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수필의 요건
자기가 살 집을 짓고자 하는 사람은 볕 잘 들고 바람 잘 통하는 곳에 터를 잡은 다음 자기가 원하는 집을 짓기 위한 설계도를 그린다. 설계도에 따라 시멘트, 모래, 철재, 목재 등 건축자재를 구입하여 공사를 시작한다. 기초는 튼튼하게, 벽은 견고하게, 집안의 공간은 용도에 따라 널찍널찍하게, 창문은 넓으면서도 외풍이 들어오지 않게, 외벽은 정감 있게. 완공된 그 집에 입주하여 쾌적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게 된다면 그 집은 설계도나 자재의 우수성만으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구조주의 문학이론에서는 문학작품을 창작하는 데 사용되는 요소, 이를테면 주제, 구성, 표현과 그에 따르는 여러 요소는 그 자체만으로 작품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집을 짓기 위해 준비한 건축자재가 집이 아닌 것과 같다. 벽은 시멘트와 모레를 물로 버무려 쌓지만 시멘트와 모래와 물이 벽은 아니다. 문학예술의 한 장르인 수필도 마찬가지다. 주제문을 정하고, 소재들을 선정하고, 구성하는 단계를 거쳐 효율적인 문장으로 표현하는 일련의 작업을 통하여 창작되는 한 편의 작품 안에는 여러 요소들이 어우러져 있다. 일상에서 경험, 거기에서 비롯한 사유, 시작에서 끝에 이르는 과정을 정치하게 얽어가는 구성, 그리고 선명한 문장 등. 그러나 사유 깊은 주제, 특출한 소재, 정치한 구성, 유려한 문장, 자체만으로는 문학예술의 하나인 수필이 될 수는 없다. 이는 집을 짓기 위해 공사장에 야적해 놓은 건축자재와 같다.
그래서 구조주의 이론에서는 한 편의 문학자품이 생성하는 결과는 그 작품 안에 들어 있는 요소들의 총합보다 크다고 주장한다. 2+3=5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6, 또는 그 이상의 결과를 창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미슬, 음악, 무용 등 모든 예술에 적용된다.
은옥진의 <꽃 한 송이의 위로>에서 화자는 평상시에 무척 좋아하던 꽃을 통해 환우로 인해 피폐했던 일상을 회복한다.
사는 게 이만하면 되었다 싶을 때가 있다. 베란다 꽃밭을 바라볼 때다. 문을 빠꼼히 열고 내다보면 찌든 삶, 추운 겨울이 엿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거기에서 기쁨을 맛보며 살진 삶을 누린다. 대자연 속에 펼쳐지는 봄날의 향연이 아니어도 좋다. 화사함으로 견준다면 어느 꽃밭과도 비길 바가 아니다. 외기外氣에서는 봄이 한창이지만 우리 베란다에서는 한겨울에도 만발하는 꽃들이다.
꽃은 일반적으로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꽃에 환호한다. 그런데 화자는 문을 빠꼼히 열고 한겨울인데도 베란다에 만발한 꽃들을 보면서 살진 삶을 누린다. 여기서 꽃은 환호의 대상이기보다 삶에 생기를 주는 대상이다.
엄동설한에 꽃 잔치를 벌이는 우리 베란다는 하늘나라가 이리 아름다울까, 에덴동산이 이랬을까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한다. (중략)
생각해 보았다. 내가 꽃나무를 기른다고는 했지만 어쩌면 그게 다가 아니었음이다. 가끔 분갈이를 하여 작은 도움의 손길을 준 건 분명하지만, 집에만 있는 나를 안쓰럽게 여긴 조물주께서 나의 꽃들을 어여삐 여겨 길러주셨다는 깨우침이 왔다.
화자는 꽃들이 만발해 있는 자기 베란다를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상상한다. 저 꽃들이 건강하고 아름답게 필 수 있는 것은 화자의 작은 도움보다는 조물주께서 집 밖에 나갈 수 없는 자기를 위해 길러주셨다는 깨우침을 가진다. 이것은 신에 대한 믿음일 수도 있다. 진정한 자기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신은 도움의 손길을 뻗친다고 하지 않던가.
그래서 베란다의 꽃으로 인해 이웃들과 소통하게도 되고, 아프기 전처럼 외기의 꽃들을 조우하고 싶은 발싸심을 다잡을 수 있다. 자기가 처한 형편을 꽃을 통해 긍정하며 자기를 세우려는 의지가 읽힌다.
시들어 가는 일상의 의욕을 회복하면서, 이만하면 되었지 싶은 마음으로 오늘도 베란다의 꽃들을 바라보고 있다.
이 마지막 문장이 암시하는 바는 아주 크다.
화자가 장기간 환우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 평상시에 무척 좋아하던 꽃을 비록 베란다에서 일망정 가꿀 수 있다는 점, 그 꽃들이 만개한 모습을 보며 삶에 대한 의욕을 되찾고 있다는 점 등이다. ‘이만하면 되었다.’는 극심한 곤경을 겪은 사람만이 가진 수 있는 달관의 경지이다.
<꽃 한 송이의 위로>는 꽃에 대한 일반적인 느낌이 아니다. 꽃에 대한 작가의 체험이 작품 속에 녹아 작가만의 꽃을 제시하고 있다. 그래서 꽃 한 송이가 삶의 위로가 될 수 있다.
박태선의 <4번 출구>는 지인한테서 들은 단순한 이야기를 소개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결코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찾지만 그것이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어렵게 찾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가 진정으로 찾던 것이 아닐 경우가 많다, 화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지인의 조카딸의 경우가 그러한 경우이다.
시청역 2번 출구 밖에 있는 직장에 인턴으로 근무하는 조카딸은 출근할 때마다 4번 출구를 바라보곤 마지못해 2번 출구를 향하곤 한다. 4번 출구 밖에 자기가 선망하는 회사가 있어서이다. 어느날 퇴근길에 선망하는 회사의 구직광고를 본 조카딸은 지체 없이 지원서를 냈을 것이다.
면접관이 다짜고짜 물었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자성어를 말해 봐요?”
“4번 출구.”
그녀의 입에서 느닷없이 그 말이 튀어나왔다.
부지불식간에 튀어나온 이 동문서답에 당혹스러워 하는 면접관들의 얼굴에서 그녀는 불합격을 직감했다.
면접관은 그녀의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자성 ‘4번출구’의 출처가 궁금했다. 이는 그냥 궁금해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나 그간의 사정 이야기를 들은 면접관들은 그녀를 합격시켰다.
프로이드는 무의식중에 하는 말이나 행동만을 진실한 것으로 친다. 친구와 만나자는 약속을 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경우 사람들은 깜빡 잊었다고 변명한다. 그럴 때 약속을 지키지 않은 친구에게 배신감을 느꼈던 사람은 너그럽게 용서한다. 그러나 깜빡 잊은 것은 만나기를 청한 사람에 대한 배신의 무의식적인 발로이다.
의식적으로 하는 말이나 행동은 얼마든지 가식일 수 있다. <4번 출구>는 무의식만이 진실하다는 것을 준다.
박경숙의 <목욕탕 오디세이>는 사람들, 특히 여자들이 자주 들르면서도 보여주기를 싫어하는 목욕탕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일상 속에서 적나라한 자신을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도 괜찮은 곳. 여인들이 그곳에서 내보이는 것은 표면만이 아닌 모양이다.
‘목욕탕에서는 모르는 여자들끼리도 금세 친해진다.’ 피차에 적나라한 모습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여자들의 직업도, 신분도 가지가지지만 이내 무리를 지어 소곤소곤 이물 없이 이야기를 나눈다. 화자는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의 사실 여부에는 관심이 없다. 이솝의 우화쯤으로 치부한다.
가끔 순찰을 도는 주인이 음식물 반입을 금지한다고 주의를 주지만 그럴 때면 우르르 사우나실로 자리를 옮겨 음료수를 나누어 마시도 한다. 목욕탕에서는 신분이나 이격의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왁자지껄 떠들다가도 휴게실에선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하다. 잠시 하품을 하던 여자가 드디어 코를 곤다. 자다가 일어나 출출하면 매점으로 걸어간다. 먹고 나면 또다시 잔다. 깨어 있는 이에게 물었다. “목욕탕에 자주 오세요?” 대답은 무시하는 표정과 함께 돌아온다. “집에서는 남편과 아이들 때문에 편히 쉴 수가 없잖아요,” “그냥 밖에서 밥 한 번 먹으면 될 것도 다 안 된다. 시간 없다 하니까 할 수 없이 오는 거지요. 제일 먼저 앞장 서 나가던 사람이 말한다. ”거,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냉커피나 한 잔 할래요?“
이쯤 되면 목욕탕은 가사에 얽매어 사는 여자들의 해방구이다. 집안에서는 하지 못하던 말도, 행동도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 곳이다. 그것은 자신을 가리고 있는 옷을 벗어버렸기에 가능하다.
목욕탕 안에서는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아도 된다. 서로들 몽따고 눈치 주는 사람이 없다. 수건을 몸을 닦는 용도로 쓰지 않고 제멋대로 사용해도 좋다. 여봐란 듯이 반대로 행동한다. 그렇지, 이래야 목욕탕에 온 맛이 나지! (중략) 프라이버시 침해를 싫어한다면서 언즉번즉 속내를 전시하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 목욕탕을 찾는다지만 고립을 못 견딘다.
일상생활에서 허용될 수 없는 언행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것은 해방구에서만 누릴 수 있는 자유다. 아니, 그것이 방종이라 해도 하는 수 없다. 자신을 칭칭 동여매고 있는 일상에 대한 해방을 갈구하는 반항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기모순을 행하면서도 그것이 모순인 줄을 의식하지 못한다.
이경수의 <내 안의 숨결>에서 화자는 외부의 충격에 의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계기를 갖게 된다.
이른 아침 짹짹거리는 소리에 창가로 간다. 라일락 나무에 그림처럼 앉아 있는 참새들. “어마나!” 나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리다 두 손으로 입을 막는다. 인기척에 놀란 듯이 이 가지 저 가지로 옮겨 앉더니 이내 모두 날아간다. 참새들을 쫓던 내 시선으로 라일락 잘린 가지들이 비집고 들어온다.
화자는 서릿바람을 맨몸으로 맞고 있는 라일락나무에 참새들이 찾아와 짹짹거리는 소리에 탄성을 터뜨리다가 입을 막는다. 인기척을 듣고 놀랄 참새에 대한 배려 때문이다. 여기서 참새는 자연을 상징한다. 날아가는 참새를 쫓던 시선에 잘린 라일락 가지가 잡힌다. 잘린 라일락 가지는 자연에 대한 훼손을 상징한다. 이 서두에 제시한 화두는 자연임을 알 수 있다.
지난여름 울타리를 넘어 벋은 라일락 가지를 앞 빌라 주민이 톱으로 잘라버린 것이다. 그것을 본 화자는 대거리하지 못하고 가슴을 두근거리며 보고만 있었다. 가지 꺾이는 소리가 비명처럼 들렸으나 톱질하는 사람과 맞설 만한 배짱이 없어서였다.
화자는 어머니의 첫아이였다. 임신 기간 중 입덧이 심해 도통 먹지를 못하였다는 어머니. 내어난 아이는 죽지 않고 산 게 신기하다 싶을 정도였다 한다. 그래서 형제들보다 키도, 목소리도 작았다. 늘 가족들의 배려를 받으며 자랐다. 동생보다 작은 나는 늘 놀림의 대상이 되었다. 키가 작은 내가 싫고 창피했다. 아이들 앞에서 주눅부터 들었다. 이러한 성장과정이 굳어 사람들 앞에서 움츠리는 성격이 형성된 듯하다.
주위를 둘러보며 욕심도 내보고 투정도 부려 보지만 그 때마다 나를 어루만지며 ‘네 키에 맞추어 살면 되는 거야.’ 하고 다독거리는 숨결이 있다. 내 키에 맞추어 살도록 속사기는 소리. 그 소리는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아이의 숨결이다.
작은 아이를 탓하지 않기로 한다. 기뻐하지 않아도 헐떡거리지 앉아도 될 나의 숨에 기대어 살고자 한다. 내 호흡에 거슬리지 않고 내 꼴대로 사는 게 가장 편하게 사는 거라고 비로소 고개를 끄덕인다.
‘내 안에는 아이가 산다.’고 한다. 아이는 순수하고, 순수한 것은 자연이다. 자연은 가식을 용허하지 않는다. 화자가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작은 아이의 숨결을 느끼는 것은 순수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새소리에 탄성을 터뜨리고, 라일락 가지가 잘려 나간 것을 안타까워하고, 무자비하게 가지에 톱질하는 사람에게도 대거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한원준의 <죽음과 마주했던 순간들>에서 화자는 얼핏 죽음에 직면했던 세 번의 경험담을 리얼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병약한 나는 죽음과 얼굴을 맞대었던 순간들이 많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다른 때는 그다지 실감나거나 무섭지 않았다. 필요 이상으로 움직이기 위해 차를 타고 이동 중일 때 사고가 날 뻔했고, 다시 새겨보아도 틀림없이 죽음과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것은 내게 신장암이 발견되었다고, 제 마음대로 내 수술 날짜를 결정하던 의사보다 더 무서운 기억이었다.
이 서두 부분의 이 대목이 없었다면 이 글은 문학예술로서의 수필이 될 수 없다. 과거에 경험한 죽음과 얼굴을 마주했던 순간들을 아무리 상세하고 실감나게 기술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경험담에 지나지 않는다. 수필이 작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라 하지만, 모든 문학 장르가 그렇듯이 경험담만으로 수필이 될 수는 없다. 경험에 작가의 생각이나 느낌을 융합시켜 경험한 사실 이상의 것을 전달할 수 있을 때 독자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문학작품이 생성된다.
문학의 3대요소가 주제, 구성, 문체라는 것을 모르는 작가는 없을 것이다. 주제를 효과적으로 살리기 위해 선택한 것이 소재들이며, 이 소재들에서 상위개념을 추출한 것이 제재이고 이를 단계적으로 배열하여 결미에 이르게 하는 것이 구성이다. 문체도 구성도 주제를 살리는 데 공헌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 중에서도 구성의 공헌도는 매우 크다.
<죽음과 마주했던 순간들>이 그 좋은 예이다. 자칫 지나치기 쉬운 서두 부분이 이 수필의 핵심 단락이다. 뒤에 열거한 세 번의 아슬아슬한 죽을 뻔한 순간들은 이 서두 부분을 도외시한다면 별 의미가 없다. 특히 ‘그것은 내게 신장암이 발견되었다고, 제 마음대로 내 수술 날짜를 결정하던 의사보다 더 무서운 기억이었다.’는 문장에 유의해야 한다.
화자는 왜 신장암 수술을 결정한 의사보다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한 과거의 경험이 더 무서운 기억이라 했을까? 이는 두 가지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단지 몸소 경험했음으로 기억이 생생하다고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되어 희미한 기억이다. 최근에 암 판정을 받고 수술 날짜를 잡은 것보다 더 무서울 수는 없다. 암수술을 받게 되자 떠올린 기억일 뿐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역설이 작용한다. 세 번이나 아슬아슬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신장암 따위가 나를 죽일 수는 없다는 자신감일 수도 있다.
강순희의 <오페라로 출렁이는 가을>에서 화자는 산굼부리 앞에서 자연이 펼치는 웅장한 오페라에 감격하고 있다.
분화구 앞에 다다랐다. 전에는 보지 못했던 풍경에 눈이 번쩍 뜨인다. 거대한 굼부리에서 오페라의 향연이 펄쳐지고 있다. 자연이 베푼 수려한 무대. 오페라하우스다. 삼라만상의 소리와 몸짓과 온갖 풍광이 눈 맛을 잡아끈다. 지붕은 허공에 구름 한 점 없이 둥실 떠 있다.
10만 전에 자연이 빚어놓은 산굼부리 능선의 억새 군락이 오페라의 웅대한 무대이다. 역동적인 춤사위 한 판을 벌이는 억새꽃은 주인공이다. 관객들은 춤사위에 사로잡혀 굼부리의 웅장한 오페라를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고 들떠 있는 듯하다.
오늘은 산들바람 불어 좋은 날. 가극 무대를 빛내는 억새꽃이 칸타빌레 가락을 타며 춤을 춘다. 잎사귀도 일제히 알레그로로 일렁이며 하모니를 이룬다. 방금 얼굴 내민 꽃도 아침 이슬에 곱게 빗은 머리 살랑이며 보랏빛 웃음으로 관객을 반긴다. 태어나면 백발일 지언정 햇빛과 바람의 인사에 손 모아 감사드리는 모습도 오페라로 승화한다. 경건하다.
가뭄과 태풍으로 인한 고난의 세월을 이겨낸 것이 억새꽃의 삶이었다면 고곤한 세월의 굴곡을 넘어 이제 백발이 된 화자의 삶과 다를 게 무언가. 그래서 백발을 감추기 위해 눌러 썼던 벙거지를 벗어 던진다. 억새꽃과 함께 삶의 환희를 누리기 위해서이다.
<오페라로 출렁이는 가을>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문체이다. 시각적인 이미지를 청각적인 이미지로 환치한 공감적 이미지가 빛을 발한다. 그리고 대상을 자기의 안으로 끌어들인 인상적인 묘사 또한 탁월하다. 이러한 작업이 문학작품을 형상화하여 감동을 이끄는 힘이 된다.
수필이 문학예술이 되는 데는 형상화가 필수적이다. 이는 미술이 선과 색으로 어떤 형상을 그려내고, 음악이 소리로 어떤 형상을 떠오르게 하는 것과 같다. 언어에는 선과 색도 소리도 없기 때문에 묘사와 서사를 주로 활용하여 형상화했을 때 비로소 문학예술이 될 수 있다. 그런 연후에야 작품의 결과가 요소들의 총합보다 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