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랭응집소병, 냉기 닿으면 적혈구 파괴 반복…극희귀 자가면역 혈액 질환
진단 후 5년 내 10명 중 4명 ‘사망’…“국내 치료제 부재로 환자 부담 증가”
“치료제 쓰면 큰 증상없이 살 수 있지만, 쓰지 못하면 5년 내 40% ‘사망’”
“희귀질환에 대한 인식 달라져야…‘콘트롤타워’ 두고 조직적인 관리 필요”
용혈된 적혈구 이미지. 사노피 아벤티스 코리아 제공
체온보다 조금만 낮은 온도에서도 암 환자 수준의 피로 및 신체적 고통을 받는 질환 ‘한랭응집소병’(Cold agglutinin disease·CAD). 이 질환은 전문의사조차도 평생 환자를 한 번도 못 볼 정도로 극희귀질환이며, 진단 후 5년 내 10명 중 4명이 사망할 정도로 치명적이다.
한랭응집소병을 앓는 환자들은 늘 극심한 추위를 느끼며, 일상생활 중 조금만 냉기가 있다면 적혈구 파괴 증상을 겪기 때문에 한 여름에도 선풍기, 에어컨 사용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질환에는 ‘온도 감옥’이라는 무서운 별명이 붙어있다.
이 질환은 치료제를 쓰면 큰 증상 없이 살 수 있지만, 못 쓰면 암도 아닌데 5년 내 40%는 사망한다며 이러한 희귀질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고 전문가는 조언한다.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장준호 교수는 지난 8일 글로벌 제약회사 사노피 아벤티스 코리아가 개최한 미디어 세미나에서 이 같이 밝히며 “희귀질환을 위한 콘트롤 타워를 두고 조직적인 관리가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장 교수는 “혈액을 전공한 전문의도 평생 한랭응집소병 환자를 한 번도 못 볼 정도로 극희귀질환으로, 우리나라에는 100명 안팎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암도 아닌데, 5년 내 40%의 환자가 사망할 정도로 치명적인 질환”이라고 말했다.
한랭응집소병은 적혈구 파괴가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극희귀 자가면역 혈액 질환이다. 환자 몸 안의 한랭 자가항체에 의해 정상 체온 미만에선 적혈구를 계속 파괴한다.
장 교수는 “우리가 숨 쉴 수 있도록 산소를 운반하는 적혈구가 부족한 질환이 바로 빈혈인데, 빈혈의 대다수는 철분이 부족해서 적혈구를 못 만드는 ‘철 결핍성 빈혈’”이라며 “이와 달리 한랭응집소병은 적혈구를 만들어내지만 내 몸에서 한랭응집소라는 자가항체가 적혈구를 남의 것으로 인식해, 면역세포가 적혈구를 공격해 파괴하는 질환”이라고 설명했다.
적혈구 파괴. 게티이미지뱅크
환자들은 늘 극심한 추위를 느끼며, 설거지나 냉장고에서 물건을 꺼낼 때, 시원한 물을 마실 때 등 조금만 냉기가 있는 곳이라면 적혈구 파괴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이 때문에 여름에도 선풍기, 에어컨 사용이 불가능해 대중교통 이용에 어려움이 있다.
한랭응집소병은 주로 빈혈, 극심한 피로 호흡 곤란, 혈색소뇨증과 같은 용혈 증상 및 손끝이 파래지는 말단 청색증, 레이노 현상 등 증상을 겪는다. 인구 100만명 당 약 1명에게 발생하는 것으로 보이며, 인구 100만명 당 기후에 따라 5~20여명으로 추산된다.
우리나라는 한랭응집소병에 대한 질병코드가 없어 환자 수 집계조차 불가능한 상황이다. 적은 환자 수만큼 잘 알려지지 않아 치료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치명적인 빈혈 및 혈전성 합병증을 유발하며 진단 후 5년 간 사망률이 3배 증가한다. 진단 후 생존여명은 8.5년에 그친다.
장 교수는 “진단 5년 후 환자 10명 중 4명가량(39%)이 사망하는 것으로 보고됐다”며 “암 사망률 그래프와 유사하다. 상당히 문제 있고 사회적 부담이 큰 질환”이라고 말했다.
사망의 가장 큰 원인은 혈전증으로 나타났다. 이 질환자의 혈전 발병률은 1000명 당 30.4명으로, 비 한랭응집소병 인구(1000명 당 18.6명) 대비 2배 높게 나타났다. 혈전색전증은 1년 사망률이 20%에 달하는 치명적인 합병증이다.
그는 “흔히 항응고제를 먹으면 혈전이 예방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 병의 혈전증은 보체 그 자체, 응고시스템 등 3가지 경로로 생긴다”며 “항응고제는 응고시스템만 차단하고 나머지 두 가지를 예방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의료진도 잘 모를 정도로 질환 인지도가 낮은 점은 한랭응집소병 진단을 어렵게 한다. 환자들이 이 질환의 증상을 잘 몰라서 진단이 지연되거나, 진단 전까지 여러 번의 병원을 방문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힘들게 진단받게 되더라도 국내에는 한랭응집소병에 허가된 약이 없어 치료가 제한적이다. 환자들은 추위·냉기 피하기, 엽산 복용, 수혈 등 대증적인 치료로 유지하고 있다.
8일 진행된 사노피 한랭응집소병 미디어 세미나_모습.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장준호 교수. 사노피 아벤티스 코리아 제공
중증 빈혈을 동반한 한랭응집소병 환자 중 절반가량은 증상 완화 및 생존을 위해 임시방편인 수혈에 의존해야 한다. 또 유효성과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은 미허가 약제를 쓰며 미봉책으로 증상을 피하는 경우가 많다.
사노피가 ‘수팀리맙’이라는 약을 미국‧유럽 등에서 유일한 치료제로 허가받았으나, 국내에는 아직 허가되지 않았다. 이 약은 용혈의 원인인 고전적 보체 경로를 선택적으로 표적 하는 치료제다.
장 교수는 “치료제를 쓰면 큰 증상 없이 살 수 있지만, 못 쓰면 암도 아닌데 5년 내 40%는 사망한다”며 “희귀질환 패스트 트랙으로 국내에 진입하기 위해선 한랭응집소병 같은 희귀질환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다.
어어 “이런 질환은 사람들에 인지가 안 돼 희귀질환의 트랙에도 들어가지 못한다"며 "희귀질환을 위한 콘트롤 타워를 두고 조직적인 관리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이승구 온라인 뉴스 기자 lee_owl@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