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추억 #19, 어느 신고식
서울의 용산에 '수원정'이 있다면 부산에는 '초량12교회'가 있었다. 세칭 동방교에서는 전국에 산재해 있는 지교회에 숫자가 붙어있다. 서울에 있는 대기처들은 숫자가 없고 수원정, 수원장, 청수장, 청산루, 성무대, 청해장등 풍류연척 하는 요정이나 누각같은 이름들이 붙어 있다.
그 중에서 단연 동방교의 중심은 용산에 있는 '수원정'이었다. 이곳을 외부적으로는 제일교회라고 칭했다. 이곳을 중심으로 모든 동방교의 간부들이 모이고 훈련받고 지시를 내보내고 결과를 보고받는 중심장소였다. 부산에 있는 '초량12교회'는 부산, 경남지방에 산재해있는 동방교 지교회의 중심거점이었다.
서울에서 부산,경남, 경북, 전라, 충청등 각 지역별로 주1회씩 순회자라고 하는 동방교의 간부들이 책임맡은 지역으로 다니면서 세칭 동방교 교주의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지성(헌금)을 모아서 회수해가는 일을 하고 있었다.
교주에 대한 우상화, 신격화, 이제 곧 때가 다 되어 무시무시한 불심판이 하늘에서 내린다는 말세론적 협박,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않는 지성(헌금)이 필요하다는 강요등이 순회자들의 주요 임무였다.
60년대말, 70년대 초, 당시 부산 경남지방에는 20여개가 넘는 지교회가 초량, 영주동, 사상, 당감동, 구포, 거제리, 해운대, 마산, 김해, 대저, 대동, 명지, 밀양, 울산, 충무, 진해, 고성, 수산, 원동등에 산재해 있었고 각 교회마다 전도사라고 불리우는 남녀들이 임명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모두 빈집초월(무단가출)해서 세칭 동방교에 충성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주로 젊은 2-30대의 여자들이 많았고 소수의 청년들, 그리고 그중에는 세칭 동방교의 믿음에 너무나 충실한 나머지 가정의 남편과 자식들을 팽개치고 이런 지방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는 중년 여성들도 꽤 있었다. 이단사이비 종교집단에 의한 가정파탄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어찌 남편을 떠나고 생때같은 자식들을 버려두고 가정을 나와 그런 생활을 할수 있었는지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당시 동방교 내에서는 믿음이 좋은 성민(세칭 동방교 신도를 일컫는 말)이라고 칭찬이 자자했었다. 보통사람의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이단사이비 종교집단은 그런곳이다.
세칭 동방교의 지교회중 하나인 경남의 밀양교회에서 믿음이 솟아나(특출해서) 부산 '초량12교회'로 불려와 출세(?)한 소년이 있었다. 이름은 재화, 성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명명은 ‘히스기야’이다. 16-7세쯤 되었을까, 아마 밀양 어느 산골에서 가난하게 자라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소년이었던 것같다. 어떻게 동방교에 전도를 받아 들어오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순수하고 착하고 붙임성도 좋았다.
당시 '초량12교회'에는 나를 비롯한 20대초반의 청년 5-6명이 상주해 있었는데 나는 '초량12교회'의 전도사를 맡고 있었고 다른 청년들은 부산 인근의 지교회 전도사일을 하면서 주중에는 주로 '초량12교회'에서 숙식을 같이하고 있었다.
그때 재화라는 이 소년이 우리와 같이 기거하면서 여러 가지 잡심부름도 하고 일을 거들고 훈련을 받도록 밀양에서 '초량12교회'에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 또래들이 분위기를 잡고 있을때니까 이 소년은 자연히 우리들에게 주눅이 들고 매사가 조심스러웠다.
그러던 차에 마침 히스기야 재화의 밀양 친구인 또 한명의 소년이 같은 밀양교회에서 초량 12교회로 들어오게 되었다. 일종의 출세(?)였던 것이다. '초량12교회'에 재화의 친구 소년이 처음으로 온 날, 분위기에 이미 얼마큼 익숙해 있던 히스기야 재화는 후배를 다루는 선배처럼 이 친구에게 호기를 부렸다.
쭉 둘러 서 있는 우리들 앞에서 “야, 형님들이다. 인사해라” 하고 시키니 분위기에 눌리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예∼” 하면서 기가죽어 고개를 수그리고 인사를 했는데 그 장면이 흡사 영화에 나오는 무슨 조폭들의 신입행사 같았다.
그후 '초량12교회'는 학생들이 많이 전도되어 인원이 불어나서 더 이상 수용이 어렵게 되자 당시 옛 침례병원 (지금은 인창병원으로 변경) 정문앞의 어느 2층짜리 건물 하나를 빌려 교회를 신설하게 되었는데 1층은 몇 개의 방과 부엌이 있었고 2층은 전체가 강당처럼 구조가 되어있어 집회장소로는 안성마춤이었다.
주학교회라고 이름을 붙였고 두루 주(周)에 학(鶴)자를 사용했는데 이는 세칭 동방교의 사주(四柱) 중의 한 사람인 정재덕 요나단 목사의 호(號)다. ‘학처럼 높이 날아 세상을 두루 두루 살펴 본다’는 뜻이라고 했다.
정재덕 요나단 목사는 교주 다음의 제 2인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동방교 내에서는 비중있는 최고위 중량급 인사다. 인물도 잘 생기고 같은 사주(四柱)인 양학식 베드로목사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신사풍의 인물이었다.
당시는 이분이 부산, 경남지방의 순회자로 서울에서 매주 '초량12교회'를 왕래하고 있었다. 그만큼 '초량12교회'는 세칭 동방교에서 서울 용산의 수원정 다음가는 중요한 요충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호(號)를 따서 주학교회를 설립했는데 나는 '초량12교회' 전도사를 거쳐 주학교회의 담임 전도사로 이동되었다. '초량12교회'에서는 김인경 입다목사의 지도아래 일을 했다고 하면 주학교회는 전적으로 내가 책임지는 전담 전도사였다.
이때 히스기야 재화가 나에게 배속되어 주학교회로 나를 따라 오게 되어 세칭 동방교 내에서의 여러 가지 훈련을 받게 되었고 내가 서울의 용산 '수원정' 대기처로 올라갈 때 까지 나와 같이 지냈다.
김인경 입다목사의 수제자가 나라고 한다면 나의 수제자가 히스기야 재화쯤 되었을까. 얼마쯤 세월이 흐른 후 그도 서울의 대기처로 들어 갔는데 내가 세칭 동방교의 마약에 취해서 병역의무도 포기할 각오로 2년여 신검을 기피하다가 겨우 입대해서 군복무를 마치고 사회생활에 적응하여 세칭 동방교를 떠나 잊고 지낼때 어느날 들리는 소문으로는 동방교 대기처내의 대학 나온 어느 처자와 결혼하여 호주로 갔다는 풍문이 들려왔지만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2대 교주 노영구 시절에 몇몇 신도들을 무단 방출하는 식으로 무작정 외국으로 내 보낸 적이 있었다. 통일교 집단의 어느 시절처럼, 독일로 호주로 남미로 카나다로... 그때 떠났던 몇 사람들의 세칭 동방교 신자들이 간난신고를 거쳐 현지에 자리잡게 되었고 지금 기독교대한 개혁장로회로 위장한 세칭 동방교는 호주총회, 미주총회, 남미총회, 독일총회 하는 식으로 무슨 방대한 국제 조직이 있는 것처럼 말을 하고 있지만 이것도 사실은 허무한 위장일 뿐이다.
위장의 명수들이다. 내용을 알고보면 몇 사람들의 세칭 동방교 신자가 떠나왔던 조국을 그리워하며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중에 독일쪽이 아마 제일 오래 되었을 듯 싶다. 일찍이 세칭 동방교의 신자였던 간호원들이 수십명이나 독일로 떠나가서 뼈 빠지게 일해서 받은 월급을 수 년동안 가족들에게 보내지 않고 몽땅 세칭 동방교로 송금해서 가족들에 의해 진정서가 접수되어 검찰이 수사에 나섰던 ‘세칭 동방교 파독 간호원 사건’도 언제 언급 할 기회가 있을듯 하다.
이 글을 적다보니 또 한 사람 보고싶은 이가 생각난다. 독일로 떠났다고 알려진 장현두씨! '주간 기독교'에서 근무하던 그는 세칭 동방교에서는 보기드문 신사풍의 내 또래 청년이었다. 나와도 참 친하게 지내던 사이였는데...
보고싶다 재화야!
그리고 보고싶은 장현두씨!
어느 세월에 이글 읽을 날이 있을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