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시 6.25가 다가왔다. 작년엔 혼자 막연하게 유엔묘지를 찾아 참배했고, 올해는 다가서다 가슴에만 담기로했다.
나이가 드니 생명 소중함의 가치를 실감한다. 100세시대, 전혀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아니라, 내생애 조금이나마 보은의 마음 느끼고 떠나고 싶은 것이리라.
나의 두뇌 영상속에 저장된 전쟁, 6.25와 베트남전이다. 6.25는 구전, 기록과 영상으로 남았고, 베트남전은 나의 세대에 근접했기에 생생하다.
베트남전, 내가 고등학교 2학년때든가? 작은형이 해병대 입대해서 베트남으로 떠나던날, 어머니를 모시고 부산항 8부두로 갔다. 그곳엔 난생 처음보는 웅장한 미국 군함이 정박해 있었다. 당시 8부두는 미군(특수물자)의 전용 부두였다.
까마득한 높이의 갑판, 지상의 가족과 갑판위의 장병들은 서로의 숨은 얼굴 찾기 경쟁에 바빴다.
자식을 알아본 부모들은 사과에 실을 묶어 편지를 매달아 던져올렸다. 힘이 부치는 여러 부모님들이 내게 맡겼고, 나는 연신 갑판위로 팔매질을 해댔다.
고동소리 울리며 머리 돌리는 군함, 드디어 참고 있던 가족과 연인들의 흐느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때가 베트남 전쟁의 확전기, 가면 다죽는다는 소문이 퍼져 돌았다. 더구나 수색전문 해병전투부대였으니...
눈시울 젖으신 어머니를 보며 "도대체 전쟁은 왜 하는거야?"하는 볼멘소리를 했지만, 후일 철책선에 선 나의 총쥔손엔 힘이 더해졌다.
이후 부모님과 형제들은 라듸오의 베트남전 뉴스에 귀를 기우렸고,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시간이 흘렀다. 2년만에 작은형은 신체에 가벼운 전쟁의 흔적을 남긴채 C레이션(C-ration, 미군 전투식량) 흔적남은 배낭을 메고 귀국을 했다.
총성과 아우성, 1973년 미군 철수로 1975년 4월 수도 사이공이 베트콩에 함락되자 난민 수백만명이 공산치하를 피해 배를 타고 세게 각국으로 피난을 떠났다. 국제 미아가 된 그들, 이름하여 보트피플...
그해 이맘때쯤, 그 난민들을 싣고 부산항에 16일만에 도착했다는 군함, 함정안의 모습에서 말그대로 피난민이란 단어를 내게 각인시켰더라.
나는 그때 키작고 얼굴 새까만 그들을 인도받아 학교에 수용하는 업무에 참여했는데, 전후가 연상되니 감회가 남달랐다.
전쟁의 공포에서 이탈되지 못한 뇌리, 이국의 낮선 환경, 나라잃은 설움, 그들의 지치고 망연자실한 표정이 오랫동안 나의 머릿속에 남았었다.
어릴적 6.25 전쟁 이야기를 들었고, 등산을 다니며 지리산 남부군의 루트, 철원 • 화천 전쟁의 참혹함과 남북대치, 그런 동족상잔 비극의 흔적을 보아왔다.
욕심 거두고 조물주가 베푸신 자신의 몫을 챙기고, 인생 즐기다 가면 좋으련만 끝없는 인간의 탐욕이 화를 부른다.
앞서간 호국영령 희생으로 오늘의 내가 있다. 이젠 그러지 말아야지. 이땅에선 다시는 6.25와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여전히 갈등을 부추기고, 우리들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불안한 생각이 든다.
첫댓글 양재일 님
참 글을 잘 써시네요?
연세가!!!
우째 되십니까!
젊은
우리 친구들에게
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