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징후로써의 문학
- 《에세이문학》 2024년 봄호(165호)를 읽고
1. 자본주의적 욕망의 그늘
21세기가 도래하기 이전,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현대문명의 거대한 물살에 침잠하지 않았다고 믿었다. 그때는 휴머니즘이란 단어를 자주 들먹이며, 의도적일지라도 인간이 유지해가야 할만한 정서를 이어가려는 인문학적 흐름이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인간을 소외시키는 자본과 산업사회에 대한 우려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흐름 가운데 김형석은 고독을 ‘인간이라는 존재성 깊숙이 숨겨져 있는 병’이며, ‘생리적이고, 심리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병’이라 썼다(《고독이라는 병》). 이후 고독에 대해선 사회학이나 심리학 혹은 철학과 종교에서 그들의 관점에 따라 조금씩 차이 나는 정의를 내려왔다. 하이데거는 고독을 인간에게 주어진 근본 감정이라 한다. 따라서 ‘그 감정이야말로 우리의 본질적인 세계이며, 그곳에서 비로소 우리는 존재의 의미를 밝힐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느끼는 외로움이나 고독은 신체적 감각이나 정서라기보다는 존재하는 모든 사건, 사물의 본래적 불완전성에서 기인한다. 완전하지 않음, 즉 ‘결여되어 있음’이다. 인간 무의식에는 동공, 비어있는 공간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육신의 병보다 훨씬 더 근원적이며 개인적이고, 한편으론 철학적이라 할 수 있다. 인간에게 근원적으로 내재한 고독이라는 정서가 우리가 사는 환경적 요인과 결합할 때 좌절과 불안으로 인한 우울한 사회가 된다. 현대적 삶의 조건이 부조리하고 불가해한 경우가 많듯, 그로부터 상처받고 소외당하며, 억압된 사건들은 주체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슬픔과 좌절과 방황과 불안이라는 병증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감정들은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실존적인 증상이다.
이 감정들이 변화해 온 시간을 거슬러 보면 산업화 시대 이후 가속화 되어 현대에 이르러서는 인간소외의 현상을 막지 못하고 고독은 한층 더 깊어졌다. 이런 환경에서 인간은 실존을 위한 부대낌으로 상흔은 깊어져 치유해야 할 증세가 많아진다. 자본주의 사회의 정점에 와 있는 지금의 우리 삶이 증언해주고 있는 셈이니, ‘고독이라는 병’을 일찌감치 설한 철학자들은 곧 도래할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졌다.
이미 개인주의적 삶에 익숙해진 현대인은 외로움을 싫어하면서도 타인과 같이 부대끼는 것을 원치 않는다. 따라서 간섭받지 않고 자유롭게 살려면 외로움을 감당해야 한다. 혹자는 최첨단의 문명을 누리고 사는 현대인이 어찌 외로울 틈이 있겠느냐 의혹을 던진다. 맘만 굳히면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문명의 이기들과 인간의 대역까지 가능한 AI를 갖춘 현실을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그 정도의 고독이라면 대상에 의해 치유될 수 있는 외로움이겠다. 하지만 깊은 내면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고독은 형상이나 물질문명이 화려해질수록 상대적 박탈감이 커져 고독은 강화된다. 결국 현대인은 미디어의 홍수와 풍요 속의 빈곤이 주는 고독 속에서 실존을 위한 팽팽한 긴장감을 견뎌야 하는 존재다.
《에세이문학》 봄호에 실린 수필은 추천작 등을 제외하고도 50여 편이었다. 작가들에게 지면을 많이 할애한다는 점에서는 매우 바람직하지만 계간 평을 써야 하는 평자로서는 작품을 선(選)해야 하는 고민의 시간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결국 수필문학의 미학을 담보하면서 동시대의 담론을 외면하지 않는 글을 살펴보게 되었다. 여기서 다룰 시대의 담론이란 자본주의의 폐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시점에서, 물질의 풍요와는 달리 개개의 삶은 고독과 소외로 인하여 더 황폐해지거나 고독 속에서도 존재성을 회복하려는 내용이다. 작가들은 이러한 현상을 포착하여 글로 써냄으로써 미미하게나마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부조리함을 말하고 증언하는 존재의 역할을 하고 있다.
최승영의 <늙은 개를 쓰다듬으며>, 한복용의 <나에게도 단골 술집 하나 있으면 좋겠다>, 김혜주의 <곁>을 그 범주에서 깊이 읽었다. 수필에서 말해지는 세계가 작가의 경험적 이야기라는 보편성을 넘어서 시대를 통찰하고 고착화되어가는 문학적 틀을 흔들어주며, 새로운 출구를 모색하려는 의도를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이라 여겼다.
2. 실존의 흔들림, 그리고
최승영 <늙은 개를 쓰다듬으며>
이 글은 정통적 수필 쓰기 방식에서 다소 비켜서 있는 작품이다. 에피소드의 갑작스러운 전환이나 시 ‘면벽의 유령’을 자기 관점으로 풀어 쓰는 등 구성 또한 친절하진 않으나 이는 오히려 주제를 말하는 핵심 화소로 작동한다. 이러한 요건과 이미지 때문에 복잡다단한 현대인의 심리, 그리고 고독과 소외, 타자를 대하는 방식을 말하는데 오히려 효과적이라는 관점을 제시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적 이야기와 외적 형식이 잘 어우러진 작품이다.
화자는 지금 사랑을 믿어야 할지, 그 믿음을 놓아야 할지의 기로에 있는 듯하다. 소설 <사랑을 믿다>가 담배를 피우러 발코니로 나온 그에게 툭 떨어진 걸 보면 말이다. 최소한 담배 피우는 것에서만큼은 화자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맞은편 동의 다른 사내가 등장하고, 두 사람은 서로에게 실루엣만 보이는 상태로 일주일에 두세 번은 만난다. 사실 담배를 피워야 하는 그 상황은 주체가 어떤 이유로든 불안정한 상태에서 안정을 찾으려는 심리임을 유추하게 한다. 단순한 기호식품이 아니라 담배는 심리적으로 결핍을 채우려는 주체의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와 나 사이로 무거운 침묵과 깊은 밤이 역사처럼 쌓”여가는 동안에도, 그들은 서로를 의식하나 상대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다. 이른바, 현대인의 익명성이다. 그들은 담배 피우는 시간에만 그림자처럼 상대를 바라보고, 그 자리를 떠난 후엔 서로를 알지 못한다. 두 사람이 만나는 현실적 공간은 고독이 맴돌다 담배 연기처럼 허무하게 흩어지는 자리다.
일상의 반복된 습관은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의 패턴이 되어가기에 화자의 마음 사이로 남자에 대한 작은 공간이 생겼겠다. 한밤중에 홀로 발코니에 나와 담배를 피우는 이에게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이 눈앞에 있다면 존재는 심적인 위안이 되어 쓸쓸함이 훨씬 덜해질 것이다. 그날, 남자가 먼저 들어가고 홀로 남은 화자는 적막한 겨울 새벽에 남자의 생활을 상상한다. “그도 나를 생각할까”. “여생은 고단하지 않을까, 고단하다는 생각이 들지만”은 상대에 대한 연민이지만 엄밀하게는 자기가 처한 현실의 투사로 읽힌다.
남자가 들어가고 혼자 남은 화자에게 20대 중후반쯤의 캡을 쓴 청년과 점퍼 후드를 뒤집어쓴 청년이 지나간다. 캡은 후드에게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라고 상소리 섞인 불평을 던지고 후드는 진저리를 친다. 추운 날씨가 아니더라도 청년들의 현실을 잘 알고 있는 화자는 그들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사랑하여 결혼하고 싶어도 경제적 자립이 어려운 현실 때문에 포기해야 할 것이 많은 두 청년은 이 세대의 환유적 기호이고, 화자는 두려움 없이 현실과 직면해야 하는 청년들이 춥고 외롭게 방황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감정을 투사한다. “아저씨, 담배 하나 던져주면 안 잡아먹지”. 이런 배경과 무드(mood)속에서 진심을 장난처럼 경쾌하게 말하는 캡에게 화자는 담배를 갑 채 던져준다. 담배 한 갑이지만 외롭고 차가운 현실의 강을 건너는 청년들을 이해하는 오롯한 마음이 전달된다. 이 세대가 그들의 뜻을 펼치며 온전하게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화자를 비롯한 기성세대의 책임 또한 크다는 것을 인식하는 화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취업과 결혼은커녕 사랑하는 마음조차 랩으로 둘둘 말아두고 사는데, 나는 고작 까닭 모를 불평만 했”다는 자괴감이 진정성을 획득한다.
동시대를 살아가면서도 교집합을 찾아 연대하지 못하는 기성세대로서 지금의 청년들에게 가졌던 편견과 오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다. 그는 부조리한 삶의 요건들이 청년들에게 일상에 대한 소외와 외로움을 강요한다는 생각으로 그들을 용인한다. 고독을 아는 사람만이 고독한 이의 슬픔을 알아보듯 말이다. 대상에 대한 공감의 표현은 타자의 상황에 깊이 공감하고 동참하고 연대할 때 개인은 물론 사회적 기표가 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주체와 타자는 하나가 될 수 없다. 하지만 타자와 시점을 공유하는 그 과정에서 양자 간의 틈새를 최소한으로 회복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 과정을 통해 화자는 안희연의 시 ‘면벽의 유령’을 자기식으로 해석하면서 사랑을 믿어보려 한다. ‘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가장 사랑하는 것을 버려야 한다’면, 즉 사랑하는 대상을 버려야 갈 수 있는 천국이라면 다시는 가지 않겠다는 인식의 전환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대상을 잃으면서까지 욕망하는 세계란 부질없다는 실존적 현실을 용인하는 것이다. 생에서 눈부신 순간을 맞을 수 없을지라도 곧 ‘죽음을 맞아야 할지 모르는 늙은 개를 쓰다듬는 심정으로 이 겨울밤을 함께 걸어’보겠다는 다짐은 철회했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다시 복원해 보겠다는 의지로 해석되고, 나아가 삶에 대한 믿음으로 확장이 된다. 권여선의 소설 <사랑을 믿다>는 사랑의 하찮음을 긍정하면서 역설적으로 사랑을 믿게 된다는 이야기다. 사랑을 믿지 않는 주인공에게 생의 남루한 경험들이 외려 잃어버렸던 사랑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게 해준 셈이다. 작가 최승영은 이 수필에서 사랑에 대한 믿음 문제를 시작과 끝 지점에 배치해두고, 사랑에 대한 그의 사유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 과정에 두 에피소드가 생에 대한 작가의 인식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매개로 작용하고, ‘면벽의 유령’에서 ‘늙은 개’를 인용해 사랑을 믿는다는 결말을 확인해준다. 더 이상 희망이나 기대를 거는 일이 무의미한 현실이지만 자신이 사는 이 사회에 대한 믿음을 열어 보겠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 수필에는 현대인의 고독한 이미지가 전경화되어 있다. 정보와 물질문명 속에서 수많은 사람과 지치도록 만나며 살아도 불통의 결핍으로 등을 돌리면 허허롭고 쓸쓸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작품은 화자 개인의 문학적 세계를 넘어서, 사랑을 외치고 풍부한 물질에 허우적대며 휘황한 밤거리를 누비면서도 안으로는 외롭고 허무한 현대인의 자화상이 떠오르게 한다. 기존의 서사 방법을 독특하게 구성하여 고독한 현대인의 이미지를 그려낸 작품이었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복용 <나에게도 단골 술집 하나 있으면 좋겠다>
화자가 원하는 ‘단골 술집 하나 있으면 좋겠다’는 이 작품에는 이상적인 술집의 한 형태가 그려져 있다. 술집에서 인간은 가장 솔직해질 수 있기에 다면성을 드러내기에 적절한 공간이고, 작가는 그 점을 잘 활용하고 있다. 그는 인간이 꿈꾸는 이상적인 바람을 이 술집에서 나누며 교류하고, 결핍을 충족하고, 존재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혹자는 저 정도의 희망 사항을 두고 과장이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저 단골 술집에서 일어나는 온갖 상상은 인간의 세상, 달리 말하면 현실에서는 불가한 꿈의 세계다. 그래서인지 화자는 실재하는 단골 술집을 끝내 찾지 못하고 그의 상상적 공간 안에서만 주유하다 작품을 마무리한다.
화자는 자신을 학주(學酒) 수준으로 보고, 술이 없어도 좋고 있으면 더욱 좋다고 한다. 그에게 술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추운 겨울날 따뜻함이 필요할 때, 혹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부딪힘으로 생각이 복잡해질 때 ‘그집 문을 밀고 들어가면 언제라도 따스한 온기가 기다려주는 그런 술집’을 욕망한다. 아늑하고 따뜻하되 그 공간은 “술잔이 진열된 장식장 앞에 앉아 유리에 비친 나를 보며 소주잔을 기울이고 싶”은 곳이다. 혼자 마시는 술이고, 유리에 비친 자신을 응시하며 고독으로 진입할 수 있는 적절한 자리다.
그럴 땐 나를 아는 누구도 그 집 문을 밀고 들어오지 않기를. 실내는 너무 넓어도 곤란하고 조명은 되도록 어둑할 것. 테이블은 가급적 띄엄띄엄, 손님들과는 얼굴이 아닌 등을 볼 수 있는 미음자이거 나 디귿자형 구도라면 좋겠다. 음악은 느리고 묵직한 재즈가 어울리겠지. 그런 술집이라면 시린 마음 그대로 내려놓아도 불안하지 않으리. 오랫동안 홀로 앉아 있어도 아무 이상할 것 없이, 허전하거나 쓸쓸하지도 않을 테니까.
같은 공간 안에 있되 얼굴을 마주치지 않아야 하는 사람들, 그런 술집이라면 외로움이나 다친 마음 내려놓을 수 있단다. 분명 같은 공간에 타인들은 있는데, 주체에게 간섭하거나 끼어들어 방해하진 않아야 한다. 이런 상황은 화자가 대중에게서 소외되지는 않았으나 역으로 화자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이데거식으로 보면 타인의 지배 아래에 놓여있는 일상 세계로부터 떨어져나온 고독한 시간이다. 이 시대의 우리 모습과 닮지 않았는가. 현대인의 심리가 그렇듯, 홀로 자신의 존재성을 응시하고자 하는 심리와 인간은 사회화된 존재여서 익명의 누구라도 함께 해야 하는 심리가 각축을 벌이고 있다.
이제 화자는 자신이 그리는 술집이 “속살마저 가장 인간적인 인간들이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인간들과 함께 있는 곳”이길 바란다. 화자의 가장 큰 욕망이며, 현실에선 불가한 술집의 요건이다. ‘속살마저 가장 인간적인 인간’들이 모이는 술집이 어디 있긴 있을까. 실존의 어둠을 헤쳐보면 속살까지 인간적인 존재가 있긴 할까. 턱없이 불가한 꿈이지만 문학은 그 욕망의 허구성이 아니라 절실성을 탐색하는 과정 아니겠는가. 따라서 존재의 불가능성을 논하지 말고 화자가 원하는 술집의 절실성을 들여다보자. 술집에 대한 화자의 억압성은 미뤄두고 그 유혹성으로 논점을 옮겨보는 것이다.
“어깨를 누르는 짐 덩어리 모두 내려놓고 가장 가벼운 마음으로 가장 선한 사람과 술잔을 기울이다 보면, 삶의 긴장 속에서 잠시도 마음 편치 못했던, 한 줌 의지할 곳 없어 방황했던 이들도 잠깐이나마 행복해하지 않을까”.
일상의 책임과 의무에 짓눌리고 사람과 부대끼느라 긴장 속에서 사는 외로운 인간이 유혹당할 수밖에 없는 게 따스하고 안온한 이런 공간일 게다. 관성처럼 그런 술집을 찾아 잠시 자신을 충전하고, 내일을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떼는 곳. 무엇보다 혼자 있는 고독을 이기기 위해, 지친 마음 다독이기 위해 찾아든 사람들 틈에서 얼마간 시간을 보내다 보면 화자는 “세상 하잘것없는 이 몸에도 존재라는 게 있다고 느”낀다.
결국 화자가 꿈꾸는 이상적인 술집은 화자의 존재성이 발현되는, 아니 발현되도록 촉구하는 평화롭고 아늑한 곳이다. ‘평화롭고 아늑한’이 지시하는 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누려보고 싶은 이상적 공간에서의 감각이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보다 타인들과 함께 할 때 자기의 존재성을 더 의식한다. 주체는 타자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의식하고, 즉 타자를 의식하며 자신을 인정하는 존재이다. 하여 한복용이 꿈꾸는 술집에 함축된 의미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주체와 타자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서로를 인정하는(간섭하지 않고) 것으로 그들은 모두 외로움과 소외감을 불식시켜준다. 그런 술집에서 화자는 비로소 존재의 진정성을 획득한다. 그래서 화자에게 필요한 것은 술이 아니라 고독한 존재의 안식처라 이름하는 것이다.
실존의 영역에서 피투(Geworfenheit)의 존재로 외롭고 고달프게 살아가다 지치고 다친 마음 내려놓고 자신의 존재성을 재충전하는 공간, 그런 술집이 현실에 존재한다면 그곳에서는 유토피아적인 순간을 맞이할 수 있겠다. 존재가 느끼는 피투성의 기분은 불안을 통해 자각되니 안식처로서의 술집은 현대인에게 얼마나 근사한 공간인가. 허나 그런 공간은 실재하지 않기에 화자는 상상 속에 그려놓고 매일 들락거리는 것으로 위안 삼는다. 현대사회라는 실존의 공간에 사는 인간의 비애다. 문학이 시대의 어떤 징후를 기록하는 역할을 한다면 이런 수필이 그 전범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는가.
김혜주 <곁>
“스치듯 빠져나가 버리는 무언가를 잡으려고 애쓸 때마다 나는 ‘곁’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불안이 조금 누그러지고 왠지 겨드랑 안쪽으로 끼어드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진다. ”
작가 김혜주는 ‘곁’이라는 단 한 글자를 설명과 묘사를 통해 이렇게 형상화한다. 다소 추상성을 담고 있던 명사가 구체화 되면서 그만의 방식으로 독자를 ‘곁’으로 끌어들인다. 제목만으로는 글의 서사나 내용을 유추할 수 없는 불안전한 것임을 아는 이 작가는 경험적 이야기를 통해 ‘곁’에 대한 확실한 방점을 찍어준다. 언어를 섬세하게 운용하는 작가의 감각은 글 쓰는 이로서는 매우 큰 강점이다. 표현하려는 사상이나 대상을 자재롭게 형상화할 수 있는 능력은, 문학 창작의 중요한 지점을 정복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혼자 사는 할머니와 이웃으로 산다. 할머니에게는 ‘바흐’라는 강아지가 있을 뿐, 해가 져도 찾아올 사람 없는 할머니의 집에서는 사람 사는 인기척이 나지 않는다. 퇴근길에 어둑한 복도를 지나치며 할머니의 불 꺼진 창문을 바라보는 화자의 마음 또한 할머니처럼 쓸쓸한 시선이다. 어느 날, 할머니가 실버타운으로 이사 간다는 소식을 들은 후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친다. 그때까지만 해도 화자는 “등이 굽은 할머니는 두 팔을 나의 겨드랑이 사이로 휘감은 채 등을 다독여 주었다. 수줍게 서로의 체온을 나누는 동안 한 꺼풀의 서먹함”이 있었다. 이웃이라 하지만 타인인 할머니와의 밀착된 포옹이 거북한, 아직은 주체와 타자와의 거리가 존재하고 있다. 그랬음에도 화자는 그 서먹함을 ‘곁’이라는 단어로 밀어낸다. 이때의 ‘곁’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화자의 인간적 정서가 이끈 의지의 산물이다. 할머니는 이웃으로 사는 동안 알게 모르게 화자에게 ‘도톰한 그늘이 되어준 분’이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실버타운으로 떠나면서 화자의 집 현관문에 귤 몇 개를 넣은 비닐봉지를 걸어두었다. “곁이 돼아서 고맙수다레.”라는 쪽지와 함께.
나는 귤을 꺼내 들고 양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찔러 넣는다. 희한한 일이다. 차갑고 딱딱했던 귤이 시간이 흐를수록 말랑해진다. 귤과 나 사이에 면역이 생긴 거다. 누구에게 곁을 내준다는 일은 자 신의 시간을 내놓는 일이다. 안달복달 조급하게 분초를 다투었던 내 모습이 스친다. 오히려 있는 그 대로 다가와 내게 이웃이 된 할머니에게 갚지 못할 빚을 진 셈이다. 천둥벌거숭이로 서울살이하면서도 미처 깨닫지 못한 점이다.
화자는 할머니와의 일상적 경험을 통해 누군가에게 ‘곁’을 내준다는 것은 자기의 시간을 내놓는 일임을 알게 된다. 그는 50여 년이 다 된 아파트에서 바흐 할머니를 만날 때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었다. 시간을 들여 상대의 역사를 알고 이해하고 때론 연민할 때 타자에 대한 ‘곁’이 생긴다. 주체와 타자가 서로에게 내주고 스며드는 시간과 공간이 ‘곁’이라는 인간적이면서 아름다운 세계를 창출하는 것이다. 그 흔한 자동문이나 비밀번호를 대라는 번호판도 없는 아날로그식 아파트였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인생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할 것이라고, 기꺼이 당신의 ‘곁’이 되겠다는 달콤한 제안이 빼곡하게 있는 광고지”의 실버타운으로 떠났다. 한 인간의 마지막을 지켜주고 지켜보는 것은 분신처럼 부대끼며 살았던 가족이나 사랑하는 지인들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상징인 실버타운이다. 한 생을 산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부리는 마지막 장소가 낯설고 고독한 공간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곳에 가면 ‘곁’이 되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까. 자본과 문명의 지배하에 인간적인 삶을 포기하고 편의와 효율주의에 쫓겨가는 고독한 개인이고, 우리 사회의 씁쓸한 모습이다.
화자는 할머니가 준 귤을 겨드랑이에 끼워보며 비로소 ‘곁’이라는 말의 의미를 체화한다. ‘곁’이 된다는 것은 주체가 마음을 열어 타자를 환대할 때 가능한 감각과 정서다. 이때 섬광 같은 순간일지라도 주체와 타자가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 이 작품은 사회의 변화에 따라 인간의 관계가 파편화되는 시점에서 그 삶의 한 형태를 말하여 타자에 대한 윤리를 담고 있기에 의미 있게 읽었다.
3. 덧붙이는 글
근래 들어 수필작품 속에서 <곁>과 같은 작품을 가끔 만난다. 우리에게 아직 인간으로서의 따스한 삶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그 외에도 신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존의 문제에 맞닥뜨린 노인의 삶이 고립과 소외로 해체되어가는 모습이나 고독과 좌절과 절망이 난무하는 현실적 징후들을 드러내는 수필을 여러 편 만났다. 그 수필들은 주체의 존재성을 상실하지 않고, 타자를 향한 공감과 유대에 따뜻한 응시를 보내는 이야기였다. 작가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방황하며 슬픔과 절망에 빠지면서도 실존과 존재성을 유지하기 위해 혼신을 바쳐 글을 쓰는 존재들이다. 지면 관계상 구체적으로 다루지 못했으나 김은미의 <몽당연필의 시간>, 봉혜선의 <춘래불사춘>, 염귀순의 <노을빛 그녀>, 고태현의 <마지막 시간과 공간>, 윤기정의 <요양원의 아우>도 분석해보고 싶은 글이다. 문학성을 담보하고 있으면서도 이번 호의 주제를 함의하고 있는 수필들이었다.
작가는 자기 안에 흩어져 있는 무수한 이야기를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기록하려 하는 사람이다. 그 이야기가 개인 삶의 궤적이든, 시대적 징후로서의 세상을 말하기 위해서든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절박함으로 책상 앞에 앉는다. 스스로 외부로부터 소외시키고 자기 내면의 냉철한 심연과 마주했을 때 창작의 영감이 번뜩인다면 외로움이나 고독은 작가들에게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