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가 다스리던 조선 후기는 빠르게 변해가는 시기이기도 하였습니다.
먼저는 청나라를 통해서 온세계의 지식, 과학, 종교, 기술들이 조선에 전해져요.
우리 조상들은 새로운 사고를 접하면서 예전에 사로잡혔던 여러 고정관념들이 깨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둘째로 신분제가 흔들리고 배움의 기회가 넓어져요.
농업, 상공업이 발전하면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여러 기회가 생겨납니다.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부유한 평민이 생기기도 하고, 몰락하는 양반이 생기기도 하고, 종교 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노예들이 해방됩니다.
전반적으로 사회가 평등해져 가면서 배움의 기회로 넓어집니다. 마을 주민들이 배우고 싶어 직접 서당을 세우기도 하고, 몰락한 양반들이 생계수단으로 훈장이 되면서 서로 필요를 채워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변해가는 사회를 바라보며 우린 무엇을 배울 수 있었을까요?
(지음재원)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은 지구의 땅 모양은 네모나고 그 중심에 중국이 놓여있다는 인식 속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배움을 통해 지구가 네모나지 않고 둥근 구이며 그렇기에 어떤 땅이든 마음먹기에 따라서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주체성이 생기게 된다.
배움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틔이고 자신의 정체성이 변하게 된 사건이다.
이전까지 시선이 중국을 쫓아가고 따라하고 싶어 바깥으로 향해 있었다면, 이제부터는 우리를 향해 눈을 돌려서, 우리 안에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나아가려는 실천들로 나타난다. 기술을 발달시키고(그 방법이 ‘대강 만든 물건을 탓하지 않고 그냥 쓰면 결국 농기구 같은 게 발달하지 못해 모두가 망하는 길’이라고 표현한 것도 참 흥미롭다.), 사회제도를 다듬고, 평등사회를 만들어간다.
나라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일반 백성들도 공부하고 배우면서 계를 만들어 자기 삶터를 가꾸고 상소문으로 정치에 참여하며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게 된다.
배움을 통해 이전의 갇힌 세상에서 벗어나서 적극적으로 자기가 가장 생기있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보게 되었다.
우리 안에 그런 배움의 유익을 경험한 사건은 없을까 떠올려본다. 나는 하늘땅살이 수업이 나의 세계관을 넓혀주는 배움이 될 때가 많다. 밭생명이 자라는 모습 속에는 생명이 살아가는 이치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밭에 넣은 고추씨가 5주가 지나서야 새싹을 틔였을 때, ‘아! 어떤 것이든 내가 정성껏 씨앗을 심었다면 자신의 때에 맞춰 싹의 틔우는구나. 섣부르게 결과를 단정짓지 말고 씨앗을 심는다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지켜봐야지’ 지혜를 얻기도 했다.
또 습기에 녹아버린 장다리 씨무, 씨배추를 보면서는 때로는 아무리 애써도 피할 수 없이 맞이하는 실패와 죽음도 있구나. 이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기도 하였다.
늘 배우는 삶을 살고 있다. 요즘도 철학수신으로 도덕경을 읽고, 잇고짓고 공부로 푸른이들 날적이도 읽고, 하늘땅살이도 배우고, 장구도 배우고, 풋살ㆍ농구도 배우고, 수업 준비로 조선사와 상고사도 배운다.
배움길이 호락호락하지 않고 버거울 때도 있지만 껍질 깨고 새로운 세상에 나가는 일이라 생각하며 힘 받아 배워가겠다.
(가을)
노비 제도를 철폐하는 얘기가 기억에 남는다. 노비들은 물건처럼 사고 팔리고 조상에 따라 대대로 노비가 된다. 결국 참지 못한 노비들은 주인을 죽이며 도망치거나 한다. 이렇게 노비들은 도망치지 않으면 이 억울함에 당하고만 있어야한다.
표현을 해야만 사대부들이 귀를 기울이고 생각을 해보게 된다. 표현을 해야만, 말을 해야만 알아차리는걸까? 노비들이 도망을 치지 않더라도 좀만 살피면 노비들의 고통, 억울한 삶을 모르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나도 최근에 한 동무의 힘듦을 들었다. 그 동무에 힘듦을 듣고 이 동무가 이렇게 힘들어 했는데 난 왜 살피지 못 했고 알아차리지 못 했을까 미안하다.
하늘땅살이 시간에 지현 선생님이 말씀하신 완두콩 실험을 보면 식물은 연결되어 있지 않아도 서로 상황을 감지한다고 들었다. 우리 기준엔 말도 못하는 식물인데... 역사를 보면서 사람들이 놓치는 부분, 아쉬운 부분을 많이 보게 될텐데 나도 지내며 후회하지 않게 잘 살피며 지내고 싶다.
(해성)
18세기 조선은 청을 통해 서양의 문명을 만난다. 처음은 오랑캐들이라고 무시하던 청이었지만 대단한 기술들과 새롭고 발달된 지식을 보고는 아무리 오랑캐 것이라도 배울 것은 배워야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것을 보고 배움의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아주 오랜 시간 계속된 사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고를 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어떤 양반들은 배우려는 마음으로 오랜 윤리와 사상을 깼다. 나는 어떠한 배움을 할 때 자신에게 들어오는 배움의 양은 마음가짐과 자세로 결정된다 생각한다. 또 배우려는 마음만 있으면 아무리 작은 일에도 배움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 부분에서 새로운 문명을 배우려 애썼던 사람들이 대단했다.
천주교는 서양 문명을 들여오던 중 한 학문으로 들어오게 됐다고 한다. 그러다 천주를 믿게 된 신자들은 자기들 힘으로 교회를 세우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 배움을 실천한다. 이 부분은 배운대로 사는 삶이 무엇일까?하는 질문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좋은 배움을 해도 실천하지 못하면 굳은 지식이 되는데 천주교 신자들은 실천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학교에서 많은 배움을 하는데 늘 배우려는 마음으로 배움을 마을에 들이고 그대로 실천하며 살고 싶다. 혼자는 어렵지만 동무들과 함께하면 가능할 것 같다.
(현아)
앞 쪽에 보면 오래된 생각의 틀을 깨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노비제 폐지 등 그 당시에는 그렇게 오랫동안 크게 믿어오고 지켜왔던 것들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런 이야기들을 받아들여 실천으로도 옮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을거라 생각이 든다. 그만큼에 애씀이 있었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갇히지 않고 깨는 것에 대해 생각해봤다.
내 일상에서도 그런 일들이 분명 있을거다. 그 당시 만큼 흐름을 깨는게 어렵진 않겠지만 깨어서 지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최근에 어떤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일을 할 때는 틀이 필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 틀은 시간이 지나면 점점 형태만 남고 새로워지는 상황들을 헤아리는게 어려워지기도 한다. 그래서 틀을 만들고 그 틀을 스스로 계속 깨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늘 놀라는 마음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나도 모르는 새 틀에 갇혀있을 때도 있다. 혼자하면 계속해서 깨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곁에 서로 지켜줄 수 있고 빛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이들이 있다는게 든든하고 고맙다.
내가 무언가에 갇히게 되는 때는 다양하다. 그냥 일상 지내면서도 그런 것들이 있을 것 같다. 막상 떠올리려니 생각나는건 없지만 무슨 의미인지 모른 체로 하고 있는 일들도 있을거다. 내 안에 뜻이 서있지 않아서 그렇다. 내 일상을 다 관찰해보고 그런 것들을 찾아 스스로에게 물으며 뜻을 세워가는 것도 해봐야겠다.
또 나 자신 안에 갇히기도 한다. 혼자 생각을 많이 하다보면 그 생각 안에 갇히게 된다. 넓은 시선으로 보지 못 한다. 그 생각에 갇힌 채로 주변 관계를 만나기도 한다. 나한테 그 생각은 때마다 찾아오는 고민거리가 될 때가 많다. 아까도 말 했듯이 혼자하려고 하면 깨고 나오기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나를 계속해서 벗들에게 나누는게 필요하다 느낀다. 하지만 나누면서도 그 생각에서 나아가지 못하고 계속해서 갇혀있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이런 나를 있는 그대로 비춰주는 이들이 있다. 참 고맙고 나에게 이렇게 관심과 사랑으로 다가와주는 이들과 내 안에 갇혀서 하는 이야기가 아닌 함께 느낄 수 있는 이야기로 더 풍성하게도 만나고 싶다. 물론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 내 마음과 상태를 솔직하게 나누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게 고민이 있든 뭐가 있든, 그걸 펼치는 곳은 내 일상이기 때문에 지금에 더 충실하게 있는 한껏 느끼며 알차게 살아야겠다.
(은율)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평민이 들어났고 백성이 억울함을 직접 호소 할 수 있게 되었다는게 기억에 남는다. 이때 모두가 중심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모두 동등한 사람이다. 물론 내가 살면서 막 동등히 여기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앞으로 그럴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좋은 점과 앞선 문물을 받아들이려 노력하기도 한다. 이렇게 속에 갇혀 있지 않고 새로운 걸 받아들이려하는 것도 기억에 남는다. 이런 일들이 있었기에 노비제도를 철폐할 수 있었고 그런 문제들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작은 것이 큰 것이 된다는 것도 맞는 것 같다. 나도 내 안에 갇히지 않고 싶다. 그게 뭔지는 차차 생각해볼거다.
(은혜)
이번 장에서는 노비와 양반의 차이, 노비제도를 없애자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런걸 우리 삶 안에서 생각해봤다. 우리는 보통 차별하지 말자고 많이 말한다. 옛날에는 노비와 양반의 차별, 흑인과 백인의 차별, 남자와 여자의 차별 같은 것도 있다. 예를 들어 또 학교에서는 편드는 모습도 종종 있다. 이런 것이 다 차별이라고 생각한다. 그냥 다른 것이 아니라 어떤게 더 좋고, 높다고 말하는거다. 꼭 ‘차별’까지는 아니더라도 선배와 후배, 여학생과 남학생으로 갈리기도 한다. 모두 다 똑같은 사람인데 그냥 다른 것 뿐인데 무슨 기준을 지어놓고 맘대로 판단하는 건 아닌거 같다. 나도 가끔 선배니까 해야지, 동생이니까 그런거지, 하며 나에게 더 유리하고 좋은 쪽으로 말할 때가 있는데 앞으로는 모두 똑같이,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도록 하고싶다. 그런데 갑자기 바꿔버리면 좋은 걸 누리고 있던 사람들은 억울할 수 있으니까 서서히, 조금씩 조금씩 그런 문화를 만들어 나가야겠다.
(남우)
사람들이 노비제도를 없애고 평등사회로 변하자는 목소리를 높일 때 나는 어째서 신분사회가 있었는지가 의문이 갔다.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은 평등하며 똑같은 불행과 행복, 또 과정을 얻어야하는데 어째서 이런 신분 문화가 시작된걸까? 당연히 강한 자가 약한 자 위에 군림하고 재능있는 자가 없는 자보다 높은 대우를 받을 수 있지만 이 신분 제도는 모자란 자가 지혜로운 자 위에 올라서게도 한다. 물론 처음에는 나라에서 공을 세우거나 훌륭한 사람이 권력을 가졌겠지만 이 자손 대대로 물려주는 신분 제도는 잘못된 것 같다. 또 반드시 변해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