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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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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국문학과 설성경 교수
1. 춘향전의 이어사 소재와 암행어사
춘향전의 원작가가 조경남임을 알게 됨으로써 밝혀진 인물의 비밀은 남성 주역이나 여성 주역의 모델이 개인이기보다는 여러 인물이 중첩된 모델로 드러난다는 점이다. 이를 몇몇 대표 인물의 모델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산서 조경남은 암행어사와 특별한 인연이 많은 인물이다. 그가 주로 활동하던 임병 양란 의 전후 시기, 그리고 인조반정 전후 시기는 암행어사의 파견이 빈번할 때였다. 이 당시 암행어사를 파견해서 수령을 염찰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민심의 수습에 있었다. 수령들로부터 재지배받는 백성들에게 그 수령을 누를 수 있는 암행어사가 있다는 기대는 하나의 기댈 언덕이 되었다. 특히 암행어사의 기능 중 민심의 수습은 재난이나 국난, 정변 등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더욱 긴요했기 때문에 국가적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암행어사를 해당 지방에 파견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에 민심수습을 위한 암행어사의 파견이 집중되었고, 반정(反正)을 통해 정권을 잡은 인조 때에도 새로운 치화(治化)에 대한 백성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암행어사의 파견이 빈번하였다.1)
이러한 시기에 곡절 많은 삶을 살았던 조경남은 성이성, 노진이란 두 명의 암행어사와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었으며, 이들 어사들의 활동은 조경남이 춘향전을 창작할 때 춘향전에 등장하는 이어사의 복합적 모델화에 원용이 된 것으로 보인다
1-1. 암행어사 성이성
춘향전의 남성 주역은 작품의 전반부에서는 이도령으로, 후반부에서는 이어사로 활동하는 인물이다. 춘향전의 책방 도령에서 어사까지의 활동에 대한 인물 소재로 성안의 부사의 자제 성이성((成以性)을 들 수 있다. 그는 부친 성안의가 남원부사로 재직할 때, 남원에 와 있었다. 특히, 그의 부친 성안의 남원부사는 재임동안에 덕치를 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부용당 성안의의 삶을 살펴보면, 그는 1591년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랐으나, 이듬해 여름에 왜구들이 난을 일으키자 의병장 곽재우를 따랐다가 관찰사 김륵(金?)의 막하에 종사하였다. 그는 그때 배필을 잃었으나 김륵이 자기 형의 손녀사위로 맞게 되자 부모를 모시고 영주군의 처가에 가서 살게 되었다. 그 후 여러 벼슬을 하다가 1596년에는 외직에서 돌아와 성균관 직강이 되고 이듬해 가을에는 사헌부 지평이 되었고, 다시 사간원 헌납으로 옮겼다. 또 다음해에는 병조좌랑으로서 영남 조도사가 되었다. 1600년 가을에 조정으로 돌아가니 공적을 칭찬하며 요직을 맡기려 하였지만, 그는 연로한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영해부사로 내려갔다. 1604년 가을에 부친의 병환으로 창녕으로 돌아왔으나 끝내 부친을 여의었다. 부친상을 마친 후 남원부사가 되었다. 남들이 그곳은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라고 하였으나 그는 부임하였다. 그는 폐단을 혁신하고 쇠잔한 형편을 소생시켜 일을 결정하여 처리함에 막힘이 없었다. 공무를 마치고는 문득 고을 사람들 가운데 어진 이를 맞이하여 서로 학문을 강론하고 시를 읊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1611년 봄에는 광주목사로 옮겼고, 1612년 요직에 있는 이의 뜻에 거슬린 탓에 관직을 그만두고 영주로 돌아왔다. 그 후 12년 동안 자주 덕망이 훌륭한 선비들을 교분을 가지면서 소요 자적하였다.2)”
이러한 성안의 부사의 자제 성이성은 부친이 남원부사로 재임했던 1607년부터 1611년까지 4년간 부친을 따라 남원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물론 그는 남원에서만 머무르지는 않았다. 부친의배려에 따라, 1607년 11월에는 경상도 상주에 거주하는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밑에 가서 공부를 했고, 1609년에는 당시 주역의 권위자인 전주의 강공(康公) 윤복성(尹復誠)에게 배우기도 했다.3) 그 중간에 남원에서는 산서 조경남으로부터 학제 공부를 하였다. 부친이 광주목사로 이직하였을 때 남원을 떠날 때 그도 그곳을 떠났고, 그 후 1639년에는 암행어사가 되어 1차로 남원에 왔고, 1647년에는 다시 남원에 호남어사가 되어 내려왔다. 성이성이2차로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에 내려왔을 때의 상황은 그의 『호남암행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삼십일 아침 부사가 와서 뵈었다. 식사 후 길을 떠나 오후에 역참에서 쉬니 여기가 바로 순천 땅이니 부(府)로부터 25리의 거리였다. 저녁에 배로 낙수를 건너서 구례에서 명령을 기다리는 자들을 만났다. 해가 지고 난 후 구례에 들어가 유숙했다. 사또 이경후가 논박을 받고 파직되었다. 곡성현감 이문주가 맞으러 왔다.4)」
⊙ 십이월 초하루 아침 어스름에 길을 나서서 십리가 채 안되어 남원 땅이었다. 내방한 것을 맞아 주었다. 비가 오다 그치다 하였다. 성현에서 유숙하고 눈을 무릅쓰고 (원천부내로) 들어갔다. 원천부사 흥주가 맞이해 주면서 진사 조경남의 집에 자리를 베풀어주었다. 조진사는 바로 내가 어렸을 적 송림사에서 학제공부를 가르쳐 준 분이다. 기묘년에 또한 암행 차로 광한루에 들렀을 때는 조진사가 아직도 건재해서 이 누에서 동숙했었는데, 이제는 이미 세상을 떠나 그 서출 자식인 조목형제 등만 나와 인사했다. 그 가족들이 다담상을 들려 들어왔다. 조씨네와 헤어졌다. 오후에는 눈바람이 크게 일어서 지척이 분간되지 않았지만 마침내 광한루에 가까스로 도착했다. 늙은 기녀인 여진(女眞)과 늙은 서리인 강경남이 맞으며 인사해 왔다. 날이 저물어 아전과 기생을 모두 물리치고 소동(小童)과 서리들과 더불어 광한루에 나와 앉았다. “흰 눈이 온 들을 덮으니 대숲이 온통 모두 희도다.” 거푸 소년시절 일을 회상하고는 밤이 깊도록 능히 잠을 이루지 못했다.5)
⊙ 십이월 초이틀 아침 남원부사를 맞아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사 후에 길을 떠나 오후에 오수역에서 쉬었다. 찰방 이양복이 차원으로 떠나갔다. 호남방백 이시해 자범과 전라도윤 박황 덕우와 판관 신홍망 망구가 서신을 보내와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저녁에 (이곳에서) 묶었다. 임실현감 조귀석은 말미를 받아 여기에 없었고, 순창군수 민응경이 겸관의 자격으로 와서 맞았다.6)
이러한 기록에서 확인되듯이 성이성은 남원부사의 아들로 남원에서 학업을 닦다가 16세에 남원을 떠나갔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1차로 남원에 암행어사로 왔을 때에 자신의 학제 스승 조경남과 함께 광한루에서 밤을 보냈음도 분명하다. 그리고 다시 남원에 2차 암행어사로 내려온 당시에는 조경남은 이미 사망한 이후이므로 그의 자제들과 만났다.7) 이 날 성이성 암행어사는 눈보라가 치는 속에서 광한루로 찾아갔다. 그는 그곳을 찾아온 늙은 기생 여진, 늙은 아전 강경남을 맞아 대화를 나누게 된다. 그는 해가 진 이후에는 시중드는 기생들마저 다 물리친 후 소동(少童), 서리들과 함께 광한루 난간에 나와서 설경(雪景)을 즐긴다. 그리고 광한루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소년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느라고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8)”
이처럼 성안의 부사와 같은 어진 부사의 아들로서 부친을 따라 남원에서 내려와서 책방도령으로 산서 조경남 밑에서 과거 공부를 하다가 16세의 도령으로 남원을 떠나고, 후에 다시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에 내려와 옛 스승을 만나는 성이성은 춘향전 이어사 모델로서의 몫을 충실히 하고 있다.
성이성은 남원을 떠난 이후 광해군 난세 때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다가, 1614년에는 이괄의 반란 때 공주로 피난하는 왕을 호종하는 그의 부친을 따랐고, 난리가 평정되자 성균관에 유학하였다. 1627년에는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승문원 부정자(副正字), 정자(正字)에 올랐다가 승정원 주서(注書)에 옮겼다. 1628년 유효입이 대북의 잔당을 규합하여 역모를 꾀하면서 인성군(仁城君) 공(珙)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하여 인성군을 자결하게 하고, 연좌처형 하기로 된 아들 용(用)은 대년(待年) 중이었다. 그 아들 용을 구명하고자 간곡한 뜻으로 상소, 경연에서도 여러 차례 간절한 진달(陳達)로 용서를 청하매 인조는 드디어 감동되어 인성군의 아들 용(用)이 구원됨과 함께, 같은 역률(逆律)에 연좌되어 대년 중이던 사람들도 모두 죽음을 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고도 그는 이런 사실을 전혀 말하지 않았기에 구원받은 사람들조차 그런 줄을 모르게 했다. 그는 가을부터 이듬해 겨울까지에 수찬, 교리, 정언, 시강원문학을 두세 차례씩 역임했다.
1633년 성균관전적(成均館田籍)에 올라, 사헌부감찰,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를 지내고, 1634년 정언 부수찬 부교리를 거쳐 이듬해 지평을 지낸 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1635년 사서로 보직되어 수찬이 되었다. 이때 그는 인성군의 아들 용 등 여러 목숨을 죽음에서 구원하였다. 1636년 겨울 병자호란으로 왕이 남한산성에 피난했는데, 그는 수찬으로서 마침 귀향해 있던 중 변란 소식을 듣고, 망와(忘窩) 김영조, 학사(鶴沙) 김응조와 함께 급히 왕 곁으로 달려가던 중 충주를 지나다가 경상감사 심연을 만났다. 그는 ‘적군에 막혀 남한산성에는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니 차라리 여기서 힘을 바침이 옳으리라’고 하는 감사의 말을 좇아 참모가 되었다. 그의 도타운 충의와 비상한 지모에 심감사는 감탄을 마지 않았다. 그는 진휼어사로 경상도 여러 고을을 두루 돌아 지방관리의 정사와 민정을 살폈으며, 이어 호서 암행어사가 되어 탐학한 관원들을 엄중히 징계하고 선정이나 미행이 있는 이를 포상하였다. 이어 사헌부지평 겸 지제교를 거쳐 사간원 헌납이 되어 윤방, 김류, 심기원, 김자점 등의 나라 그르친 죄를 극론하였다.9) 이듬해 홍문관 교리에 옮겨 그대로 지제교를 겸했다. 그때 권신들이 서로 알력을 빚어 공직한 인품으로 명망을 띤 그를 서로 끌고자 하여 이조정랑을 삼으려 하였으나, 어버이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병조정랑, 교리, 사간, 호남 암행어사 등을 거쳐 사간, 집의 교리를 지내고, 어버이를 위해 외직을 구하여 합천현감에 부임했다.
1644년 파직되어 돌아왔다가 그 겨울 시강원 필선을 거쳐 보덕에 옮기고, 이듬해 부수찬이 되어 청나라 사행에 서장관으로 인평대군을 모시고 북경에 다녀오게 되었다. 그해 가을서부터 이듬해 여름까지에 교리, 수찬을 4차례, 사간, 사헌부 집의를 4차례, 시강원 보덕 1차례에 각각 임명되어 혹 취임하기도 하고, 안하기도 했다. 그 해 별시 과거에 고관이 되어 주시관이 출제를 잘못한 사건에 연루되어 함께 파직되었다가 1647년 다시 교리에 복직되었다. 그해 겨울엔 또 호남암행어사가 되었다가 홍문관 응교를 거쳐 담양부사에 부임했다. 1650년 암행어사가 그 치적을 임금께 알려 표리가 하사되고 포상하는 유서가 내렸다. 다시 교리로 불려 곧 집의에 제수되고, 겨울에 부응교를 거쳐 다시 사간에 옮겼다. 효종 2년에 또 사간 겸 춘추관 편수관이 되었다.1653년 창원부사에 제수되자 그는 사양하지 못하고 부임했다. 1654년 가을 모친상을 당하여 복을 마치자 군기시정을 거쳐 진주목사에 부임했다.
1658년 암행어사 민정중이 순안군무를 겸하여 임금의 명으로 진주에서 훈련 사열을 하고 나서 군사에게 향연을 베풀고 상벌을 행하므로 병사 이하가 모두 분주하고 두려워했다. 연회가 끝나고 병사가 어사를 위해 촉석루에서 크게 놀음놀이를 벌여 어사의 환심을 얻으려 할 때, 그는 단연 그것을 제지시켜 막았다. 이를 듣고 어사가 깊이 감복하여 조정에 들어가 으뜸으로 보고하여 포상으로 표리 한 벌이 하사되었다. 그 가을 다시 부교리로 불렸으나 얼마 아니하여 파직당하여 돌아왔다.
효종이 승하하고 1659년 국장도(國葬都) 감낭청이 되었으며, 다시 사간이 되었다가 교리에 제수되었다. 1660년 강계 백성이 오래 폭정에 시달리므로 신하 가운데서 중망이 있는 인물을 부사로 물색하다가 그에게 임명되었다. 그 후 단양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663년 서용(敍用)되었으나, 다음해 70세로 생애를 마쳤다.10)
이러한 청백리로서 올곧은 삶을 살아간 그는 빼어난 의표(儀表)에 단정 장중하여, 아무리 불시에 급한 경우를 당해도 자약(自若)하여 급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특히, 남원에 책방도령으로 있을 때에 관아에 귀신의 괴변이 많았다 한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개의함이 없이 밤이면 늘 혼자서 거처하며, 태연히 글을 읽으며 학문에 열중하였다 한다. 또 한번은 그가 부친을 뵈러 제주도로 가는 도중에 험악한 풍랑을 만나서 배가 거의 전복이 될 지경에 이르니, 사공마저 놀라서 고함을 치며 당황해 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유를 보이며 다른 사람들마저 안정을 찾게 하였다 한다. 벼슬길에 나아가서는 교유가 적었으며, 권귀가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한다. 인평대군이 여러 차례 내방하였지만, 그는 답례로 찾은 뒤에는 더 이상 찾지 않는 결백함을 보였다. 벼슬자리에 있을 때는 절용, 애민, 청렴을 내세웠고, 법을 잘 준수하며, 사사로운 청탁을 하지 않았다. 관청이 정숙하고, 안과 밖이 엄격히 격리되어 아문의 관속들도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술 한잔, 국 한 그릇도 사사로이 쓰지 않았다. 그러나 간혹 비방이 있으면 그것에 개의하지 않았으며, 담양, 창원, 진주, 강계 등 부임하는 고을마다 밝게 다스려 칭송이 많았다.11) 그는 이렇게 어진 목민관으로서 백성을 보살폈고, 몇 차례에 걸쳐 암행어사로서 직책을 감당하였다. 그가 청백한 관리로서 일생을 보낸 점을 높이 평가하여 나라에서는 1695년 그를 청백리 명부에 올리고, 자손에게는 쌀과 콩을 하사 하였다.”12)
이러한 활동을 한 암행어사 성이성이 춘향전의 이어사 모델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을 높이는 한시가 있다. 조경남은 광해군 15년인 1622년 2월 3일의 『속잡록』에 명나라 장수 조도사(趙都司)가 우리 나라에 와서 정치가 혼란한 것을 보고 읊었다는 ‘청향지주천인혈(淸香旨酒千人血) 세절진수만성고(細切珍羞萬姓膏) 촉루낙시인누낙(燭淚落時人淚落) 가성고처원성고(歌聲高處怨聲高)’라는 한시를 인용하고 있다. 이 한시는 이미 중국에서는 전해오던 시로서 조도사가 중국에 있을 때 알고 있던 「오륜전비(伍倫全備)」의 한 구절을 읊은 것13)이다. 조경남은 이 한시가 지닌 의미를 적극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책방 도령으로 있다가 남원에 암행어사로 내려온 성이성 사건과 혼란한 광해조의 정치 풍자를 담은 명나라 조도사가 전한 이 풍자적 한시를 춘향전 창작 중 암행어사 출도 대목에서 이어사가 변부사를 향해 풍자하는 어사시로 활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이 한시가 지닌 풍자의 정도가 너무도 노골적이기 때문에 수산(水山) 광한루기(廣寒樓記)에서는 ‘즉 중국인이 지은 것인데 시의 뜻이 너무 노골적이다. 따라서 취할 바가 못된다.[卽華人爲作而辭意太露 因不足取也]’라 하기도 하였다.
이런 과격한 내용을 담고 있는 시이기 때문에 비록 작품 속에서나마 암행어사의 위치가 아니고서는 그 과격성 때문에 물의를 빚을 수밖에 없는 발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한시는 이어사 모델인 성이성이 역사적 현실에서 암행어사가 되어 활동할 때에 직접 사용한 어사시는 아니다. 조경남이 춘향전 작품의 후반부에서 일관되게 이끌어오던 변부사에 대한 비판을 한 정점으로 이끌어 올리기 위하여 암행어사 출도를 위한 변부사의 탐관적 행위를 비유적으로 폭로하는 작품 속의 어사시인 것이다.
이는 작가 조경남이 아니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창의성으로서 그가 성이성 어사의 행적과 조도사의 어사시를 함께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연계를 통한 허구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대목은 작가의 창의적 기술에 의하여 어사의 위엄을 최대한 살리면서도 그 분위기를 보다 우연하게 하는 예술적 형상화에 성공한 표현이 된 것이다.
그런데, 계서 성이성의 직계 후손들은 이 어사시가 자신의 선조 성이성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성이성의 후손들은 그의 선조인 성이성이 호남 암행어사로서 출두하면서 이 한시를 읊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5대 손인 성섭이 자기 고조(高祖)인 계서 성이성이 다음과 같은 어사출두의 주체이고, 그 때 이 한시가 불러졌다는 것을 『필원산어(筆苑散語)』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14)하고 있다.
⊙ 나의 고조께서 수의어사가 되었을 때 암행하여 한 곳에 이르렀는데, 호남 열두 고을 수령들이 크게 연회를 베풀고 있었다. 술잔과 쟁반이 어지러웠고, 기녀와 악공을 벌여놓아 구경하는 사람들이 성처럼 둘러 있었다. 날이 바야흐로 정오가 될 무렵 수의어사께서 걸객의 모양을 하고서 음식을 청하니 여러 사또들이 바야흐로 취하여 잠시 자리를 허락하였다. 주섬주섬 음식을 차려주고는 여러 사또들이 말하기를, “손님께선 능히 시를 지을 줄 안다면 곧 가이 종일토록 잔치자리에 참석하여 취하고 배부르게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것이나, 만일 못한다면 빨리 돌아가는 것만 같지 못하지” 하였다. 수의어사께서 운자를 청하시니, (그들이) 이르기를 ‘기름 고’자와 ‘높을 고’라고 하였다. (이에 어사께서) 곧 종이 한장을 청하여 시를 쓰기를
항아리 속 아름다운 술은 천 사람의 피요
쟁반 위의 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촛물이 떨어질 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래소리 높은 곳에 원성소리도 높구나
라고 하였다. 쓰기를 마치시고 즉시 내어놓으니 여러 사또들이 돌려보고서 의아하며 놀라워할 때에 서리들이 “암행어사”를 외치며 곧장 들어오니 여러 사또들이 한꺼번에 모두 흩어졌다. 당일에 파출시킨자가 여섯이요, 그 나머지 여섯명은 서계 가운데 기입하였다. 여러 사또들은 모두 세도가의 자제들이었는데도 단 한 사람도 서계에 올리는 일에 고려해주지 않으니, 호남의 사람들이 일컬어 아름다운 이야기로 여겼다.
(吾高祖爲繡衣湖南時 暗行至一處 湖南十二邑守令 大張宴 盃盤狼藉 設妓樂 觀者如堵 日之方中 繡衣爲乞客樣 請飮食 諸?方醉 暫許席 草草設飮食 諸?曰 客能作詩 則可以預終日宴席, 醉飽飮食可也 否則莫若速歸 繡衣請其韻 曰膏 曰高 卽請紙一張,寫詩曰 樽中美酒千人血 盤上嘉肴萬姓膏 燭淚落時民淚落 歌聲高處怨聲高 寫畢 卽進 諸?轉觀 疑訝之際 書吏呼暗行而直入 諸?一時皆散 當日罷出者六人 其餘六人 入書啓中 諸?皆勢家子弟 而一不顧籍 湖南之人 稱之爲美談)15)”
이 기록은 성섭이 『필원산어』의 바로 앞 이야기에서 “우리 오대조 부용당은 어릴 때 총명하고 지혜로워16)”라 하여 부용당을 5대조로 서술하고 있고, 바로 다음의 암행어사 이야기에서는 계서 성이성의 이야기를 ‘우리 고조 할아버지[吾高祖]’라 서술하고 있다. 이는 성씨 가문에서 전승되는 야담을 전한 것이며, 『필원산어』의 전반적인 서술 태도로 보아서 성섭의 창작 삽입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또, 『필원산어』의 내용을 일부 정리해 놓은 『교와문고(僑窩文稿)』의 『기선세유사(記先世遺事)』조에도 기록17)되어 있다. 여기서는 “우리 고조 상교공이 암행어사로 호남에 있을 때18)”로 첨삭 변이시키고 있다. 즉, ‘오고조’의 실체를 밝히는 듯하면서도, 실은 ‘성이성’이란 표현 대신에 ‘상교공’으로 구체화시키고 있다.
그런데 성이성의 어사출도 당시의 실화와 관련이 없는 ‘금준미주시’가 후손들에 의하여 자신의 선조 성이성 어사의 출도 때 일이라는 기록은 실은 성이성이 춘향전 남성 주역 ‘이도령, 이어사’의 모델임을 보여주는 한 증거로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의 선조 성이성 어사가 춘향전 남성 주역의 모델이 되었다는 풍문이 춘향전의 유행과 함께 확대 전파되자, 남원 기생 춘향과 자신의 조상이 사귀었다는 것을 수긍하기 어려운 처지에서 이도령 부분을 제거한 채 이어사 출도 부분만을 선택하여 성이성의 실화로 수용한 결과로 판단된다. 즉, 이 한시는 조경남이 이미 1622년 2월 3일 『속잡록』에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1637년에, 1639년에, 1647년의 암행어사 때에 읊었다고 해도 무리가 간다. 그런데 성이성이 1637년에는 각도 어사로 갔다. 1647년에는 「호남암행록」을 직접 쓰고 있지만 그런 모습의 출도를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후손들의 이 기록은 춘향전의 이어사 모델의 근거를 보여주는 것이지, 암행어사 성이성이 이 한시를 읊으며 출도하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춘향전에서 이어사가 금준시를 읊은 출도 대목이 포함된 춘향전 주역 핵심 모델이 자신의 조상 계서 성이성임을 인지하고, 기생 연애담을 차단시키면서 어사시는 수용하여 선택과 배제적 수용을 한 것임을 입증해준다. 이는 결국, 계서 성이성이 원작가에 의하여 ‘이어사’로 허구화되었으나, 성이성의 인접 주변 지역에서는 춘향전을 개작하면서 소재적 사실과 재결합시켜 안동의 권진사 같은 분들이 성도령과 이춘향으로 설정한 춘향전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전승 내지 개작상의 순행과 역행의 관계 속에서, 계서 성이성의 연고 지역권에서 일어나는 바람을 막기 위하여 문중에서는 이런 방어용 야담을 유포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논거를 뒷받침해주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이가원은 이도령 모델로 성이성이 대상화될 수 있는 근거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했다.19)”
⊙ 1954년 여름에 경북 문경 장엄촌에 우거해 계신 족숙 가산(可山) 이익원(李翊元1881- )옹이 내경하셨기에 고사를 많이 섭렵하는 어른이라 이렁저렁한 얘기를 물었더니, “춘향의 주인공 이도령ㆍ성춘향은 애초에는 성도령ㆍ이춘향이니 성도령은 곧 계서 성이성공(成以性公)이다.” 하고 말하고, 또 “원춘향전의 작자는 안동읍에 살던 권진사이다.20)”
위의 기록에서 원춘향전의 작가를 안동의 권진사로 내세운 것은 권진사가 춘향전 개작자의 한 사람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런 점은 남원의 양진사 창작설과 같은 이치에 해당된다. 이와 더불어 권진사 유형의 작가가 작품을 창작하면 이를 없애려는 성이성 문중의 노력 또한 심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21)
김동욱도춘향전 근원설화 중 암행어사설화를 소개하면서 이 성이성 설화를 제시하였다.
⊙ 광해군 때 남원부사로 부임했던 성안의 부사의 아들 성계서 이성(以性)이 뒤에 남원에 암행어사로 나아가 부사 생일연에서 「금준미주천인혈 운운」의 시를 읊어 암행어사 출도를 하였다는 것으로 계서의 행록애 적혀 있다 한다. …중략…이도 암행어사 설화의 전형적인 것으로 보아진다. 더욱이 이 성이성이 바로 남원으로 암행어사로 간 것으로 되어 있으나, 다만 이 설화애는 춘향이 사실이 없다. 그저 순연(純然)한 암행어사 설화일 뿐이다.22)”
이러한 점들을 고려한다면, 춘향전 이어사 모델로 암행어사 성이성이 가장 근접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1-2. 암행어사 노진
1930년대 김태준은 「증보조선소설사」에서 춘향전은 옥계 노진(盧?)의 사실을 소설화한 소개하였다. 즉, 김동욱은 춘향전 근원설화 중 암행어사 설화를 소개하면서 그 첫 설화로 노진설화를 들었다.
⊙ 이 야담 중애서 어릴 때 고아가 된 것은 행장에 통하나 「불매첩(不買妾)」23)이란 사실성을 어느 정도 이 설화와 결부시켜야 할지 미심이다. 이 노진설화와 춘향전을 비교해 보아 틀리는 근본적 플로트의 차이를 들면 다음과 같다.
발생 설화의 지방적 차이로서 선천과 남원과의 배경이 틀린다. 노진이 빈한한 집 도령으로 혼수를 얻기 위하여 구걸하러 간 것으로 되어 있으니 이도령과 대척적(對蹠的)이다. 이 선천기(宣川妓)는 심산 암자에 숨었으니 이는 도망노비에 해당할 것이며 춘향과 다르다. 변학도(신관)의 수청들라는 플로트적 기복이 없다. 이 선천기는 옥단춘전의 옥단춘에 비의할 수 있는 의기(義妓)로 형성되어 있다.24)
이런 논의의 대상이 된 남원 사람인 옥계 노진(1518- 1578)은 호서어사를 지낸 사람인데, 그에 관한 야담으로 다음과 같은 절개를 지킨 기생과 암행어사 이야기가 전한다.
⊙ 옥계 노진은 어릴 적에 고아가 되어 가난하게 남원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장성했지만 아내를 맞을 수가 없었다. 그 무렵 무인인 당숙이 선천원님으로 있었다. 모친이 선천으로 가서 혼수를 얻어오라고 보냈다. 옥계가 머리를 묶고 도보로 울면서 떠났다. 선천부의 관문에 이르렀는데 문지기에게 걸려 들어갈 수가 없었다. 길에서 방황하고 있는데 마침 어린 기생 하나가 있어 입은 옷이 곱고 새것이었는데 지나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서서 옥계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묻기를, “도령님은 어디서 오셨나요?” 옥계가 사실을 말해주었다. 기생이 “우리 집은 어떤 동에 있고 바로 몇 번째 집에 있으니 여기서부터 멀지 않습니다. 도령님이 우리 집에 하숙처를 정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옥계가 허락했다. 옥계가 어렵게 관문에 들어가서 당숙을 보고서 찾아온 연유를 말했더니 당숙이 얼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새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아니하고 관청에 부채가 산처럼 쌓여서 심히 고민이다.” 그는 참으로 냉대하는 것 같았다. 옥계가 하숙처에서 나가 자겠다는 생각을 고하고는 하직을 하고서 관문을 나섰다. 그리고 즉시로 그 기생의 집을 찾아갔다. 동기가 반갑게 맞이하면서 그 어미로 하여금 저녁 밥을 정갈하게 차려서 내 오게 하였다. 밤에 그와 함께 동침을 하였다. 그 기생이 말하기를, “제가 본관 사또를 보니 수단이 매우 협소해서 비록 지친의 사이라도 혼수를 잘 마련해줄 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도령님의 기골과 형상을 보니 크게 현달할 모습이십니다. 어찌 반드시 거지의 행색을 스스로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가 지닌 은 오백여냥이 있으니 이곳에서 며칠 유숙하시고 다시는 관문에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은을 가지고 그대로 고향에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자 옥계가 아니된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행동거지가 이와 같이 궁색하니 당숙이 어찌 책망을 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는가?” 기생이 말하기를, “도련님이 비록 지친의 정을 믿는다 할지라도 지친을 과연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많은 날을 유숙하다보면 그 사람의 괴로와하는 얼굴빛만 당할 뿐이요, 고향에 돌아갈 때에는 수십 냥 밖에 노자돈을 주지 않을 것이니 장차 그 돈을 어디에다 쓸 것입니까? 차라리 지금 그대로 떠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여러날을 보내는데 낮에는 관에 들어가서 당숙을 보고 밤에는 기생의 집에서 잤다. 어느날 밤에 기생이 등불 아래서 행장을 차리고 은을 내놓으며 보자기로 쌌다. 새벽이 되어서 마굿간에 있는 말 한 필을 끌어내어 싣고 길 떠나기를 재촉하면서 말했다. “도련님은 십년 남짓 지나면 반드시 크게 귀한 몸이 될 것입니다. 내 마땅히 몸을 깨끗이 하여 기다리겠습니다. 도련님과 얼굴을 맞댈 수 있는 길은 이 한 길 밖에 없습니다. 천만 보중하옵소서.” 눈물을 뿌리면서 문을 나섰다. 옥계가 부득이하여 당숙에게 하직인사도 하지 아니하고 길을 떠났다. 다음날 아침 본관사또가 귀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하는 짓이 미친 것 같은 것을 내심 괴이하게 여겼으나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돈냥을 소비하지 아니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옥계가 집으로 돌아온 뒤 그 은을 가지고 처를 맞이해서 산업을 일으키니 의식이 구차하여지지 않았다. 이에 과거 공부에 온 정성을 쏟아 4, 5년 뒤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크게 임금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얼마 되지 않아 수의사또로 관서지방을 시찰할 때 바로 그 기생의 집을 찾아가니 그 어미만 남아 있고 그 딸은 보이지 않았다. 옥계가 어미 앞에 나아가 묻기를, "할머니는 근래에 무사하시오?" 그 할머니가 한참 바라보다가 옥계인 줄을 알아차리고 이에 옷소매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우리 딸이 자네를 보내고 난 뒤로부터 어미를 버리고 도망가서 간 곳을 알지 못하니, 지금까지 몇 년이나 지났나? 늙은 이 몸이 밤낮으로 생각하느라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네."
옥계가 망연자실하여 속으로 생각하기를, "내가 이곳에 온 것은 오로지 옛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지금 그림자조차도 없으니 간담이 떨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저는 반드시 나를 위해서 자취를 감추었을 것이다." 다시 그 어미에게 물었다. "할머니의 딸이 한번 떠난 뒤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직 듣지 못했습니까?" 할머니가 대답하기를, "근래에 소문을 들으니 내 딸이 선천 경내의 산사에 몸을 부치고 있다고 하는데, 자취를 완전히 감추어서 그 얼굴을 본 사람이 없다고 한다네. 들려오는 소문인지라 믿을 수가 없네. 늙은 몸이 나이 들어 쇠약해서 기운이 없고 또 사내가 없는지라 그 종적을 찾을 수가 없었네." 옥계가 다 듣고 난 다음 즉시 선천땅을 가서 일대의 사찰을 두루 찾아보았다. 아무리 찾아도 끝내 그림자 조차 없더니, 한 절을 찾아가니 절 뒤에 천길 벼랑이 있고 그 위에 자그마한 암자 하나가 있는데 너무 가파라서 발 디딜 곳이 없었다. 옥계가 칡 덩쿨을 부여잡고서 어렵게 그 위로 올라가니 서너명의 스님이 있었다. 그들에게 물으니, "사오년 전에 이십 쯤 되어 보이는 여자 한 사람이 나타나 약간의 은을 예불하는 수좌에게 맡기고 식사비용으로 삼게하고는 불좌의 탁자 앞에 엎드려서 머리를 풀어헤쳐 얼굴을 덮게 하고 조석 밥을 창 틈으로 들여보내게 했습니다. 간혹 대소변을 볼 적에 잠시 문을 나섰다가 다시 들어갔습니다. 이와 같이 한 지가 벌써 여러 해 되었습니다. 소승은 모두 그 여자가 보살 생불이라고 생각해서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옥계가 그 기생이라고 추측하고서 수좌로 하여금 창 틈으로 다음과 같이 말을 전하게 했다. "남원 사는 노 도령님이 낭자를 위해서 이곳으로 왔으니 어찌 문을 열고서 맞이하지 않습니까?" 그 여자가 스님을 통해서 묻기를, "노 도령님이 왔다고 한다면 과거에 급제했습니까? 안했습니까?" 옥계가 마침내 과거에 급제한 뒤에 이제 마침 수의사또로서 이곳으로 왔노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여자가 이렇게 말했다. "첩이 이와 같이 여러 해 동안 자취를 감추면서까지 고생을 하는 것은 오로지 낭군을 위해서 입니다. 어찌 흔연히 즉시 나가서 맞이하고 싶지 않겠습니까마는 여러 해 동안 귀신 형용이라 장부한테 뵈기가 어렵습니다. 행차께서 만약에 나를 위해서 십 여일 머무신다면 첩이 삼가 때를 씻고 화장을 해서 본래의 형용을 되찾은 다음에 만나는 것이 좋을듯 합니다." 옥계가 그 말대로 따라서 머물렀다. 십 여일을 보낸 뒤에 그 여자가 화장을 하고 곱게 차린 뒤에 나와서 옥계를 보고 서로 손을 잡으니 슬픔과 기쁨이 함께 이르렀다. 그 곳에 살던 스님들이 비로소 그 내력을 알아차리고 탄식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옥계가 본부에 통지하고 가마와 말을 빌려 선천부에 실어보냈다. 그 어미하고 상면하게 했다. 일을 마치고 임금에게 보고한 뒤에 비로소 사람과 말을 보내어 데려와서 함께 살아 종신토록 애지중지하였다고 한다.25)
이러한 야담의 내용처럼 그는 호서 지방에 파견된 어사로 활약한 적도 있고, 만년에 몸이 불편하여 고향 남원에서 일시 머물기도 하였다. 노진에 얽힌 이런 열녀 기생이야기는 춘향전에서 보여주는 열녀 기생과 일부 상통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노진이 활동하던 시기에 비하여 아주 후기의 것으로거의 200년간 전승되던 이야기가 후에 『계서야담』에 수록되었다.26)
산서 조경남은 앞선 시대의 사람이기는 해도 옥계 노진의 고향과 같은 고을, 같은 동네에 살았다는 인연이 있다. 옥계 노진이 1578년에 사망하였으니 그가 사망하기 몇 년 전인 1570년에 조경남은 태어났다.
두 사람의 관계를 보다 구체화시킬 수 있는 옥계 노진의 만년 사건을 살펴보자.
⊙ 그는 1574년에는 병조참판 대사간에 임명되고 갑자기 이조참판 겸 예문관 제학(提學)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75년에 특히 자헌(資憲)에 진계(進階)되고 예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에 올랐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이해 10월에 대부인이 졸하였다. 1576년에 이조참의에서 충청관찰사와 전주부윤을 거쳐 부제학으로 소환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귀양(歸養)을 소걸(疏乞)하니 선묘께서 위유하고 휴가를 주어 체직(帶職) 왕환할새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사장(辭章)과 함께 잠경(箴警)의 말을 첨부하니 성지(聖旨)로써 가장(嘉?)하고 마침내 체직(遞職)을 허락하고 함께 도관(道官)에 명하여 양친의 수용을 공급할 제 그는 상전진사(上箋陳謝)하였다. 삼년상이 끝나자 그는 병조판서를 분임(奔臨)하였으나 병으로 경질되고 공조판서 대사헌을 거쳐 대사마에 임명되어 공직한 지 수십 일에 병으로 사양하고 1578년에 이조판서에 올랐으나 그의 병은 이미 급전하여 일어날 수 없게 되니 선묘께서는 내의(內醫)를 보내고 어약(御藥)을 하사하였다.27)
그의 묘비명에 따르면, 그는 임종에 가사(家事)는 언급하지 아니하고 단지 “내가 송추에서 사망할 수 없음은 실로 평생의 뜻이 아니다”라 하고 마침내 졸하니 춘추는 61세, 당시 집에는 한 섬의 곡식도 없었으니 사부로 염습을 다스렸고, 경중의 사부는 경조분곡(傾朝奔哭)하고, 가동주졸(街童走卒)까지도 비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장지로 돌아옴에 함양의 사민은 남녀노소할 것 없이 경상(境上)에서 영곡(迎哭)하고, 조부(吊賻)에 힘을 다하였으며, 장사날에는 수 개 군에서 모여들었고, 오지 못한 사람은 위패를 모셔 곡하였다고 한다.28)” 이런 상황에서 산서 조경남은 자신의 동네에서 치루어진 노진의 장례에 대한 뒷 이야기를 자기 부친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로부터 관심있게 들었을 것이다. 비록 노진의 묘지는 남원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지리산 옆의 함양 주곡리(酒谷里)에 있었지만, 그 장례의식은 어린 조경남에게 평생을 두고 기억나는 암행어사 출신 대정치가의 장례로서 기억되었을 것이다.
노진의 묘사(廟祠)는 남원과 함양 두 곳에 있고, 현재 남원에는 원천동 호경마을에 ‘모덕사(慕德祠)’란 사당과, 근자에 도로 개설로 옮기며 세운 ‘옥계노진선생 별묘’가 있다. 이곳은 지리산 육모정 입구로 산서 거주지 1Km 이내 지점이다.
앞에서 확인되었듯이, 조경남과 노진은 남원이라는 동일한 공간을 배경으로 3대에 걸친 만남을 이루고 있다. 조경남의 부친 조벽은 같은 동네의 유학자요 국가의 정승인 노진이 남원에 거처하는 동안에 어떤 형식으로든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옥계 노진의 죽음을 전후한 상황과 그때 겪었던 소년 조경남의 상황은 그의 일생에 옥계 노진이 삶의 강력한 인상으로 자리하는 사건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남원에 거주하는 8세 소년 조경남은 임금의 신하에 대한 자상한 손길이 한양으로부터 머나 먼 지방에까지 미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로부터 5년 뒤 조경남은 비로소 평생에 걸쳐 쓰게 되는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13세의 소년이 이 일기를 쓰게 된 과정을 살펴보면, 그의도가 자못 국가적 스케일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조경남은 벌써 국운과 자신의 삶을 관련시켜 사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불행하게도 조경남은 노진과 같이 태평한 시대에 조정에 출사하여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는 없었던 시대를 살았다. 조경남은 나라를 위한 자신의 충정을 의병활동이라는 형태로, 자신의 공업을 글이 아닌 무공으로 남겼다. 그러나 노진에게 보여주었던 국왕의 은혜를 다시 한번 남원에서 자신의 일로 재현하는 것은 조경남에게는 이루지 못한 소망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의미있는 세대간의 만남은 조경남과 그의 제자 성이성의 만남이다. 조경남은 노진처럼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에 내려온 성이성을 통해서 소년 시절의 꿈이었던 옥계 노진을, 아니 임금의 눈과 귀가 되어 국왕의 정치를 보필하고 싶었던 자신의 좌절된 소망을 보게 되었다.
또, 조경남은 자기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용추동을 마음의 위안처나 풍류의 공간으로 삼았다, 지리산 황령치와 향로봉 사이에 있는 용추동은 그의 시 ‘용추동’에서 ‘벗과 더불어 술을 가지고 용추 가에 가서, 난리 겪는 심정을 서로 위로하였다.’29)에서도 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携我惠而好 나를 동반하니 고맙고도 좋긴 한데
同歸山路難 함께 돌아감에 산길이 험하구나
人歡溪水上 사람의 기쁨이야 시내 물가에 있고
花笑樹陰間 꽃들의 웃음이야 나무 그늘 사이 있다만
魄喪三年亂 정신은 삼 년 난리 통에 다 잃고
形偸半日閑 겉껍데기만 반나절 여유를 훔쳤네
捷音今若至 승전의 소식 지금 여기 이른다면
沈醉亦便安 깊이 취한들 또한 맘 편할 것을
이러한 용추동 관련 기록은 산서가 노닐었던 대표적 공간 유허팔구지의 하나인 ‘영귀암’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고 있다.
⊙ 영귀암은 용추의 두번째 구비에 있느니 구룡소의 위쪽이요, 옥녀봉의 아래이다. 읍지에 이르기를 “위에는 가히 이 백 사람을 앉힐 수 있다. 아래로는 풍호대가 있고, 위에는 인지반이 있다. 고루암은 그 서쪽을 둘렀고, 용호당은 그 동쪽에 세워져 있다. 선생이 일찍이 남원부사 목성선 및 노공 형제(옥계 노공30)의 후손으로 설서31)의 벼슬을 하는 분들)와 더불어 여기에서 풍류를 읊조리고 해 저물어 돌아왔다. 그래서 바위에 이 이름이 붙게 되었다.32)
여기서 나오는 “부사 목성선과 노씨형제들(옥계의 손인 ‘說書’무리)은 이 곳에서 풍류를 즐기다가 날이 지면 돌아왔다.33)”로 보아, 조경남은 남원부사 목성선 및 옥계의 손자 형제들과 어울렸음이 확인된다. 산서 조경남이 영귀암에서 부사 목성선과 어울린 시기는 목부사의 재임시기인 1635년 10월부터 1638년 1월의 사체(辭遞)까지로 보아야 하므로, 이 때는 산서 조경남이 65세가 넘은 만년이었다.
또, 목성선부사도 그 모임 등에서 함께 어울리는 옥계의 자손들을 통해 옥계에 관한 이야기를 산서 조경남과 같이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목성선부사는 1638년 1월 남원부사를 사체한 바로 직후인 1638년 9월 24일 경상도 암행어사로 명을 받고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므로 산서 조경남은 이 사실을 뒤에라도 접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로 볼 때, 산서 조경남은 옥계 노진에 관한 이야기를 평상시 마을에 전하는 전언으로, 또 옥계의 집 근처에 있는 영귀암 놀이 등에서 그 친자나 친손들의 입을 통하여 생생하게 전해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또, 옥계 노진의 증손인 노형하는 교리 최상중의 외손자로서 세상에 세칭 ‘팔미군자(八美君子)’라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진사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지평(持平)에 이르렀지만, 일찍 죽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다.34)” 는 인물이다.
이처럼 산서 조경남은 남원 지리산 영귀암에서 당시 남원부사요, 직후에 암행어사가 된 목성선 부사와 옥계의 손자 형제들과 더불어 음풍영월을 하며, 온 종일 즐기기도 하였다. 이 영귀암은 지리산 용추 구룡소 위의 옥녀바위 옆에 있는데, 선경같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공간이다. 이곳은 산서 조경남과 옥계 노진 및 그 자손들이 사는 동네와 약 3Km 이내에 위치한 공간이었다. 이는 산서 조경남이 옥계 자손과의 모임이나, 또는 다른 만남에서 당시 자기 동네의 선배요, 청백리요, 어사 출신의 대학자, 판서 출신인 옥계를 존중하면서 그의 삶을 들어 이해하고 있었을 것임을 암시한다. 이런 상황은 조경남에게는 ‘암행어사 노진과 열녀 기생 이야기’의 모태가 되는 실제의 사건과 그의 주변적인 야담 등이 인상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더구나 산서는 그 시기에 고금설화집을 편찬하고 있었기 때문에, 야사와 야담, 설화에 깊은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조경남은 여러 암행어사에 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접했다. 자신 보다 앞 선 시대의 인물로서 야사로까지 발전하며 전하는 절개 지킨 기생과 관련되었고 자신과 같은 동네에서 말년을 보내었으며, 그의 손자들과 교류한 바 있는 암행어사 노진, 부친이 남원부사였으며 자기 제자이며 출도 전날 광한루에서의 특별 만남을 가졌던 암행어사 성이성 등이 이어사 모델로 작용했을 것이다. 즉, 조경남은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에 찾아온 성이성을 핵심 모델로 삼으며, 암행어사 노진의 열녀기생 이야기 등을 중첩시켜 이어사 모델로 활용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2. 춘향전의 암행어사 관련 삽화
2-1. 십장가와 어사시의 대결정신
십장가(十杖歌)의 높이와, 어사시의 질량감은 동일한 수준의 짝을 이루는 동일인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이런 과격한 설정은 조경남같이 전란의 현장에서 적과 생사를 걸고 맞서본 작가의 발상이라 하여 적절할 것이다.
연약한 여인이 억울하게 매를 맞는 십장가 대목도 사실의 세계를 반영했다기보다는 작가에 의하여 만들어진 허구의 세계일 뿐이다. 춘향이 매를 맞으며 ‘십장가’란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비일상적인 행위이다. 다만, 사육신들이 당한 혹독한 형벌이나, 전란 중을 겪었던 처절한 살육의 비유적 표현이나 지조없는 세태에 대한 냉혹한 풍자로서는 가능한 것이었다.
이처럼 작가나 독자는 사육신을 통해, 왜란과 호란이란 전쟁을 통해 겪었던 죽음과 죽임에 대한 극한적 이미지가 지행하는 바를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춘향의 저항과 그에 따른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평화시의 작가나 독자에게는 인식되기 어려운 특수한 체험자들이 창작하고, 특수한 시대 조건 속에서의 독서는 그 의미의 교감이 가능했을 것이다,
무차별 살육을 당하던 그 현장을 목격한 이들, 그 시신의 틈바구니 속에서 생명을 부지했던 이들이 짓고 감상하는 작품의 세계는 십장가의 의미가 그렇게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다. 죽음을 거부하다 죽어가는 가족과 친지 그리고 이웃들의 살육 현장을 바라보았던 그들에게는 형장을 맞으며 십장가를 부르는 춘향의 모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춘향전에서 ‘금준미주’시의 설정은 특이한 배치요 묘수이다. 춘향의 정절과 핍박받는 민중간의 고리를 기묘하게 연결시켰다. 얼핏 억지 연결같은 변부사 잔칫상을 보고 읊조리는 ‘천인혈, 만성고’는 내적 구성으로는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다. 그러나 ‘천 사람’ ‘만 백성’의 사람들이란 그 대상 의미 확충방식은 생일잔치에 동참한 남원 부근 관장들의 잔칫상에 오른 그 술과 안주에 비견하는 것만으로는 무리임이 틀림없다. 예컨대, 명나라 장수 조도사가 광해군의 흥청대는 궁중 잔칫상을 보고 노래부른 그 표현을, 남원이 지방의 수령이 베푼 잔칫상을 보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과장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경남의 눈에는 이런 설정이 가능한 것이었을 것이다. 즉, 남원부사의 잔칫상은 남원이 군사적으로 삼남의 요충지요, 정유재란 때의 왜군의 침공으로 피의 바다를 이룬 바로 그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 전란의 피해가 아직도 남아있고, 그 유족들이 살아있는 그 마당에서 변부사는 무죄한 기생 춘향을 능욕하고, 생일잔치의 유희감으로 죽이려 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로운 만인의 묘지인 ‘만인의총’ 앞에서 벌어지는 탐악한 관리 변부사의 잔칫상은 온 백성의 고혈로 벌리는 잔칫상이라고 할만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작가가 현실의 성이성 어사출도에서는 있지 않았던 절묘한 어사시를 허구적 인물인 변부사의 징치와 변부사의 탐악을 만백성의 고혈로 연게시킬 수 있는 작가이자, 남원이란 한 지역의 개체적인 관리의 탐학상보다는 국가적 차원의 탐학으로 인한 백성들의 비참한 삶의 현장으로 고발할 수 있는 금준미주시의 창조적 활용을 가능하게 하는 인물은 남원 의병장 출신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가 이 조도사의 한시를 자신의 잡록에 실어 소개한 발상이요, 스케일이기 때문이다.
조경남은 전란을 겪은 의병장 출신이기 때문에 이런 경험을 춘향전 주제의식의 기저에 강
력히 깔아놓을 수 있었다. 물론 표층에는 변부사같은 탐관오리의 이야기가 자리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그 징치의 표현이나 의미 부여를 강력하게 되는 근거가 어사출도 대목의‘금준미주’의 설정 같은 데서 확인된다.
2-2. 어사출두 방식의 전투성
춘향전의 어사출도도 실제의 암행어사가 보여주는 출도의 사실에 비하여 크게 폭력적이고 집단적 과격 행위로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작가가 작품이 지닌 극적인 상황을 고조시키기 위해 의도한 설정이요 허구적인 조작이지만 이런 설정은 상무적 성격의 작가가 구상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암행어사 출도를 할 때, 역졸들의 관장에 대한 공격같은 것은 전쟁에서 겪은 전투의 굴절된 모습이다. 왜냐하면 실질적인 출도의 상황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전쟁체험에서 본 공격자의 분위기를 역졸들의 행위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암행어사출도가 흡사 유격작전같은 모습을 띠는 것은 전후문학으로서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할 만하다.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그런 인식이 없겠지만 작품창작 초기의 독자들에게는 전쟁경험에서 얻은 유격전투의 이미지를 출도하는 역졸들에게서 느낄 수 있고 그 통쾌감은 한 관장을 타도하는 통쾌감이면서 전쟁의 적을, 비유컨대 왜적을 타도하는 감동으로 느낄 수 있다.
(중략)
또 출도의 의미 확산은 ‘개벽’이나 ‘개국’와 같은 거대 의미로 상징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금준미주’시의 풍자 규모나 용량과 연계시켜 본다면, ‘파경몽(破鏡夢)’과 ‘금준미주(金樽美酒)’시는 하나의 연속선 상에서 어사출도가 지닌 폭발력을 강력히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이 삽화는 태조의 꿈이야기이니 쉽게 기생 춘향의 꿈으로 차용한다는 발상이 쉬운 것이 아니다. 같은 왕조의 건국을 한 태조의 꿈을 기생 춘향에게 연계시키는 것에 대한 부담은 「광한루기」에서 “ ‘꽃이 떨어지니’ 라고 운운한 것은 곧 우리 임금께서 등극하실 꿈이었다.…중략…속본에서는 감히 이 말을 사용하였으니 불경한 것이 심하다. 이제 아울러 개정하노라.”35)에서처럼 일부에서는 이 설화 자체가 참람하다는 비판도 한다.
이처럼 조경남은 운봉 부근인 남원에서 살았고, 왜란때 운봉전투에서는 자신도 왜군을 격퇴하는 승전의 관록을 가진 인물이다. 이런 조경남이기에 그 어떤 남원 주변 지역의 관장보다 운봉사또에게 거는 기대가 컸을 것이다, 이런 점이 어사 출도시에 운봉이 걸인 차림의 어사를 돕고, 또 거의 같은 시간대인 하룻밤 전에는 옥중의 춘향이 운봉전투에서 왜구를 맞자 전승했던 그 장군이 건국이 기미를 알 수 있었던 꿈인 ‘파경몽’을 꾸고 있었던 것으로 설정하였다. 이런 설정, 즉 운봉사또와 태조의 ‘파경몽’은 어떤 누구보다도 조경남이 춘향전의 소재로 활용했을 가능성을 높여준다. <출전: 설성경, 『춘향전의 비밀』, 서울대출판부, 2001>
[네이버 지식백과] 『춘향전의 이어사 소재와 암행어사』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암행어사), 2002.,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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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소개 고맙습니다.
송년 건강과 결실이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다사다난했던 을미년도 몇일 남지않았네요.
가는해 마무리 잘하시고~
희망찬 병신년(丙申年)에도 배전의성원 부탁드리며...
소망하는일 모두 이루시길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