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면 안 돼. 버텨!
일상의 삶이 참 구질구질하다. "피곤하고, 포기하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 거 같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소리치고, 매번 거지가 된 기분이고, 돈 뜯으러 온 도둑 같고, 동료들이 날 때릴 기세로 쳐다 보고, 그럼 나도 때리고 싶은 충동이고, 내 생활을 위해 동료들에게 나에 대한 동정을 강요하고... 너무 고단하고 외롭다. 우울한 인생이다.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자유로이 노래 하는 저 새! 저게 나라면 좋겠다."(영화 속 '산드라'<마리옹 꼬띠아르>의 대사들) 평온한 금요일 오후, 한 통의 전화가 울린다. 전화를 받은 산드라는 동료들이 투표를 통해 자신을 복직시키는 대신 천 유로의 보너스를 받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실의에 빠진 그녀, 하지만 투표가 공정하지 않았다는 제보 덕분에 월요일 아침 재투표가 결정된다. 일자리를 되찾고 싶은 산드라는 주말 동안 16명의 동료를 찾아가 설득하려 하지만 보너스를 포기하고 자신을 선택해 달라는 말은 어렵기만 하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동료들. 마음을 바꿔 그녀를 지지해주는 동료도 나타나지만 그렇지 않은 쪽의 반발도 거세진다.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긴 두 번의 낮과 한 번의 밤이 흐른다.(영화 정보 인용)
내 '일'(my job)을 위한 시간. '내일'(tomorrow)을 위한 시간. 원제(two days, one night) 그대로 1박2일이란 한정된 시간에 자신의 복직에 필요한 과반수 투표 지지를 위해 동료를 찾아 나서는 반복되는 이야기로 구성된 아주 단순한 설정의 영화다. 그런데 이런 단순한 구조의 영화라해도 감독이 다르덴 형제라면 그 밀도와 흡입력이 다르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를 그려내면서도 그 내면에는 항상 도덕·윤리적, 시대적 사회성 고발과 성찰이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는, 마치 한국의 이창동 감독과 결을 같이하는 듯한 품위와 영화엔 품격이 녹아난다. 상황상황의 상태적 심리를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감정선을 사실과도 같게 자연스럽게 이끌어 내어 결국은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어내는 거장들만의 탁월함이다.
이 영화의 백미는 역시 마지막 부분에서의 환희 웃으며 회사를 박차고 나와 남편에게 전화하는 장면이다. 영화 포스터에서 보듯이 복직을 위해 열심히 뛰어다니며 '울지 않고 버텼지만' 결국 과반수를 얻는데 실패하고... 하지만 그 순간 그녀에게 역설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선택의 기회가 주어지는. 곧, 1박2일 동안 보너스를 포기하고 자신의 복직을 도와달라 수모를 감수했던 그녀가 이제는 곧 계약기간이 만료되는 이주외국인 노동자를 내치고 대신 자신이 그 자리를 복직할 것인가에 대한, 주말 동안 자신이 동료들에게 물었던 질문을 고스란히 돌려 받은 산드라가 그 대답을 하는 장면이다. "남을 해고시키고 복직할 순 없어요."
난 행복해
나도 힘든데, 지지리 궁상인데 집세도, 아이들 학비도 급하기에 자존심도, 온갖 비아냥도 비굴함도 받아들이며 복직을 바라는데.. 내가 원하는 그 자리가 나보다 더 미소한 사람으로부터 빼앗아야만 한다면? 나라면, 당신이라면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질문과 결정을 영화에서는 처음 기획 때부터 우리에게 묻고 있다. 내게 필요한 것, 내게 중요한 것. 그것이 다른 누군가에도 동일하게 필요한 것임을 깨닫게 하는, 깊은 갈등의 선택적 길 위에서 선 나. 나는? "나를 위한 뭔가를 결심한 건 처음이야!" "여보, 우리 잘 싸운 거지? ... 나 행복해."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루카 19,5)
회사를 나서는 산드라 그녀의 환한 표정이 어떤 충고의 따끔한 말보다도, 어떤 현인의 각성있는 잠언보다도 오랜 시간 강렬하고도 뭉클하게, 무엇보다도 흐뭇하게 지금껏 남아있는 참 행복한 영화였지요. 여태껏 자신을 위해 뭔가를 스스로 결심할 수도 없을 만큼의 열등적 비루한 삶에서 맞닥뜨린 변곡變曲의 1박2일. 우린 그렇게 절망과 황폐와 좌절의 꼭지점에서, 내 삶의 최대 승부처이기도 한 인생의 변곡점에서 하느님이 인간을 찾아 나서는 구원을 발견하게 되지요. 얼마전 본 학폭에 대한 복수를 그린 [더 글로리]의 마지막 문동은(송혜교)의 "그러고 보니 내 주변에도 좋은 어른이 많았다."는 대사와도 같이 이 영화속 산드라에게도 자신의 팍팍한 삶에서의 상실된 자존감, 자괴감과 초라함, 반발과 멸시의 굴곡적 인생에서도 자신을 걱정하고 위로하고 도와주는 좋은 친구들이 주변에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는 그 벅찬 깨달음. 그 "앎"이, 묶인 것에서의 내려옴이, 그녀에게 변곡의, '난, 행복해'라고 말할 수 있게 한 희망이자 구원이 되었음을 새삼 상기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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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행복한 사람이야! 자기 영혼 안에서 스스로에게 행복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 퍼뜩 성경 속 '키 작은 자캐오'가 떠올랐네요. 세관장이고 부자였지만 한없이 내면적으로도 작기만 해야했던 자캐오. 돌무화과나무에까지 올라가서야만 '볼 걸 볼 수 있는' 자캐오. 결국 삶의 변곡점으로 작용하기 위해 올라야 했고 또한 내려와서 그 누군가와의 인격적 "만남"을 통해 자신의 행복함을 발견하게 되네요. 올라가려는 내 애씀으로만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머리속으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잃어 버린" 나, 참자아를 만날 수 없는 것이겠지요. 내려와서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0)고 하시는 "사람의 아들" 곁에, 그리고 그분과 같은 발걸음을, 보폭을 맞춰 걷고 또한 함께 머물러야함인 거지요. 예수님은 '잃어 버린 나'를 찾아서 이 땅으로 내려오셨네요. 하늘 나라 하느님으로서 열등감 많은 작디작은 나를 "일어나게", "들어올리기" 위해 이 세상이라는 죽음의 땅으로 이민(내려) 오신 사랑의 '이민자'시네요. 강생구속. 이제는 내가 내려올 '때' 내일을 위한, 부활을 위한 시간 'Kairos' 구원과 희망의 은혜로운 "때"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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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시간.. 어느새 서른두 해를 앉아 지내는 나에게 마음대로, 편하게 앉아있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두 달. 필요할 때 외에는 대체로 엎드려서 지낸, 꽤 길게만 느껴진 시간이었네요. 부디 내일을 위한 시간이었길.. 내 안에 주어진 내 본래의 모습인 '하느님 사랑의 모상'을 회복시키기 위한 자아ego의 내려옴, 자기 비움(Kenosis)의 '때'였기를.. 나이(Chronos)를 먹어가면서 오는 더 완고해지는 오그라듬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지고 부드러워졌기를.. 아둥바둥 부여잡고 있는 그것들마저 내려놓고, 보다 예수님 말씀으로 내려올 수 있었기를.. 내 안에 심어주신 하느님의 선과 평화를 여전히 잘 보존할 수 있었기를.. 하느님의 그 순수한 단순함으로 조금은 더 가까이 내려올 수 있었기를.. 엎드려 생각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성찰할 수 있었음에 감사할 수 있기를.. 결국 내려와야 만날 수 있고, 동행할 수 있고, 함께 머무를 수 있는 것을. 그래서, 난, 행복해! 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을!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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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도 이 영화 보면서 저의 아픈 현실을 직시하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도 마트에서 일할때 회사생활할때 정말 똑같은 상황 보기도 하고 겪기도 했거든요.
사는게 만만치 않다는 생각 들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병원 의사 선생님께 영화와 현실이 똑같다고 말해서 의사선생님께서 저를 현실을 영화와 같은 공상적으로 생각하는 정신적으로 문제있는 환자로 진단 하셨지만. 간혹 정말 가끔 이 영화처럼 현실과 영화가 똑같다는 생각 들게 하고 현실이 영화보다 더 심각하고 더 극단적이라는 생각듭니다.
드라마 영화도 많은 사람들이 보는 이유가 재미로 보는 것도 있지만 삶을 대변해주기에 삶을 실으며 본다고 합니다.
영화관 가본지도 몇 달 되어서 그립네요.
하지만 5천원 영화도 아깝고 그 돈이면 반찬 만들수 있다는 생각에 영화도 이젠 도서관에서 DVD로 보려합니다.
영화공간주안에서 예술 영화 독립영화 보는 거 좋아했는데 보고 싶은 영화가 너무 많아서 경제적으로 부담 됩니다.
책도 요새 잘 안 사고 도서관에서 빌려 봅니다.
갑과 을의 싸움은 이제 어쩌면 당연한 것이고, 아니 싸움 자체가 안되고, 을과 을의 싸움이 된지 이미 오래입니다. 잠시 저를 대비시켜 고민해 봤습니다. 저 역시 산드라와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네요. 나보다 더 힘든 을을 희생시켜서 을인 내가 갑질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저를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랄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