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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 ☆ 2022년 퇴계 선생 마지막 귀향길 700리 종주이야기 (7)
퇴계 선생의 발자취, 경(敬)으로 따르다
2022.04.04~04.17.(14일간)
* [제7일] 4월 10일(일) 강천섬(굴암리)→ 가흥창(가흥초교) (29km)
* [1569년 기사년 음력 3월 10일 퇴계 선생]
◎ ‘흔바위나루’(강천섬)에서 배를 탄 선생은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가 섬강과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흥원창’ 앞을 지나, 남한강 상류 충주 방향으로 향하였다. 이윽고 선생의 배는 충주 고을 경계로 들어갔고, 얼마 뒤에 ‘가흥창’ 가까운 나루에 배를 대었다. 당시 충청감사 유홍(兪泓, 1524~1594)이 마중 나와 있었다. 이때 유홍이 시를 지어 선생에게 바쳤다. ○〈贈退溪〉(증퇴계, 퇴계에게 드린다)이다.
百世斯文在 백세사문재 백세 흘러 도가 선생에게 있나니
高名斗以南 고명두이남 북두 이남 드높은 명성이어라.
天將調鼎鼐 천장조정내 임금님 국정 맡기시려 하나
身欲老江潭 신욕노강담 선생은 고향 강가에 늙고 싶어라.
日月閑中遣 일월한중견 해와 달 한가로이 보내며
乾坤靜裏探 건곤정리탐 고요 속에 우주의 이치 더듬는도다.
男兒能事盡 남아능사진 남아도 할 일 다할 수 있었나니
俯仰兩無慚 부앙양무참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러움 없어라.
— 《松塘集(송당집)》〈贈退溪〉(증퇴계, 퇴계에게 올리다)
이에 대해 퇴계 선생이 화답시 두 수를 지었다. 〈충청감사 유홍의 시에 차운한 두 수〉이다.
乞退辭天上 걸퇴사천상 물러나 쉬기를 빌어 임금님 하직하고
言歸指嶺南 언귀지영남 돌아감에 영남으로 향하노라.
杯傳加興館 배전가흥관 가흥관에서 술잔 주고받고
新泝達川潭 신소달천담 달천담 거슬러 배 저어 가노라.
世事歆高論 세사흠고론 세상일에는 고담준론 흠모하였고
仙區聳歷探 선구용역탐 선경은 두루 더듬었기에 힘 솟았도다.
詩來言過重 시래언과중 보내온 시 말씀이 너무 무거워
吟對碧山慙 음대벽산참 읊조리며 푸른 산 마주하니 부끄러워라.
그리고 이어진 또 한 수(首)이다.
故國藏蹤日 고국장종일 서울에서 자취 감추던 날
中原別恨春 중원별한춘 중원의 이별 한스러운 봄날이라.
那知棠案筆 나지당안필 어찌 알았으리, 당안의 붓이
能記鹿群身 능기녹군신 사슴무리 속에 있는 이 몸 기억해 주리란 것을.
好鳥迎時哢 호조영시롱 아름다운 새 시에 맞춰 노래하는 듯하고
幽花照墨新 유화조묵신 그윽한 꽃 먹빛에 비취 새롭구나.
酬書更回首 수서갱회수 답글 적고 고개 다시 돌리나나
何日得重親 하일득중친 어느 날 다시 만날 수 있을까.
—《退溪集(퇴계집)》〈次韻忠淸監司兪泓之二首〉(차운충청감사유홍지이수)
이 시는 충주(忠州)에서 선생이 지어 유홍(兪泓)에게 준 시 중 두 번째 것인데, 이별의 아쉬움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 충주를 떠나 고향으로 향하면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시 제목의 차운(次韻)이라는 표현을 보아 유홍의 시로 운을 달리한 두 수였을 것이나, 《松塘集》에는 한 수만 실려 있다.
◎ 이후 유홍(兪泓, 1524~1594)은 1589년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 1등을 받았고, 정여립(鄭汝立)의 사건에 위관으로 참여하여 평난공신 2등에 올랐다. 임진왜란 때는 우의정으로 4도체찰사가 되어 세자의 분조에 활동하였고, 좌의정까지 지낸 명사였는데, 시를 특히 잘 지었다. 1570년 선생이 별세하자 당시 우승지였던 유홍은 왕명을 받들고 도산으로 내려와서 치제(致祭)하였던, 각별한 인연이 더 있었다. 유홍의 조카로서 뒤에 안동부사를 지낸 유대수(兪大修, 1546~1586)는 선생의 문인이다.
* [2022년 4월 10일 일요일 귀향길 재현단]
▶ 오늘 귀향길 재현단은 남한강 강천섬 앞 굴암리를 출발하여 충주 가흥창(터)에 있는 가흥초등학교까지 총 29km를 걷는다. 오전 8시, 굴암리 마을 앞, 어제의 종착점이었던 남한강 강변에 재현단이 집결했다. 그 동안 미음나루까지 걷고 외부의 행사가 있어 함께 하지 못했던 김병일 원장이 복귀하여 다시 재현단과 함께 걷게 되었다. 오늘은 퇴계 선생 17대 종손 이치억 공주대 교수와, 한국콜마 윤동한 회장을 비롯한 명사 두 분도 함께 참석하였고, 특히 김병일 단장의 부인과 아드님이 참석하였다.
▶ 굴암리 한강변에 도열한 귀향길 재현단 —, 김병일 원장이 오늘의 일정을 말씀하신 후 이동신 별유사의 진행으로 연시조 〈도선십이곡〉제6곡을 반주음과 함께 노래했다.
춘풍(春風)에 화만산(花滿山)하고
추야(秋夜)에 월만대(月滿臺)라
사시가흥(四時佳興)이 사람과 한가지라
하물며 어약연비(魚躍鳶飛) 운영천광(雲影天光)이아
어늬 그지 이슬고
— 봄바람이 불어 꽃은 산에 가득 피어 있고, 가을밤 달빛은 누대에 가득하다. 사계절이 각기 지닌 흥취는 사람과 한 가지라 하물며 물고기는 물에서 뛰놀고 솔개는 하늘을 나는데, 구름의 그림자와 밝은 햇살은 어찌 끝이 있을까. … 계절의 성격이 다르고 모든 사물의 현상이 제 각각 다른 흥취를 보이지만, 다 같은 생명으로 약동하는 대자연 속에서 하나의 조화를 보이고 있다. 이는 천인합일이라는 궁극적인 경지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현실적인 도(道)의 경지이기도 하다.
봄날 산을 뒤덮은 흐드러진 꽃들과 누대(樓臺)에 교교하게 비치는 달빛을 묘사하면서 물아일체(物我一體)를 구가했다. 강호에 존재하는 갖가지의 자연물 하나하나는 모두가 그들 나름의 흥(興)이 있다. 시에 등장하는 꽃과 물고기 그리고 솔개 등의 자연물도 작품 속의 사람과 함께 대등하게 이(理, 天理)를 가졌거나 또는 흥취를 공유하고 있다. 바로 물아일체의 경지이다. 연못에 뛰노는 고기와 하늘을 나는 솔개 등은 사람의 종속물이 아니고 대등한 독립체로 인식하는 것이다.
오늘의 출행
▶ 오전 8시 30분, 재현단은 준비운동을 마친 후 일행은 오늘의 장정(長征)에 돌입했다. 선두의 이한방 교수를 비롯하여 의관을 갖춘 이광호 박사, 이재찬·이원필 님. 홍덕화 님, 송상철·오상봉 님등 선비단이 대열을 이루고 그 뒤에 평상복을 입은 도산서원 이태원 별유사, 국학진흥원 권진호 박사, 어제 서울에서 내려온 나대용 박사·정학섭 박사, 윤재철 님, 그리고 연일 걷고 있는 이상천, 진병구, 남동현, 노복순, 진현천 님 등 종주단이 뒤를 따랐다. 오늘은 월간 ‘사람과 산’의 선주성 편집주간도 참여하여 열심히 사진을 찍으면서 취재를 했다. 필자가 카메라를 들고 선두에서 향도를 맡았다. … 특히 오늘은 (주) 한국콜마 윤동한 회장과 지인 두 분이 함께 참석하고 퇴계 선생 17대 종손 이치억 박사가 의관을 정제하고 동행했다.
섬강로, 창남이고개를 넘다
▶ 강천섬 앞 굴암리에서 강안을 따라 가는 길은 가파른 산길이 아직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고, 섬강 하구의 다리가 없기 때문에, 길은 강안을 떠나 돌아가는 도로를 따라 걸었다. 여주시 강천면 강천1리 마을 앞의 도로를 따라 영동고속도로와 나란히 가는 (구) 영동고속도로를 이용하여 걸은 것이다. 실제 차는 많이 다니지 않은 도로이다. 정면으로 쏟아지는 아침햇살이 유난히 따갑다.
오전 9시 17분, 다리골마을 창남이고개 마루에서 처음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도로는 완만한 내리막길이었다. 강천2리에서 섬강교를 건넜다. 바로 옆에 새로 건설된 영동고속도로 거대한 교각이 시야를 압도한다. 다리를 건너, 바로 q자 형태의 길을 돌아 교각 아래에서 섬강(蟾江) 둔치의 길을 따라 남한강 유입 지점의 제방에 이르렀다.
섬강(蟾江)
1569년 이날, 퇴계 선생은 흔바위나루(강천섬)에서 바로 남한강 물길을 거슬러 충주 방향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이날의 재현단은 도로를 따라 걸어가게 되므로 부득이 멀리 돌아서 섬강이 남한강에 합류하는 지점에서, 다시 남한강 동쪽의 제방 길에 들어선 것이다.
섬강(蟾江)은 강원도 횡성의 한강기맥 태기산 남쪽에서 발원하여 횡성호—횡성읍을 지나 원주시 지정면 간현관광지를 경유하여 이곳 남한강에 유입되는데, 섬강 하구는 경기도 여주와 강원도 원주의 경계를 이룬다. …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 첫머리에 나오는 바로 그 섬강(蟾江)이다.
江강湖호애 炳병이 깁퍼 竹듁林님의 누엇더니,
關관東동 八팔百백里니에 方방面면을 맛디시니,
어와 聖셩恩은이야 가디록 罔망極극하다.
延연秋츄門문 드리다라 慶경會회 南남門문 바라보며,
下하直직고 믈너나니 玉옥節절이 알패셨다.
平평丘구驛역 말을 가라 黑흑水슈로 도라드니,
蟾셤江강은 어듸메오, 稚티岳악이 여긔로다. … 〈관동별곡 원문〉 첫 머리
— 선조 13년(1580), 45세 정철이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어 한양의 광화문을 출발하여 원주 감영에 부임하는 여정이다. ‘方방面면’은 관찰사이고, ‘延연秋츄門문’은 경복궁 서문이며 ‘慶경會회 南남門문’은 광화문이다. ‘玉옥節절’(임금이 내린 관찰사 깃발)을 앞세운 관찰사 정철은 광화문을 출발하여 ‘平평丘구驛역’(남양주 삼패동)에서 말을 갈아타고 ‘黑흑水슈’(양평 용문)를 돌아서 이곳 ‘蟾셤江강’을 건너서 강원도 감영이 있는 ‘稚티岳악’ 산 아래 원주에 부임한 것이다. — 〈관동별곡〉을 포함한 네 편의 송강가사(松江歌辭)는 조선 시대 시가문학의 백미(白眉)로 꼽힌다.
그러나 정치인으로서 정철은 문제적 인물이다. 선조 22년(1589) 겨울에 벌어진 기축옥사(己丑獄事)는 조선 정치 풍토를 뒤집어 놓은 참혹한 사건이었다. 기축옥사는 서인이었던 정여립이 여당인 동인으로 당적을 옮기고, 그가 반역을 꿈꾸다 발각돼 벌어진 사건이다. 역적 토벌을 빌미로 이후 3년 동안 1000명에 달하는 동인 선비가 학살당하고 유배당한(東人誅連以千計, 이건창, 〈당의통략〉) 참극이다. 그 옥사를 담당한 위관이 바로 서인 당수, 정철이었다. 그 악랄함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섬강 하구의 절경
오늘 재현단 일행이 걷는 이 섬강 하구의 제방 길은 행정구역상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이다. 여기 남한강 본류와 섬강, 두 물줄기가 합류하는 곳, 맞은편에 자산(紫山)의 절벽이 솟아 있어 경치가 일품이다. 옛날 이 인근에 ‘원흥창나루’가 있었다. 섬강 하구의 제방에 일행이 걸음을 멈추고, 김병일 원장이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과 이 지역에 관련된 내용을 설명을 하기도 했다. 깨끗한 하늘, 밝은 햇살이 쏟아진다. 한참 동안 모두 남한강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주) 한국콜마 윤동한 회장
오늘은 한국콜마(주) 윤동한 회장이 지인(知人) 두 분과 함께 참석하여, 굴암리 출발지부터 우리 귀향길 재현단과 동행하고 있다. 필자는 지난 3월 19일 조선일보 섹션지 ‘아무튼 주말’에서 윤동한 회장의 인터뷰 기사를 읽은 바 있어서, 오늘 함께 동행 하게 되어 매우 반가웠다.
윤동한 회장은 대구 계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계성고를 나온 이광호 박사의 고등학교 선배라고 했다.) 그는 영남대학교 경영학과에 재학한 4년 내내 장학생이었고, 대학을 졸업한 후 1970년 농협중앙회에 입사했다. 1974년 경영대학원을 나와 농협 5년 근무를 마치고 당시 중소기업이었던 대웅제약에 입사하여, 15년간 근무하면서 최연소 부사장이 되었다.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1990년 ‘한국콜마’를 창업하여 화장품과 제약업계 굴지의 기업으로 키워냈다. 처음 직원 6명을 데리고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지금은 연 2조원대 매출에 직원 3,400명을 거느린 기업의 회장이다.
특히, 한국콜마 윤동한 회장은 ‘이순신 장군’으로 리더십을 모델로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이다. 2017년 ‘서울여해재단(汝諧財團)’을 만들고, 산하에 이순신학교를 운영하면서 중견 직장인을 대상으로 ‘이순신 리더십’을 교육하고 있다. ‘여해(汝諧)’는 이순신 장군의 아호이다. 윤 회장은 이순신 장군의 탁월한 인간성과 지도자로서의 위대성에 주목하여 이순신 장군을 통하여 기업경영의 최고의 가치를 구현하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 현양사업에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최근, 이순신 장군을 위대하게 만든 어머니 ‘초계 변씨 부인’에 관한 평전 《조선을 지켜낸 어머니》를 내기도 했다. 어머니가 전장에 나가는 이순신 장군에게 말한다.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윤 회장은 말한다. “어머니 초계 변씨는 조선 최고의 명장 이순신을 키워낸 여장부”이다. 그리고 “조선의 한반도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해냈던 충무공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지금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 이어지는 말씀을 다 옮길 수 없다.
남한강 흥원창
▶ ‘흥원창(興原倉)’은 충주에서 내려오는 남한강이 여주 방향으로 구부러지고 강원도 횡성에서 발원하여 내려오는 섬강이 남한강에 합류하는 지점에 있다. 지금의 원주시 부론면 홍호리 강변이다. 흥원창은 고려시대부터 운영되던 조운창으로, 강원도 남서부 지역의 물산이 이곳에 모여 남한강을 통하여 서울로 올라갔다. 지금의 제방 길의 사각정 쉼터에 ‘흥원창’이 있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을 뿐이다.
다시 이어지는 긴 제방길
▶ 흥원창 사각정 쉼터에서 한참을 쉰 후, 재현단은 부론면의 긴 제방을 길을 따라 걸었다. 우측에 한강물을 끼고 이어지는 바이크로드, 사방의 시야가 시원하게 열려 있다. 따가운 봄 햇살이 사정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제방 길은 길고 멀었다. 하류의 강천보 담수로 인하여 한강은 고요한 호수를 이루고 있다. 오늘은 퇴계 선생의 17대 종손 이치억 박사가 참석하여 의관을 정제하고 함께 걷고 있다. 이치억 박사는 현재 공주대 교수이다. 주중에는 강의가 있어 참석하지 못하다가 오늘 일요일을 맞아 여정에 동참한 것이다. 재현단 선비들의 하얀 도포자락이 부드러운 강바람에 펄럭인다.
법천마을 —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는 천 년 고찰 법천사가 있었다. 지금을 터만 남았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101호인 ‘지광국사 현묘탑(智光國師 玄妙塔碑)’이 유명하다. 법천사 터 인근 법천(法泉) 마을은 유학자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이 살았던 곳이다. 그는 기호지방 출신이면서 퇴계(退溪)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따르고 율곡(栗谷)의 학설을 비판(批判)하였다. 당시 영남의 퇴계학파를 이끌었던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과 매우 절친하였으며 학문적으로 깊게 교유했다. 《이자수어》를 편찬한 성호(星湖) 이익(李瀷)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던 그는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가장 존경하였던 나주 정씨 집안의 방친(傍親) 조상이다.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
이곳 원주시 부론면 법천마을은 ‘퇴계의 학맥’을 잇는 우담 정시한의 고장이다.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자는 군익(君翊)이고, 호는 우담(愚潭), 본관은 나주(羅州)이다. 인조 3년(1625) 서울 회현방에서 태어나 숙종 33년(1707) 원주에서 세상을 떠났다. 증조부는 병조판서·대사헌을 지낸 고암(顧菴) 정윤복(丁胤福)이고, 부친은 관찰사 정언황(丁彦璜)이며, 어머니는 횡성 조씨(橫城趙氏) 직제학 조정립(趙正立)의 따님이다. 대대로 벼슬을 한 서울의 양반가 중 명문이었다. 그는 25세 때 강원도 원주의 법천(法泉)으로 낙향하여 평생 벼슬을 멀리하고, 오직 이현일(李玄逸)․이유장(李惟樟)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에 힘썼으며, 성리학의 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1689년(숙종 15)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南人)이 집권한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자, 정시한은 남인에 속하면서도 인현왕후를 폐위시킨 일은 잘못이라고 소(疏)를 올렸다가 삭탈관직 당하였다. 이 해에 다시 기용되었으나 사퇴하고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 1694년 서인들의 인현왕후 복위 운동으로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 인현왕후가 복위되어 서인(西人)이 집권하고 남인이 실세하자, 1696년 희빈 장씨(禧嬪張氏)를 정비에서 희빈으로 강등하는 것에 반대하는 소(疏)를 올렸다. 이처럼 정시한은 당파적 입장을 떠나 일관된 의리론적 입장을 지켰다.
1690년(숙종 16) 정시한은〈만언소(萬言疏)〉를 올려, ‘왕의 마음을 바로잡을 것’, ‘집안 다스리기를 엄격히 할 것’, ‘나라의 근본을 배양할 것’, ‘조정을 바르게 할 것’, ‘인재를 쓰고 버림에 신중히 할 것’, ‘언로(言路)를 열 것’ 등 6조(條)를 제시하였다. 이 상소를 보고 왕이 분노하여 관직을 삭탈하도록 명하였다. 그 뒤 세자시강원 진선으로 나아갔다.
정시한의 생애와 인품에 대해 《숙종실록》에서는 “일찍부터 과거 공부를 버리고 편안하게 고향에서 지냈다. 어버이를 섬겨 효도했으며, 성품이 공손하고 조심스러워 남과 비교될 바가 아니었다. 가정은 가난하지 않았으나 검약을 법도로 삼았다. …”고 하였다.
정시한의 학문 세계
정시한(丁時翰)은 부친의 권유로 여러 차례 벼슬길로 나갈 기회가 주어졌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친 시중을 들면서 학문에만 매진했다. 율곡 이이가 퇴계의 성리설을 비판했을 때 정시한이 독자적으로 나서서 이기론과 사단칠정론을 치밀하게 분석하여 퇴계 성리학의 정당성을 입증하며 율곡을 비판했다. 그래서 그의 〈사칠변증(四七辨證)〉은 한국 철학사상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 좀 전문적이기는 하지만, 정시한의 학문세계를 연구한 동인문화원 나대용 박사의 논문, 〈우담 정시한의 이주기보설〉 (《퇴계학보》 제134집, 2013.12.)의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해 본다.
… ‘우담 정시한은 성리설에서 이(理)와 기(氣)의 관계를 현상적으로 주인과 보좌의 역할에 상응시킨 이주기보설(理主氣輔說)에 따라 이기사칠설(理氣四七說)을 전개하였다. 우담은 기(氣)를 이(理)의 보조자로 규정하고, 이(理)를 주재하고 명령하는 자로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이주기보(理主氣輔)는 인심·도심 일원(一源)에서의 근본적인 이기(理氣) 관계이기도 하다. 우담은 이러한 인심·도심 일원을 사단칠정의 혼륜(渾淪)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는데, 이러한 우담의 혼륜에 대한 이해는 율곡(栗谷)의 기발적(氣發的) 혼륜과 구별되는 이발적(理發的) 혼륜이며 갈암(葛庵)의 피상적(皮相的) 혼륜과도 명백히 구별되는 근원적(一源的) 혼륜이다. 특히 절친 갈암 이현일과도 서로 다른 사상경향을 보인다. 갈암의 사칠설은 인심·도심[사단칠정]의 근원과 소종래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고 근원과 소종래를 동일하게 분개하는 인심·도심이원설 즉 이기이원설으로 요약될 수 있고, 우담의 사칠설은 인심·도심의 근원은 일원(一源)이면서 소종래는 인심도심의 분개가 이루어짐을 주장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정시한의 학문적 업적은 성리설의 이기론과 사단칠정론을 정밀하게 분석하여 이황(李滉)의 ‘이생기’(理生氣, 理가 氣를 낳는다) 학설을 명석하게 해명하고 그 도통(道統)을 계승한 데 있다. 정시한은 이현일이 〈수주관규록(愁州管窺錄)〉(1695)을 통해 이이(李珥)의 성리설을 비판함으로써 퇴계학파의 형성에 선구적 역할을 한 것을 계승하여 〈사칠변증(四七辨證)〉을 통해 이이(李珥)의 성리설을 41조에 걸쳐 조목별로 비판함으로써 퇴계학파의 형성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정시한은 이이(李珥)의 성리설이 혼륜에 집착한 기일원론(氣一元論)임을 지적하고, 특히 인심(人心)·도심(道心)이 서로 시작과 끝이 되어 연결된다는 이이의 주장은 명나라 나정암(羅整庵)의 입장과 일치하고 주희(朱熹)와는 상반되는 것이라며 거부하였다. 또한 이황의 이발설(理發說)은 이기구발(理氣俱發)을 의미하는 것이라며 이이의 기발일도설(氣發一途說)을 비판하였고, 이(理)에도 통(通)·국(局)이 있고, 기(氣)에도 통·국이 있다고 하여, “이(理)는 소통하고 기(氣)는 국한한다(理通氣局)”는 이이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정시한은 1700년부터 3년 동안 문인 외암 이식(李栻)과 인성(人性)·물성(物性)의 동이문제(同異問題)에 관한 논변을 벌이면서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의 입장을 전개하였다. 이 논변은 남당 한원진(韓元震)과 외암 이간(李柬) 사이의 인물성론쟁인 호락논쟁(湖洛論爭)에 선행한 것이었다. 홍성(호론)의 한원진은 인물성이론(人物性相異論)을 주장하였고 아산(낙론)의 이간은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하였다.
나대용 교수는 우담 정시한의 성리설(性理說)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 ‘첫째 우담은 퇴계철학의 충실한 조술자이다. 둘째 우담의 사단칠정의 근원은 一源이면서 소종래의 묘맥은 分開된다고 주장하였다. 셋째 우담은 理의 能發 및 理의 직접적인 動靜을 주장하였다. 넷째 우담의 理氣說은 理主氣補이다. 다섯째 우담은 人物性異論을 주장하였다. 여섯째 훗날 大山 李象(1711~1781)의 理主氣資說은 우담의 理主氣補說을 계승한 것이다. —《퇴계학보》 제134집, (퇴계학연구원, 2013.12.) pp.85~86
정시한의 문하에서는 이식(李栻)·황수일(黃壽一)·이만부(李萬敷)·권두경(權斗經) 등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저서로는 문집인 《우담집(愚潭集)》을 비롯하여 〈임오록(壬午錄)〉·〈만록(漫錄)〉·〈산중일기(山中日記)〉·〈관규록(管窺錄)〉·〈사칠이기변(四七理氣辨)〉·〈변무록(辨誣錄)〉 등이 있다.
성호 이익(李瀷)은 묘갈명에서 정시한의 학문적 공적을 “학문의 정맥(正脈)에 거슬러 올라가 이어감으로써 〈사칠변증〉을 저술하니 크게 빛나서 밝았다.”라고 평가하였으며,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방친유사(傍親遺事)〉에서 정시한의 학덕을 존숭하여 “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 이후로 진정하고 순수한 유학자는 오직 선생 한 분뿐이다.”라고 강조하였다. 원주의 광암사(廣巖祠)에 제향되었다. ☜ [민족문화대백과]
법천리의 별미 ‘보리밥’
긴 제방 길을 지나서 재현단 일행은 49번 지방도로 남한강대교 앞에 이르렀다. 이곳 다리 앞의 마을이 부론면소재지인 바로 법천리이다. 법천리 남쪽에는 부론면 손곡리 봉림산(577m)에서 산곡에서 발원한 법천천이 남한강에 유입된다. 법천천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법천사지’가 있고 그 인근에 우담 정시한의 마을이 있다고 한다. … 우리 재현단 일행은 법천의 ‘보리밥집’에서 별미의 점심식사를 했다.
충청북도 앙성면 단암리 남한강 제방[단암제]
식사 후, (서울에서 내려온 일부 인사는 상경을 하고) 재현단은 49번 지방도로 남한강대교를 건넜다. 이제 행정구역상 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 단암리이다. 대교를 건너자마자 죄측으로 남한강 제방[단암제]의 자전거길을 따라 걸었다. 눈앞 보이는 직선의 길은 아득하고 멀었다. 하늘은 맑고 햇살은 눈부시고 따가웠다. 좌측에 남한강을 허리에 끼고 걷는 제방은 끝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직선의 길이었다. 재현단은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대열을 이루어 걸었다. 뒤처지는 사람들도 보인다. 온몸의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단암제의 긴 제방 길을 지나 강천리 제방 길이 이어진다. 강안 둔치의 길로 내려가 수점천 하구의 테크다리를 건너고 한참을 걸었다. 샘개우물을 지나 에어그린하우스 앞 오르막길을 올라 삼거리에 이르렀다. 자동차가 다니는 ‘남한강변로’에 들어선 것이다.
남한강변도로를 따라가는 길
이곳 앙성면 강천리에서는 일반도로[남한강변로]에 바이크로드가 공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각종 차량이 다니는 도로의 가장자리를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도로의 좌측은 남한강이요 우측은 산록을 절개한 옹벽이었다. 강천리를 지나면 영죽리이다. 따가운 햇살이 쏟아지는 먼 노정에 온몸이 피로감이 쌓이고 다리는 경직되고 발바닥에는 불에 댄 듯 화끈거린다. 가끔 강변 쪽 길목에 카페가 보인다. 아, 저 강변의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며 다리를 뻗고 쉬어갔으면 얼마나 좋을까. 잠시 얄팍한 생각이 스쳤지만 우리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질주하는 차들이 다니는 도로를 따라 걷는 것은 참으로 고역(苦役)이다. 전력으로 쌩쌩 질주하는 자동차들, 고즈넉한 백주의 정적을 여지없이 깨뜨린다. 문명은 소음(騷音)이다.
비내섬 쉼터’ 카페
오후 4시,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앙성면 조천리 ‘비내섬 쉼터’ 카페에 도착했다. 남한강을 바라보는 카페의 발코니 그늘에 앉아 다리를 풀었다. 오늘 따라 발가락이 유난히 아프고 발바닥이 화끈거린다. 양말을 벗어 보았더니, 발가락 세 군데에 굵은 물집이 생겼다. 우려했던 것이 확인된 것이다. 필자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물집이 생긴 것을 확인했다. 오늘의 목적지 충주의 가흥창(가흥초등학교)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먼데… 그러나 어쩌겠는가. 참고 걸어야 한다. 노산 이은상의 ‘고지가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는 싯구가 조용히 힘을 세운다. 전 연합통신 홍덕화 님이 재현단 일행에게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샀다. 시원한 냉기가 더운 가슴을 쓸어내렸다. 목마르고 지친 자에게 이렇듯 시원한 감로수를 주다니, 참 고마운 마음이 든다.
비내섬 탐방로 ― 갈대숲길
▶ 강안의 비내섬 쉼터(커피점)에서 한참을 쉬고 난후. 다리를 건너 비내섬으로 들어가 갈대의 숲길을 걸었다. 자전거길은 계속 도로를 따라서 이어진다. 비내섬은 충주시 앙성면에 있는 남한강 하중도(河中島)로서 남한강에서 가장 규모가 큰 모래섬이다.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철새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다. 비내섬은 생태보존지역으로 시민의 자연산책로를 조성해 놓고 있었다. 우리는 비내섬 안의 탐방로를 따라 걸었다. 길 주위에는 작년 가을의 마른 갈대가 봄바람에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비내섬 탐방로가 끝나는 남단 테크 다리를 건너서 올라온 지점에 신경림의 시 〈갈대〉의 시판이 있다. …
어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 조용히 울고 있었다. //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 그의 온 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 까맣게 몰랐다. //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시인 신경림(申庚林, 1936~)은 이곳 충주 남한강 유역 출신이다. 초기에는 인간 존재에 대산 탐구를 관념적 측면에서 시를 쓰다가, 1960년대 이후에는 주로 향토적(鄕土的) 정서를 토대로 한 민중(民衆)의 삶을 서정적으로 노래한 시를 많이 썼다. 〈갈대〉, 〈농무〉, 〈목계장터〉등의 작품이 있다. 〈갈대〉는 신경림 초기의 대표작이다.
양지말산 산비탈 길
비내섬 탐방로 갈대숲길을 걸어 내려와 테크다리를 건너서 강안으로 올라왔다. 길은 양지말산 산비탈에 조성된 산길로 이어졌다. 아픈 발바닥이 더욱 고통스러웠다. 산길은 완만하게 때로는 급하게 오르고 내리는 길이고 길바닥에 닿는 한 걸음 한 걸음 내 딛기가 매우 아프고 힘들었다.
산길이 끝나는 지점에 작은 공원이 있다. 거기에도 이 지역 출신의 시인 신경림의 시판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널리 알려진 시 〈목계장터〉도 있다. …
‘하늘은 날보고 구름이 되라 하고 /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 청룡 흑룡 흩어져 비내린 나루 /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 하네 /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나루에 /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 하네 …(후략)’
—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제방 길이다! 봉황산 아래 능암리 ‘앙성천’ 테크 다리를 건너고 ‘한포천’ 봉황교를 건너면 충주시 가흥동의 긴 제방 길이 이어진다. 이제 본격적인 충주시 권역에 진입한 것이다. 좌측에는 하중도 능암리섬 철새도래지이고 이어지는 남한강 너른 둔치는 자연 습지여서 강안에 연초록의 봄기운이 은연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4월의 해가 설풋 서쪽 하늘에 기울어지고 있었다.
오늘의 도착지 — 가흥창(터) 충주 가흥초등학교
교정의 이순신 장군의 동상
▶ 오후 6시, 오늘의 도착 포인트인 가흥초등학교에 도착했다. 가흥초등학교는 옛날 ‘가흥창’이 있던 곳이다. ‘가흥창’은 고려시대 이래로 충주의 남한강 가에 있었던 조운창(漕運倉)이다. 충청도 내륙의 세곡과 물산을 모아 한양으로 옮기던 중간 창고이다. 여기에는 가흥역관이 가까이 있어 수로와 육로의 교통의 요지였다.
가흥초등학교 교정에 이순신(李舜臣) 장군 동상이 세워져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이 동상은 1976년에 건립된 것인데, 우리 일행이 교정에 들어서자, ‘이순신 박사’(?)인 한국콜마 윤동한 회장이 각별한 관심을 보이고 동상 앞에 나섰다. 이순신 장군의 위대성과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에 대해 열정적으로 말씀을 풀어놓았다. 현하지변(懸河之辯)이다. 윤 회장은 이순신 장군을 통해 인성을 함양하고 기업경영 철학을 세운 분이다. 윤 회장은 올봄 대구가톨릭대에 국내 첫 ‘이순신학과’를 만드는 데도 앞장섰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개설되는 이순신을 연구하는 석·박사통합과정이다. 여기서 배출한 연구자들로 ‘이순신학회’를 꾸릴 계획도 있다. 여해재단에서 그 대학원생들에게 장학금을 대준다. 경영학 박사 학위가 있는 데도 이 학교 석좌 교수인 윤동한 회장도 신입생으로 등록했다고 했다.
퇴계 선생과 이순신 장군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오늘 충주 가흥초등학교에서 이순신 장군 동상을 참배하고 윤동한 회장의 뜨거운 말씀을 들으면서 ― 문득 전 고려대 김언종 박사가 집필한 《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에서 소개한 유홍준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2019년 제1회 귀향길 재현행사에서 유홍준 교수가 앙성면 단암리의 제방길을 걸으며 했다는 ‘노상 강의’ 내용이었다. 책에서 소개한 유홍준 교수의 말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학술고문이던 열암 박종홍, 동주 이용희 교수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단군 이래 최고의 학자가 누구냐고 묻자, 박종홍 교수가 ’아무래도 퇴계 선생’이라 했고, 최고의 장군은 누구냐고 묻자 ‘역시 충무공 이순신’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박 대통령은 단군 이래 문무(文武)를 대표하는 두 분을 위한 추모 사업으로 도산서원과 현충사 성역화를 대대적으로 시행하였는데 도산서원의 면모가 그 때 일신되었다. …’ ☜ 김언종 집필. 이광호 외 지음《퇴계의 길에서 길을 묻다》(2021.3., 푸른역사)
◎ 열암(洌巖) 박종홍(朴鍾鴻, 1903~1976)은 보통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초등교육에서 대학교육에 이르기까지 두루 교편을 잡으며 후진양성과 활발한 학술활동을 한 철학자이다. 1929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철학과에 진학하여 서양철학을 전공했다. 1937년 이화여자전문학교를 시작으로 대학 강단에서 철학을 강의하며 서울대학교에서 정년퇴임했다. 일제강점기에 독일 철학의 관념론 연구에서 출발하여 해방 후에 실존철학, 분석철학, 한국철학 등의 분야 연구에서 선구적 성과를 보였고, 〈국민교육헌장〉의 기초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유신체제를 이념적으로 정당화하는데 기여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특히 박종홍 박사는 한국 성리학에 관한 개척자로 평가되고 있는데 이황과 이이의 학문을 심도 있게 연구했고 주체적인 한국사상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철학은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이상과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한 점이 특징이다. 초등교육에서 대학교육에 이르기까지 두루 교편을 잡아 평생 동안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다.
▶ 오늘 퇴계 선생 귀향길, 가흥초등학교에서 퇴계(退溪) 선생과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극적으로 만났다. 퇴계 선생의 고절한 학덕을 기리고 선생의 도(道)를 세상에 펼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김병일 원장과, 위기의 나라를 구한 이순신 장군을 숭모·현양하고 연구하는데 온갖 열정을 다 바치는 한국콜마 윤동한 회장을 통하여, 오늘 퇴계 선생과 이순신 장군, 두 분이 푸른 역사 속에서 우리 앞에 살아서 다가오신 것이다. 그리고 두 분의 공덕과 위업을 현양하는 데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은 박정희 대통령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분명한 것은, 퇴계 선생과 이순신 장군은 ‘우리 민족의 영원한 사표(師表)’라는 점이다. 높은 산, 퇴계 선생을 따라 걷고 있는, 멀고 힘든 여정이지만, 조용한 교정에서 두 분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1569년 오늘, 가흥창
퇴계 선생을 영접한 충청감사 유흥
▶ 1569년 음력 3월 10일 오늘, 충청감사 유홍(兪泓,1525~1594)이 충주관아에서 이곳 가흥창까지 몸소 나와 귀향길의 퇴계 선생을 맞이하였다. 선생을 영접한 감사 유홍이 술잔을 올리고 시를 읊으니 선생도 이에 두 수의 시로 화답했다. 이듬해(1570년) 퇴계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당시 조정에서 우승지로 있던 유홍이 왕이 내린 제문을 가지고 도산에 와서 치제(致祭)를 하기도 했다. 그는 서인(西人)에 속하는 사람이었지만 퇴계 선생을 깊이 존숭했다. 그리고 퇴계 선생의 제자인 약봉 김극일(1522~1585), 학봉 김성일(1538~1593) 형제와도 친교가 깊었다.
송당(松塘) 유홍(兪泓)
◎ 송당(松塘) 유홍(兪泓,1525~1594)은 본관이 기계이다. 1524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26세에 사마시 합격, 3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춘추관을 거쳐 5도의 관찰사와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으며 1588년 무자년에는 2백년간의 외교 현안이었던 왕가의 계보를 시정하여 인륜질서를 바로 세웠다. 또한 임진왜란 때 북으로 몽진하는 선조를 호종하기도 하고, 전란 속에서 도체찰사로 활약하다 1594년 갑오년에 71세로 해주에서 사망했다. 충청북도 보은군 외속리면 불목리에 기계 유씨 보은종중 주재로 세운 〈충목공송당유선생광국사적비〉가 있고, 보은군 탄부면 임한리 솔밭에도 〈송당유홍선생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 가흥초등학교 교정에서 한국국학진흥원 권진호 박사와 전 고려대 김언종 박사가 유홍과 퇴계 선생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김병일 원장이 두 분이 주고받았던 시(詩)를 현장에서 소개하고 해설했다. 글의 흐름을 위해 앞에서 소개한 송당의 시를 다시 인용한다. 선생을 존숭하는 마음이 역력하다!
百世斯文在 백세사문재 백세 흘러 도(道)가 선생에게 있나니
高名斗以南 고명두이남 북두 이남 드높은 명성이어라.
天將調鼎鼐 천장조정내 임금님 국정 맡기시려 하나
身欲老江潭 신욕노강담 선생은 고향 강가에 늙고 싶어라.
日月閑中遣 일월한중견 해와 달 한가로이 보내며
乾坤靜裏探 건곤정리탐 고요 속에 우주의 이치 더듬는도다.
男兒能事盡 남아능사진 남아도 할 일 다 할 수 있었나니
俯仰兩無慚 부앙양무참 하늘과 사람에게 부끄러움 없어라.
— 《松塘集(송당집)》〈贈退溪〉(증퇴계, 퇴계에게 올리다)
◎ 그런데 퇴계 선생은 1569년 이날 가흥창 옆에 있는 역관(驛館)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유홍과 함께 다시 배를 타고 달천담까지 가서 거기서 말을 타고서 충주관아로 내쳐 갔던 것으로 보인다.
길고 먼 여정. 히루를 마무리하다
▶ 그러나 오늘 귀향길 재현단은 이곳 가흥창(가흥초등학교)에서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이날 강천섬에서 출발하여 가흥초등학교까지는 30km에 달하는 장거리이므로 더 이상 진행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재현단이 걸어온 구간의 대부분은 남한강 강변의 바이크로드로 길은 평탄하였지만,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따가운 태양의 화살을 받으며 장장 60km를 걸은 것이다. 워낙 먼 길이라 많은 분들이 발바닥에 물집이 생기고 무거운 피로가 온몸을 휘감았다. 필자의 경우, 귀향길 재현단의 진행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기 위해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선두와 후미를 오가며 뛰어다니다 보니 실제 거리보다 몇 km는 더 걸은 것이다. 힘든 것은 자동차 도로를 따라 걷는 노정이었다. 강천섬에서 국도 섬강로를 통하여 섬강교를 건널 때까지와 남한강대교를 건너 긴 단암제를 걷고 난 후, 충주시 앙성면 강천리-영죽리-비내섬 구간은 차량들이 오가는 국도를 따라 걸을 수밖에 없었다.
▶ 재현단 일행은 이순신 장군 동상 주위에 모여 다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빙 둘러서서 상읍례(相揖禮)로 하루의 일정을 마감했다. 인근의 식당에서 따뜻하게 저녁식사를 하고 윤동한 회장을 비롯한 일부 인사는 상경하고, 오늘에 이어 내일도 계속 걷기로 한 재현단 일행은 남한강 건너 목계장터의 모텔에 유숙했다.
숙소에 들어, 연일의 보행으로 발가락에 물집이 잡힌 필자를 비롯한 몇 분에게 이동신 별유사가 소독약을 바른 바늘을 꽂아 물을 뽑아내고 소독하고 치료해 주기도 했다. 재현단 송상철 님은 필자에게 내일을 위하여 ‘발가락 양말’을 선물해 주기도 했다.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 선생의 가신 길을 좇아가는 길, 오늘도 참으로 길고 고단한 여정이었다. 그러나 편안하고 충만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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