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기원과 정체성을 묻고 생각한다 3
상고대 중앙아시아 스시아나에서 월지족 밝 박씨(태호 복희씨)일단이 곤륜산 (화전옥) 돈황을 거쳐
동으로 이동하여 홍산(태백)에 이르러 신시를 건설하고 환웅천제로 하여금 하늘에 제사하고 개천
하였다. 한웅천제는 주민을 이롭게하는 공동체(홍익인간)를 마련하고 원주민 곰족과 혼인동맹하여
조선을 건국하고 단군왕검이 다스리게 하였다. 단군조선은 다수의 거수국을 연맹하여 삼한관경제로
나누어 관리하였다. 단국왕검이 우주의 조직원리인 삼신오제 신설(神說)원리에 의하여 삼한을
설정한것인데, 중국 한대 [사기]에 이를 본따 삼황오제라는 신화를 등재한것이다. 진한은 요하요역
만주평원일원, 번한은 요서 하북 산동일원, 마한은 산동반도 일부와 요동 한반도일원에 걸처 있었다.
신정(神政)체제는 소도(솟대를세워 신단을 설치한 소읍)를 세우고 제사장(무당주)을 겸하였다.
[소도의 구성] 진산(꼿뫼 검단산) 검단(신단=천단 지단 산단 천단) 칠석(바위) 거북바위 수성당(해신
당) 당산목 솟대 고인돌 기타 제사시설과 건물이 배치 되어 있었다. 그후 삼국시대에 이르러 동명왕
묘(소도를 시원으로 한 백제 제사 시설)에서 천제 기우제 등을 거행한 사서기록과 유적이 남아 있고,
검단산과 천원지방제단 솟대 등이 지금도 전국각지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백두산 서측록에는
수많은 제천단(여진제단 기타)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 지역은 장차 심층적 발굴이 기다리고 있다.
기후변화와 지각변동으로 홍산지역에서는 목축 농업의 어려워 짐에 따라 대거 이동이 일어났다.
일부는 오르도스 (석묘왕성)를 거쳐 섬서지역(중원)으로 이동한 단군조선의 일부는 중원에 이르러
섞여 살게 되고 황하 치수의 대역사에서 우(禹)에게 치수공법을 지원하며 하(夏)의 건국을 도왔다.
요서 연박출신의 설(契)이 하(夏)를 멸하고 상(商)을 세워 탕왕이 되였다. 설(契)은 순의 황하 치수에
공을 세워 상(商)땅을 받았다. 상(商)은 은허인 안양(산서 산동)을 중심으로 발전하였고 스메르문명의
야금술 청동기 마전차(馬戰車) 철기문화를 도입하여 황하문명 최초로 기록된 왕조국가를 세웠다.
산동에는 중국에 없는 고인돌이 있는데 이것은 홍산인이 청구에서 이동한 치우, 소호금천씨를 조상
새(천손 玄鳥)토템으로 공유한 우리의 방계 조상들이다. 설이 세운 상(商)은 홍산문명권의 한 부족이
고죽으로 이동 후 다시 산동으로 이동한 세력으로서 단군조선의 고도화한 문명이 이어진 왕조이지만
중국에서 일어난 역사이기 때문에 황하문명권에 편입된 것이다. 동이족은 홍산에서 갈려나간 요서
하북 산동에 살았던 단군조선족의 일부가 포함되였으며 중국측에서 동이로 불렀고, 상(은)이 멸한 후
중원의 주(周)에 의해서 배척당하기 시작하였다. 은(상)허의 발견으로 갑골문을 알게 되였고 황하문명의
기원이 고증되였다. 주(周)에게 상이 멸망후 동이족을 동쪽으로 밀어 내면서 상의 유민이 고죽(연)땅
과 요서 번조선으로 대이동이 시작 되었다. 이보다 앞서 상의 무정(武丁)시대에 서방의 북방기마족
(푸리기아)이 오르도스-화북-홍산으로 이동하여 만주지역 진한의 왕권을 양여받아 부여를 세웠다.
요서 하북에 있는 번한은 번조선으로 남아있게 되고 중국의 진에 밀려난 동이족들이 유입하여 조선족
과 섞여 살았고. 중국측의 한나라와 격돌을 버리게 되였다.
북방기마족이 유입하면서 청동기 철기 마전차 등 신문명이 들어오며 신정통합체가 문너지고 삼한의
신(神) 과 정(政)이 분리하고 읍제군주국으로 변하게 되였다. 부도지에 기록을 참고하면 단군조선의
홍익인간의 통치법을 온전히 이행할수 없게 하는 무리가 생겨 단군의 올바른 정사를 방해하니 이를
말려도 듣지 않음을 알고 천부3인을 비밀히 묻고 스스로 산으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부도지에서는 단군에 거슬린 자를 하우(夏禹)로 칭하고 있는데 이는 단군의 태자 부루가 우를 도와
황하치수를 도우면서 끝까지 홍익인간의 도를 권하였으나 듣지 않고 우가 거슬러 할수 없이 포기한것
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단군조선의 진한은 부여단군국으로 되고, 번한은 번조선으로 남았다.
마한은 산동과 한반도에 남아서 거수국들의 관할과 신생국(신라 백제 가야) 터전의 배후지가 되였다.
중국과 접하게 된 번조선(번한)은 왕검성(노룡)을 도읍으로 하고 난하를 경계로 연(燕)과 접하여 있었다.
[사기]에 연에서 귀순한 위만이 준왕위를 찬탈한것을 조선의 사직이 끊겼다고 기록했으나 그것은 왜곡이다.
위만은 동이족이였고 또한 조선에 귀순(상투를 틀고 조선복장을 함)한후 왕권을 찬탈했어도 신료이하 조선
인으로 채워진 온존한 조선국으로 봐야한다. 위씨조선은 중국문화의 영향받아 강력한 국세를 갖춰나갔다.
한(漢)이 우거왕때 번조선을 뺏어 낙랑 등 4군을 설치한것이고, 진한 마한 부여는 한의 침입이 없었다.
주신(=숙신=주진)과, 한(韓=진=진번), 예맥,옥저,낙랑 마한 기타 단군조선에 예속된 거수국들이 다수 수록
되여있어 한4군과 진인(辰人), 북부여 고구려초의 영토적 정체를 정리하는데 혼돈을 주고 있다.
그로 말미암아 단군조선 후기기록과 북부여사를 정통사에서 누락시켰다.
호(흉노) 동호는 단군조선-부여의 방계로 분류되고, 오환 선비 몽골 거란 여진 만주는 방계에서 분리되였다.
해모수가 건국한 북부여는 단군조선(진한)을 이양받았다. 또 부여는 북부여 동부여 홀본(동명)부여로
이어졌다. 단군의 천손과 태양족이 융합해진것이 부여족으로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를 출생시킨
토대가 되였다. 부여는 동서외곽 중앙아 및 서구 등지까지 퍼저 나갔다.
[산해경](대황북경) 곽박 주(注) 有胡不與之國 今胡夷語皆通然라 했다(호=부여=단군조선=이(夷)=천축天竺).
"부여(夫餘)는 불여(不輿)라 하는데 호(胡)와 이(夷-단군조선,天竺)의 말은 모두 서로 통한다"라고 했다.
흉노(호)는 전한을 격파한후 세력을 떨치다가 후한때에 패퇴한후 서쪽으로 이동하여 중앙아 스키타이인과
중첩되여 훈이라는 종족명으로 유럽에 진출하게 되였고 유럽역사의 지각변동의 도화선이 되였다.
[산해경]에는 동해의 안쪽과,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하늘이 기르는 조선이다. 그 사람들은 강과 바
닷가에서 살며 사람을 아끼고 사랑한다.(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 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라 했다.
중원의 동쪽 산동및 동지나대륙과 발해연안 요서 요동에 걸처 조선이 있었다고 인식된다.
부여족은 프리기아(弗離支 스키타이계)인이 월지를 거쳐 홍산으로 이동 단군조선인(貊人)과 융합된 호맥
(胡貊)족이다. 진한의 진인(仙人)이 호맥에게 단군권을 이양한것이 북부여 해모수단군으로 보고 있다.
선인정신은 현재 우리나라의 천도정신(신선사상)과 중국으로 전해진 도교의 뿌리가 되는 것이다.
바이칼호 부리야트족의 고조선 원류 설은 고증이 없는 허위이고, 북방기마 유목인인 푸리기아-대월지
->흉노 ->동호 ->부여로의 동래설이 대두하고 있다. 흉노의 오르도스지역에는 하가점상층의 석관묘를
쓴 단군조선족과 공통점을 갖는 원주민이 살았음이 판명되고 있음. 호(흉노) 동호는 부여의 방계이다
부여는 요서와 만주의 진한 여러 거수국을 통합하며 700여년에 걸쳐 동북아 핵심세력이 되었다.
북부여는 고구려로 넘긴후에도 일부가 읍루 몽골로 이어지는 등 잔여 세력이 발해 초기까지 이어젔다.
대월지인이 곳갈모와 "피발좌임"으로 기마생활을 한것인데 후에 공자가 동이족을 묘사할때 피발좌임
이란 표현을 한것으로 유명한데 이 대월지가 부여인과 연관하였음을 알수 있다.
단군조선의 진한을 부여로 이양하는 시기와 중국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秦)에 밀려온 동이족이 연(燕)
을 거쳐 번조선으로 유입한 시기가 같은 무렵이었다. 위만에게 밀려 번조선을 떠난 준왕은 신료와 함
께 바다를 건너가 마한 왕이 되였다. 이 마한 땅은 후에 백제 신라 가야의 배후지로 내어 주었고, 마한
은 한반도 남부의 땅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백제에 병합되고 끝을 맺었다. 전남에 고인돌이 많은
이유이다. 이곳 전남의 금동관 유적은 마지막까지 단군조선의 문화를 남긴 마한의 것으로 인식된다.
이 시기에 요서를 중심으로 발해연안 산동 요동 한반도에 동서 인구 교류가 일어난 결과로 한국 중국
에는 일정 부분 혈통적 연관성이 있게 되었다. 부여는 옥기 황금야금술 청동기(청동솥) 철기 기마술
일본 등 서역(프리기아 )의 문명을 도입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때까지 전차(戰車)전에서 기마(騎馬)
무장전으로 전환되기 시작하여 전쟁의 양상이 크게 달라졌다.
부여는 북방기마 태양족으로 단군조선의 천손족 풍속을 이어받아 삼신오방제 음양 달력 영고 소도제천
칠성 천도와 옥과 금치장 등이 융합하였다. 부여문화는 단국문화와 함께 우리문화의 뿌리로 남아있다.
한나라가 부여에 조공한 옥갑의 기록이 있는데, 한(漢) 초기에는 부여단군을 상국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조] '부여왕이 장례를 치를 때에는 항상 옥갑(玉匣)을 사용하였으
므로 한(漢) 조정에서는 언제나 옥갑을 만들어 미리 현토군에 갖다두어 왕이 죽으면 그 옥갑을 취
하여 장사지내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한 유방이 건국할 때 부여의 지원이 있었던 연고가 있다.
부여 옥갑의 문자와 아라가야의 도부호의 공통적인 문자가 부여와 가야의 연결고리로 고증되고
있다. 이는 태백일사에 [아라가야인은 원래 홀 본부여 사람이다(安羅 本忽本人也)]라는 기록이 있는
데 태백일사의 진위여부 등 많은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는 유물이다.(부여옥갑/대련 고려박물관 고증).
부여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일본에 이르는 동북아 주역이 되는 역사를 창조한 조상으로뿐만 아니라
유라시아, 아메리카까지 분포한 강력한 유전자를 가졌다. 유럽의 불가리아 박물관에 소장된 유물중에
유골을 복원한 동양인상, 환두대도, 동경 기타 유물이 부여시대의 것과 유사한 것이 다수 보관되여
있다고 하는데 부여인이 서진한 역사의 한 사례로 보인다. BC1,000년경에 푸리기아-대월지를 경유
유입된 철기 기마인이 오르도스에 흉노, 요서에 동호(오한 선비), 만주에 부여를 형성하였다. 이들은
일정부분 섞이며 동북아 열국에 분포하게 되였다. 부여는 700여 년에 걸쳐 백의민족 기마민족 천손족
이라는 고유 풍속의 흔적을 남긴 위대하였던 조상으로 현대까지 중국과 구별되는 종족성을 갖고 있다.
[독사신론-신채호]는 "夫餘族은 卽我神聖種族 檀君子孫이 是也라. 四千載 東土의 主人翁된 者"라고
하면서 부여족을 단군을 계승한 한민족의 진정한 중심족으로 보았다. 부여 이후 삼국시대의 부상은
단군조선을 계승한 부여족의 강력한 유전적 역동성이 근저에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우리나라의
초라한 부여 역사기록을 재조명해야 할 것이다.
신정(神政)체제 단군조선이 끝나면서 고대 공화연방제인 소읍소도국가는 종말을 고하고 무력을 갖춘
철기 기마무력을 사용하는 군주국가로 변환이 일어났다. 황하문명을 창조할 때 배달 동이족인 치우와
하화족인 헌원의 탐록대전으로 헌원은 중원을 차지하고 치우는 산동 중국동해연안을 차지하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하화족(지나족)과 동이족으로 갈리게 된것이다. 치우가 청구국(요하지역)에서 나와
하북(탁록)에 진출하고 산동으로 영역을 넓혔다. 이에 따라 산동에는 신농씨와 소호금천씨가 동이역
사의 주인공이 나왔다. 중국학자 부사년이 동이는 동쪽 산동에, 하화는 서쪽 중원에 살았다는 이하동
서설(夷夏東西說)을 말했다. 그러나 그 이전의 역사는 동이에서 황제 등이 나왔고, 하화족도 동이에서
나온것이며 다만 황하유역 원주민의 토대위에서 동이계 지도급이 하화계를 이끌었던 것이다.
공공 동이(共工 東夷)족은 중국측 [사기]에 기록이 처음 나타나는데 황제 제곡 요 순이 공공족과 지
속적으로 갈등하며 주도권을 다투다가 우(하夏)에 이르러 공공세력을 동북으로 밀어내는 기록이 나
온다. 이 [사기]는 한대(漢代) 사마천이 동이를 사실에서 축소 왜곡한것이 많은것으로 보아 5제시대
의 주도세력은 공공족(환웅단군)인 것으로 추론할수 있다. 동이의 이(夷)자는 오랑캐란 뜻이 아니라
뿌리라는 뜻으로 태양인 천손족이란 홍산문명을 주도한 종족의 이름인데 후대인 중국황하문명을 주도
한 하화종족이 이족을 동쪽으로 밀어내면서 폄하하여 동이라고 하면서 오랑캐라고 칭한 것이다.
서쪽에서 하화족 주(周)가 일어나 상(은)을 멸하였든데 주는 패전한 상의 귀족과 신하들을 노예로 삼으며
동이족을 없애려 하였다. 주에서 상의 갑골문을 소재로 삼아 한문을 작성하는데 노예(상의 유신)를 활용
하여 예서(隸書)란 문자 이름이 생겼다. 이후 한대에 이르면 그동안 동이어(한국계언어)를 버리고 중국어
문체로 대폭 바꾸게 된다. 그리하여 주대에 시작하여 한대에 이르러 중국어에 의한 한문자로 진화하였다.
한국어는 동이어 바탕이 유지되였으며 한국언어에 맞지않개된 문자인 한자를 빌어 문장을 작성하게 되
였고 문맹자는 글을 읽을수 없었다.세종대왕이 한글을 제정하면서 우리글로 우리말 표현이 가능하게 되
였다. 상(은)이 붕괴한 중원의 외곽에서는 주(시안)의 배척에 대항하는 상의 유민인 동이족이 남아서 연, 제,
노, 산동과 동지나해 연안지역에서 강력한 저항과 문화력을 발휘하며 장기간 그 영향을 미쳤다. 이곳은
고대 조선천독(朝鮮天毒 하늘님이 다스리는 조선)지역으로. 우리민족의 연고가 있는 고토이기도 하다.
춘추란 역사서를 찬술한 공자의 작품에서 딴 이름인데 중화사상을 주장하여 교화시켰으며. 존화양이
(尊華 攘夷)를 설법함을 춘추필법이라고 한다. 춘추전국시대의 공자가 "관중이 없었다면 '중국은 피발과
좌임(被髮 左衽)의 천지가 되였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곧 춘추 전국시대 까지 동이와 상(은)의 후예
들이 중원의 주요 세력이었음을 간증하고 있다. 피발좌임은 상투를 한 조선인 풍속을 말하는것으로서
피발은 상을 당할때 상투를 푸는것을 말하고, 좌임은 옷섶을 왼쪽으로 덮어 여민다는 말이다
[출처] 한국(인)의 기원과 정체성을 묻고 생각한다 3|작성자 미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