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인문학기행 답사기
김경식( 시인. 기행작가)
■ 이천 기행의 의미
경기도 이천시의 지명은 고려를 건국했던 태조 왕건과 관련이 있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기 전에 이천 고을을 휘돌아 흘러가는 복화천을 건너야 했다. 그러나 장마로 건널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이천 출신의 호족이었던 서목徐穆)의 도움으로 복화천을 무사하게 건널 수 있었기에 전쟁에 승리할 수 있었다.
왕건은 그 보답으로 주역의 이섭대첩(利涉大川)에서 두 글자를 모아서 동네 이름을 이천(利川)이라 했다. 이천(利川),“이익을 주는 하천이 있는 동네”의 이름값을 하고 있다. 고려 초에 이천현(利川縣)이란 지명을 얻었는데, 당시의 지명이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
1996년에 시로 승격되었을 뿐 아니라 2010년에는 대한민국 최초로 공예 및 민속 예술분야 유네스코 창의도시로 지정되었다.
이천은 고려시대 외교관이며 문인이었던 서희(942~998)와 조선후기 어재연(1823~1871) 장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이수홍(1905~1926 의사의 고향이다.
천주교 박해시기에 순교한 이문우(1810~1840)을 비롯한 많은 신자들이 활동하였던 지역이다.
천주교 <단내성지>는 우리나라 최초로 교유촌이 형성된 곳이다.
이천은 쌀과 도자기로 유명한 고을이다. 광주산맥의 지맥들이 낮은 구릉을 형성한 사이로 평야가 산재하면서 충적평야가 기름진 들을 만든 곳이다. 남한강의 지류인 청미천, 복하천, 송곡천 등이 흐르면서 비옥한 들을 형성했다. 이런 토질은 도자기 생산의 토대가 되어 도공들의 삶터가 되었다.
이천은 이천도호부가 설치되었던 고을이었다. 삼국시대에 백제의 남매현, 고구려의 남천현, 신라 진흥왕 집권기에는 신라의 영역이 되어 이 남천정이 설치되었으니 역사가 오래된 고을이다.
설봉공원은 이천 시민들이 자랑하는 곳이다. 설봉산 자락에 60만평의 이 공원은 이천도자기축제와 이천쌀문화축제가 열리는 곳이다.
설봉공원 내에 자리 잡고 있는 문학공원은 아름다운 서정과 운치를 더하는 곳이다.
■ 설봉서원
서원의 형태가 처음 등장한 것은 중국 당나라 말기이다. 주자(1130~1200)가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건립하고, 학문 연마의 도량이 된 이후 남송, 원나라, 명나라 때 많은 서원이 생겼다.
우리나라는 1543년(중종38) 풍기군수였던 주세붕(1495~1554)이 안향(1243~1306)을 배향하고 인재양성을 위해 경상도 순흥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한 것이 최초이다.
서원 설립과정에 중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기능과 성격 등은 상이하다.
중국 서원의 특징은 국가의 관리가 되기 위한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학교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조선의 서원은 은둔했던 선비들의 결집과 향촌사림의 정계 진출을 위한 교두보 역할을 했다. 이것은 결국 중앙정계 진출을 위한 과거시험 공부와 유교 학문으로서의 서재(書齋)와 제사공간인 사우(祠宇)의 두 가지 기능을 했다.
조선의 서원이 설립하게 된 배경은 조정에서 소외되었던 선비들의 향촌활동에 기인한다. 사림 세력들 향촌사회에 경제와 학문적인 세력기반 토대를 구축하고 있었다. 사림들의 중앙 조정의 정계진출이 가능해진 성종 이후는 유향소의 거점을 전개하려고 했다. 그러나 훈구척신들은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여 지방 토착 선비들의 정치세력화는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유향소는 조선 초기에 향리를 감찰하고 고을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각 지방의 유지들이 조직한 자치기구이다.
연산군 시대의 폭정과 이후 여러 번의 사화로 중앙 조정의 선비들은 대거 냑향한다. 지방 선비들의 교육과 교화를 목표로 향촌활동을 합리화할 수 있는 구심체로 서원이 설립과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 된 것이다.
지방 사림의 정계 진출로 자신들이 흠모하는 위대한 유학자들을 모실 사당이 필요했다. 당시 정암 조광조로 상징되었던 신진 사림들은 왕도정치의 재현을 목표로 도학정치의 실시를 주장했다.
문묘종사운동은 선비들이 도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고 이를 숭상하도록 하였으며, 사회로 희생되었던 김굉필과 정여창 등을 추종했다. 서원의 설립이 활발하게 되면서 지방의 사림세력들은 자신들의 고향 유학자들을 모시면서 교학 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경기도 이천에 있는 설봉서원이 이런 상황에서 설립되었다.
1564년(명종 19)에 이천부사 정현(鄭賢)을 중심으로 한 이천 선비들의 뜻을 모아 자신들의 유교 정신에 합당한 인물을 모시기로 하고 설립하였기 때문이다.
이곳에 이천 출신의 서희(徐熙), 이관의(李寬義), 김안국(金安國)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이유다.
설봉서원은 1593년(선조26)에 이천읍 관고리로 재건축하고 최숙정(崔淑精)을 추가적으로 배향한다. 이천 출신의 선배 선비들을 배향과 이천교육의 요람을 담당하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철폐되었다.
이천 설봉서원에서 가장 윗대로 배향한 인물은 이 고장 출신의 탁월한 외료전략가이며, 문인이었던 서희 선생이다.
▢ 서희
서희(徐熙942~998)는 고려시대의 문인이며, 탁월한 외교관이다. 뛰어난 외교 전략과 지혜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고려를 위기에서 구하고 체면을 유지하게 했다. 고려의 운명이 바람 앞에 촛불 신세가 되었을 때 거란의 수십만 대군을 지혜로운 외교적 논리로 물리친 훌륭한 문관 출신의 장군이다. 서희는 서필(徐弼)의 둘째 아들로 이천에서 태어났으며, 본관 역시 이천이다. 자는 염윤(廉允)으로 서희의 할아버지 서신일(徐神逸)은 당시 이천 지방의 토착 호족이었다. 부친 서필(徐弼)이 광종 집권기에 내의령을 역임하면서 개성의 중앙 정치 무대에 등장 할 수 있었다. 내의령은 930년(태조 13)에 내의성을 설치한 최고의 우두머리 장관이다. 고려 중앙행정의 최고기관이었던 내의성의 종1품 장관이다. 982년(성종1)에 내의령을 내사령(內史令)으로 고쳤으며, 1061년(문종 15)에 중서령(中書令)으로 불렀다.
서희는 유년시절부터 성격이 엄숙했고 성실했다. 부친 서필은 광종에게 직언을 많이 했던 신하였다.
서희는 960년(광종 11) 18세에 과거에 급제했다. 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워 장군으로 알고 있지만 문관 출신이다.
972년(광종23) 송나라와 교류하면서 협상가로서의 면모한다. 그 무렵 고려는
약 10여 년간 송과 외교가 단절되기도 했다. 당시 그의 활약을 <동사강목>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서희는 용모와 거동이 절도가 있었다. 황제가 서희를 중하게 생각하여 조칙(詔勅)을 내렸다. 왕에게는 식읍(食邑)을 더해 주었다. 추성순화수절보의공신(推誠順化守節保義功臣)의 칭호를 내려 주었으며, 서희에게는 검교병부상서(檢校兵部尙書)를 제수했다.”
- <동사강목>제6 상
외교적인 업무를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서희는 최고의 외교관이 되어 좌승이 되었다. 983년(성종2)에는 병관어사가 임명되었으며, 정2품 내사시랑으로 승진했다.
거란(요나라)의 침입과 위기에 서희는 고려를 구원했다.
거란은 4세기 몽골 지역을 중심으로 유목생활을 했던 북방 민족이었다. 고구려 장수왕 때는 거란은 고구려에 예속되었다. 한 때는 당나라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국하고 거란족은 부족연합체로 독립 된 나라를 구성했다. 당시 거란은 많은 부족 중에서 한 사람을 선출하여 전체 부족을 다스리는 체제였다. 그러나 당나라, 고구려, 발해 등 강대국에 의한 방해로 통일국가를 형성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10세기 초 거란에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라는 지도자가 등장한다.
그는 당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주변 부족들을 통합해 요(遼)나라를 세웠다.
요나라 황제로 등극한 뒤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다. 거란국이다.
거란국(요나라)은 중국 대륙을 통일하는 원대한 꿈을 갖는다. 고려와의 교류가 필요했던 이유다.
고려는 고구려의 정신을 계승한 국가였다. 국호를 '고려'로 삼았던 이유다.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을 서경으로 옮기고 북방을 향한 전초기지로 삼았다. 따라서 북방 진출에 방해가 되는 거란, 여진과 불편한 관계였다.
거란이 926년(고려 태조8년)에 발해를 멸망시킨 것도 고려와의 관계를 껄끄럽게 한 요인이었다. 거란은 942년(태조25)에 사신 30명과 낙타 50필을 보내 화친을 맺으려 했다. 그러나 고려는 이를 거절하며 사신들을 가두고 낙타들도 모두 굶겨 죽였다. 게다가 태조 왕건은 후대 왕들에게 남겼던〈훈요십조〉에서도 거란과 거리를 둘 것을 강조했다. 그런데 거란은 이러한 굴욕을 당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거란의 내정이 불안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거란국(요나라) 6대 성종은 송나라와 전쟁을 준비하면서 발해 유민들이 건국했던 정안국과 압록강 하류의 여진을 정복한다. 아울러 고려를 정복하기 위해 993년(성종12) 침공했다. 소손녕을 총대장으로 침략한 거란군을 상대하기 위해 고려 성종은 서희를 중군사에 임명한다. 상군사 시중 박양유, 하군사 문하시랑 최량과 함께 현재 평북지방이었던 북계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성종도 전투를 지휘하기 위해 서경에서 지휘봉을 잡았다. 소손녕이 이끄는 침략군은 봉산군을 먼저 함락한다. 아울러 고려군의 선봉 군사와 급사중 윤서안 등을 포로로 잡고 고려 조정에 서한을 발송한다. 서한의 내용은 옛 고구려의 영토를 반환하라는 것이었다.
서희은 소송년이 보낸 서한을 검토하고, 화의의 가능성이 있음을 간파한다. 성종에게 이를 보고하자 이몽전을 보내 거란과 화의를 제안한다. 하지만 소손녕은 이를 거절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의 협박을 한다.
"우리는 고려가 백성을 돌보지 않아서 천벌을 주러 온 것이다. 80만 대군으로 멸망시키기 전에 고려왕과 신하들은 무조건 항복하라.”
이몽전이 이러한 내용을 왕에게 보고한다. 조정의 대신들은 혼비백산했다. 투항하자는 의견이 비등했다.
성종은 거란(요나라)이 원하는 고려의 땅을 빨리 제공하고 전쟁을 끝내려했다.
뿐만 아니라 서경의 창고에 보관하던 곡식을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어 거란의 군사들이 군량미로 쓰이지 못하도록 대동강에 버리라고 명령하려 했다. 그러나 서희는 성종과 생각이 달랐다. 곡식을 버리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다.
거란이 고구려의 옛 영토를 찾겠다고 하는 것은 위협에 불과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서경 이북을 포기하지 말고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성종은 전쟁을 하는 것이 두려웠다. 어사 출신의 이지백이 서희의 투쟁정신을 강하게 지지하자 성종은 서경 이북 땅을 포기하는 주장을 철회한다.
이런 상황에서 소손녕은 안융진을 공격하면서 보복작전을 감행한다. 고려군의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이 그들과 싸워 승리한다. 소손녕은 서신을 보내어 항복을 독촉하고 협상을 요구한다. 성종은 협상의 적임자로 서희를 임명한다. 서희는 위험을 무릅쓰고 거란군의 병영으로 들어간다.
서희가 고려의 국서를 지니고 거란의 진영에 당도하자 소손녕은 서희에게 자신에게 절하라고 명령한다. 그러자 서희는 이를 거절하면서 다음과 같이 화답한다.
"신하가 자신이 모시는 왕을 대할 때 당하에서 절하는 것은 예법입니다. 그러나 양국의 대신들이 협상하는 좌석에서는 절을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소손녕이 이를 용인하지 않았다. 서희가 숙소로 돌아가자 소손녕은 서희의 태도가 매우 불쾌했다. 그러나 또 다른 마음에는 서희의 비범함과 당당함에 감동한다. 소손녕은 서희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당상에서 대등하게 협상을 시작한다. 소손녕이 먼저 서희에게 묻는다.
"고려는 옛 신라 땅에 건국했다. 고구려의 옛 영토는 거란에 귀속되었는데 어째서 고려가 침범했는가? 거란과는 국경이 인접한데도 바다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어 정벌하러 왔다. 만약 고려가 그 지역을 반환하고, 우리와 국교를 회복한다면 무사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서희가 당당하게 반박한다.
" 오해입니다. 고려는 고구려의 후계자입니다.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부르고 평양을 국도로 정한 이유입니다. 오히려 경계를 따지자면 거란의 동경(東京, 지금의 요양)이 고려의 땅이 되어야 합니다. 침범했다는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압록강 주변 역시 고려의 땅이 합당합니다. 우리는 여진이 그 중간을 강점하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바다로 나가 송나라와 교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교가 통하지 못함은 여진의 탓입니다. 장군은 우리의 의견을 귀국 임금에게 전달하시라.”
서희의 이런 논리와 질의에 소손녕은 더 이상 반박하지 못했다.
소손녕은 자신의 왕에게 회담 내용을 보고한다. 거란의 왕은 고려가 화의를 요청한 것이니 그만 정전하라는 회답을 보내왔다. 결국 서희의 이런 담판은 엄청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서희가 고려로 돌아 갈 때에 소손녕은 낙타 10두, 말 100필, 양 1천 마리와 비단 500필을 예물로 받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80만 대군이 고려를 정벌하기 직전에 외교적인 지혜를 발휘하여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거란을 물리치고 북진의 명분과 실리를 획득했다.
서희의 회담 성공소식에 성종은 서희를 마중하며 영웅으로 대접하며 환영했다.
서희는 거란이 퇴각한 후에 군사를 거느리고 친히 여진을 정벌한다. 압록강 동쪽 장흥, 귀화, 곽주, 구주, 안의, 흥화에 성을 쌓아 이른바 강동 6주를 구축할 수 있었다. 발해 멸망 이후 주인 없이 버려져 있던 땅을 고려의 땅으로 편입하게 된 것이다. 서희가 당시 찾은 강동 6주는 세종대왕 때에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까지 영토를 확보하는 데 기준이 될 수 있었다. 서희는 거란의 수십만 대군을 회담으로 승리하고 강동6주를 회복하고 998년(목종 원년)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위(章威)라는 시호를 받았다. 서희는 우리민족의 최고 영웅이 될 만한 인물이다.
▢ 이관의(李寬義)
언제 태어나고 세상을 떠났지 알 수 없는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다.
본관은 광주이며 자는 의지(義之)이고 호가 율정(栗亭)이다.
성리학을 비롯, 천문, 지리, 기상, 역학 등의 학문에 전념했던 학자였다.
초시에는 합격하고 몇 번 대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한 이후에는 주로 향리 이천에서 학문연구에 몰입했다.
1483년(성종14) 성종은 그를 추천을 받아 경연(經筵)에서 대학과 중용을 강론하도록 했다.
서거정과 성종 임금도 그의 덕과 박식에 탄복하여 등용하고자 하였지만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처사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설봉서원에서 추앙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 김안국
김안국(1478~1543)은 조광조(趙光祖) 등과 함께 도학정치의 실천의 중심인물이다. 그러나 기묘사화로 파직된 뒤에는 주로 후진양성을 했다.
본관은 의성이며, 자는 국경으로 모재(慕齋)라는 호를 사용했다. 부친은 참봉 연(連)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陽川許氏)이다.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은 그의 아우이다.
스승은 김굉필(金宏弼)이며, 1501년(연산군7)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했으며1503년 별시문과에 급제한다. 승문원에서 벼슬을 시작한 뒤 홍문관박사, 부수찬 등을 역임하다가 사가독서하며 많은 수양을 쌓았다. 1507년(중종2)에는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대사간과 공조판서 등을 역임한다.
1517년 경상도관찰사로 근무할 때에 각 향교에〈소학>을 권장하고 지방 향약을 실천할 수 있도록 했다.
고향인 이천의 주촌(注村) 등에서 약 20여 년 동안 은거한다.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곳에 머무르며 하서 김인후(金麟厚)와 유희춘(柳希春) 등 〈동유사우록>에 게재되었던 인물들과 교류했다.
1538년에 벼슬을 다시 시작하여 예조판서, 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 단내성지
단내성지는 천주교 박해의 순교자들을 현양하기 위해 조성한 숭고한 장소이다. 김대건 신부의 사목 활동 길을 따라 조성된 오솔길을 따라 걷다보면 오래된 수도원 같은 느낌이 든다. 앞으로는 여울이 휘돌아 흘러가고, 뒤로는 와룡산이 감싸고 있는 <단내성지>는 아름다운 자연경관 속에 자리하고 있다.
성지에는 숲이 울창하면서도 인적이 없는 계곡과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총연장 5km의 순례코스가 조성되어 있다. 예수성심상이 있는 전망 좋은 와룡산 정상에서는 정은 바오로와 이문우 성인의 고향과 김대건 신부님의 사목 활동 경로를 조망할 수 있다.
정은 바오로(1804~1866)는 단천리(단내) 출신이다.
단내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당시 순교한 정은 바오로의 고향이자 유해가 잠든 묘소가 있는 곳이다. 정은 바오르는 당시 광주 유수부가 위치했던 남한산성에서 처형당했다. 단내는 1784년 이전부터 천주교 신자들을 교우촌을 형성했던 곳이다.
영동고속도로 덕평IC에서 농촌 길 약 7Km미터 지점 언덕 위로 대형 십자가가 보이면 그곳이 단내성지다. 정은 바오로의 묘지 앞에 서면,
단천리 주변의 풍경이 가슴으로 성스럽고 경건하게 다가온다.
단내에 살던 정온 바오로는 동래 정씨로 할아버지 때부터 접했던 실학사상과 천주교에 영향을 받았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사촌형 정섭과 정옥이 천주교에 입교했다. 단천리 인근에는 이문우 요한의 고향이다. 단천리는 김대건 신부의 처소가 있었던 은이 공소와는 12km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마카오에서 국내로 들어와 이 마을에서도 선교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 광주유수부에서 파견 된 포졸들은 정은 바오로를
체포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63세였다. 추운 겨울날에도 산속 굴에서 버티던 정온 바오로는 남한산성에서 처형당했다. 그의 손자 정양묵 베드로는 할아버지의 체포 소식을 듣고 스스로 천주교인임을 고백하여 자수한다.
남한산성의 감옥에서 두 사람은 배교를 강요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배교하지 않다가 1866년 12월 8일(음력) 백지사형으로 세상을 떠났다.
백지사형은 얼굴에 물을 뿌리고 백지를 덮어 숨을 쉴 수 없게 하여 죽이는 방법이었다.
정은 바오로의 시신은 남한산성 동문 밖의 시구문을 통해 던져졌다. 살아남은 가족들은 몰래 시신을 찾아 현재 위치에 안장했다. 그러나 증손자 정 베드로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당시 함께 순교한 수많은 시신들 틈에 섞여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신 수습과정은 극적이다. 정은 바오로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아들 정일동은 남한산성 동문 밖에 던져진 부친의 시신을 찾기 위해 매부 박서방의 8촌 박선여에게 부탁한다. 당시 시신을 수습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부탁을 받은 박선여는 낮에 남한산성의 동문 밖으로 가서 낭떠러지 바위 밑에서 정은 바오로의 시신을 발견한다. 주변에 있는 마른 풀을 뜯어 덮고 돌로 표시를 하고 밤이 오기를 기렸다. 아들 정일동과 함께 낮에 표시해둔 정온 바오르의 시신을 찾아 자신들의 고향 단내의 산소에 모셨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마을에 살 수 없었다. 30여 년을 산속과 산촌을 떠돌다가 1900년에 고향 단내로 귀향한다. 됩니다. 지금 단내의 정씨들은 그 후손들이다. 당시 함께 세상을 떠났던 정양묵 베드로는 끝내 시신을 찾지 못했다. 단내성지를 조성하면서 남한산성 동문 밖 흙을 가져와 정은 바오로 산소 옆에 모신 이유다.
■설봉산과 설봉공원(문학공원)
설봉산(394m)은 이천시의 진산이다. 서쪽에서 북동쪽과 남동쪽으로 이천시를 에워싸고 있다. 북악산, 무학산, 부학산 등 3종류의 이름을 지니고 있다. 산세는 험준하지 않지만 삼형제 바위, 연자바위, 희망바위 등 기암괴석이 산재하여 있다.
특히 이 산에는 설봉산성이 있는데 김유신 장군이 활동했던 무대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하는 영월암 등의 유적과 약수터 8개소와 등산로가 있어 이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설봉공원과 설봉서원, 이천시립박물관 등이 모두 설봉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설봉공원은 이천시 관고동에 3만평 규모로 자리 잡고 있다. 문학비와 각종 조각 작품이 자리 잡고 있으며, 이천세계도자엑스포의 열렸던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당시 세계 38개국 유명 작가의 조각품들이 세워졌는데 아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 볼거리가 다양하다.
이곳 문학공원의 시비들이 없으면 결코 이곳을 방문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곳에는 많은 시인들의 시비가 서 있다. 다만 시비 선정을 어떻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 설봉문학공원 윤동주 시비 <서시>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이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 설봉문학공원 구상 시비 <오늘>
설화의 성터를 돌아가는
부악은 머리이자 가슴이라
나래 펼친 학의 깃바람으로
설봉호에 내려오면
하늘이 담겨지는 파문들이
햇살을 춤추게 한다
깊이로 맺은
마음 고운 사람들
산정 사잇길 돌아
정갈하기 맑은 바람과 더불어
시내로 내려오면
가슴 행복한 사람들을 만나는 눈엔
설봉호의 물이 고인다
사람 내음이 그리운 날은
장날의 소음이 박자를 맞추는 곳에서
깊은 정을 전달하는 인심 따스한 것도
설봉산에서 내려온 물과 바람 탓이라면
이천 사람들은 그 정기를 담아
맑은 가슴으로 산다.
-설봉문학공원 채수영 시인 시비 <설봉산>
■ 이천 애련정
이천 애련정은 성종 1474(성종5년)에 안흥지에 세워졌다. 정자 주변에 연못을 조성하고 연꽃을 가운데 심었다.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워서 조선 문인들이 자주 찾았던 곳이다.
왕들도 여주의 세종대왕릉을 참배하고 돌아가던 길에 애련정에 들리곤 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1907년 소실되었다가 1998년에 복원되었다.
임원준(任元濬1423년~1500년))의 애련정(愛蓮亭) 기문(記文)에 이천의 역사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천 고을이 고구려 때에는 남천현(南川縣)이었으며, 훗날에 신라의 영지(領地)가 되어 남매군(南買郡)이라 불렀다. 이곳에 군주(軍主)를 두어 통치하였으며, 황무군(黃武郡)으로 고쳐 주위 여러 현(縣)을 다스렸다.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대군을 거느리고 이천 땅에 당도하니 서목(徐穆)이 안내하여 남천(南川)을 무사히 건너게 되었다. 태조가 만족하여 현재의 지명인 이섭대천(利涉大川)의 뜻을 얻은 것이다. 조선 태조 2년에 다시 현(縣)이 되었고, 세종 26년에 천호(千戶) 이상이므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했다.”
임원준은 조선시대 전기, 중기의 문인으로 효령대군의 사돈이다. 임원준은 1506년 중종반정 직후 처형된 뒤 20일 만에 부관참시를 당했던 임사홍의 아버지로 묘소가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 산25-5에 있다. 왕건을 안내했던 서목(徐穆)이란 사람은 이천출신이라는 것 이외에는 생몰연대를 알 수 없다. 다만 태조왕건(王建)이 남쪽으로 정벌할 때 한주(漢州) 소속의 황무군(黃武郡)이었던 이천 지역을 지날 때 안전하게 강을 건널 수 있게 하여 역사에 등장한 인물이다.
정조대왕은 1779년(정조3년) 애련정에 들렸다. 이천행궁(利川行宮)에 도착하여 정조는 당시 경기감사였던 정창성(鄭昌聖)에게 “행궁의 정원에 연정(蓮亭)이 있는데, 저것이 애련정(愛蓮亭)인가?라고 묻는다.
“애련이라는 정자명은 유래가 오래 되었습니다. 국초(國初)에 발간되었던 여지승람(輿地勝覽)에도 게재되어 있으며 지금도 임원준이 지었던 기문이 남아 있습니다.” 라고 대답한다.
정조는 다시 경기 감사 정창성에게 묻는다. “애련의 뜻을 주렴계(周㾾溪, 周惇頤, 周子)의 애련설(愛蓮說)에서 따온 것인가? 또한 애련정을 건축한 때는 언제인가?” 정창성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 이 고을의 노인들에게 물으니 이세보(李世珤)가 처음 이 정자를 건축했고 신숙주(申叔舟)가 애련이라고 편액(扁額)하였다고 합니다.”
임원준의 기문 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전의(全義) 이세관(李世珤)이 통훈대부로 부(府)를 다스린 지 2년 만에 정사가 공평하고 송사가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이곳의 백성들은 편안히 하였고, 매년 풍년이었다. 이세관이 현재의 연못 주변을 걷다가 그 습한 것을 목격하고 정자 아래에 못을 파서 그 가운데에 연꽃을 심었다. 정자 이름을 영의정 고령 신상공(申相公)에게 청하였다.
그는 ‘애련(愛蓮)’이란 두 글자로 회답했다. 이세관은 그 정자의 이름을 영광으로 여기고 여기어 기록하게 되었다.”
서거정은 애련정에 올라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어느 누가 염옹(濂翁, 周子)을 애련을 말하였는가.
정자명을 지은 것은 결국 옛 사람의 인자함이었네.
그대는 덕이 많아서 평생을 좋아하리라.
나역시 마음을 비워 죽을 때까지 연모하리라.
결실은 둥글기가 말[斗] 같다는 말을 이미 들었노라.
만발한 꽃은 크기가 배[船] 같음을 일찍이 감상하였네
다시 키우는 데 노력하라
풍월(風月) 앞에 신이나 홀로 흥겨워라
성종의 형이었던 월산대군은 애련정에 올라 시를 지었다.
연못을 파고 연꽃을 심었구나.
풍류(風流)로운 옛 주인의 덕이 그립도다.
향기로운 향기가 번지고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즐길 것이로다.
연꽃의 몸짓에 지금은 나 홀로 사랑하누나.
푸르른 산과 연꽃은 달밤을 잊게하고
푸르고 맑은 물결에는 배를 띄우고 싶어지네
이런 상황에 술과 안주가 나오니 흥겨움이 크도다.
시를 쓰고 읽으니 기쁨에 흥겨워라.
첫댓글 월전미술관에는 안 갔나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9.gif)
바로 옆이었는데 안타깝게도 관람을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