명이 관장하도록 하게 된다
효명세자(孝子世子) 이영이 대리청정을 하던 시절 요금문을 통하여 나가 걸어서 10분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살고 있는 2살 많은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환재 박규수를 만나러 다니던 문이다
세자는 그를 친구이상의 관계로 자주 궁궐로 불러들여 학문을 논하고 친분을 나누었다고 한다
이 문은 궁중의 왕족을 제외한 내시, 상궁들 같은 궁인들이 병들어 죽음에 이르렀거나 죽었을 때 퇴궐시키던 문으로, 주검을 살아있는 형태로 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인현왕후처럼 이 문을 통하여 살아서 나갔다가 다시 살아서 들어온 경우도 있다
1884년 갑신정변 때 고종과 명성왕후는 관물헌을 나와서 이 문을 통하여 지금의 현대 사옥 뒤편 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의 사당인 경우궁
(景祐宮)으로피신하였다고 한다
은덕문화원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길 49, 원서동 129-5)
원불교에서 문화예술공간이자 도량으로 운영하고 있는 한옥으로 전은덕 대호법이 자신의 집을 기증한 것이기 때문에 은덕문화원으로 불리고 있다
원불교에서 마련한 공간이지만 종교적인 색채를 띠지 않고 북촌의 열린공간이다
이 문화원 부지는 지금은 창덕궁길을 사이에 두고 창덕궁과 분리되어 있지만, 한일합방 이전에는 창덕궁 내에 있었던 군기창(무기보관장소)자리였다고 한다
1910년 경술국치로 일제는 창덕궁의 부지를 축소하면서 이 자리가 궁궐의 담장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으며, 그 후 민간주택이 건설되었다는 것이다
♤ 원불교(圓佛敎)
1916년 교조(敎祖)인 소태산(少太山) 대종사(大宗師) 박중빈의 대각(大覺)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개교(開敎)의 동기를 "물질이 개벽(開闢)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로 요약해서 표현했다
이는 정신 문명의 주체성을 확립해서 물질문명을 올바른 방향으로 활용하여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이 원만하게 발전되는 새로운 세계를 지향함을 뜻한다
깨달음을 얻은 뒤 박중빈은 고향인 영광을 중심으로
초기 공동체를 모았다
1916년 영광군 길룡리에서 불법연구회를 조직하여
8 - 9인을 규합한 것이 최초의 공동체로 이들은 저축조합을 함께 운영하였다
방언조합이라는 명칭도 사용되었다
원불교 초기 공동체는 영광 지역에서 간척사업을 하며 확대하고 있었으나 조선총독부의 신흥종교 감시 대상이 되었다
박중빈은 체포되어 1주일간 구금된 뒤 석방되었고 영광을 벗어나 전국적인 종교로 확장하기로 마음 먹었고 전주를 비롯한 여러 곳을 총부의 후보지로 물색하다가 이리(현 익산)에 총부를 세우게 되었다
원불교 익산성지는 1924년 원불교 총부(당시 명칭은
불법연구회)가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차츰 필요한 건물을 세워 하나의 마을을 이루었다
1924년 불법연구회의 간판이 걸린 본원실을 비롯하여 1929년 세워져 훗날 원광대학교의 모태가 되는 공회당을 비롯한 일제 강점기의 목조 건물들이 밀집하여 있어 2005년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179호로 지정되었다
1943년 박중빈의 죽음으로 송규가 2대 종법사가 되었다
2대 종법사 송규는 해방 이후 교단의 이름을 원불교로 개칭하고 교리를 정비하였다
1948년 종교단체로 법인 설립 허가를 받았다
원불교의 개조인 박중빈 스스로 자신의 깨달음이 불교에 연원한다고 하였을 뿐 역사나 인물, 조직 운영면에서 기존의 불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1967년 5월 현재의 한국불교종단협의회의 전신인 대한불교총연합회가 출범할 당시 가입하였으나 1970년 불교재산관리법에 대한 의견 차이로 탈퇴하였다
2004년 대한불교종단협의회 재가입 논의가 있었으나 2019년 현재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 싸롱 마고
" ‘마고’ 여신을 내세우는 이면에는 ‘여성 중심’의 남녀평등을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도 깃들어 있다. ‘무서운 어머니’로서의 전투적 여성해방운동보다는 남성들의 협조를 유도해 ‘자애로운 모성’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 김지하 시인의 변(辯)
[얼마 전까지만해도 원불교측에서 생명운동 하는 김지하 시인에게 사랑방으로 지원했었는데 현재는 원불교측에서 직접 쉼터(카페)로 운영하고 있다]
싸롱 마고에서 잠시 쉬어간다
금위영 서영터 (서울시 종로구 창덕궁길 49, 원서동 129-5)
금위영 서영은 조선시대에 도성 삼군문(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의 하나인 금위영의 분영이다
♤ 금위영(禁衛營)
인조(仁祖) 때 기병(騎兵) 중에서 정병(精兵)을 선발하여 병조 산하에 두었던 정초군(精抄軍)과 훈련도감의 별대(別隊)를 통합하여 1682년(숙종 8)에 설치되었다
처음부터 5군영의 일부로 독립된 채 생겨난것이 아니고, 병조판서가 금위영의 대장직을 겸함으로써 실질적으로 6조 중에서 병조의 수중에 있었다
이후 1754년(영조 30년)에 독립된 군영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주 임무는 국왕호위와 수도인 한양을 방어하는 것이다
이 군사 부대의 군량미 창고로는 남장(南倉)이 있었다
아울러 금위영은 오늘날 대한민국 대통령경호실과 대한민국 육군 수도방위사령부, 군사안보사령부의 역할을 하였다
박인환 집터 (서울시 종로구 원서동 134-8)
1926년 강원 인제에서 태어난 박인환이 사업차 상경한 아버지를 따라와 살았던 곳이다
박인환의 집에 살았다는 사람이 남긴 글이다
"이 집안에 방이 7개나 있었어요. 그 중에는 비원이 훤히 내다 보이는 방도 있고요. 이 건물이 80년 됐어요. 제가 건축대장 떼보니 1930년대 지은 것으로 나와 있더라고요. 박 시인이 있던 방은 왼쪽 끝방이라 비원이 안 보였을 거예요"
♤ 세종로 집터 (서울시 종로구 종로 1, 세종로 116)
1948년 결혼 후 원서동 시댁에서 밤마다 친정이 그리워 우는 아내를 위해 처가살이를 한 아내 이정숙의 친정집으로 1956년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거주하며 창작활동을 하던 집터다
이곳에서 큰아들 세형과 딸 세화을 얻었다
♤ 박인환(朴寅煥)
1926. 8.15 강원도 인제에서 4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평양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8·15 해방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그 뒤 상경하여 마리서사(茉莉書舍)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김광균(金光均)·이한직(李漢稷)·김수영(金洙暎)·김경린(金璟麟)·오장환(吳章煥) 등과 친교를 맺기도 하였다
1946년 국제신보에 '거리'를 발표하면서 활동시작함
1948년 서점을 그만두면서 이정숙(李丁淑)과 혼인
하였다
그 해에 자유신문사, 이듬해에 경향신문사에 입사하여 기자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56. 3.17일을 유난히 좋아했던 시인 이상의 기일로 알고(실재로는 4월17일 이었다 함) 오후부터 지인들과 이상을 추모하며 폭음하다 1956. 3.20 오후 9시경 심장마비로 사망(31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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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에 발간된《박인환선시집》에 그의 시작품이망라되어 있으며 특히「목마와 숙녀」는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으로서 우울과 고독 등 도시적 서정과 시대적 고뇌를 노래하고 있다
1956년 작고 1주일 전에 쓰여진「세월이 가면」은
노래로 만들어져 널리 불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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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서사 터 (서울시 종로구 수표로 104, 종로3가 2)
한국 모더니즘 시운동의 발상지인 ‘마리서사(茉莉書舍)’ 는 박인환이 20세가 되던 1945년 해방 후 평양의학전문학교를 그만두고 상경해 아버지를 설득하여 3만 원을 얻고 작은이모에게 2만 원을 빌려서 지금의 ‘송해거리’ 입구 ‘대한보청기’ 자리에 문을 연 20평 규모 서점이다
절친이자 선배 시인 오정환(후에 월북)의 남만서점을 해방 후에 물려받은 것이다
마리서사 앞에서 임호권과 함께 - 1947년 3월
초현실주의 화가 박일영의 도움으로 세련된 분위기의 인테리어를 하고 문을 연 ‘마리서사’는 책을 좋아하고 예술가들의 교류 장소를 만들고 싶어했던 박인환의 꿈이 실현된 곳으로 새로운 문물에 대한 욕구와 정열이 한창인 때에 예술인들의 작은 캠퍼스였다
‘마리서사’에서는 앙드레 브르통, 장 콕도 등 여러 문인의 작품과 문예지, 화집 등 주로 문학, 예술분야의 서적들을 취급하였다
이곳에서 김광균, 김기림, 김수영, 임호권 등 문인, 예술인 등과 교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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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인환은 이곳에서 손님으로 왔던 문학소녀 이정숙과 만나 1948년 결혼하였다
1948년 입춘 무렵에 마리서사가 문을 닫자 이를 걱정하던 김경린에게 박인환은 말한다
“김형, 나는 아무 미련이 없어. 그때 드나들던 많은 친구들을 사귄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야지. 하지만 김형, 그 때에 손님으로 찾아왔던 정숙을 알게되어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마침내는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니 서점에서 보석을 얻은 셈이지”
♤ 은덕문화원, 싸롱 마고, 박인환집터 모두 지금은
창덕궁 궁궐담장 밖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창덕궁 궁궐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