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풍운비망록
청운하
서장
성명 : 적용사우
나이 : 사십사 세
신분 : 천마교 십칠 대 교주
성격 : 무심비정
죄업 : 무려 오백여년의 세월 동안 이 땅에 난세를 불러일으킨 천마교의 마지막 맥을 이은 인물로서 천하제패의 원대한 야망을 버리지 못하고 십만 천마교도들을 이끌고 천하무림을 피로 물들은 중죄, 독단적으로 일천 팔백 삼십팔명의 정파무림고수 척살.
천하인의 중론 : 당연히 무림칠대뇌옥 가운데 가장 무서운 적사도에 투옥해
야 한다는 것이 지배적임.
때는 초추, 사들한 야풍이 섬뜩한 차가움으로 와닿는 계절이다.
그러나 이 계절은 천하무림의 판도에 일대 전환기가 되고 있었다. 무려, 오백여 년의 세월 동안 이땅을 난세로 몰아넣었던 천마교의 종말이 도래했다는 의미에서...
그그긍...
귀에 거슬리는 음향과 함께 담청빛 이끼가 자욱하게 낀 하나의 철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오시오.]
한 줄기 담담한 음성이 깊은 늪처럼 정적이 깔린 철문의 입구에서 여운처럼 길게 울렸다. 입구의 천정에서 은은히 흘러 내려오는 야명주의 흐릿한 빛 그 빛 아래 흐릿하게 서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청년이었다. 나이는 대략 이십 칠 팔세 가량, 두 눈썹은 짙고, 구레나룻이 멋지게 늘어졌다.
얼굴은 호남형으로 꽤 준수한 편이었다. 일신에 걸친 옷은 물빛 청삼, 가슴에 비스듬히 비껴들고 있는 것은 검인 듯 싶었는데...
[...!]
눈, 물처럼 고요한 가운데 가끔 칼 끝처럼 날카로운 예기가 흐르는 청년의 눈빛은 철문안으로 향해 있었다. 철문 안은 칠흑의 어둠에 잠긴 하나의 식실이었다.
이때 문득, 석실의 한 구석에서 천천히 고개를 드는 한 사람이 있었다. 야명주의 흐릿한 빛이 눈부신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리는 얼굴...
흐트러진 흑발속에서 드러난 그 얼굴은 백납처럼 창백했다. 중년인이었다.
검은 얼음을 박아넣은듯 냉혹한 느낌을 주는 눈, 예리한 콧날과 비정한 냉소를 머금은 듯한 얇은 입술, 선천적으로 오만해 보이는 귀상이었다. 그리고, 느릿하게 청삼청년을 응시하는 그의 깊은 눈은 늪과 같아서 어떤 투시도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고요한 가운데 상대의 시선을 빨아들이는 마력이 있었다. 이것을 효웅의 눈이라 하던가?
이때,
[때가 되었는가?]
중년인은 메마른 어조로 중얼거리며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순간,
철그렁...
기이한 금속성이 그의 전신에서 요란하게 터져나왔다.
그렇다. 그의 전신은 족히 일만 근의 무게는 넘어 보이는 쇠사슬이 칭칭 동여매어져 있었던 것이다.
[자네의 기도는 놀랍군. 검의 예기를 기도로써 풍겨낼 수 있는 인물은 그
리 흔치 않지...]
중년인은 청년을 바라보며 은은히 감탄의 빛을 얼굴에 띠었다.
[본좌의 짐작이 맞는다면 압으로 십 년이 지나지 않아 검으로는 자네를
상대할만한 인물이 이땅에는 없을 것이네.]
[영광이오.]
청년은 빙긋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무엇이 영광이란 말인가?]
중년인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청년은 담담히 대답했다.
[당신은 사마도의 역사에 새로운 장을 연 일대의 마웅 적용사우.. 위대한
당신으로부터 소생이 과한 칭찬을 들었으니 어찌 영광이 아닐 수 있겠소?]
적용사우라는 이름은 삼천년 무림사상 최강의 사마집단이라는 천마교의
십칠대 교주를 일컬음이며, 불과 약관의 나이에 천마교주로 등극하여 이십
여 년의 세월 동안 이 땅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장본인, 그가 바로 이 초라
한 몰골의 중년인이었다.
그러나, 정작 적용사우는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적용사우는 죽었다네. 이곳에 남은 본좌는 적용사우가 아니라 천마교의 역사에 씻을 수 없는 일대 오점을 남긴... 헛허허... 추레한 역사의 잔재가
아니겠는가?]
고뇌와 회한이 깃든 그의 시선은 잠시 공허히 석실의 천정을 맴도는 가 싶더니 이내 청년에게로 향한다.
[한 가지 물어도 되겠는가?]
적용사우는 청년을 바라보며 고요히 말했다.
청년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적용사우는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는 선악의 개념 차이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
청년은 의외의 질문이라는 듯 흠칫하며 잠시 침묵했으나 이내 간단히 대답했다.
[각자의 마음에 있다고 생각하오.]
[현명한 대답이로군. 동감이네. 인간은 바로 마음에따라 선인이 될 수도, 악인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은 선하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악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네. 그것이 문제가 아닌가?]
[...!]
자신만이 바르고 선하다는 생각은 곧 자신이 아닌 탄인을 일방적으로 악
인으로 몰아넣은 타성을 낳았으니... 헛허허... 본좌가 악인이어야 하는 것
은 그런 이유 때문만이 아니겠는가?]
담담한적용사우의 음성에는 메마른 한이 담겨 있었다.
[자네가 자신을 선인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본좌 또한 자신을 선인으로 생
각해 왔네. 그리고 자네가 죽여야 할 악인들을 죽인 것처럼 본좌 역시 죽어
야 할 악인들만을 죽여왔네.]
[음...]
[한데, 어째서 자네는 선인이어야 하고 본좌는 악인이어야 하는가? 그 선
악의 판단기준은 어디서 비롯된 것이며, 누가 만든 것인가? 헛허허... 선인
은 살인을 해도 선인이고... 천하제패의 야망을 지녔어도 선인이니...]
적용사우는 허탈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어 그는 무거운 침
묵 속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숙인채 사념에 잠긴 듯한 그를 보며 청년은 전
신을 가늘게 떨었다.
(과연 거인이다. 감히 우리 군협칠대무황이 넘볼 수 없을 정도의...)
이때, 적용사우는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미안하네. 자네 앞에서 신세 한탄 따위나 하고 있었다니... 이런 본좌는
분명 적용사우가 아니네. 헛허허...]
[...]
[자네를 알고 싶네.]
[소생은 염무정이라 합니다.]
청년 염무정의 말투는 어느새 공손하게 변해 있었다. 순간,
[염무정...?]
적용사우의 얼굴에 언뜻 경악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 빛은 이내 사라지고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군. 천마교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최절정고수 백인을 잡아들인 군협칠대무황가운데 일인... 검황 염무정이 바로 자네였군. 그래서 그 기도가 놀라운 것이었어.]
[기실 천마교가 멸망한 것은 자네 같은 뛰어난 기재가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 만약 자네들 같은 인재가 우리에게도 있었다면, 이 자리에 있을 사람은 본좌가 아니라 군협천무 철군무였을 테지. 헛허허.. 그렇지 않은가?]
[아니오, 그분은 위대하오.]
검황 염무정은 고개를 흔들며 숙연한 표정을 짓는다.
[우리 군협칠대무황이 천마교에 몸을 담고 있었을지라도 여전히 당신은 이곳에 있었을 것이오.]
이어 그는 천천히 적용사우의 전신을 동여맨 쇠사슬을 풀었다. 이미 전신 무공이 폐지된 상태의 적용사우. 쇠사슬을 풀었을지라도 그는 여전히 폐인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 오시오. 마지막 심판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소.]
이 말을 끝으로 검황 염무정은 몸을 돌려 어두운 통로를 따라 걸어갔다.
그 뒤로 적용사우는 천천히 따랐다. 그의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다.
그 무거운 발길 위로 처연히 떨어져 내리는 것은 그의 소리 없는 중얼거림..
- 적용사우여... 너는 하나를 모르고 있었다. 스스로 너는 천마교 오백년
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로만 생각했었지, 군협전 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 한 사람이 너와 공존하고 있었음을 무시해 왔다. 아아... 이제사 그것을 느꼈음은 천마교의 멸망, 그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 헛허허... 이제 이 추레한 몰골은 정파무림의 심판대에 올려질 것이다. 내 무슨 면목으로 선조들을대할 것인가... -
이곳은 대소림사의 한 지하뇌옥.
저 위대했던 천마교주 적용사우와 검황 염무정의 최초의 만남이 있었던 이 날은 사마무림의 신이었던 위대한 인간이 정파무림인들의 앞에서 그 죄에 대한 심판이 있는 의미깊은 날이다. 그리고, 송대에서 시작하여 원을 거쳐 대명에 이르는 장장 오백여년의 세월에 걸쳐 참으로 끈질기게 이어져 온 천마교와 군협천의 대혈전이 종식되는 감명 깊은 날이기도 하다.
초추의 바람이 결코 차갑게 느껴지지 않음은 길고 긴 난세가 종식되는 화평의 기운이 천하를 감싸고 있음인 것이다.
대소림사. 태산을 산중제라 하고 북두를 천중황이라 하듯, 예로부터 세인들은 숭산 대소림사를 일컬어 태산북두라 하였다. 돌이켜 보자면, 보리달마가 갈대잎 하나를 타고 중원의 숭산으로 들어와 불법과 무행을 전한 것이 무림의 시조라 하니, 대소림사의 역사가 곧 무림의 역사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닌가?
그 동안 대소림사는 한 번도 중원무림의 태두로서의 역할을 잃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대개의 문파가 피와 죽음으로 얻어진 이름과는 달리 자비로움으로 얻어진 이름이라는 데에 더욱 의의가 있는 것이다.
대소림사는 좀처럼 무림활동을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대소림사가 무림인들의 마음속에 태두로써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대소림사의 무한한 잠재력이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한데, 이 불문의 성지가 알게 모르게 무림 일에 관여하게 된 것은 정파무림인들의 끈질긴 간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이백년 전 당시의 무림은 난세의 극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삼천년 무림사상 최강의 집단이라는 천마교와 군협천의 대혈전이 삼백여년에 걸쳐 이어져 왔던 그 무렵, 대세는 서서히 정파무림의 하늘이라는 군협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수많은 천마교의 고수들이 포로라는 이름으로 군협천으로 잡혀 들어왔고, 그들의 처리에 군협천은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물론 그들을 죽이면 문제는 간단하다. 그러나, 현명한 당시의 정파무림명숙들은 죽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알게 되었고, 죽이는 대신 다른 방법으로 천마교인을 다스려 후세의 사마도의 인물들을 훈계하려하니... 그리하여 중원에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불귀의 일곱 개 뇌옥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름하여 무림칠대뇌옥. 대륙의 각기 다른 지역에 만들어진 이 무림칠대뇌옥의 무서움은 단지 돌아올 수 없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들어가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오랜 세월 번민과 후회 속에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결국은 죽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간단하게 죽이는 것보다 더한 훈계를 후세의 사마인들에게 줄 것은 명확한 것.
그러나 이 방법에도 어려움은 있었다. 천마교를 상대하는 데 온힘을 다한다.
"군협천으로서는 잡혀 있는 수많은 천마교의 포로들에 대한 죄의 경중을 일일이 가리고... 거기에 따라 죄인들을 무림칠대뇌옥에 분산 투옥시킬 시간적 여유나 인적 여유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뜻있는 정파명숙과 군협천의인물들은 고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고심 끝에 한 가지 방법을 내놓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대소림사를 이 일에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대소림사로 하여금 임시방편으로 만든 무림법을 행사케 하니, 바로 천마교도들의 죄를 대소림사로 하여금 판단케 하고, 그 판결에 따라 죄인들을 무림칠대뇌옥에 투옥케 한 것이다. 물론, 이런 정파무림인들의 간원을 대소림사에서도 처음에는 완강히 거부했다.
그 일 자체가 대소림사가 무림 일에 관여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림 일의 관여를 원치 않았던 대소림사에서도 그 일이 이 땅의 평화를 위하는 일이었기에 결국은 허락하고야 만다.
대과헌, 그래서 탄생이 된 대소림사 내에 있는 천마교도들을 심판하는 일종의 무림법 이행 기관이었던 것이다. 기실 돌이켜 보면 대과헌에서 하는 일은 지극히 간단했다. 대소림사의 인물들은 판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천마교도 개개인의 자료 즉, 그들의 무림활동과 성격, 출신내력 등의 자료를 군협천으로부터 제공받은 후, 그 자료를 토대로 대소림사의 인물들은 죄인들의 죄에 대한 경중을 판결한다. 그리고, 그 일차의 판결을 기준으로 하여 그 죄인들 중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죄인들은 무림칠대뇌옥 중 적사도에 보내져야 한다는 이차의 판결이 내려진다. 또한 그 아래의 죄에 해당하는 판결이 일차적으로 내려진 인물들은 무림칠대뇌옥 가운데, 만겁뇌, 지옥굉, 백사지대, 독풍림, 만빙담, 고해동의 순으로 보내져야 한다는 판결이 일차적으로 역시 내려진다.
여기까지가 대소림사에서 할 일인 것이다. 그리고, 죄인을 잡아들이고 그 죄인들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고, 판결이 내려진 죄인들은 무림칠대뇌옥으로 압송하는 일은 모두 군협천에서 맡아서 한다.
지난 이백여 년의 세월동안 이런 대소림사의 판결에 따라 수많은 천마교도들이, 아니 비록 천마교에는 몸을 담고 있지는 않을지라도 천마교도들에 상응하는 무림공적과 희대의 탕남탕녀들도 무림칠대 뇌옥으로 투옥이 되었다.
대소림사 내의 대과헌, 이래서 오늘의 무림마인들에게는 그야말로 공포와전율, 그 이상의 의미를 주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보면 대과헌에서 하는 일자체가 너무 간단했다. 천마교를 전력으로 상대하는 군협천으로서는 대과헌에서 하는 일을 맡아서 할 인적여유와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었기에 대소림사를 끌어들인 것이라 하지만, 따지고 보면 대소림사의 대과헌에서 하는 일자체가 군협천에서 말하는 인적 여유와 시간적 여유를 별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군협천에서는 무슨 이유로 대소림사 내에 대과헌을 창설하게 간원한 것인가? 그러나 그 이유는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대소림사의 무한한 잠재력, 그 자체가 사마인들에게는 오랜 세월 이전부터 공포의 대상이었기에, 군협천에서는 단지 대소림사를 끌어 들임으로써 사마인들에게 엄청난 무게를 주려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군협천의 그런 계획은 성공했다고 볼 수가 있었다. 대소림사가 알게 모르게 무림의 일에 관여함으로써 천마교에서는 군협천에 비교될만한 위압감을 느낀 것은 사실이었고, 그것이 결국은 천마교의 몰락을 가져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음도 사실이었다.
대과헌, 오늘도 이 무림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 이 관에서는 판결이 있다. 바로, 천마교주 적용사우에 대한 판결이 그것이다.
천마교의 몰락을 가슴에 안은 비운의 인물, 대과헌에서 있은 이 인물에 대한 판결은 지금 천하인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화젯거리였다. 그리고 이것을 끝으로 무림은 평화시대로 돌입하게 될 것이다. 이래서 정파무림인들의 발길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대소림사로 향하고 있었는데...
과연, 천마교주 적용사우에 대한 판결은 어떻게 내려질 것인가?
땡땡땡!
정오의 온묘로운 햇살을 헤치며 숭산 소실봉을 은은히 흔드는 청아한 종소리가 있었다. 대과헌, 이백년 전에 만들어진 이 대소림사의 성지이자 무림의 성역은 지금 장엄한 분위기에 감싸여 있었다.
희디흰 거대한 불전, 불전을 중시섯로 사방에는 끝간데 없이 송죽림이 펼쳐져 있다. 대소림사의 수많은 불전 가운데 가장 규모가 거대한 곳이다.
위로는 소실봉의 정상을 바로 눈앞에 두고 있고, 아래로는 도대체가 헤아릴 수도 없이 들어선 대소법전과 법당을 두고 있는 이 불전이야말로 대과헌의 모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불전 내에는 근 일천 명에 달하는 정파의 명숙들이 엄숙한 자세로 들어서 있었으니 그 규모의 거대함이야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정적, 보이는 사람은 일천여명에 이르나, 대과헌 전체는 숨 막히도록 무거운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중인들의 시선은 오직 세 사람에게로만 향해 있다. 그중 한 사람은 물론 천마교주 적용사우이다.
이때, 그는 불전의 중앙 단상에 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었다.
수많은 중인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해 있었음에도 그는 담담했다. 그의 시선은 공허히 허공으로 향해 있었으며 입가에는 자조 서린 미소가 스며 있었다. 그리고 중인들의 시선을 받고 있는 나머지 두 사람, 그들은 대소림사의 장문인인 무운선사가 아니었고 이 시대의 새로운 신화와 전설을 창출해 가고 있는 군협칠대무황 가운데 이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두 사람은 바로 군협천주 철군무와 대소림사의 천엽성승이었던 것이다.
천마교주 적용사우의 정면 단상 위에 놓인 두 개의 태사의에 몸을 묻고 있는 두 사람, 옥골의 준수한 중년인, 완숙한 기품을 지닌 사내, 전신으로 흐르는 귀풍이 형용할 수 없이 신비스럽다.
일신에는 눈부시게 흰 유삼을 단하게 걸치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통천관을 썼다. 단지 겉으로 보이는 그 모습만으로도 항거불능의 위엄을 느끼게 하는 이 인물, 군협천주 철군무, 이렇게 불리우는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천마교와 함께 삼천 년 무림사상 최강의 집단이라는 정파무림의 하늘, 군협천. 이 군협천의 이십일대 천주, 그리고, 천마교의 몰락을 가져온 군협천 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 바로 그였다. 또 한 사람, 대략 마흔 살이나 되었을까?
훤칠한 키의 중년승인, 피부는 극히 희고 얼굴은 청수한 편이었으며, 일신에는 황색법봅, 그 위에 붉은 천을 왼쪽 어깨에서 허리까지 두르고 있었다. 또한 팔목과 목에 염주를 걸고 있는 인물. 그의 일신에서 풍겨져 나오는 기도는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인물인 군협천주 철군무에 비해 가히 손색이 없었는데...
이 인물이 바로 대소림사 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는 천엽서승이었던 것이다.
외관상 중년의 모습에 불과했지만 기실 그의 나이는 일백하고도 이십을 넘어서고 있었으니... 대과헌의 헌주이자 대소림사 내에서 가장 배분이 높은 인물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대과헌이 탄생된 지 어언 이백년, 앞의 백년을 대소림사의 일대성승이었던 여래신승이 대과헌의 헌주로서 천마교도의 죄를 판결했다면, 뒤의 백년은 바로 천엽성승이 여래신승의 뒤를 이어 천마교도의 죄를 판결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뭏든 중인들의 모든 시선을 받고 있는 이 두사람이야말로 이 시대가 탄생시킨 가장 위대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때 문득 천엽성승은 오랜 침묵을 깨고 불호성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적용시주,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소?]
순간 중인들의 시선이 모두 천마교주 적용사우에게 향한다. 적용사우는 무심한 시선을 천엽성승에게로 돌렸다.
[할 말은 많지만... 단 한마디만 하겠소.]
[아미타불... 말씀하시오.]
적용사우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천마교는 다시 부활할 것이오.]
그리고 그는 소리 없이 웃었다. 순간 중인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듣고 보자니 실로 광망한 말이 아닌가?
천마교의 시대는 이미 끝났음은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거늘 새삼 천마교의 부활을 거론하다니...
중인들의 눈에 분노와 경멸의 빛이 동시에 떠오른 것은 당연했다.
[이젠 할 말이 없소. 성승의 마지막 판결만이 남아 있을 뿐이오.]
적용사우는 담담히 말한 후 눈을 조용히 내리감았다. 정적, 장내에는 또 다시 숨막히는 정적의 물결이 흘렀다. 그러나, 그 정적은 이내 천엽성승에 의해 깨어졌다.
[무림법에 의하면 적용시주의 죄는 당연히 무림칠대뇌옥 가운데 적사도에 투옥되는 중죄에 해당하오. 천하인의 중론 또한 당신이 적사도에 투옥되는 것을 바라고 있소.]
천엽성승의 음성은 물처럼 담담했으나 거역할 수 없는 힘이 깃들어있었다.
[아미타불... 그러나 노납의 생각은 천하인의 중론과는 다르오.]
이 말에 중인들은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의혹의 눈길로 천엽성승을 주시했으며, 적용사우와 군협천주 철군무도 역시 다분히 의아한 시선으로 천엽성승을 주시했다.
천엽성승은 그런 중인들을 주시하며 부드럽게 미소 짓는다.
[노납은 당신에게 인간이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자비를 내리고 싶소. 이미 무공이 전폐된 적용시주는 이제 더 이상 무림인이 될 수 없는 것. 그런 적용시주를 무림칠대뇌옥에 보내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오.]
[아...]
[이것은 노납의 소견일지는 모르나... 그를 이 땅에서 자유롭게 살게 하고 싶소. 아미타불... 그런 적용시주를 세상 사람들은 부담 없이 대할 수 있을 것이고... 그를 보면서 사는 결코 정을 이길 수 없다는 사불범정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그를 무림칠대뇌옥에 투옥시키는 것보다 훨씬 후세의 인물들에게 교훈이 될 것이오.]
말이 여기에 이르자 중인들은 크게 탄복했다. 그들은 제각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군협천주 철군무의 얼굴에도 은은히 감탄의 기색이 흘렀다.
(소림에 위대한 활불이 존재하고 있다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다.)
그는... 이 위대한 인물은 천엽성승을 보며 과거 어떤 인물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때였다.
[크핫하하하하.]
돌연 적용사우가 허공을 향해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그런 그의 두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크아핫하하... 내 천마교의 역사에 일대 오점을 남기는 것도 모자라... 지울 수 없는 치욕도 함께 남겨야 한다면...]
그의 음성은 처연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다면 내게 주어진 길은 오직 하나.. 헛허허... 대과헌이여... 천마교의 역사에 한과 저주와 증오를 남긴 너, 대과헌이여... 너는 끝내 나의 혀를 물게 하느냐?]
순간, 피... 진홍빛 핏물이 주르르 그의 입술을 헤집고 나오는가 싶더니 끊어진 혀가 함께 스며 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어 천천히 적용사우의 몸은 앞으로 무너져 갔다. 그리고, 그가 남긴 마지막 더듬거리는 말...
- 천마교는 반드시 부활한다. -
누구도 이런 적용사우의 행동을 예상치 못했다.
누구도 이런 적용사우의 죽음을 예상치 못했다.
예상한 사람이 있다면 이 죽음을 너무도 담담한 눈길로 주시하고 있는 두
사람, 바로 군협천주 철군무와 천엽성승 뿐이리라.
[아미타불... 이제 모든 것은 종결 지어진 셈이로군.]
천엽성승이 흐릿한 탄식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는 군협천주
철군무를 바라보며 정중히 말했다.
[천주... 이제 대과헌은 더 이상 존속할 의미가 없어졌소이다.]
그러자 군협천주 철군무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대과헌은 앞으로도 계속 존속해야 할 이유가 있소이다. 천마교는 완전히 이 땅에서 사라진 것은 아니오. 다시 말해 아직도 천마교의 잔재세력은 천하에 산재한 채 시시각각 천마교의 부활을 노리고 있소. 적용사우가 죽어가면서까지 천마교의 부활을 외친 것은 바로 그런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오.]
[아미타불.]
[본인과 군협천의 모든 식구들은 그런그들의 남은 야망을 없애기 위해 계속 전력을 다할 생각이오. 그 동안은 대소림사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오.]
군협천주 철군무의 태도는 간절했다. 이런 그의 간절한 태도에 결국 천엽성승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것으로 대소림사 내의 대과헌에서 있었던 한 사람에 대한 판결은 막을 내렸다. 적용사우의 죽음과 함께,
그러나 적용사우가 죽어가면서 남긴 천마교의 부활이란 말은 참으로 오랫동안 대과헌에 참석했던 무림인들의 가슴에 남아 여운처럼 맴돌고 있었으니...
천마교의 몰락이 있었던 지금... 군협천의 거대한 성장이 있는 지금...
천마교의 부활이 과연 현실로 도래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그리고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었지만...
과연...
쏴아아... 쏴아...
관능과 타락과 향락의 도시, 항주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장대 같은 빗줄기가 땅바닥을 요란하게 두들기며 튀어 올라 항주의 거리를 뿌옇게 흐려놓고 있었다. 그리고 흐르는 빗물에 씻기어 내려가는 빛바랜 낙엽은 이 비가 가을이 가기를 재촉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었는데...
항주에서 제일 유명한 것은 기루이다. 기루의 많음은 감히 다른 도시에서는 따를 수 없는 것이고, 기루의 화려함 또한 그렇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이곳 항주의 기루에 천하절색의 명기가 많음이 진회하를 비롯한 항주의 홍등가를 유명하게 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진회하, 이 진회하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설명을 매듭을 져야 한다. 바로 중원제일의 환락가라는 진회하는 화려하다.
특히 밤에는 더욱 그렇다. 밤의 진회하를 가보지 않고서는 풍류인이라 자처할 수도 없는 것이다.
쏴아아.... 가을비 내리는 이 밤에도 진회하는 여전히 불야성을 이룬 채
흥청거린다.
기녀들의 끈끈한 교소... 얼큰하게 취기가 오른 풍류인들의 호방한 웃음소리...
좋다. 돈 많은 풍류인에게 있어 이 거리는 그야말로 지상낙원이리라. 그러나, 믿을 수 없게도 이 진회하의 뒷골목은 한산하다. 아니 한산하다 못해 황폐하기까지 했다. 버려진 음식찌꺼기가 군데군데 널려 있고 몇 마리의 생쥐들만이 이 거리의 주인인 듯 빠르게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정적, 진회하의 앞거리는 떠들썩 하나 이곳은 쥐죽은 듯한 정적이다. 빗소리만이 적막을 처량하게 깨고 있을 뿐이고, 기루에서 흘러나오는 흐릿한 유등의 불빛만이 어둠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바로 이 뒷골목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고 해서 주의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인이었다. 가을비를 맞으며 비틀비틀 이 진회하의 적막한 뒷골목으로 들어서고 있는 인물은... 한데 여인의 배는 불룩하게 솟아 있었다. 여인은 만삭의 산모였다.
[쿨룩쿨룩]
여인은 심하게 기침을 토하고 있었다.
쏴아아아....
[빌어먹을 놈...]
처벅처벅...
[빌어먹을 놈... 쿨룩쿨룩]
여인은 오직 배운 말이라고는 이 말 뿐인 듯 쉴새 없이 똑같은 말만을 되풀이 하여 중얼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누구를 빌어먹을 놈이라는 것인지?
쥐죽은 듯한 정적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뒷골목을 한 동안 배회하던 여인은 한 기루 처마 밑에 이윽고 자리를 잡는다. 그러자 기루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유등의 불빛 아래 여인의 모습이 드러났다. 여인은 심하게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머리는 마구 헝클어진 채 산발이 되어 있었고, 일신에 걸친 먹빛 궁장은 군데군데 찢겨진 채 너덜거리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이십대 후반 정도, 한데, 자세히 보자니 여인은 뭔가 확실치 않으면서도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풍기는 미인이 아닌가?
어둠속에서 만지면 묻어날 듯 새하얀 피부가 유난히 돋보이게 드러나고, 깎아 빚은 듯한 콧날과 붉디붉은 입술은 아예 전율스럽도록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는데... 눈, 특히 여인의 두 눈은 마치 가을비와 같은 축축하고도 음울한 분위기를 뿌리고 있었다.
한데 단지 그런 느낌뿐만이 아니라 그 눈 어둑한 곳에서는 은은히 퇴폐적이면서도 요사한 요기가 뿌려지고 있다. 자세히 보자니 여인의 전신에서는 기이한 요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런 여인이 아이를 뱃속에 집어넣고 있다는 사실조차가 의심스럽다. 대개, 이런 종류의 여인이란 한 사내에게 집착하지 않는다. 이 폭발적인 요기는 무수한 사내들을 타락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도 남은이 있는 것이었으며 자신조차 그 타락속에서 헤어나질 못한다.
지나온 역사를 타락시킨 희대의 요부들이 이런 류의 기질을 풍기는 여인인 것이다. 어쨌거나, 여인은 분명히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으며 지금 하복부가 갈가리 찢겨져 나가는 고통 속에 사로잡혀 있었다.
[으으...]
여인은 입술을 짓깨물어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안으로 삼킨다. 여인의 시선은 온갖 형태의 저주와 증오의 빛을 담고 불룩솟은 자신의 배로 향해 있었다.
[으으.. 이 빌어먹을 놈. 네놈이 아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이 수음마희 담야교는... 으으... 수음마공을 십이성 대성했을 것이다. 으으... 만약 그렇게만 되었다면... 천마교는 적어도 나로 인해 십년은 더 버틸 수가 있었을 것이다. 한데 빌어먹을 네 놈이 뱃속에 들어설 줄이야. 그로인해. 무려 백여 년의 세월에 걸쳐 구백 아흔 아홉 명 사내들의 순양지기를 빼내 만들어진 나의 수음지기가 모조리 네놈에게 흘러들고 말았으니...]
하복부의 고통으로 인해 무섭게 전신을 뒤트는 여인. 천마교의 일원으로서 희대의 요부이자 마녀인 그녀의 올해 나이는 어림잡아도 일백 이십 세. 한데, 불과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이 여인은 한때 천하게 거칠게 없었던 여인이다. 그러나 천마교가 몰락한 지금 그녀는 진회하의 뒷골목을 방황하는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나, 그녀가 저주하는 대상은 군협천이 아니었다. 바로 그녀가 밴 아이였던 것이다. 참을 수 없는 산고 속에서도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 여인. 그녀가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데는 나름대로 처절한 사연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일백년 전, 그녀의 나이 이십여 세 때의 일이다.
선천적으로 요기를 타고 난 그녀는 숙명처럼 천마교에 몸을 담았다. 그런 그녀의 기이한 체질은 곧 당시의 천마교주이던 적용린에게 발견되었고, 그것이 그녀가 희대의 요부로 발돋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당시 천마교주 적용린으로부터 한 가지 무공을 전해 받았다. 그 무공은 천마교 오백년 사상 가장 무서운 무공이라는 천마삼절학 가운데 하나인 수음마공이었던 것이다.
천마삼절학이란 창안은 되었으나 그 누구도 연성을 못한 세 종류의 마공을 일컬음이다. 천마교 사상 최강의 무공이었음에도 모두가 연성에 실패한 근본적인 원인은 두가지였다. 첫째는 천마삼절학 모두가 무려 일백년의 세월을 두고 연성해야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이 무공들의 연성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금기사항들이 인간으로서는 지키기가 너무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수음마공, 이 무공을 연성키 위해서는 일백년의 세월동안 한 차례도 빠짐없이 만월의 음기를 체내로 빨아들여야 하는 것이니, 이 가운데 절대 임신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단 한번의 임신이라도... 그러나, 임신을 피하기 위한 어떠한 인위적인 수단을 동원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생각해 보면 불가능한 일이다. 여인이 일백년의 세월 동안 일천 사내와 정사를 해야 하는데 자연적인 불임을 바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 불가능이 가능한 것처럼 보일 때가 수음마희 담야교에게는 있었다.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그녀는 구백 아흔 명과 관계를 맺었고 임신이 안 된 상태였다. 일 년 이내에 나머지 열 명의 사내들을 받아들인다면 수음마공을 십이성 대성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기대가 그녀를 서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후 두 달 만에 그녀는 아홉 사내들의 순양지기를 체내로 받아들였으니 그것이 문제였다.
무려 구십구 년의 세월동안 걸리지 않았던 임신이 그녀를 방심하게 만들었던 그 임신이 찾아들었고 그녀는 그것으로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만 것이다. 누구의 자식인지는 모른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아홉 사람과 관계를 맺었으므로. 그러나, 그녀에게 있어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뱃속의 아이는 하루하루 그녀의 수음지기를 빨아들이고 있었으니 그녀로서는 어떻게 하면 아이를 낙태시키느냐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낙태를 시킬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절벽에서 떨어져 보기도 했고, 치명적인 독을 복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모진 것이 인간의 생명이라 했던가? 이 뱃속의 아이는 어찌된 셈인지 그녀의 갖은 수단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건강한 채로 온 것이었으니...
수음마희 담야교의 입에서 빌어먹을 놈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해할만 했다. 뱃속의 아이는 그녀의 모든 희망을 앗아가 버린 것이었다. 더군다나, 천마교가 몰락한 지금 그녀는 군협칠대무황으로부터 집요한 추적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 있으나 산 목숨이 아니고 언제 어떻게 그들에게 잡혀 무림칠대뇌옥으로 투옥될지 모르는 가련한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가 이 진회하의 홍등가에 오고 싶어 온 것은 아니다. 군협칠대무황의 추적을 피하다 보니 항주에 이르게 된 것이고 급작스럽게 출산의 기미가 보이자 인적이 없는 이곳으로 찾아들게 된 것이다.
쏴아아아.....
어쨌든 수음마희 담야교는 이 처절한 사연으로 인해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그것과는 상관없이 진통은 계속되고 있었다.
[으으...]
그러나 비명은 내지를 수 없는 형편이다. 하복부가 마구 뒤틀리고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찾아들었지만 비명을 지른다면 아무리 인적 없는 뒷골목일지라도 사람을 불러들일 소지가 다분히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오만상을 찌푸릴지라도 비명만은 참고 있는 것이다.
멀리서 기녀들의 끈적끈적한 비음이 흐르듯이 들려온다. 그러나, 그녀의 귓전에는 그런 것들이 들릴리 만무한 것이다. 그녀는 이제 마구 뒹굴고 있었다. 그녀의 손톱은 바닥에 긴 핏자국을 만들고 있었으며 다음순간,
[으아앙...!]
뒷골목의 적막을 헤치며 우렁찬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마침내, 한 생명이 그 긴 고통속에서 막 탄생의 고고지성을 울린 것이다. 그러나 그 울음소리는 수음마희 담야교의 피묻은 손에 의해 가려져 버렸다.
그녀 자신이 비명을 지를 수 없듯 아이도 울음을 터뜨릴 수가 없는 것이다.
쏴아아아....
아무도 축복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빗소리만이 한 생명의 탄생을 축복하고 있을 뿐이었다.
[빌어먹을 놈...]
힘없는 수음마희 담야교의 음성이 흘러나온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였다. 그녀는 아이를 안고 있었다. 아이는 피투성이였다. 그 아이를 지금그녀는 빗물에 씻기고 있었다. 아이는 마치 껍질을 벗듯 핏물로 물든 막을 벗었다. 그러자 차츰 드러나기 시작하는 아이의 얼굴. 아이는 너무 아름다웠다. 핏줄까지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한 살결 위에 펼쳐진 신비롭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이목구비. 일견하자니, 그 모습은 그대로 수음마희 담야교를 빼닮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얼굴에는 천진함이 가득 흐르고 그녀에 비해 더욱 아름답다는 것뿐이었다.
수음마희 담야교, 근세 백년 이래 최고의 미녀로 불리우던 여인이었다. 그녀가 희대의 요부이든 아니든 그것은 자타가 인정하는 바였다. 한데, 그녀를 판에 박은 듯한 아이가 탄생한 것이다. 그것도 여아가 아닌 사내아이가. 더군다나, 아이의 얼굴에는 그녀와 유사한 요기가 흐르고 있었으니 이것은 또 무슨 운명의 전주곡인가?
쏴아아아...
결코 하려고 한 것은 아니건만 수음마희는 아이가 추울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품에 아이를 꼭 안는다. 태어나기 전에는 무섭게 저주하고 증오하던 아이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아이를 보자 그런 마음은 씻은 듯이 가셔버린다. 아마도 이것은 본능적인 모성애의 발로에서 나온 행동이리라.
[빌어먹을 놈...]
아이를 보며 습관처럼 내뱉은 그녀의 음성 또한 자애롭기 이를 데 없었다.
문득, 그녀는 격렬하게 기침을 쏟아내더니 아이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그러자, 우연인지 아이도 그녀를 향해 방실방실 웃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조그맣고 붉은 입술이 흡사 젖을 빠는 듯 오물거린다. 뿐인가? 아이는 젖을 찾기라도 하듯 그녀의 젖가슴을 더듬기까지 하는 것이었으니...
[아아... 아가야... 내 아가야...]
그녀는 와락 아이를 가슴 깊숙이 다시 끌어안는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거리를 경계의 눈빛으로 이리저리 쳐다보기까지 하는 것이었으니 누가 이 여인을 보고 수음마희 담야교라 하겠는가?
한데 그녀의 모습은 크게 변해 있었다. 그 싱싱한 아름다움은 간데없고 그녀의 피부는 윤기를 잃고 대신 주름살이 가득했으니, 이 모습은 칠십은 넘어 보이는 노파의 그것이다.
그녀는 백년의 세월 동안 쌓아올린 수음지기로써 청춘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을 아이에게 모두 빼앗겨 버린 지금 그녀는 그녀의 나이만큼 늙어버린 것이었다.
그런 것이 지금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자 그녀의 모습은 전혀 다르게 변해 버리는 것이다.
삼십대 평범한 여인의 모습으로 돌변해 있다. 수음마희 담야교, 이 여인이 그동안 무림인들의 눈을 피해 지금까지 존속해 올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이 뛰어난 역용술 덕분일 것이다. 무림인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백년의 세월동안 거의 천의 얼굴로 활동했다.
그녀의 진면목이 무림에 드러난 것은 불과 몇 차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아뭏튼 그녀는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향해 투덜거린다.
[빌어먹을 놈의 비... 언제까지 내 아가를 추위에 떨게 할 셈인가?]
그녀는 아이를 걱정하고 있었다. 이어, 그녀는 이내 이 황폐한 뒷골목을 벗어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남아 있는 것은 그녀가 흘린 핏물 뿐, 그러나 그것도 이내 핏물에 씻겨져 내려간다. 아무런 흔적이 없다.
그녀가 여기에 머물렀다는...
쏴아아아아.... 여기는 진회하의 뒷골목...
한 아이가 탄생되었고 그 아이의 고향이 되어버린 버려진 거리. 비는 계속하여 무심히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세월은 흘러간다. 십년이라는 세월이 간단없이... 십년의 세월이....